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 평양천도 = 남진정책
강단 주류 불변의 통설
대체 어떤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조의
평양천도 기사 전후의 주요 내용은 어떤가?
12년(424)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왕이 그를 위로하였는데 특별히 후하게 대하였다.
15년(427)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23년(435) 여름 6월에 왕이 사신을 위(魏)에 들여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청하였다......
가을에 왕이 위(魏)에 사신을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위(魏)의 사람들이 연(燕)을 자주 쳐서 연(燕)이 날로 위태롭고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연왕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일 일이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였다가 나중에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주기를 청하였다.
24년(436)에 연(燕) 왕이 사신을 위(魏)에 들여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청하였으나, 위(魏) 왕이 허락하지 않고 병력을 일으켜 이를 토벌하려 하였고, 사신을 보내 [고구려 등에] 알렸다.
여름 4월에 위(魏)가 연(燕)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왕이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무리 수 만을 거느리고 양이(陽伊)를 따라 화룡(和龍)에 이르러 연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5월에 연왕이 용성(龍城)에 당시 거주하던 호구를 이끌고 동쪽으로 옮겨오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불이 열흘이 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부인은 갑옷을 입고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陽伊) 등은 정예 병력을 통솔하며 바깥에 서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연왕의 뒤를 따랐다. 사각으로 벌린 대열을 하고 나아갔는데 앞뒤가 80여 리나 되었다.
위(魏)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 연왕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이 사신을 위(魏)에 보내 표(表)를 올려서,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화(王化)를 받들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위주(魏主)가 왕이 명령을 어겼다고 공격할 것을 의논하고 농우(隴右)의 기병을 보내려고 하였다. 유혈(劉絜)과 낙평왕(樂平王)비(丕) 등이 시정을 건의하자 그만두었다.
남쪽의, 이미 전왕대에 제압한 백제나 신라에 다시 쳐들어가거나,
그와 관련된 작업을 하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신라의 사신을 '특별히 후하게 대한' 기록은 있다.
남쪽 정세의 현상 유지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다.
반대로 서쪽으로 진출하는 내용은 있다.
북위의 사전 경고를 무시하고, 북위와의 충돌을 무릅쓰고,
갈로/맹광이 이끄는 수만 병력을 파견하여
북위에게 멸망한 북연의 왕 풍홍의 일족을 접수해 온 사건이다.
북위에서 풍홍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역시 거부했다.
북위 조정에선 고구려와의 전쟁을 의논했으나 그만두었다.
아마도 승산이 없다고 봤을 것이다.
물론 장수왕 집권 중/후기에는 남쪽 정세가 급변하고
고구려 대 나제동맹의 전쟁양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먼저 평화를 깨고 군사행동을 한 쪽은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신라였다.
장수왕 28년에 고구려군의 변경 장수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후로 고구려와 신라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장수왕 57년에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변을 공격해온다.
그리고 백제가 북위에 고구려 협공을 제안한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진다.
장수왕 63년의 대대적인 한성침공은 그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기록 어디에도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목적으로 평양천도를 실행했음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