한국의 영토는 남북 삼천리가 맞는가? (사천리로 기록된 역사문헌 탐구)
기록에 나와 있는 조선왕조의 영토는 분명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였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의 여러 사서와 <조선왕조실록>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천리라는 조선의 영토가 애국가 가사에서 삼천리로 축소될 수 있는지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관련 문헌을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를 표기하면 간도지역이 다 포함된다.
삼천리라 함은 약 1,200km로 南단으로는 땅끝마을 해남에서부터 北단으로는 함경도 온성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현재의 한반도를 말함이다. 즉 우리 영토에는 간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사서의 기록대로 ‘남북 사천리’라 함은 남쪽 끝 해남에서부터 북으로는 흑룡강까지로 지금의 간도지역이 거의 다 들어가게 된다. 그 간도지역에서 ‘동서 이천리’라 함은 동쪽 끝 연해주로부터 우리가 주장하는 서간도까지 모두 포함되게 된다.
과연 사서 기록은 ‘사천리’가 맞는지 살펴보자.
1. 중국의 기록
먼저 중국의 사서 기록으로는, <도서편> <명사기사본말> <정계양잡저> <조선부> <흠정속문헌통고> <대청광여도> 등이 있다. 이들 내용에는 전부 조선의 영역을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로 명기하고 있다.‘참고로 중국(명나라)의 1리는 560m이다.
그러므로 동서로 1,100km, 남북으로 2,200km 좌우가 조선의 영토인 것이다.즉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라 함은 간도지역이 거의 다 들어가는 것이다.
대표로 명나라때 사서인 <명일통지>에 "조선의 땅은 동서 이천리, 남북 사천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조선왕조실록 의 기록도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
1) 선조 26년(1593년) 6월 29일(임자) 9번째 기사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조선은 국토의 넓이가 동서로 2천리이고 남북으로 4천리입니다. 대체로 정북쪽의 백두산(長白山)에서 산맥이 일어나서 남쪽으로 전라도 경계에 이르러 서남쪽을 향하여 멈춰 있습니다. (朝鮮幅圓, 東西二千里, 南北四千里。 蓋從正北長白山發脈, 南至全羅道地界, 向西南而止)。
2) 고종 34年(1897년 / 대한제국 1年) 9月 29日(양) 2번째 기사
“김재현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리다”
또 논의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왕」이나 「군(君)」이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 임금의 칭호이며 「황제」라는 것은 여러 나라를 통틀어 관할하는 임금의 칭호이므로 넓은 영토와 많은 백성들을 가지고 여러 나라를 통합하지 못하였다면 황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삼한(三韓)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는 사천리를 뻗어있고 인구는 2천만을 밑돌지 않으니 폐하의 신민(臣民)된 사람치고 누군들 우리 폐하가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기를 바라지 않겠으며 지존의 칭호를 받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옛 것을 인용하여 오늘에 증명하고 여정(輿情)을 참작하고 형세를 헤아려 보아도 실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且論者曰: ‘王者、君者, 有一國之稱, 而皇帝者, 統轄衆邦之稱。 不有拓土廣民統合各邦, 則不當稱之’云。 然我邦統合三韓, 陸地疆土, 延互四千里, 人口不下二千萬, 在今日爲陛下臣民者, 孰不望我陛下處至尊之位而膺至尊之號哉?)
3) 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9월 30일(양) 1번째 기사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각 나라의 약장(約章)에는 각 나라 황제의 칭호를 인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나라가 작고 군사가 약하여 나란히 나갈 수 없는 나라나 상스럽고 속되며 추하고 고루하여 개명(開明)한 세계로 진보(進步)할 수 없는 나라인 경우에도 각 나라가 반드시 인정하여 함께 교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영토의 넓이가 사천리로서 당당하게 천자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으며 예악과 문물이 세상에 표준이 됩니다. (澤曰: “各國約章, 有各國帝號認之之說。 此謂國小兵弱, 不足與方駕者及俚俗醜陋不能進步於開明者, 則各國未必認之而通行也。 惟我幅圓四千里, 堂堂萬乘之國, 可以養百萬之衆, 禮樂文物, 表準於天下)
4)고종 34년(1897 / 대한제국 1년) 10월 13일(양) 2번째 기사
“국호를 대한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及我太祖龍興之初, 輿圖以外, 拓地益廣。 北盡靺鞨之界, 而齒革?絲出焉, 南收耽羅之國, 而橘柚海錯貢焉。 幅員四千里, 建一統之業。)
위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우리 영토는 분명 남북 사천리 동서 이천리였다. 특히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인 1897년의 기록에서 여러 번 ‘사천리’란 기록이 나온다.
삼천리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한반도에 밀어넣고, 축소지향적 역사관을 갖게 한다. 이제부터라도 삼천리 라는 의식을 버리고, 당당히 사천리를 주장하기를 염원하며, 작은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