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4-25 21:37
[중국] 푸이의 부친 재풍(짜이펑)의 삶 1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550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의 생부 섭정왕 짜이펑 [醇親王 載沣]    

 

 

1. 짜이펑, 독일 황제 앞에서 허리 굽히길 거

 

 1901년 ‘頭等專使大臣’ 자격으로 독일에 가던 도중, 홍콩에 잠시 체류 중인 순친왕 짜이펑

(앞줄 자리에 앉은 사람). 당시 18세였다. 

 



1908년 가을, 제국의 실권자 자희(慈禧·서태후)와 황제 광서제(光緖帝)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11월 13일, 서태후는 광서제의 동생인 제2대 순친왕(醇親王) 짜이펑(載沣·재풍)과 푸이(溥儀·부의) 부자

를 섭정왕과 후임 황제에 각각 임명했다. 다음날 광서제가 세상을 떠났다.


또 하루가 지났다. 15일 오후, 늦은 점심을 마친 서태후가 갑자기 혼절했다. 몇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서

야 마지막 정신이 돌아왔다. 만면에 근심이 가득한 권신들에게 이틀 전에 했던 말을 재삼 반복했다.

 

“내 병세가 위급하다. 더 이상 일어날 기력이 없다. 국정의 모든 권한을 순친왕 짜이펑에게 이양한다.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태후와 의논은 하되 결정은 순친왕이 해라.”  48년간 정국을 주도하던 서태후도 황천길을 떠났다. 

독살설을 필두로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서태후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말이 제일 오래갔다. 

“다시는 부인네들이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라. 환관들의 농간에 놀아나기 쉽고, 본 왕조의 가법에도 위배된다.” 나머지는 금세 수그러들었다.

 

 전 세계가 하루아침에 노(老) 제국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한 25세의 청년을 주목했다. 허구많은 황족들 중

에서 짜이펑을 지목한 서태후의 의중을 가늠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세 살짜리 황제는 덤이었다.

짜이펑은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침착했다. 황족들 중에서 두드러진 편이 아니었다. 

부끄러움도 잘 탔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랬다. 서태후만은 예외였다. 아무런 표정이 없는 짜이펑을 

볼 때마다 시동생이며 매부였던 이솬(奕譞·이현)의 젊은 시절 모습이 어른거렸다. 

주변에서 나약한 게 흠이라고 하면 화를 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1850년 함풍제(咸豊帝)가 즉위했다. 함풍제는 동생 이솬을 순군왕(醇郡王)에 봉했다. 

직함은 번듯해 보이지만 별것도 아니었다. 나이도 열 살에 불과했다. 함풍제 재위기간 이솬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1861년 함풍제가 재위 1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라곤 여섯 살밖에 안 된 서태후 소생이 

유일했다. 임종 직전 8명의 권신들에게 240여 년 전 누르하치와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 

“어린 황제에 젊은 황태후, 나라를 절단 낼지 모른다. 

수렴청정을 실시하되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태후를 죽여버려라.”

서태후는 시동생 공친왕(恭親王)과 정변을 일으켜 권신들을 제거했다. 

평소 조용하던 21세의 이솬이 전광석화처럼, 눈 하나 깜짝 않고 공친왕의 대열에 합류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실권을 장악한 서태후는 야심 많고 활달한 공친왕보다 이솬을 더 좋아했다. 

순친왕에 봉하고 친정 여동생과 결혼을 권했다. 아들 동치제가 세상을 떠나자 서태후는 

이솬의 아들을 황제(광서제)에 앉혔다. 이솬이 죽자 짜이펑이 순친왕을 계승했다. 

친왕과 군왕은 천지 차이였다. 

서태후는 짜이펑도 총애했다. 20세기 벽두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가 화염에 휩싸이고 선교사와 외국인들이 맞아 죽었다. 독일공사가 피살되고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했다. 서태후는 변복 차림으로 황제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도망쳤다.

독일 측에서 사죄사를 보내라고 압박했다. 서태후는 짜이펑을 파견했다. 황제의 친동생이다 보니 

자격에 손색이 없었다. 
독일에 체류하는 동안 짜이펑은 “독일 황제가 정좌하면 3번 허리 굽혀 절하라”는 독일 측의 요구를 

거절했다. 평소 겸손하고 조용했던 사람답지 않게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독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며 2주일간을 버텼다. 서태후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2. ‘세 살 황제’ 푸이, 보좌에 앉아 “빨리 집에 가자” 

 



 

 세 생일 얼마 후 황제 자리에 오른 형 광서제가 37세 때 세상을 등진 것을 본 2대 순친왕 짜이펑

은 세 살의 장남 푸이가 황제가 되는 것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동생이었던 짜이펑과 

광서제의 생모 유가씨(劉佳氏·가운데)도 극구 반대했다. 

왼쪽은 짜이펑의 생부인 1대 순친왕 이솬(奕譞)의 측실. 오른쪽은 서모(庶母)라 불리던 이씨(李氏). 

조선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 

 

1908년 12월 2일 오전 9시쯤, 자금성(紫禁城) 태화전(太和殿)에서 황제 즉위식이 열렸다. 25세 생일을 

갓 지난 섭정왕 짜이펑(載灃·재풍)이 세상 구경한 지 3년이 채 안 된 장남 푸이(溥儀·부의)를 보좌(寶座)

에 앉혔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황제라고 봐주지 않았다.

푸이는 얼음덩어리나 다름없는 의자에 앉자마자 몸을 뒤척였다. 마당에 엎드린 신하들이 쭈그렸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괴상한 소리를 외쳐대자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급기야 “아빠 빨리 집에 가자”며 울음보를 터트렸다. 

짜이펑은 연신 황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얼러댔다. “곧 끝나니까 울지 마라. 곧 끝난다.”

별것도 아닌 일이 길흉화복(吉凶禍福)의 징조로 둔갑하곤 한다. 

며칠 지나자 베이징 인근에 괴소문이 떠돌아 다녔다. “즉위식 날 황제가 집에 가자고 보채댔다. 섭정왕은

 곧 끝난다며 황제를 달랬다고 한다. 불길한 징조다. 청나라도 끝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섭정왕은 실질적인 최고 통치권자였다. 아무리 말 같지 않은 소리라도 한마디 했다 하면 

황제의 지상명령이나 다를 바 없었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짜이펑이 섭정왕 자리에 

오르자 여기저기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 점잖은 것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길어야 2년이다.” 짜이펑도 도처에 위기가 잠복해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서태후의 친정 동생인 모친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모두 그게 그거다. 권위는 만들면 생긴다. 

우리 언니도 어렸을 땐 평범했다.” 짜이펑은 위험인물 제거에 나섰다.

 

푸웨이(溥偉·부위)를 제일 먼저 손봤다. 푸웨이는 아버지 이솬(奕譞·혁현)과 함께 서태후를 권좌에 앉힌

공친왕(恭親王)의 손자였다. 친조카였지만 나이는 짜이펑보다 세 살 많았다.

서태후는 푸웨이를 총애했다. 

1900년, 짜이펑의 친형인 광서제(光緖帝) 폐위 문제를 놓고 고민할 때 푸웨이를 염두에 뒀을 정도였다.

 서태후의 은총을 등에 업은 푸웨이는 거칠 게 없었다. 어릴 때 제수받은 내정행주(內廷行走) 신분으로

 황제와 태후의 개인적 공간인 내정(內廷)을 아무 때나 들락거렸다.

 

광서제의 병세가 위중하자 궁중에서 밤을 새웠다. 온갖 정보를 수집하며 태후의 낙점을 기다렸다. 

용포(龍袍)가 눈앞에 어른거렸음 직하다.

푸웨이는 짜이펑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서태후가 짜위펑의 아들 푸이를 황제 계승자로 

지명했을 때도 실망하지 않았다. 

짜이펑은 사람 됨됨이가 소박했다. 권력욕도 전혀 없었다. “좋은 책과 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면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일 없이 뱃속 편하면 그게 바로 신선”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푸웨이는 짜이펑 부자가 의지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푸웨이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아들이 황제로 지명되자 짜이펑은 극구 사양했다. 

생모는 짜이펑보다 더했다. 노발대발, 대성통곡하며 언니를 원망했다. 

“33년 전, 젖먹이 아들을 황제 시킨다며 빼앗아 가더니 이제는 손자마저 뺏어갈 참이냐.”

짜이펑 모자의 의중을 안 서태후는 짜이펑을 불렀다. 

“어쩌다 보니 집안일이 나랏일이 돼버렸다. 가장 가까운 황족인 푸웨이에게 군기처를 맡겨서 

너와 황제를 보필토록 하겠다.”



이 한마디에 짜이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 잘 돌아가고 기력이 왕성한 푸웨이가 조정에 들어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안위는 물론이고 금쪽같은 아들을 어느 귀신이 물어갈지 몰랐다.

사람은 보통 동물이 아니다. 순식간에 바뀔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무능한 사람이 어쩌다 권력을 장악하면 갑자기 강력한 통치자로 둔갑해 사람들을 난해하게 한다. 

섭정왕에 취임한 짜이펑은 하루아침에 변신했다.



기대에 부풀어 있던 푸웨이에게 요직을 맡기지 않았다. 푸웨이는 울화가 치밀었다. 

서태후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술을 잔뜩 마시고 한바탕 소동을 피우며 자리를 요구했다. 

짜이펑은 모른 체했다.

황궁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믿을 건 친형제밖에 없었다. 짜이펑은 동생을 경호실장 격인 

궁정문금대신(宮廷門禁大臣)에 임명해 황궁 경호를 강화시켰다. 

이어서 황제 명의로 조서를 발표했다. “앞으로 섭정왕이 짐(朕)을 대신해 국정을 주재한다. 

짐 이하 모두가 섭정왕의 명령을 준수하고 복종함이 마땅하다. 

황족들은 국법을 유심히 살펴라. 그간 왕궁과 백관들일수록 대대로 내려오는 규범을 혼란케 함이 

빈번했다. 국법에 의해 모든 것을 다스리겠으니 유념토록 해라.” 

100자가 채 안 됐지만 보면 볼수록 살기등등한 내용이었다.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푸웨이는 칩거했다. 문 밖에 얼씬도 안 하고 방문객도 만나지 않았다. 

몇 달 후 한직(閑職) 중에 한직인 금연대신(禁煙大臣) 자리가 돌아오자 대문을 빼꼼히 열었다.

짜이펑은 ‘궁정 보위전’이 일단락됐지만 마음을 놓지 않았다. 

북양신군(北洋新軍)을 사병처럼 부리는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칼을 겨눴다. 

위안스카이는 푸웨이보다 계산할 게 더 많았다. 
 

 

3. 짜이펑, 광서제 배신한 위안스카이 제거 결심

 

 

독일인 교관의 안내로 참모들과 함께 신건육군(新建陸軍)을 열병하는 북양대신(北洋大臣) 위안스카이(가운데 작고 통통한 사람). 훗날 이 안에서 총통 5명이 배출됐다. 1905년, 톈진(天津).

 

중국인들의 뇌리에 사실처럼 자리 잡은 전설이 있다. “짜이펑이 형 광서제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 제거를 결심했다.”

짜이펑이 섭정왕에 취임하자 만주 귀족들은 “위안스카이를 죽여야 한다”며 부글부글 끓었다. 

방법까지 제시했다. “위안스카이는 매일 아침 조정에 나온다. 날고 기는 경호원들이 에워싸고 있지만

자금성 안에 들어오면 홀몸이 된다. 

어전시위를 동원해 숨통을 끊어버리자.” 짜이펑은 무능하고 합리적인 모순덩어리였다. 

위안스카이 처형에 동의하면서도 명분을 찾느라 전전긍긍했다. 

그만큼 위안스카이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위안스카이는 진사(進士)를 두 명 배출한,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시험 운은 없었다. 20세 때 향시(鄕試)에 낙방하자 학문으로 관직에 나가겠다는 꿈을 접었다. 

대청제국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공개적으로 관직을 사고팔았다. 관료사회가 난장판과 비슷했다. 

위안스카이도 대대로 내려오는 골동품을 처분한 돈으로 관직을 샀다. 

아무 권한도 없는 허직(虛職)이었다. 돈 싸 들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은 절망의 도시였다. 시골 청년을 상대해주는 고관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전이라도 찾겠다며 도박장을 드나들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가친척이라는 사람들은 남보다 더했다. 반 거지 차림으로 돌아온 위안스카이를 반기지 않았다. 

한때 우리나라도 가출소년들이 돈 떨어지면 군에 자원 입대하던 시절이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군문을 두드렸다.  22세 때였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好男不當兵, 好鐵不打釘

(멀쩡한 사내는 군인이 되지 않고, 좋은 철은 못이 되지 않는다)’을 당연시 여길 때였다.

군인 위안스카이는 조선에 10년간 머무르며 기반을 닦았다. 

군과 외교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895년,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군제 개편을 단행했다. 

조선 체류 시절, 군수품 조달과 훈련능력을 인정받은 위안스카이에게 신군(新軍) 건설을 위임했다.

불과 2년 만에 위안스카이는 흔히들 북양군(北洋軍)이라 부르는 신건육군(新建陸軍)을 

만천하에 선보였다. 지금으로 치면 허베이(河北)성 부성장 격인 직례안찰사(直隷按察使)로 

승진한 후에도 신군 훈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38세 때였다. 

1년 후 청 왕조와 위안스카이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둥(廣東) 출신 캉유웨이(康有爲)

를 주축으로 한 유신세력이 황제 광서제와 손잡고 개혁을 추진했다. 

위안스카이도 개혁에 동조했다. 자신을 발탁해준 리훙장(李鴻章·이홍장)을 찾아가 퇴진을 요구했다.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쫓겨나도 뜻을 바꾸지 않았다.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태후의 압력이 만만치 않았다.

광서제와 캉유웨이는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광서제는 위안스카이에게 시랑(侍郞) 벼슬을 내렸다. 

캉유웨이는 서생(書生)다웠다. 위안스카이에게 무모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군대를 몰고 이화원(頤和園)을 포위해라. 서태후를 제거해야 한다.” 위안스카이가 

“펄펄 끓는 물과 화염 속에 뛰어드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자 일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며 후난(湖南) 청년 탄쓰퉁(譚嗣同·담사동)을 파견했다.

1898년 8월 3일(음력) 늦은 밤, 탄쓰퉁은 위안스카이가 머물고 있는 사찰을 방문, 정변 계획을 

밝혔다. 두 사람이 나눴다는 대화가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황제는 너를 신임한다. 지금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직례총독을 살해해라. 

병력을 몰고 베이징에 들어와 이화원을 포위해라.”

 

위안스카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이화원을 포위하는 목적을 알고 싶다.” 

탄쓰퉁은 거침이 없었다. “늙은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존할 수 없다. 너는 포위만 하면 된다.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여기서 늙은이는 서태후를 의미했다. 

실패하면 멸족(滅族)을 당하고도 남을 내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하는 사람이었다. 

“베이징과 톈진 일대에 총독의 군대가 널려 있다.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만 명이 채 안 된다.

 총은 있어도 실탄이 없다.” 탄스퉁은 냉소를 지었다. 

“지금 네 목숨이 내 손안에 있는 것처럼, 내 목숨은 네 손안에 있다. 

오늘 밤 안으로 결정해라.” 위안스카이는 거절하지 않았다.

3일 후, 이화원에 있던 서태후가 자금성에 들이닥쳤다.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복귀를 선언했다. 

톈진에서 소식을 들은 위안스카이는 총독에게 달려가 유신파들의 이화원 포위계획을 이실직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승승장구했다. 

자금성의 외딴 건물에 안치된 광서제는 10년간 위안스카이를 저주하다 세상을 떠났다. 

매일 허수아비에 위안스카이 이름을 붙여놓고 화살을 쏴댔다. 

                                                                                                                 ohyh45 님 블로그 참조 

[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46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81 [중국] 중국 공산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 (3) 녹내장 10-29 1408
380 [중국] 항미원조 주장이 가능하다면 항중원미 차원도 가능… 윈도우폰 10-28 983
379 [중국] 중국의 충격적인 625 교육 (4) mymiky 10-24 1731
378 [중국] 명나라 역사 영토 (11) 예왕지인 10-22 2688
377 [중국] 송나라는 과대평가된 약소국이라 생각됩니다 (33) 미수이 10-17 1558
376 [중국] 상나라 대해서 알아보자 예왕지인 10-11 1006
375 [중국] 중국 춘추전국시대 유물 몇점 (13) 예왕지인 10-11 1357
374 [중국] 중국 한나라 화상석들 (8) 예왕지인 10-10 1368
373 [중국] 중국 한나라 병마용(한양릉) (2) 예왕지인 10-10 1126
372 [중국] 중국 한나라 토기 인물형 (5) 예왕지인 10-10 879
371 [중국] 중국 한나라 가옥 토기 (한나라 시대) (1) 예왕지인 10-10 1308
370 [중국] 지도로 배우는 한자의 변형과 역사 (32) 예왕지인 10-10 1425
369 [중국] 중국인들 도대체 한국이 중국 문화 유산을 훔친다고 … (9) 예왕지인 10-09 1949
368 [중국] 중국 위키백과의 한복 문화 공정에 대한 비판 (9) mymiky 10-09 1175
367 [중국] 중국 한나라 벽화 (3) 예왕지인 10-09 1473
366 [중국] 명나라 시대 복장을 복원한다는 중국 (6) 냥냥멍멍 10-06 2116
365 [중국] 고구려 벽화를 위진남북조 시대 벽화로 설명하고 있… (4) mymiky 09-24 1130
364 [중국]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만리장성 고발합니다 (3) Korisent 09-14 1740
363 [중국] 중국 해안 모양의 변천 지도 (1) 꼬마러브 09-12 1180
362 [중국] 중국인 : 고구려 부여 백제는 중국역사다 (5) 예왕지인 09-05 1316
361 [중국] 중국 한푸 프로젝트 예왕지인 08-23 1562
360 [중국] 중국 역사채널인데.. 한국역사 다뤘는데 뭐라고 하는… (2) 예왕지인 08-21 1754
359 [중국] 중국넘들 한복에 대한 열등감이 대단하네 (2) 예왕지인 08-20 2097
358 [중국] 중국 정부에 대해 돌직구 날리는 중국인들 (1) 예왕지인 08-17 1685
357 [중국] 중국 한푸 프로젝트 현실화 된듯 . (4) 예왕지인 08-04 1719
356 [중국]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머리회로에 혼란이 온 중국… (4) mymiky 07-18 2123
355 [중국] 중국 송나라 시기 여성 복장 입는 법 (1) mymiky 07-04 1781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