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거북선 실물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서화가 미국의 한국 기업가에 의해 공개됐다.
* 갑옷을 입고있는 조선수군의 모습(포졸의 옷이 아님)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윤원영 서진무역 사장이, 언론에 공개한 이 고서화는 윤 사장은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한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마우리의 손자 며느리로부터 이 그림을 구입하면서 "1867년 일본 니가타현 인근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 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전했다.
70년 마우리 가문은 일본 고미술반출협회 허가를 받고 일본에서 이 그림을 반출해 보관하다 윤 사장에게 매각했다.
윤 사장은 또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측정기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이 그림이 300~35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다" 며 "이는 임진왜란(1592~1598) 이후인 17세기 중반~18세기 초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군선과 수군 장병의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인 셈" 이라고 설명했다
거북선 실물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17세기경 고서화가 재미 기업인 윤원형씨에 의해 현지시간으로 17일 미국 뉴욕에서 공개됐다. 이 그림은 그동안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 온 거북선 원형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가로 140cm, 세로 239cm의 크기로 2장의 비단 천에 그려진 이 그림에는 거북선 모양의 배 위에서 회의 중인 장수들과 소형 선박에서 무기를 점검하는 병사들, 물건을 나르는 민간인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거북선 모양의 배는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 전서’에 대략적인 스케치 형태로 그려져 있는 2층 구조가 아니라 3층 구조로 돼 있어 눈길을 끈다. 또 왼쪽 하단에 육안 해독이 불가능하긴 하지만 바랜 서체로 거북선 제원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학계는 적외선 촬영을 통해 이 글씨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윤씨는 “평양 숭실학교 교장을 역임한 미국인 선교사 데이비드 마우리의 손자며느리인 마우리 여사로부터 지난해 1월 구입했다”면서 “1867년 일본 니가타(新潟)현 인근의 나가오카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그림이라는 설명을 마우리 여사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윤씨는 또 “조지아대에서 탄소동위원소 방식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300~350년 전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최고 1640년대의 그림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이 경우 임진왜란 후 거북선을 비롯한 당시 군선과 수군 장병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그린 그림일 가능성이 크다. 윤씨는 “그림을 그릴 당시에 사용했던 석채(광물성 물감)가 용머리 방패 깃발 등 일부분에 남아 있고, 나머지 부분은 일본에 건너간 뒤 덧칠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조선시대 거북모양으로 만든 전선(戰船). 일반적인 거북선에 관한 기록은 조선 초기의 《태종실록》에 처음 보인다. 즉, 1413년(태종 13)에 “왕이 임진강 나潁?지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들이 해전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고, 또 1415년(태종 15)에는 좌대언(左代言, 조선태종 때 좌승지의 다른 이름) 탁신(卓愼)이 “귀선의 전법은 많은 적에 충돌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가 없으니, 결승의 양책(良策)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뜻을 상소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내용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裝甲船)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북선의 기원을 왜구의 침해가 가장 심하던 고려 말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와 같이 거북선은 고려 말, 또는 조선 초에 이미 제조, 사용되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순신(李舜臣)에 의하여 전래의 거북선을 개량하여 철갑선으로서의 거북선이 창제, 실용화되었는데 이를 ‘창제귀선(創制龜船)’이라 한다. 창제귀선은 임진왜란 초반의 잇따른 해전에서 함대의 선봉이 되어 돌격선의 위력을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임진왜란 후의 거북선은, ‘창제귀선’의 제원(諸元)에 대한 기술적인 전승을 이루지 못한 채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조선 말기까지 각 수영에 존재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 의하여 창작, 구사된 바로 그 거북선인 것이다.한편, 비록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거북선의 유형에 속하는 배가 따로 구상된 예가 있다. 이미 이순신의 귀선이 용맹을 떨치고 있던 1592년 태자를 호종한 이덕홍(李德弘)은 왕세자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귀갑거(龜甲車)의 전법과 귀갑선의 이로움을 아뢰고 있다.
그는 귀갑선의 체제를 “등에 창검을 붙이고, 뱃머리에는 쇠뇌〔弩〕를 매복시키고, 허리에는 판옥(板屋)을 지어 사수를 그 속에 두고……”라 하고, 또 “듣건대 호남의 장수들이 이것을 써서 적선을 크게 무찌르고 있다.”고 언급한 뒤 이듬해 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귀갑선의 구상도를 첨부하여 그것의 제작을 건의하고 있다(艮齋先生文集 卷二).이와 같은 귀갑선의 구상은 그 발상에 있어서 이순신의 창제귀선과 비슷한 데가 있으나, 구조상의 개념은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이 귀갑선의 발상과는 별도로 지금도 거북선에 대하여 귀갑선이라는 명칭이 종종 혼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