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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09 20:53
[기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의 이동에 관하여 (동북공정 관련)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155  

https://blog.naver.com/thebeat913/50142227995

-전략-

처음 비가 발견된 것이 1876~80년경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비가 왜 그 이전에는 그 자리에 있었다는 우리의 어떠한 기록도 없고 어떻게 그 때까지 발견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사서에 아래와 같이 압록강 건너 집안지역에 있는 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용비어천가 제39장 압강(鴨江) 주해>

▲ 근처 아불란사 터에 있는 높이 3~4m의 이 대석이 우리 기록에 언급된 대금황제능비로 보인다.

평안도 강계부 서쪽 강 건너 백사십리에 있는 큰 들 가운데 대금황제성이라 칭하는 고성이 있고 성 북쪽 7리에 비가 있다.

<皇城> 平安道江界府西越江一百四十里, 有大野中有古城 諺稱 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동국여지승람 권55 강계부 산천조>

만포 삼십리 거리 황성평에 금황제묘라 전하는 황제묘가 있고 10장 높이의 비석이 있다.

<皇城平> 距滿浦三十里. 皇帝墓. 在皇城平. 世傳金皇帝墓. 碑石爲之 高可十丈

<강계읍지 : 1830년 찬 1872년 교정>

금나라 초 도읍이라고 전해지는 성곽이 있다는 내용 외에는 위의 기록과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皇帝城> 在伐登鎭被鴨綠江邊. 城郭尙今宛然. 金國初都云. 皇帝墓 在皇城平上一里許 有立碑. 高可十丈.

 

1830년에 편찬되고 1872년에 교정된 강계읍지에도 분명 <동국여지승람>과 똑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런데 호태왕 비가 발견된 근처 아불란사 터에 높이 3~4m 정도 되는 큰 석주가 있다.

필자는 이 석주가 위의 기록과 일치하는 금황제의 비석으로 생각된다.

물론 10장(丈)의 높이가 당시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통상적으로 1장을 3m라 했으니 약 30m 정도인데 비석의 높이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마 10척(尺)의 오기로 본다. 아불란사 터 석주의 높이가 약 10척이고, 호태왕비의 높이는 20척이다.

그렇다면 1872년 이전에 호태왕비는 집안에 없었다는 것을 기록으로 입증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의 주 강역은 분명 산서성 중남부였다.

그런데 태왕묘와 호태왕비가 한참 떨어진 집안에 있었다니 잘 믿기지는 않는지만 그럴 수도 있다.

집안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것으로 추정되는 피라미드가 산재해 있다.

원래 대전 현충원과 같은 신성한 소도와 같은 분묘도시이기 때문에 집안에 태왕의 묘를 세울 수도 있으나

워낙 멀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아주 낮다고 봐야 한다. 분명한 것은 호태왕비는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안 지역은 현재 우리 사학계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분명 고려와 조선의 영토였다. 그

렇다면 고려와 조선의 사서에 이 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지방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서‘조선의 영토는 '동서이천리 남북사천리’라 했듯이 조선의 영토이기도 했는데,

설사 조선의 영토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서간도를 개척할 당시 이렇게 큰 비가 우리 주민에 의해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조선의 사서에도 이 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호태왕비는 원래 집안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의 기록과 다르게 평지에 있는 비석

 

호태왕 비문에는 ‘以甲寅年 九月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갑인년 9월 9일 을유에 산릉에 모시고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한다.’고 조각되어있다. 현재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은 부근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어 학계에서 광개토태왕의 릉으로 비정되었다.

그런데 현 태왕릉은 산릉이 아니고 평지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현 태왕릉은 분명 광개토태왕의 능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태왕이라는 칭호를 쓴 다른 왕이 다른 어느 시대인가 있었거나, 누군가가 비를 옮겨다놓고 명문이 새겨진 벽돌을 능에 갖다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 능이 어느 왕조 누구의 능인지는 필자도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현 집안에 있는 이 호태왕비는 과연 원래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중국 땅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의 기록에 없는 것이고,

또 그 비를 누군가가 옮겼기 때문에 비문에 기록된 산릉과 다른 평지에 비가 서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산서성 최남부 황하변에 있는 영락진(永樂鎭)에 있던 영락궁(永樂宮)에서 옮겨진 것이 아니가 생각된다.

 

만일 옮겼다면, 비의 무게가 37톤이나 되기 때문에 육상으로의 운송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고 아마 강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집안이란 압록강변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아, 아마 고구려의 핵심강역이었던 산서성 황하변 어딘가에 있었던 것을 배를 이용해 옮긴 것으로 추정한다.

참고로 김성겸선생이 해석한 남당유고집 고구려사략에 따르면 ‘태왕을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황산의 위치는 현재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황성현(黃城縣)의 동북쪽에 설치한 영락진이라는 지명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면, 동천왕 때 위나라 관구검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수하 장수를 시켜 추격하니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는데 죽령에 이르러 유유와 밀우장군이 목숨을 바쳐 왕을 지키는 활약이 나온다. 관구검에게 함락된 고구려의 당시 수도 환도성은 현 길림성 집안이 아니라 산서성 남부에 있었다. 집안에서 관구검 기공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집안을 환도산성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이는 조작으로 보인다. 방 30cm 정도 되는 작은 유물 옮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받침대(대석)가 없는 비석도 있는가?

 

무게가 37톤이나 되고, 높이가 6.34m나 되는 거대한 응회암으로 된 비석을 세우려면 당연히 지반침하를 막아야 하고,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거대한 받침대(대석)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1900년 초의 비석은 받침대(대석) 없이 그냥 땅위에 서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받침대도 없는 상태에서 지반침하도 없이 1,500년을 버텼다는 것은 솔직히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재 가로 세로 2.7m x 3.35m 높이 약 20cm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가 있는데, 3부분으로 나뉘어 깨져있다.

그리고 이상한 점은 받침대 가운데 비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한쪽 끝에 비가 있다는 것이다(제원사진참조).

비신이 있던 부분은 현재 약 5cm 가량 침하되어 있고, 대석 전체가 15-20cm 침하되어 있다.

즉 받침석이 비에 비해 너무 작고 형편없이 조잡하고 약하다는 점이다.

불과 약 120년 사이에 그 정도 침하되고 훼손되었다고 보면 된다.


고구려 때 황제비의 받침대(대석)을 이렇게 허술하게 만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 37톤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도록 받침대를 크고 견고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만일 비를 세우고 120년 만에 이렇게 침하되었다면, 분명 후대의 왕 누군가가 제대로 다시 대석을 크고 튼튼하게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현재의 대석은 너무 작고 하중을 못 견딜 정도로 부실하다보니 깨지고 망가진 것이다.

 

관석도 없는 비석이 있나?

 

보통 다른 묘비에는 대부분 관석이 씌어져 있다.

일반인의 묘비에도 반드시 관석를 세우는 법이다.

하물며 제왕의 공적비인데 관석을 안 세웠을 리가 없다.

호태왕비도 상부는 약간 뾰족하게 되어 있고 상부에 가공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관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 관석은 엄청 컸을 것으로 추정되어 인력으로 쉽게 오르내리기에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이건 개인이 아닌 조직이 동원되어 관석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원래 비가 있던 장소에서 관석을 내리고, 비를 배로 옮긴 다음 집안에다 비를 세우고, 다시 관석을 올리기가 사실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관석은 그냥 어딘가에 버리고 비만 달랑 받침대(대석)도 없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를 세우려면 비문의 기록과 같이 산릉(山陵)에 올려야 하는데 비가 워낙 커서 편의상 압록강과 산 사이의 평지에 그냥 세운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태왕 비를 옮겼다는 몇 가지 의문점을 언급했다.

사실 물증은 아직 없으나 가능성은 100% 확실하다.

왜냐하면 아시아를 호령한 대제국 고구리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광개토태왕의 비가 길림성 집안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으며,

또한 고구리의 도읍은 산서성 중부이며 최남단 황하변에는 광개토태왕의 사후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영락궁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왜 비를 원래 장소에서 압록강변 집안으로 옮겼을까를 유추해 보기로 한다.

우선 비를 옮긴 시기는 앞서 언급한 조선의 강계읍지가 교정 발행된 1872년부터 비가 최초 발견된 1876년 사이로 봐야 한다.

일제가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때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이므로, 일제가 주동해 이 비를 옮겼다고 볼 수 없고 청나라가 비를 옮겼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 청나라는 왜 이 비를 옮겼을까?

비가 옮겨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1872~1876년 사이의 청나라는 동치제(1861~1875)와 광서제 초기시대였다.

태평천국의 난과 아편전쟁을 겪은 청나라는 이른바‘동치중흥’이라 불리는 자강(自强)의 기치를 내세운 ‘양무운동(洋務運動)’을 3기로 나누어 추진했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끝내게 되는데,

일면 성공한 듯했으나 보수 사상에서 탈피 못하고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못해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는 못하였다.

여하튼 당시 그러한 자각이 있어 국가의 문물을 재정비하게 되고 서구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운동과정에서 분명‘중국 역사세우기’가 있었을 것이고 그 일환으로 광개토태왕 비가 중국에 의해 옮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예전부터 중국은 이런 역사왜곡을 이미 많이 해왔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사서에 나오는 명나라 영락제 때 실시한 역사상으로 가장 중요한 지명인 갈석산의 위치이동과 요하(遼河)의 위치 변경이다.

 

또한 중국이 비를 옮겼다는 사실은 단재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라는 책에서 비문을 답사한 내용을 적어놓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책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전략) 광개토태왕의 비문 가운데 선비 정벌에 대한 문구가 기재되지 아니하였음은 무슨 까닭인가?

내가 일찍이 호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사람 잉쯔핑(英子平)이란 소년을 만났는데,

그가 필담으로 한 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비가 오랫동안 풀섶 속에 묻혔다가 최근에 잉시(榮禧:만주인)가 이를 발견했는데

그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땅을 침노해 빼앗은 글자는 모두 도부로 쪼아내서 알아볼 수 없게 된 글자가 많고,

그 뒤에 일본인이 이를 차지하여 영업적으로 이 비문을 박아서 파는데

왕왕 글자가 떨어져 나간 곳을 석회로 발라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도리어 생겨나서 진실은 삭제되고 위조한 사실이 첨가된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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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2 18-05-09 21:01
   
히스토리2 18-05-09 21:01
   
저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비교해 보면 좋을 듯 합니다.
6시내고환 18-05-13 19:49
   
예리한 지적이시군요...하긴 비석하나만 달랑있는것도 의심해볼만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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