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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2 21:23
[한국사] 순종의 즉위와 논란(양위인가 대리청정인가?)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897  

명성황후가 낳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성년이 넘어서도 생존한 이로, 귀한 아들이지만 대신 건강은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러시아 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고 커피에 아편을 넣어 올렸는데 맛이 이상함을 느낀 고종은 바로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다량을 복용하여 순종의 이가 모두 상하였다. 그 탓에 이가 빠져 틀니를 끼고 살았으며 커피를 마신 며칠동안은 혈변을 누는 등 몸살을 크게 앓았다고 한다. 이 이후 약간 어벙해 보이는 외모까지 겹쳐 순종이 바보가 되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고 한다. 


순종.jpg


그 결과 전국적으로 순종의 입지는 그야말로 공기가 되었지만 당시 후계자로 삼을 만큼 나이가 차고 능력있는 자손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버지 고종은 후계자를 교체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고종이 자신의 퇴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또 그 부작용 때문인지 순종에겐 직계 자손이 없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성불구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의 성기능이 정상이었다는 증언도 있어서 어머니의 지나친 간섭으로 인한 심인성 발기부전을 의심하기도 한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보낸 것이 일본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여 결국 고종이 황태자에게 국정의 섭정을 맡긴다는 조칙을 내렸는데, 일본은 이를 이용하여 순종의 즉위식을 강행하였다. 하지만 말이 황제였을 뿐 실권은 일본을 등에 업은 이완용과 송병준에게 있었고, 이완용과 송병준 이 두 사람의 주도하에 일본에 국권을 넘겨주는 일이 착착 진행되어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고종이 퇴위하면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로 양위식장에는 고종과 순종 모두 불참해 신원불명의 두 사람(아마도 내관으로 추정)이 이들의 대역을 맡는 촌극이 벌어졌다.

경운궁 중화전에서 즉위식.jpg
                        중화전에서 즉위 혹은 대리청정 하는 순종                                


“황태자가 정사를 대리하게 된 것을 진하(陳賀)하는 의식을 규례대로 중화전(中和殿)에 친림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황태자가 예를 행하는 의절도 규례대로 마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권정례(權停例)로 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44년(1907년, 대한 광무 11년) 7월 19일)
권정례는 '황제가 참석해야 할 조정의 축하 의식에 황제가 나오지 아니한 채 임시방편으로 거행하던 식(式)'이다. 

1907년 7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도 "상오 칠시에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하였다더라."고 보도했고, 이토 히로부미도 같은 내용의 외교전보를 일본 외무차관에게 보냈다(통감부 전보 번호 제76호 : 今朝七時宮中中和殿ニ於テ權停禮ヲ施行). 그러나 누가 대신했는지를 알려주는 공식 기록은 없다. 대한매일신보도 1907년 7월 19일(광무 11년 금요일)에 호외를 발행해서 "상오 8시에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께 대리를 명하시옵고 조칙을 반포하였다."는 소식을 전했다.고종이 사용한 "대리"라는 단어에는, 황태자에게 권력은 주지만 제위는 자신이 계속 갖고 있다는, 고종 나름의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었다. 

고종 전에 가장 가까운 대리청정은 영조 51년(1775)에 있었다. 영조실록 1775년 12월 7일(양력)자에 보면, 만약 대신들이 계속해서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할 경우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따라서 조선왕조에서의 대리청정은 양위가 아니었고, 황태자도 이런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읽었다. 그래서 대리청정 조칙을 취소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토 히로부미는 식이 끝난 후 일본 외무 차관과 총리대신에게 '한제 양위식 거행 건(韓帝讓位式 擧行 件)'(왕전 往電 제76호)이라는 제목으로 외교 전보를 보냈다. 덕수궁 중화전에서 권정례로 양위식을 거행했다는 내용이었다.그런데 일본 관료들 사이에서 대리로 한 이 대리청정 의식을 양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많았는지, 외무장관은 '한국 황제 양위 확인(韓國皇帝 讓位確認) 및 양위식(讓位式)에 관한 件'(내전 來電 제846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 정부의 이사관과 부이사관들에게 내부 문건을 회람시킨다. '대리청정 조칙은 양위의 의미가 명백하다'는 내용이었다.양위식이라면 고종의 대리청정 선언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선언이 되고, 순종이 권정례로 어좌에 앉아 하례를 받는 의식은 즉위식이 된다. 그런데 순종은 약 40일 후인 8월 27일에 즉위식을 했다. 순종은 일본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상황들이 발생했고, 이런 모순은 즉위식이 거행된 8월 27일까지 계속된다. 만약 일본 측 논리대로라면 순종은 즉위식을 두 번이나 한 셈이 된다.고종실록은 7월 18일의 "권정례로 거행하라"는 황명이 마지막 기사다. 영조 때도 세손인 정조가 대리청정을 한 적이 있지만 영조실록은 유지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대리청정임을 밝혔는데도 고종실록을 끝내고 순종실록을 시작했으니 전례에 맞지 않는 모순이었다.신하들이 순종에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것도 7월 19일부터가 아니라 7월 22일부터다. 고종을 '태황제'로 봉존하는 절차를 밟아야 순종을 황제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그러진 절차를 거꾸로 끼워 맞추는 형국이 계속되었다. 먼저 이완용이 대리청정이 아니라 양위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런 와중에서도 친일대신들은 순종을 확실한 황제로 만드는 작업을 계속 추진한다. 
다음 날인 7월 23일에는 윤비도 황후로 진봉(進封)했다. 그런데도 순종은 고종 때 사용하던 광무를 계속 사용했다. 일본과 친일 대신들은 고종 시대의 연호 사용이 훗날 역사적 약점이 된다고 생각하고, 새 연호를 사용하게 했다.


순종 시대의 연호인 '융희'는 이런 절차를 거친 후 1907년 8월 3일부터 순종실록에 사용되었다.일본과 친일파 대신들은 '일그러진 절차 끼워 맞추기'의 마지막 절차인 즉위식 날짜를 8월 27일로 정했다. 그리고 장소는 대리청정 의식을 권정례로 거행했던 덕수궁 중화전이 아니라 외국 외교 사절들을 접견하는 장소인 돈덕전으로 정했다.

2.jpg
이태진 교수(현 국사편찬위원장)도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1907년 7월 20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내관(환관)들의 대역으로 치루어진 양위식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돈덕전(惇德殿)에 나아가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축하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


"아! 짐이 깊이 생각해보건대 임금 노릇하는 것만 어려울 뿐 아니라 신하 노릇하기도 어렵다. 이완용(李完用)은 총리(總理)이니, 너의 부하들을 통솔하고 경계하여 그대의 임금을 인도하되, 조금이라도 바르지 않게 인도하지 말라.
(순종실록 즉위년. 1907 대한 융희 1년 8월 27일)

순종은 이완용 외에 각부 대신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나라만 생각하라"고 당부한 후,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는 황제의 상징인 대원수복으로 갈아 입고 어좌에 앉았다.


돈덕전에 나아가 즉위한 뒤, 진하(進賀)를 받고 조문(詔文)을 반포하였다.대례복을 갖추고 나아가 탑(평어좌)에 앉았다. 총리대신(이완용)이 표문을 둔 책상 앞에 나아가 하례 표문을 낭독하였고 끝나자 연주가 시작되었다. 

대원수 정복으로 갈아입고 나아가 어좌에 앉자 연주가 끝났다.통감(이토 히로부미)이 하례사를 낭독하고 외국 영사관 총대표가 하례사를 낭독하고 총리대신이 탑전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고 서자 애국가가 연주되었다. 애국가 연주가 끝나고 총리대신이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만세 삼창을 하자 문무백관도 일제히 따라서 삼창을 하였다.(일성록 1907년 8월 27일)

1.jpg
순종이 즉위했다는 돈덕전 


'대리청정'과 '대리 양위'를 앞세운 고종과 순종의 '항거'는 이렇게 끝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시대는 이렇게 억지스럽게 시작되었다.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어 입법권, 관리임명권, 경찰권 등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군대를 해산해 서울에서 대거 해산 군인들과 일본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순종황제와_관료_들_ohyh45.jpg
순종과 각부 대신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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