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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28 17:36
[한국사]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미녀의 사랑 이야기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428  

1)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 이야기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과 그 주변 일대는 고구려시대 왕봉현(王逢縣)이란 행정구역이 있었다. 우왕현(遇王縣) 또는 왕영(王迎)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의미다. 즉 왕을 만난 곳이라는 뜻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이 왕봉현의 이름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만난 곳이므로 왕봉(王逢)이라고 이름하였다." 

왕봉의 왕이 바로 고구려 안장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뿐이 아니다. 같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달을성현(達乙省縣)에는 이런 기사가 덧붙여져 있다. 

"한씨(漢氏)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烽火)를 피워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므로, 후에 고봉(高烽)이라고 이름하였다." 

달을성현 또는 고봉현은 지금의 고양시 관산동과 고봉산 일대로 추정된다. 

왕봉현과 고봉현, 이 두 지명을 연결하면, 한강변에 연해 있는 지금의 행주 일대에서 북쪽으로 고양시를 지나 공릉천 일대에 걸쳐 있는 지역에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를 담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지리지 기사는 너무 간략해서 단지 두 등장 인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왜 안장왕이 이곳에 왔는지, 한씨 미녀는 누구인지, 안장왕과 한씨 미녀는 어떤 관계인지, 이 둘이 만나 로맨스를 꽃피웠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는지, 아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랑이야기인지 등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욱 이 기록이 일종의 정사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본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고, 지리지에서만 불쑥 나타나기 때문에 역사라기보다는 설화적 성격이 짙게 풍기기도 한다. 그래도 왜 하필 안장왕이었는지는 여전히 궁금하다. 

이런저런 궁금증에 답하기 위해서인지, 신채호는 해상잡록(海上雜錄)이라는 옛 문헌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조선상고사'에 수록하고 있다. 

이 책의 안장왕 이야기는 이렇다. 고구려 안장왕은 문자왕의 태자 시절에 상인 행장을 하고 백제땅 개백(皆伯)으로 놀러갔다. 당시 그 지방 한씨의 딸 주(株)는 절세 미인이었다. 안장왕이 백제 정찰관의 눈을 피해 한씨 집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다가 한주와 몰래 정을 통했다. 그리고 고구려로 떠나면서 자신은 고구려 태자인데, 나중에 개백 땅을 취해 한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개백현 백제 태수가 한주의 미모를 탐하여 강제로 결혼하려고 하였으나, 한주가 완강하게 거절했다. 분노한 태수는 그를 옥에 가두고 위협하고 감언으로 꾀었다. 한주는 옥중에서 정몽주의 시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단심가를 부르면서 자신의 굳은 뜻을 꺾지 않았다.

왕이 된 안장왕은 한주를 구하는 자에게 관작 등을 포상하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자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安鶴)공주와 사랑하던 사이인 장군 을밀(乙密)이 나섰다. 을밀은 한미한 가문 때문에 왕실과 결혼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조건으로 안학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하였다. 

안장왕의 허락을 얻은 을밀이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 땅에 들어갔다, 마침 개백 태수의 생일 잔치날에 끝까지 태수의 요구를 거부한 한주를 죽이려고 하자, 군사를 일으켜 한주를 구하고, 개백현과 그 일대를 차지하여 안장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안장왕과 한주가 다시 부부가 되고, 을밀과 안학공주도 결혼했다는 내용이다. 

위 이야기는 춘향전과 모티브가 유사하다. 또 정몽주로 알려진 단심가를 한주의 노래라고 하는 등 후대에 가필된 흔적이 많아 전하는 이야기 그대로 고구려 시대의 역사나 설화로 보기는 어렵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전하는 설화의 골격에 보다 풍부한 내용이 후대에 거듭 더해지면서 전승된 이야기로 보인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안장왕과 한씨 미녀 기사는 통일신라 성덕왕대의 명문장가 김대문(金大問)이 한산주도독(漢山州都督)을 역임한 시절에 지은 '한산기(漢山記)'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산기'는 통일신라의 한산주 즉 한강 하류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승과 풍물 등을 기록한 책으로 짐작된다. 도미 부부의 이야기 등도 '한산기'에 수록돼 있었을 것이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 이야기가 설화적 성격이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역사적인 사건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간략한 그 이야기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가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다. 장소와 두 인물이다. 왜 지금의 행주와 고봉산 일대가 주 무대이며, 안장왕과 한씨 미녀가 두 주인공인가란 점이다.



1.jpg

                                                     행주산성과 한강   

 


왕봉현 즉 행주산성 앞 한강을 삼국시대에는 왕봉하(王逢河)라고 불렀는데, 나당전쟁 중인 673년(문무왕 13년)에 당나라 군사가 거란, 말갈 군사와 함께 쳐들어왔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왕봉하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고 한다. 왕봉현 일대가 군사전략상이나 교통로상의 요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떠올리면 이 일대의 전략적 가치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고봉산 일대도 한강 하류에서 육로로 파주를 지나 임진강에 이르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고봉산성과 고봉산 봉수대가 설치된 군사상의 요지인 이유다. 즉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곳은 한강 하류의 요충지로서 백제에 대한 안장왕의 군사활동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529년 10월에 안장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 북변의 혈성(穴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백제 성왕도 좌평(佐平) 연모(燕謨)와 3만 군대를 보내 대항케 하였다. 안장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백제군 2000여 명을 전사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곡원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 일대이다. 

오곡원 전투는 장수왕의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진 전투 중 최대 규모였다. 당시 백제군 3만명은 성왕이 신라 관산성 전투에서 동원한 군사 규모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한성 공격을 위해 동원한 군사도 그 정도다.

 3만 군대라는 규모만으로도 오곡원 전투를 치르는 백제군의 의욕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오곡원 전투는 백제 한성 함락 이후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역관계를 다시금 결정짓는 전투였다. 그런 점에서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과연 황해도에서 전투를 치를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적지 않다. '삼국사기'의 오곡원 전투 기록이 백제 측 전승자료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성시대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백제 왕실의 염원을 담은 기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한씨 미녀와 관련된 전승을 함께 생각하면 안장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한강 하류지역을 다시 확보하였던 군사활동이 행주 일대의 전승으로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안장왕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커다란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겠다. 

이 오곡원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안장왕은 그동안 역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오히려 요즘 그를 다시 불러내는 데에 한씨 미녀와의 로맨스 이야기가 일정하게 기여하는 바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한씨 미녀는 누구이고, 왜 안장왕은 그런 로맨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일까? 

 

2) 안장왕의 죽음으로 끝난 한씨(漢氏) 미녀와의 사랑 


한강변 행주 일대, 즉 과거 고구려 왕봉현이란 이름에 얽혀 있는 한씨(漢氏) 미녀와 안장왕의 로맨스는 그냥 가공의 설화는 아닐 것이다. 역사상 그리 이름나지 않은 인물인 안장왕을 꼭 찍어 한씨 미녀와 엮은 걸 보면 무언가 어떤 실제 역사를 담고 있으리라 보는 게 타당하다. 

안장왕이 고구려로서는 변방이나 다름없는 이곳 한강유역까지 멀리 왜 내려왔을까? 한씨 미녀의 미모에 반해서일까? 하지만 아무리 미인이라 하더라도 왕을 멀리까지 거둥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연스레 한씨 미녀의 아버지 한씨(漢氏)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또 왕봉현 혹은 한강하류 지역과 한씨는 어떤 관계일까? 

이런 물음들에 일일이 답을 얻기 어렵지만, 당시 안장왕의 정치적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 있음은 분명하다. 안장왕이 한강유역에 내려와서 그 지역 여인을 만났다는 점에서 신라 소지왕의 로맨스가 떠오른다. 소지왕 이야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왕 22년기에 실려 있다. 잠시 살펴보자. 

「(22년) 가을 9월에 소지왕이 날이군(捺已郡)에 행차했다. 그 고을 사람 파로(波路)의 딸 벽화(碧花)는 16세로 뛰어난 미인이었다. 파로가 수놓은 비단 옷을 입혀 수레에 태우고 색깔 있는 명주로 덮어서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음식을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열어보니 어린 소녀였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받지 않았다. 왕궁에 돌아와서 그리운 생각을 가누지 못해 두세 차례 몰래 그 집에 가서 벽화를 침석에 들게 하였다. 

도중에 고타군을 지나다가 늙은 할멈의 집에 묵게 되어 물어보았다. 
"백성들이 왕을 어찌 생각하는가?" 

늙은 할멈이 대답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왕을 성인으로 여기지만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제가 들으니 왕께서 여러 차례 날이군 여자를 만나러 보통 사람 옷을 입고 온다고 합니다. 무릇 용이 물고기 옷을 입으면 고기잡이에게 잡히고 맙니다. 지금 왕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신중하지 못하니 어찌 성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왕이 부끄럽게 여겨 몰래 벽화를 맞아들여 별실에 두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설화적인 내용이지만 소지왕 말년의 여러 정황을 살피게 하는 이야기이다. 소지왕은 날이군 지방 출신인 벽화라는 여인을 비공식적으로 궁궐에 들이고 아들을 얻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소지왕이 죽자 아들이 없어서 그의 6촌인 지증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벽화와 사이에 낳은 아들은 무시되었던 것이다. 이는 벽화가 지방세력 출신으로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신라 왕실이나 귀족사회 입장에서는 그 후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더구나 위 설화에는 다소 상식적으로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 소지왕이 9월에 벽화와 만나고 11월에 사망했으면, 실제로 이때 아들을 낳을 수는 없다. 소지왕이 사망 전에 벽화와 만났다면 최소한 1년 이전 언제일 것이다. 그런데도 소지왕과 벽화의 이야기가 소지왕이 죽는 해에 기록된 것은 어쩌면 소지왕의 죽음이 이런 문제와 깊이 연관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즉 신라 귀족사회에서는 소지왕과 벽화로 대표되는 지방세력의 결합에 크게 반발했였을 것이며, 그것이 소지왕의 죽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생각해 봄직하다. 당시 불만이 만만치 않았음은 고타군 늙은 할멈의 입으로 소지왕을 비난하는 내용에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소지왕의 사례가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를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되리라 본다. 지난 회에서 잠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장왕은 백제 3만 대군과 오곡원(五谷原) 전투를 치르는 등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격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때 한강유역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새삼 재인식했을 것이고, 이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지방세력의 움직임도 예의 주시했을 것이다. 안장왕이 한강하류 지역으로 행차한 배경은 이런 점에서 충분히 추리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안장왕 죽음의 배경에도 심상치 않은 면이 있다는 점에서 앞서 소지왕의 사례를 더욱 음미하게 된다. 사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13년조와 이어지는 안원왕 즉위년조 기사에서는 안장왕의 죽음에 대해 비정상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다. 관련 기사는 이렇다. 

(안장왕) 13년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안장왕이라고 하였다. 안원왕은 이름이 보연(寶延)이고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었으므로 안장왕은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죽었는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즉 안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안원왕은 안장왕의 아우로서 안장왕이 후사가 없어서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안장왕이 후사가 없다는 점도 소지왕의 경우와 유사하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 계체기(繼體紀) 25년 12월조에는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안원왕이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다"는 식의 풍모를 고려하면, 혹 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듯이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는 아우가 형을 살해한 경우가 아닐까 추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안장왕이 아우를 사랑했다는 표현을 믿는다면 안원왕이 형을 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안원왕이 아들이 없었음에도 사랑하는 동생을 태자로 삼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후사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음을 뜻하는데, 그런 안원왕이 사망했다는 것 자체가 돌연한 죽음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안장왕이 피살되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은 당시 백제 측 정보에 의한 것인데, 여러 정황상 매우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안장왕은 어떤 정치적 연유로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았던 것일까? 

신라 소지왕의 사례에서 유추하듯이 지방세력인 한씨 미녀와의 결합이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한씨 미녀의 가문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일단 한씨(漢氏)라는 성은 실제 성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수(漢水) 일대를 근거지로 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한씨(漢氏)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한씨 미녀는 한강하류 일대를 기반으로 하는 유력가의 딸로 볼 수 있다. 한수 지역에 대한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안장왕은 이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씨 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을 것이다.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행위라 볼 수 있다. 안장왕과 한씨 미녀와의 로맨스는 당시 안장왕이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정치세력을 중앙정계에 등용해 왕권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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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 장대지 발굴 모습: 아차산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축성 운영한 한강변의 요충지이다

 


게다가 안장왕은 아직 뒤를 이을 아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씨 미녀로부터 아들을 얻고 그가 왕위를 잇는다면 중앙 정계의 세력 판도가 달라질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기존 중앙귀족들은 한씨 미녀 혹은 한씨 미녀로 대표되는 지방세력의 출현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상황을 연출한 안장왕에 대해 기존 중앙 귀족세력이 거세게 반발하면서 결국 안장왕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추정하면 지나칠까? 

지금까지는 작은 단서로 추정해본 어디까지나 역사적 상상일 뿐이다. 그런데 안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안원왕 대에 왕비의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안원왕도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앞에서 상상한 안장왕 대의 상황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광개토왕, 장수왕대의 번영은 새로운 정치세력이나 사상 등을 적극 받아들이는 고구려 사회의 개방성이나 국제성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데 100여 년이 흘러 안장왕의 죽음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반기지 않은 기존 귀족들의 기득권 지키기와 폐쇄성을 엿볼 수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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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내고환 18-05-01 23:36
   
설화로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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