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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2 18:02
[중국] 한국의 노먼베순 "방우용" 2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777  

4. “풍부한 내과 지식에 임상 경험 훌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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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통치구에서 활동하던 방우용은 19377월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이후 전쟁이 격화하자 스스로 옌안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1939년 여름 시안을 거쳐 옌안에 입성한다. 이즈음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던 최창익과 그를 따르는 의용대원 18명이 옌안으로 들어가려고 시안에 집결한다. 18명 중 한 명이 방우용이었을까. 옌안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조선독립동맹 관련 연구를 해온 염인호 서울시립대교수(국사학)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100% 단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시 최창익을 따랐던 이들 중에는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출신의 젊은이가 많았다. 이미 40대 후반인 방우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염 교수는 당시 조선인들끼리 똘똘 뭉쳐 다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김산도 본인의 인맥을 통해 옌안으로 들어간 경우다. 방우용 역시 혼자서 옌안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의사가 더 필요하다는 베쑨의 다급한 보고서가 작성되던 때, 방우용은 옌안에 가자마자 팔로군군의원 내과주임이 된다. 중국 기록은 방우용이 이미 20여 년간 의료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내과 방면 지식이 특히 풍부했다. 이론적으로 깊이가 있었고 임상 지식은 더 훌륭했다. 짧은 시간 동안 보고 듣고 만져보는 것만으로 대략 정확한 진단을 해낼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옌안혁명기념관에는 이 시기 방우용의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전시돼 있다. 1939년 찍은 팔로군군의 원의무공작자합영이라는 제목의 사진 속에는 흰 가운을 입은 32명의 남녀 의료진이 활짝 웃고 있다. 이름도 나와 있지 않다. 맨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약간은 상기된 듯한 표정의 남자가 방우용으로 보인다. 19459월 사진과 비교하면 살은 조금 더 붙었지만 얼굴 윤곽과 이목구비가 똑같다. 혁명 성지 옌안에 막 들어온 중년의 혁명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옌안에서의 6년을 예상했을까.

방우용이 베쑨과 얼굴을 맞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베쑨이 있던 진차지 해방구와 옌안은 거리가 있다. 게다가 베쑨은 방우용이 옌안으로 들어가고 넉 달여 뒤인 193911월 패혈증으로 숨진다

하지만 방우용과 베쑨의 인연은 다른 식으로 이어진다. 팔로군 총위생부는 베쑨의 희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해 121일 팔로군군의원을 백구은국제화평의원으로 바꾼다. 이듬해 1~4월 백구은국제화평의원은 옌안 유만가구(유씨 집성촌)의 산 중턱으로 자리를 옮긴다. 방우용은 이곳 본원 내과주임이 된다. 환자 치료와 함께 의료 인력을 양성하는 교수 역할까지 한다.

 

5. 마오, 방우용에게 직접 쓴 족자 선물


백구은국제화평의원은 의사와 환자가 얽힌 고통의 공동체였다.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시설은 여전히 열악했다. 흙동굴이 치료실로 쓰였다. 그나마 일반 인민들이 사는 토굴과 달리 안쪽에 회벽을 바르거나 흙벽돌을 쌓아 먼지를 줄였다.


전체 직원은 260명이었다. 초기에 하루 문진 환자는 780명에 달했다. 당시 백구은국제화평의원에서 일했고 그 뒤 중국 군사의학과학원 원장까지 지낸 중국인 의사 서통금은 회억연안화평의원’(연안 화평의원을 추억하며)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처음 침대는 200개가 있었다. 원장은 노지준, 정치위원 유신권, 의무주임 겸 내과주임은 황수측이 맡았는데 나중에 방우용이 내과주임을 맡게 됐다. 환자들은 한 줄로 지은 석요동(흙벽돌을 쌓아 만든 토굴)에서 묵었다


공작인원(의료진)은 모두 산비탈에 있는 토굴 등에서 살았다. 과주임 이상의 기술 간부들은 새로 지은 석요동에 묵도록 했다. 의원이 학교와 가까워 학생들이 실습하는 데 매우 편리했다.” 서통금은 외과에서 일했다. 그의 친구 서근죽은 방우용이 주임을 맡은 내과에서 일했다고 한다. 이후 침대는 250개까지 늘어난다. 노지준, 유신권은 19459월 방우용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이들이다.

 

옌안에서 방우용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어머니 의사로 불렸다. “화평의원은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방우용을 위한 생일 축하연을 오늘 연다.” <해방일보> 1943215일치는 특이하게도 방우용의 50살 생일 기사를 다루고 있다. 당시 마오쩌둥은 방우용에게 직접 쓴 족자를 선물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后知松柏之后凋).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나중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


나이 든 이들은 옌안의 고된 삶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백구은국제화평의원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방우용에게 어울리는 헌사였다. 주더(주덕) 팔로군 총사령관 역시 그에게 의국의인의지구’(醫國醫人醫地球·나라를 치료하고 사람을 치료하고 세상을 치료한다)라는 글을 전했다. 강풍이라는 화가는 방우용에게 금일편작’(今日扁鵲)이라는 그림을 선물했다. 그림에는 중국 전국시대 명의였던 편작이 등장하는데 얼굴은 방우용이고 머리 모양과 복장은 편작을 그렸다. 손에는 약이 든 호리병을 들었다. ‘우리 시대의 편작이라는 극찬이었다.

36일 찾은 옌안 유만가구 산 중턱에는 방우용이 근무했던 백구은국제화평의원 수술실과 치료실로 쓰인 석동굴·흙동굴 수십 개가 남아 있다. 위치를 물었더니 젊은이들은 백구은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이날따라 바람이 거셌다. 밀가루보다 곱게 갈린 흙먼지가 사정없이 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이런 곳에서 수술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유적지 관리는 전혀 되지 않고 있었다. 방우용의 치료실 혹은 숙소로 추정되는 굴은 농기구와 쓰레기가 쌓인 채 버려져 있거나 중국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한씨 성을 가진 30대 여성은 “96살이 된 할아버지 한 분이 당시 상황을 잘 아는데 지난해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방우용은 19459월 일제가 패망하자 드디어 귀국길에 오른다. 나라를 떠난 지 20여 년 만이다. 떠나는 방우용을 환송하며 유만가구 백구은국제화평의원 흙동굴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에서 방우용은 웃지 않았다. 방우용은 고향 언양이 있는 남이 아닌 북으로 국경을 넘는다. 옌안에 있던 조선의용군 등 수백 명도 북으로 들어간다.

 

6. 1956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북에서 숙청된 듯

 

방우용은 1956년 종파사건 당시 숙청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방우용은 귀국 뒤 북한에서 검열국 검열위원을 맡았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연안파라는 틀 안에서 숙청이 진행될 때 방우용도 같이 숙청된 것으로 봐야 한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정병일 연구원(학술교수)

 

북한의 초기국가건설과 연안파 역할로 박사 학위를 받은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정병일 연구원(학술교수)방우용은 1956년 종파사건(조선노동당 8월 전원회의 사건) 당시 숙청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방우용은 귀국 뒤 북한에서 검열국 검열위원을 맡았다.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연안파라는 틀 안에서 숙청이 진행될 때 방우용도 같이 숙청된 것으로 봐야 한다.” 방우용이 검열위원일 때 검열국장은 옌안에서 같이 활동한 최창익이었다. 연안파 최창익은 만주파 김일성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숙청된다. 조선의용군은 한국전쟁 당시 남침부대 주력을 이뤘다


한국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염인호 교수는 방우용이 조선독립동맹 소속인 것은 분명하지만 의사였던 그가 조선의용군 소속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군인이 아닌 의사였던 방우용의 흔적은 북한, 한국, 중국에서 차례차례 지워진다. “연안파에는 만주파와 달리 엘리트 지식인이 많았다. 만주파가 연안파를 숙청한 뒤 북한 역사에서 연안파는 삭제된다. 한국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 재생산 과정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이 거부된다. 중국 역시 혁명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이 아닌 조선인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는 것은 부담이 된다.

”(정병일) 온양 방씨 종친회 쪽에서는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40분이 계시지만 방우용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종친회 쪽은 독립운동을 신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나 모두 훌륭하신 분들이었는데 빨갱이로 몰리고 연좌제가 적용된 탓에 친척들이 연결이 안 된다고 했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방병건씨는 광복군 중심으로 사료가 발굴되다보니 이름이 알려진 몇 사람한테만 포커스가 맞춰지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중국 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연구의 대가였던 최용수 중국공산당 중앙당교 교수(2007년 작고)20057월 중국 베이징 집에서 만났다. 당시 최 교수는 좌익계와 민족주의계 분열의 아픈 기억을 합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협력하고 단결했던 역사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선의 닥터 노먼 베쑨방우용은 여전히 옌안에 묶여 있었다.


                                                                                        한겨레 21 [2013.03.18 제952호]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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