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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6 22:39
[한국사] 만주족의 통일과 병자호란1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780  

중국 동북삼성 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인은 조선과 명의 견제로 인해 오랫동안 분열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일본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과 명이 관심을 한반도로 돌린 사이에 아이신 기오로 누르하치(Aisin Gioro Nurhaci·愛新覺羅努爾哈赤)라는 인물이 여진 세력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을 전개 중이었던 것이다.

12~13세기에 금나라를 세웠다가 몽골족에 의해 멸망당한 뒤로, 이 지역의 여진인은 몽골·조선·명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16세기 당시 여진인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海西女眞) 4(), 명과 조선의 영향이 강한 압록강 북쪽의 건주여진(建州女眞) 5, 그리고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野人女眞) 4부 등 13개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빠른 속도로 여진 집단을 합병해 나갔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과 명의 관심이 유라시아의 해양 세력인 일본으로 가 있는 사이에 그 과정을 거의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전국시대를 끝낸 일본열도의 세력이 한반도를 공격했고, 그 파장으로 만주 지역의 전국시대가 끝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신중한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에 조선을 도와줄 의향이 있다고 타진하는 등(‘선조실록’ 1592914) 조선과 명에 대해 저자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595년에 경기·황해·평안·함경 도체찰사가 된 류성룡은 여진 세력이 누르하치의 영도하에 급속히 통일되고 있음을 우려하며, 이를 방치하면 장차 화근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류성룡은 유사시에 겨울의 압록강에 얼음 성을 쌓아 여진 세력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다고 건의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임진왜란 당시부터 누르하치 세력이 장차 한반도의 안정에 위협이 되리라는 사실이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르하치가 1626년에 만리장성 북쪽 영원성(寧遠城) 근처를 공격했을 때에 명나라군이 얼어붙은 보하이만의 얼음으로 성을 쌓아 대응한 것과 같이, 군사학적 소양이 깊었던 류성룡은 한반도 북부의 특성을 활용한 병법을 고안한 것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처럼 온갖 방법을 구상해야 했을 정도로 누르하치의 여진 세력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가까운 미래의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1595~1596년 사이에 누르하치를 방문하고 돌아와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라는 기록을 남긴 신충일(申忠一) 역시 예전에는 출입하는 자가 반드시 무기를 휴대해야만 안전했는데 누르하치가 단속한 후부터는 무장하지 않고 다녀도 안전하다는 여진인들의 말을 전하고 있다.(‘선조실록’ 1596130)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리바이어던(Leviathan)’에 보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라는 표현 그대로 상호 적대적이었던 여진인들이 누르하치의 영도하에 급속히 결속되어감을 우려한 것이다.

 

 

당시 여진 세력과 조선 사이에서는 백두산 자락의 인삼 채취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이어졌다.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경계를 넘어온 여진인을 조선 측이 죽인다고 누르하치 측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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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일은 여진인들이 조선 측은 여진인의 영역으로 건너와서 활동하면서 왜 우리들이 조선의 영역으로 넘어가 인삼 캐는 것은 막느냐며 조선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류성룡도 이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조정에 건의한다. 만주어로 길고 하얀 산(Golmin Šanggiyan Alin·長白山)’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백두산은, 비단 한민족뿐 아니라 이 산을 둘러싸고 발생한 많은 민족들의 공통된 성지였다. 한민족뿐 아니라 여진인들 역시 백두산 자락에서 나오는 인삼을 귀중하게 여겨 명나라와의 주된 교역 상품으로 거래했다.

 

 

애초에 여진인들은 생인삼을 물에 적셔서 명나라 상인들에게 팔았는데 이를 노린 명나라 상인들이 교역할 때 일부러 시간을 끌었기 때문에 인삼이 썩을 것을 우려한 여진인들은 헐값에 인삼을 팔 수밖에 없었다. 이에 누르하치가 인삼을 햇볕에 말리는 방법을 개발해서 장기 보관이 가능하게 하였고, 여진인들의 수익이 증대되었다는 기록이 누르하치에 대한 청나라의 공식 기록인 만주실록3에 실릴 정도로 백두산 인삼은 여진인의 사활이 걸린 상품이었다.

또한 같은 만주실록3은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에 누르하치가 금과 은을 채굴하고 철의 제련을 시작함과 동시에, 몽골 문자를 변형하여 만주 문자를 제정함으로써 여진인의 언어생활에 혁신을 가져오고 여진인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였다고 칭송한다. 당시 여진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보다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몽골의 문자를 이용하였다.

 

이는 여진어를 몽골어로 번역하여 몽골 문자로 표기하는 방식이었는데, 상호 대립하던 여진 부족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정체성을 부여하려면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할 문자를 제정할 필요가 있음을 누르하치는 절감한 것이다. ‘만주실록에서는 옛 법대로 몽골 문자를 이용하자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 맞서 중국인이나 몽골인은 자신들의 언어를 자신들의 문자로 표기하는데 우리는 남의 문자를 빌려 쓰기 때문에 백성이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끝내 새로운 문자를 제정하는 누르하치의 모습이, 마치 조선의 4대 국왕 세종과 같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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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를 비교하면 한자와 한글 간에 나타나는 근본적 차이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훗날 청나라를 세우게 되는 여진인은 누르하치가 문자를 제정하여 만주인이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홍삼 제법과 광산을 개발함으로써 여진 세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생각하였음을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알 수 있다.

 

 

1599년 이전까지 몽골 문자를 빌려서 여진어를 표기하였다는 만주실록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진인들은 몽골의 정치·경제·문화적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주원장(朱元璋)이 명을 건국하면서 몽골인들은 14세기 후반에 몽골고원으로 되돌아가 북원(北元)을 건국한다.

 

 

몽골인이 수립한 연합 제국은 유라시아 전체를 포괄하였으며, 결코 중국사라는 범위에 포섭되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북원의 건국 역시 몽골인이 자신들의 제국 가운데 한족의 영역을 포기하고 원래의 출발지로 돌아간 것일 뿐이었으며 명나라는 이후로도 몽골과의 항쟁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

 

 

 

유라시아 동부에서 몽골인들의 정치적 독립이 소멸되고 오늘날과 같이 중국의 일부로서 자리하게 된 것은 여진인들이 수립한 청나라에 의해서였다.

 

이전 왕조의 역사서를 만들어서 새로운 왕조의 수립을 기정사실화하는 한족의 전통에 따라 명나라 측에서는 서둘러 원사(元史)’를 만들었으나, 몽골 세력에 대한 적대감에서 만들어진 이 역사서는 후대에 혹평을 받기도 하였다.

 

 

1580년대에 여진 통일 전쟁을 시작한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은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러나 상호 적대적이던 다른 여진 그룹들은 누르하치에게 정복되기보다는 몽골이나 명나라와 같은 외부의 힘을 빌려 누르하치를 꺾고자 하였다.

한반도에서 조선·명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던 1593년에 몽골과의 연계가 강한 해서여진 세력들은 코르친(Khorchin) 등의 몽골 세력과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다.

 

 

누르하치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건주여진에 이어 여허(Yehe·葉赫) 집단을 제외한 모든 해서여진도 합병한 뒤에 1603년에 허투 알라(Hetu Ala·興京老城)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제까지 여진을 낮게 평가하던 몽골인 가운데 일부 세력이 이때부터 누르하치와의 연합을 모색하기에 이르렀고, 1593년의 전쟁에서 누르하치에 진 바 있는 코르친을 포함한 칼카(Kalka) 몽골 세력이 1606년에 그에게 공경스러운 한(쿤둘런 한·Kundulen Han)’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금나라 멸망 이래로 이 지역에 존재한 몽골과 여진의 관계가 처음으로 역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일본열도의 도쿠가와 막부는 히데요시가 무너뜨린 조선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고자 간청과 협박을 섞어서 조선 측을 설득하였는데, 협박 가운데에는 다시 조선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념이 없었으며, 만주의 상황을 우려하였지만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한편 명나라도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이 현실화되자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따라 해서여진의 잔존 세력인 여허를 지원하여 누르하치를 견제하였다.

 

 

누르하치는 시종 명에 저자세를 취해 왔으나 이제 명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누르하치는 1616년에 여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 세력의 유력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금국(後金國·Amaga Aisin Gurun) 건국을 선포하고 여러 나라를 기르실 밝은 한(geren gurun be ujire genggiyen han)’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이어 누르하치는 1618116일 명나라에 전면전을 선포한다. ‘만주실록4에서는 이날 아침에 황색과 청색 선이 기우는 달을 꿰뚫는 징조가 나타났다고 하여 이 전쟁을 성화(聖化)한다. 또한 같은 해 4월에 여진군이 명나라를 향해 출발할 때 누르하치는 자신이 명나라에 대해 일곱 가지 큰 한()(nadan amba koro·七大恨)”을 풀어야 하겠다고 선언하여, 이 전쟁이 외국에 대한 침략 전쟁이 아니라 정당한복수전이라는 명분을 만들어낸다.

 

일곱 가지 한이란 a)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명나라 측이 죽였다든지 b)명나라가 여허를 도와 자신과 적대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명분을 숫자 7에 맞춘 것이다. 누르하치는 하늘이 자신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자신이 (여허를 제외한) 여진을 통일할 수 있었으며, 이처럼 천명을 받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여허를 명나라가 도와주는 것은 천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만주실록에 실려 있는 누르하치의 이러한 복수운운 발언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립된 청나라의 만주인 지배세력이 한족의 전통적인 정치 관념을 이용하여 후세에 정교하게 구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명나라라는 외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였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자신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고 일본의 침략을 받게 될 조선과 명을 비난한 바 있다.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를 자신이 소멸시켰으니 감사를 표하는 사절을 보내야 할 것인데 그러지 않았으니 명나라가 잘못된 것이고, 이 문제를 중재해 달라고 조선에 요구했는데 무시했으니 조선이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였다.

 

누르하치가 전면전을 선언하자 명과 몽골은 여허 부족과 연합군을 형성하였으며,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김응서·김응하의 조선군도 명군과 함께 행동하였다.

 

이 전투에는 양호·유정·이여백 등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활동한 명의 장군들과, 역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에 투항한 일본 병사들을 다룬 경험이 있는 김응서가 참전하였다. ‘항왜(降倭)’라 불리는 조선군 속의 일본 병사들 역시 사르후전투에서 반()누르하치 연합군에 포함되어 있었다.

 

유라시아 동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누르하치 세력과 반누르하치 연합군이 충돌한 1619년의 사르후전투에서는 누르하치군이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후금과 명이라는 양대 세력의 충돌에서 중립을 유지하고자 한 조선의 군주 광해군은 강홍립 등의 조선군에 소극적인 대응을 명하였다. 전투 중에 포로가 된 강홍립은, 조선군이 자발적으로 이 전투에 참전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할 수 없이 온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누르하치의 일대기인 만주실록에는 당시 강홍립의 말이 실려 있다. “우리 병사는 이 전쟁에 원해서 온 것이 아니다. 왜자국(倭子國·odzi gurun·일본)이 우리 조선을 공격하여 토지와 성곽을 약탈하는 환란(患亂)의 때에 대명(大明·daiming) 군사가 우리를 도와 왜자를 물리쳤다. 그 보답을 하라며 우리를 데리고 왔다. 당신들이 살려준다면 우리는 투항하겠다. 우리 병사들 가운데 대명의 군대에 합류하여 간 자들은 당신들이 모두 죽였다. 우리의 이 군영(軍營)에는 조선인, 그리고 대명의 유격(遊擊) 장군 한 명과 그를 따라온 병사들뿐이다. 그들을 잡아 당신들에게 보내겠다.” (5)

 

누르하치는 명이나 몽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충돌할 요소가 많지 않은 조선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르후전투 후에 조선 측에 보낸 편지에서, “하늘이 나를 옳다 하고 한(·nikan)을 그르다고 판단하셨다. 조선(solho), 너희들의 군대가 한을 도와 우리에게 왔기에 나는 조선군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한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倭子·odz)의 침공을 막아준 은혜를 갚기 위해 온 것이리라라고 생각했다라며 유화적인 자세를 취했다.

자신에게 적대한 모든 세력과의 충돌에서 대승을 거둔 누르하치는 요동반도로 세력을 확장코자 하였다. 사르후전투 후에 조선 측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몽골 세력에 대해서도 친근한 언사로 접근하였다. 그는 당시 몽골에서 가장 강력했던 차하르 몽골의 릭단 칸(Ligdan Khan)에게 1620년에 보낸 편지에서 대명(daiming)과 조선(solho) 두 나라는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아서 같은 나라처럼 삽니다. 만주와 몽골 우리 두 나라도 말이 다를 뿐이지 입은 옷과 머리 모양은 하나같습니다” (‘만주실록6)라고 몽골 측을 회유한다.

 

명과 조선이 언어는 다르지만 문화적으로 하나인 것처럼, 만주와 몽골 역시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으로 동일하니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다. 이 밖의 여러 기록에서도 누르하치 등 만주족 집권층은 자신들의 인종적·문화적 동질성을 몽골인에게서 추구하였으며, 조선은 여진인과는 무관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청나라는 일종의 전근대판 동북공정(東北工程)의 결과물이라 할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같은 문헌을 작성하여, 유라시아 동부의 비()한족 지역에 대한 역사적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현대 한국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프로파간다적인 문헌에 적힌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여, 몽골인이나 여진인과 한국인이 인종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몽골인이나 여진인의 역사적 경험은 남의 역사가 아니라 곧 한국인의 역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무튼 조선과 몽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며 만주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한 누르하치는, 1622년에 요동 지역의 거점인 요양(遼陽)을 점령하고 수도를 두었다. 그러나 한인에 대한 지배에 실패하여 반란 움직임이 있자 1625년에는 심양(瀋陽)으로 수도를 옮기고, 만주어로 흥하다는 뜻을 지닌 묵던(mukden· 盛京)으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광해군의 조선 조정이 명과 후금의 충돌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하여는 균형외교’(한명기)라는 긍정적 평가와 기회주의’(오항녕)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요동 지역에서의 우위를 확고히 하고자 한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산해관(山海關) 바깥의 영원성(寧遠城)1626년에 공격하였다. 만리장성 바깥쪽을 포기하자는 명나라 조정의 입장에 반대한 탁월한 군사 지도자 원숭환(袁崇煥), 병력의 절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에서 유래되어 임진왜란 때에도 맹활약한 홍이포(紅夷)를 활용, 여진의 기마(騎馬) 전술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누르하치도 이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결국 사망하게 되는데, ‘만주실록에는 그의 죽음이 영원성전투 때문이라는 사실이 미묘하게 처리되어 있다.

 

정복자 누르하치의 일생에서 이 패배가 그만큼 치욕적인 사건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리라. ‘만주실록에서는 그가 죽음에 임하여 자손에게 남긴 유언이 길게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눈을 끄는 대목이 있다. “‘충경(忠經·jung ging)’의 글에서 말하기를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만류하면 가장 좋고, 일이 끝난 후에 만류하면 가장 나쁘다. 알고도 만류하지 않으면 바른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8) 지배자 된 사람은 간언(諫言)하는 충신을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사르후전투 이후 요동 지역으로 진출한 누르하치는, 압록강 넘어 조선으로 도망간 요동 지역의 한인들을 되돌려 보내라는 내용의 서한을 조선 측에 보낸다. 여진인의 가장 오래된 편찬 역사서인 만문노당(滿文老)’ 1621(천명6) 3월조에는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 i han)이 조선 한(solho han)에게편지를 보내어, “조선은 올바른 나라이니 도리를 모를 리 없을 것이므로요동의 지배자가 된 자신에게 요동의 한인들을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고 되어 있다.

 

누르하치와 조선 왕이 동등한 한(han·khan)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만문노당의 다른 곳에는 명나라의 만력 한(wan lii han·萬曆帝)이 조선의 한(solho i han)에게말했다는 구절이 보이는 등, 만주인의 초기 세계관에서 조선·여진·명은 평등한 한(han)의 나라로 간주되었다.

 

 

만주국의 태조 겅기연 한(manju gurun i taidzu genggiyen han)이 조선국의 왕(solho gurun i wang)에게 글을 보낸다” (7)라는 대목이 보인다.

 

 

만문노당의 단계에서는 만주의 한과 조선의 한이 서로 동등했지만, 조선보다 위에 자리했던 명나라가 여진인에 정복당한 뒤인 만주실록의 단계에서는 만주의 한이 조선의 왕()보다 상위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동양문고본 만문노당의 편찬자들 역시 만주인들의 이러한 조선관을 투영하여 원문을 왜곡하는 결과를 빚은 것이다.

여진인 지배자들이 조선을 자신들과 동등한 존재가 아닌 자신들의 하위에 있는 존재로서 보게 된 계기는 1627년의 정묘호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었다. 누르하치가 1626년의 영원성전투에서 전사한 뒤 즉위한 홍타이지(hong taiji·皇太極), 일찍이 아버지 누르하치가 협조를 얻고자 했던 차하르 몽골을 정복하고 칭기즈칸으로부터 전해져 온다고 하는 옥새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몽골 세계 제국의 정통성을 획득한 홍타이지는 1636411일에 만주인과 몽골인, 요동 지역의 한인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황제에 즉위했다.

 

만문노당에는 따르면, 이때 조선에서는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사신으로 와 있었지만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며 목숨을 걸고 강경 태도를 취하였다고 한다. 홍타이지로서는 만주·몽골··조선 등 4개 세력의 황제로서 즉위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었으니, 조선에 대해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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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타이지는 즉위식 이전에도 1627년 조선을 공격한 바 있으니,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정묘호란 당시 후금의 목표는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皮島)에 주둔하던 명나라의 모문룡(毛文龍) 세력을 척결하는 것, 그리고 정복 전쟁과 명나라의 금수 조치로 인해 부족해진 물자를 조선에서 입수하는 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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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후금 세력은 조선을 완전 정복하는 대신에 양국 간에 형제 관계를 맺고 경제적 착취 구조를 구축하는 데 그쳤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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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좀와라 18-04-27 01:39
   
"당시 여진 세력과 조선 사이에서는 백두산 자락의 인삼 채취를 둘러싸고 심각한 대립이 이어졌다. 인삼을 채취하기 위해 경계를 넘어온 여진인을 조선 측이 죽인다고 누르하치 측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 인삼은 재배해서 얻는 삼. 산삼과 장뇌삼은 채취해서 얻는 삼.

--- 인삼 재배 방법은 조선의 노하우로 타 종족이 인삼 재배 방법을 알기 시작 한 것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간도지방과 하와이 지방에서 재배 하면서 부터임.

--- 누루하치의 여진족은 인삼 재배 방법을 몰랐기에 당시의 여진족은 산삼만 가지고 있었을 뿐 인삼은 고려나 조선과의 교역에서만 얻을 수 있었음.
촐라롱콘 18-04-27 09:14
   
1.[[건주여진에 이어 여허(Yehe·葉赫) 집단을 제외한 모든 해서여진도 합병한 뒤에
1603년에 허투 알라(Hetu Ala·興京老城)에 거점을 구축했다.]]....??
.
.
1603년 시점에서는 해서여진 4부 가운데 하다는 이미 누르하치에게 합병된 이후지만....
호이파, 울라는 아직 멸망되기 이전이었습니다.
1607~1613년도 시기에 호이파, 울라가 차례로 멸망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예허는 1616년 후금이 건국된 이후에도 버티다가... 1619년 사르후 전투 직후에
후금에게 멸망당했습니다.


2.[[누르하치가 1626년의 영원성전투에서 전사한 뒤 즉위한 홍타이지(hong taiji·皇太極)는, ...]].....??
.
.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서 전사하지 않았습니다.
영원성 전투는 1626년 연초에 일어났고, 누르하치가 죽은 시기는 1626년 말이기 때문에
대략 10개월 정도의 시차가 발생합니다.
또한 1626년도에도 누르하치의 여러 활동내역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봐서.....
영원성전투에서는 잘해야 가벼운 부상 정도에 그쳤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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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7 [한국사] 고려의 국경에 관련해 추천하는 영상 (4) 위구르 05-04 377
19996 [한국사] 황산벌 전투 위치 / 사비성 사하 백마강 백제황산 대… 하늘하늘섬 05-03 207
19995 [기타] 한국인은 사실 황인종이 아닌 이유|인종과 피부 색… 관심병자 05-03 398
19994 [한국사] 주류 강단 사학계 ‘젊은 역사학자 모임’에 대한 학… 하늘하늘섬 05-03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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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2 [한국사] 고려 서경 올바른 위치 최초 확인 (25) 하늘하늘섬 05-03 303
19991 [한국사] 광개토대왕과 낙랑군의 위치, 누구도 모르는 그 곳에… (2) 하늘하늘섬 05-02 422
19990 [기타] 낙랑 봉니 가 낙랑군의 증거가 될수 없는 이유 (1) 관심병자 05-02 232
19989 [기타] 고조선, 최신 고고학과 유전학으로 밝혀진 놀라운 사… (1) 관심병자 05-02 378
19988 [기타] 잃어버린 우리땅 대마도는 경상도였다 관심병자 05-01 374
19987 [기타] 세 나라의 이름만 바꾸면 모두 똑같은 신화? 고구려 … 관심병자 05-01 433
19986 [기타] 역사 해석에서 자주 빠지는 오류 관심병자 05-01 231
19985 [기타] 도깨비, 장산범, 물괴, 야차 let's go 관심병자 04-30 466
19984 [한국사] 청나라 한림원 학자들이 말하는 고려 서경과 동녕로 (1) 하늘하늘섬 04-30 503
19983 [기타] ↓ 아래 글에 대한 내 관점...역사를 인문학으로 본다… (1) 윈도우폰 04-27 433
19982 [한국사] 님들은 환단고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8) 천의무봉 04-27 600
19981 [한국사] 2. 고조선 제국과 고대 요동 끝판 정리 (8) 아비바스 04-25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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