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토목학회는 ‘역사적인 토목 구조물 상’의 수상 대상으로 수원 화성을 선정했다. 이 상은 완성된 지 50년이 넘고, 토목공학 역사상 특별한 독창성과 의미를 갖고 있는 구조물에만 수상한다. 미국토목학회는 수원 화성의 선정 이유에 대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설계로 쌓은 성곽임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 화성은 당시 건축물 중 가장 혁신적인 사례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우선 화성은 그 이전 시대에 조성된 우리나라 성곽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식의 성곽으로서, 동서양 건축의 융합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성곽은 평상시에 거주하는 읍성과 전시에 피난처로 삼는 산성을 기능상 분리했다. 그런데 화성은 피난처로서의 산성을 따로 두지 않고 평상시 거주하는 읍성에다 방어력을 강화시킨 개념이다.
이에 따라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조선의 정통 양식을 보여주지만, 축조에 사용된 건설 장비나 방어시설 등은 서양의 것을 응용하고 있다. 이는 그 당시에 발달한 실학사상이 화성의 축조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군사지휘소 역할을 하는 서장대를 비롯해 외부와의 통신 시설인 봉수대, 깃발을 흔들거나 쇠뇌를 쏘는 노대 등 화성에는 다양한 군사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속이 비었다는 뜻의 공심돈은 비상시 성곽 주위의 적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망루로서 화성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처럼 다양한 군사 및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은 우리나라에서 화성이 유일하다.
수원 화성은 다른 성에 비해 성벽의 높이가 4m 정도 낮은데, 여기에도 과학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임진왜란 등 이전의 전쟁에서는 주로 병사들이 성을 타고 넘어 점령하는 방식이었지만, 18세기에는 화포로 성벽을 쏴서 무너뜨리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즉, 화포의 발달로 성벽이 높으면 오히려 대포의 표적이 되어 무너지기 쉽다는 점을 고려한 설계였다. 성벽의 높이가 낮으면 대포를 맞더라도 타격이 그리 크지 않아 성을 사수하는 데 유리하다.
화성은 성벽 재료도 기존의 성곽과 차이가 있다. 기존 성의 경우 자연석이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한 데 비해 화성에는 화강암과 더불어 주로 벽돌이 많이 사용되었다. 화강암은 강도는 강하지만 돌과 돌의 이음새가 딱 들어맞지 않아 화포 공격시 쉽게 허물어지지만, 벽돌과 석회로 벽을 쌓고 흙을 채우면 화포의 강한 공격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정조의 명령에 따라 화성을 처음 설계할 당시 완공까지 약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화성은 착공된 지 34개월 만인 1796년 10월에 낙성연을 치렀다. 중간에 더위로 공사를 중단한 6개월을 제외하면 실제로는 28개월 만에 완공된 셈이다.
이처럼 예상 공사 기간의 1/5로 단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실학자 정약용이 고안한 혁신적인 발명품 덕분이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의 기중기 같은 용도로 사용한 거중기다.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드는 데 사용한 기계인데, 고정도르래뿐만 아니라 움직도르래를 도입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정도르래의 경우 물건의 중량에 해당하는 힘을 주어야만 들어 올릴 수 있지만, 움직도르래는 1개씩 늘어날 때마다 필요한 힘이 절반씩 줄어든다. 따라서 40근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거중기 한 대가 2만5000근의 무게를 움직일 수 있었다.
또 지금의 크레인처럼 무거운 돌을 원하는 위치로 옮길 수 있는 녹로를 비롯해 바퀴 앞과 뒤로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수레로서, 캐고 다듬은 돌을 실고 수렛길을 통해 성을 쌓는 곳으로 옮기는 유형거도 정약용이 설계한 발명품이다. 화성 축조에는 거중기 11량, 녹로 2좌, 유형거 11량이 투입됐다.
조선시대 때만 해도 화성 같은 나라의 큰 공역을 할 때 백성들을 모아서 강제로 일을 시켰다. 하지만 화성을 축조할 때에는 부역 노동 대신 기술자와 백성들에게 일한 만큼 돈을 주는 노임제를 실시했으며, 공사에 사용되는 돌도 크기에 따라 차이를 둬 돈을 지불했다. 이 같은 노임제는 장인들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혁신적인 역할을 했다.
화성 축조에는 석공 642명, 목수 335명 등 1800명의 장인이 동원되었다. 공사비용은 80여만 냥, 쌀 1500석, 석재 20만1400덩이, 일반목재 2만6200주, 기와 53만장, 벽돌 69만5000장이 소요됐다. 당시의 물가 및 인구 등을 고려해 추정할 경우 화성 축조에 소요된 총 비용은 현재 기준으로 약 25조원에 달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처럼 공사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화성을 지은 후 1801년에 간행된 ‘화성성역의궤’ 덕분이다. 10권 8책으로 간행된 이 책에는 공사 일정 및 사용 자재 수량 등을 비롯해 감독관 및 기술자의 인적 사항과 작업 내역, 공사 수행 중에 오간 공문서, 전체 공사비용의 수입 및 지출내역 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즉, 수원 화성은 건축실명제가 실시된 세계 최초의 건물이기도 하다.
수원 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이 역시 화성성역의궤의 상세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