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에 상식적 판단을 해야죠
평북에서 함남까지 천리에 걸쳐 성을 쌓았으면
그게 유적으로 남아서 설명이 돼야 하고
그게 지형으로서 설명이 돼야 하고
그게 사서의 기록과 부합이 돼야죠
1) 유적 부실 ㅡ 아무리 쉴드 쳐도 후달릴 정도로 부실
2) 지형으로 보면 그 험준한 개마고원과 산맥을 따라서 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로질러서 쌓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쌓으려면 엄청난 국고가 소진되는 일인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3) 소위 천리장성은 11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걸친 것인데 대체 무엇으로부터 방비하기 위해? 거란과 여진을 방비하기 위해서라는데 여진은 이따금씩 아주 작은 소요만 일으켰을 뿐 고려가 국고를 대거 들여 엄청난 규모의 방어라인을 구축할 만큼 위협이 되지도 그들 인구가 많지도 그들이 통일돼 있지도 않았음. 그렇다면 주적은 거란인데 학계가 비정한 천리장성 라인은 거란 쪽이 아니라 동쪽을 향하여 놓여 있음. 이게 뭐여?
4) 고려사에 천리장성이라는 말이 없다 천리 장성이니 천리에 걸쳐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면 알려달라
5) 장성은 규모가 큰 산성 등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우리가 아는 만리장성식의 성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고려사, 삼국사기에서 장성을 찾아보면 그런 장성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 알 수 있습니다
고려장성:
1. (고려사 지리지 내용을 문헌에도 맞지 않다. ""길이가 천여 리(里),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尺)의 석축이었다."
2. 위 문헌을 증명할 유적도(장성)도 없다.
3. 고려사 지리지의 강역과도 전혀 맞지 않다.
"그 사방 경계[四履]는, 서북은 당(唐) 이래로 압록(鴨綠)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무릇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섰다."
4....
지도 내용
이 지도는 제작자와 제작년도가 모두 미상이지만 숙종 38년(1712)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는 그려져 있으나 조선 정조 11년(1787)에 세운 장진부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조선 영조대에 그려진 지도로 추정된다. 여진족의 첫 수도였던 심양(瀋陽) 즉 성경(盛京)지역에 대한 지도 및 지리정보는 정조 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수입하기 이전까지는 남구만의 성경지도가 토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는 남구만의 성경지도를 모본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윤관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9성의 선춘령비(先春嶺碑)가 두만강 이북에 그려져 있고, 고려의 북방경계선이 이곳까지 미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두만강과 분계강(分界江)을 따로 그려, 백두산 정계비에서 언급한 토문강을 분계강으로 해석하고 있다. 평양에서 의주와 성경(심양)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노정(路程)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까지 나타나 있다. 지도 왼쪽 위에는 만주 지방의 역사가, 오른쪽 아래에는 조선 국토 인식의 기본틀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