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4-24 15:38
조회 : 2,327
|
지금은 이 일대를 용산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이 지역의 큰 지명은 용산이 아니라 ‘둔지방’이었다. 둔지방은 용산기지와 후암동, 이태원동, 서빙고동 일대를 이르는 지명이었다. ‘둔지방’이란 지명은 이 일대의 옛 이름인 ‘둔지미’(둔지산)에서 유래한 것이다. ‘둔지미’는 평지 가운데 솟은 작은 산이나 언덕을 뜻한다고 배우리 땅이름학회 명예회장은 설명했다. 둔지산은 국립중앙박물관 바로 위에 있었다. 조선 시대에 용산은 현재의 용산성당과 용마루고개, 만리재 일대를 말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 단위의 하나인 ‘방(坊)’을 기준으로 살펴보더라도 ‘용산방’은 청파역, 공덕리, 마포나루 등에 걸쳐 있으며 대개 만초천(蔓草川)을 경계로 서쪽 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이해가 쉽다. 이 물길의 동쪽에 해당하는 구역으로는 한강 모래펄에 자리한 사촌리와 신촌리 등이 살짝 포함된 것이 전부이다. 애당초 용산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1899년 12월 ‘용산행’ 전차가 처음 개통되었을 때의 종착점이 지금의 원효로 끝자락인 한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와는 달리 용산역 방향으로 전차선로가 부설된 것은 1910년 7월에 가서야 이뤄진 일이며, 그나마도 이곳에는 종전의 용산과 구분하기 위해 ‘신용산(新龍山)’ 종점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용산 일대의 징발지에서 군영지 건설공사가 개시된 시점은 1906년 4월이다. 사격장(1907.4), 매장지와 화장장(1907.7), 군용도로 (1908.3), 연병장(1908.5)과 같은 기반시설이 우선 건설되었고, 보병연대 본부 및 병영(1908.6)과 더불어 군사령부 청사(1908.7)가 속속 완공됨에 따라 1908년 10월에는 필동군영지(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가 용산으로 자리를 옮겨오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오포대(1908.9), 위수병원(1908.9),사단장숙사(1908.10),병기지창(1908.10), 육군창고(1908.11),사단사령부 청사(1908.12), 군악대 청사(1909.4), 기병중대 병사(1909.9), 야포병중대병사(1909.9),위수감옥(1909.9),군사령관숙사(1910.4) 등이 곳곳에 건립되었고 1913년 11월에는 기타의 부속건물이 모두 완공됨에 따라 용산 신군영지는 하나의 거대한 군사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이 가운데 군사령관 숙사는 1912년 5월에 조선총독부가 새로 지은 건물과 맞교환되어 용산총독관저(龍山總督官邸)로 변신하였는데, 이로써 용산은 공간적으로도 명실상부한 식민통치권력의 정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 일대의 군영지 건설공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지속되었다. 1915년 6월에 종래의 주차군(駐箚軍; 일본 본토에 주둔지를 둔 사단병력을 주기적으로 교대하여 파견하는 방식) 체제를 바꿔 조선 내에 2개 사단을 증설하여 상주군(常駐軍)으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춰 270여만 평(여의도연습장 138만 평 포함)의 땅이 추가되어 다시 대규모의 기지확장공사가 진행되었다. 이때 용산 주둔지에는 사단장 숙사(1916.12), 여단장 숙사(1918.3), 79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기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3), 야포병연대 본부 및 병영(1920.4), 공병대대 본부 및 병영(1920.3), 사격장(1921.12), 연병장(1921.12), 매장지와 화장장(1922.3) 등의 증설 또는 이전이 속속 이뤄졌다.
그 사이에 1916년 4월 제19사단이 용산에서 창설되었고 부대편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가자 1918년 6월에는 이를 바탕으로 조선주차군사령부는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로 개칭되었다. 곧이어 1919년 4월에는 제20사단을 용산에서 새로 창설하는 동시에 먼저 생긴 제19사단은 함경북도 나남(羅南, 지금의 청진)으로 이동 배치하였다. 용산과 나남 등지에 터를 잡은 조선주둔 일본군대는 일제의 무력통치를 뒷받침하는 힘의 근원인 동시에 식민지배에 맞선 일체의 민족적 저항을 압살하는 직접적인 주체로 작용하였다. 또한 이른바 ‘시베리아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
초기 소공동의 대관정(大觀亭)에 있었던 한국주차군사령부 정문
해당 사령부는 1904년 4월 서울 중구 소공동 대관정(大觀亭 : 현 웨스틴조선호텔 인근)에 주둔했다. 정문에는 ‘한국주차군사령부(韓國駐箚軍司令部)’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그해 2월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같은 해 4월 서울에 처음으로 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필동 남산골 한옥마을 자이에 있었던 초기의 한국주차군사령부,조선헌병대사령부, 경무총감부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용산의 한국주차군사령부(1908.10.) - 조선주차군사령부(1910년 합방후)
-->조선군 사령부(1918)
용산 병영의 조선군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 때 설치된 조선군주차사령부. 을사늑약을 강압으로 체결한 후 조선군 사령부가 되었다
1908년 일본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필동2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 일대는 군사지대로 변모했다. 1910년 일제 강점 후 한국주차군사령부는 조선주차군사령부로 바뀌었다. 그리고 1918년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1915년 용산과 나남에 2개의 정규사단을 배치한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1개 사단을 추가했다. 1940년대에는 무려 23만명의 일본군이 한반도에 주둔했다.
1910년 일제강점기 당시 군사령관 관저 전경
조선총독 관저 1912
'아카사카 이궁'과 '표경관' 등을 건축하여 네오바르크 양식의 궁정 건축을 선도하여 유명한 가타야마 도쿠마가 설계하였다. 도심과 거리가 멀고 과다한 유지비 때문에 경식 연회 행사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아 방치되었다고 한다. 이 호화판 총독관저는 한국전쟁시 소실되었다
용산역 1906
|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