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5-15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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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 전투와 일본의 고민 일본이 다이카 개신에 한창일 때, 한반도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신라에 비해 한 수 앞선 국방력을 지닌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기습적인 양공작전을 견디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이 때가 서기 660년, 비록 다이카 개신으로 소가 씨 세력을 일축하긴 하였지만 백제개 도래인의 세력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소가 씨 일문에 해당하는 멸문지화였을 뿐이다. 더구나 일본 천황가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 할만큼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당부분을 백제의 힘에 의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버팀목이었던 백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런 것이다.
하지만 백제 부흥운동과 발 맞추어, 내에 있던 백제계 도래인의 출병 요구는 거세어 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일본에 망명하였던 백제 왕자 부여풍이 부흥군에 가담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성공할 듯 보이기도 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흑치상지는 한 때 3만명의 백제 군대를 수습하여 당의 소정방을 격퇴하고 임존성등을 비롯한 200여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복신은 주로 백제 부흥군과 일본천황가 사이에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국 ‘칠지도’에서 언급했듯이 백제의 후국(侯國)이던 야마토왜(大和倭) 왕 사이메이(齊明)는 백제왕족 복신(福信)의 요청으로 백제에 백제복국군(百濟復國軍)을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백제를 부활 시킬 것 처럼 보였던 부흥군은 차츰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당군은 총 병력 4만에 이르는 대 병을 증원 파병하였으며, 흑치상지는 당나라 장군 유인궤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라와 당 연합군이 고구려 공략에 집중하는 동안 복신은 임존성과 주류성, 부성과 웅진 일대를 회복 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백제의 부흥운동은 다소 일관성 없이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나당 연합군이 백제부흥군 정벌에 주력할 경우 전쟁의 승산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사이메이 천황은 전쟁을 준비하던 도중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신의 요청과 백제계 도래인의 압력으로 인해 일본은 더이상 파병을 미룰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이메이에 이어 천황에 오른 텐지(天智)는 상복을 입은 채로 군대를 지휘하여야만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일본군선은 1천여척에 이른다고 할 만큼 대단한 기세였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2만 7천여명의 병력과 4백척의 군함이 전부였다.
일본군은 금강(錦江)하류 유역인 白沙(백사)일대에 정박하게 된다. 백촌강은 금강 하류지역의 일본식 명칭이다. 그리고 백제 부흥군은 수가 적은 일본군을 보호하기 위해 주력 정기병을 보내어 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백제 부흥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백제 부흥군의 주력이 빠져 나간 것을 알게 된 신라군은, 백제 본진을 쳐 부수고 주류성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대부분은 백제 부흥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에 집결한 것으로 보인다. 임존성에서는 신라와 밀고 당기는 접전이 몇번씩이나 계속되었지만, 이미 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수적 열세를 극복할만큼 사기도 높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해외파병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며, 백제 땅에서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군인은 거의 없었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일본내에서 백제계 도래인의 입지가 약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일본내에서도 한반도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고 자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마침내 '왜'라는 이름을 버리고 '日本'이라는 독자적인 국호를 정식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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