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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5 21:38
[중국] 조공의 진짜 콤플렉스 漢族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355  

조공의 진짜 콤플렉스 漢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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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번공주로 이민족에게 팔려가는 중국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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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유방은 기원전 202년 재위 5년에 비로소 황제라 칭하고 노관을 연(燕)왕으로 봉한다. 그런데 기원전 201년 노관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방은 흉노가 갓 탄생한 한나라에 큰 골칫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40만 명의 대군을 동원, 흉노의 시조인 묵특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174)를 공격한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 유방은 백등산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난 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당시 흉노와 한이 맺은 화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그에 의하면 한은 거의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첫째, 한의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이 관례는 문제(文帝, 기원전 179∼157) 때까지 계속되었다). 
둘째, 한이 매년 술 비단 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셋째, 한과 흉노가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어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넷째,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이 합의는 기원전 198년 가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함으로써 발효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양 조정(朝廷)에 왕위 변동이 있을 때마다 새로운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했다는 점이다. 또 중국이 흉노에 내는 조공 액수도 한과 흉노 사이의 역학 관계에 따라 수시로 바뀌었는데, 대체로 한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났다. 기원전 192년부터 135년까지 적어도 아홉 차례에 걸쳐 한이 흉노에 대한 조공액을 인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한이 흉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을 흉노의 속국으로 만든 묵특선우는 흉노의 전성시대를 열었으며 우리 한민족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당시 동호(東胡 고조선 외에 부여, 예맥, 진번, 임둔, 진국 등 다양한 국가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가 매우 강성하였는데, 동호는 흉노를 경멸하며 묵특의 천리마와 연지(흉노의 후비(后妃)의 칭호)를 요구했다. 부하들이 동호의 무례함을 나무라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하자 묵특은 ‘인접한 나라 사이에 어찌 말 한 마리와 여자를 아끼겠는가’라며 순순히 동호의 의견을 따랐다.

당시 두 나라 사이에는 1000여리의 황무지가 펼쳐 있었는데, 동호가 이를 갖겠다고 나섰다. 신하들은 버려진 땅이므로 주어도 괜찮다고 했지만 묵특은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며 동호를 습격하여 왕을 살해하고 백성과 가축을 노획했다. 
패전한 동호를 대신하여 흉노는 유목기마민족의 패자로 떠올랐고, 묵특은 자신의 치세 동안 대대적인 정복활동을 벌여 아시아 초원에 있는 거의 모든 민족을 복속시켰다. 
한족이 이른바 ‘흉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은 기원전 141년 한나라 무제(武帝)가 즉위하면서부터다.

괄괄한 성미의 무제는 고조 유방 이후 60 년간 지속된 굴욕적인 대(對)흉노 유화정책을 버리고 강경 대응에 나섰다. 무제는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위청과 곽거병 등으로 하여금 기병대를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10년간의 한·흉노 전쟁으로 한나라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흉노의 피해는 더욱 컸다. 무제가 죽은 후 한나라와 흉노는 대략 300년에 걸쳐 공존하며 평화롭게 지낸다

후한

후한(後漢, 25-220)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25-57)는 중국 남부와 월남의 북부를 다시 정복했다. 기원전 209년에 묵특의 지휘아래 유목제국을 수립한지 250여년이 지난 AD 47년, 흉노제국에 내란이 일어나 몽골초원 전체가 산산조각이 났다. 덕분에 요서 초원지대의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는 제일 먼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실호기, 후한 명제(明帝, 57-75)는 전한 무제를 본받아 흉노를 다시 한번 통제해 보려 했다. 
일찍이 AD 48년에 흉노제국이 남과 북으로 양분되자, 조정관료인 장궁(臧宮)은 흉노의 약세를 틈타 “고구려,” 오환, 및 선비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자고 주장했었다. 1 당시 광무제는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신조를 강하게 피력했다. 49년, 광무제는 푸짐한 선물과 국경무역을 제공해 선비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명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58년 이후에 후한 조정이 선비 부족장들에게 정기적으로 갖다 바친 금액은 년간 2억 7000만냥에 달했는데, 그 규모는 같은 기간 동안 남흉노에게 바친 것의 세배에 달하였다. 

북위(남북조)

북위는,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 받은 2원적(二元的)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됐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만주의 여러 부족들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 해 가장 유목민적이었던 탁발 선비는, 전연(前燕)이 만들어낸 이원 통치 체제의 장점을 살려, 처음으로 북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이민족 왕조를 수립했다.

1. 모용 선비족은 탁발의 북위(386-534)조정 내에 주요 지배귀족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변경지대의 한족들은 어느 때고 초원 혹은 삼림지대 출신의 이민족 부족 중 제일 강하다고 생각되는 편에 붙었다. 탁발 선비의 언어는 아마도 거란어의 직계 조어(祖語)이었을 것이다.
2 . 부족 출신 군대 덕에, 보급이 잘되는 기병대를 보유했던 북위는 초원지대 깊숙히 원정군을 보낼 수 있었다. 거의 모든 부족들은 부대 단위로 조직되어, 할당된 지역에 거주하면서, 국경수비 공동체의 구성원 역할을 하였다.
3. 부족민과 군사에 관련된 문제는 각 부족 고유의 전통에 따라 처리되었다 정복된 한족 거주지역은 한족 관료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고위직은 대부분 선비 귀족들이 차지했다. 전통적으로, 한족들의 이상은 능력주의 사회인데 반해, 유목민족들은 세습적 귀족제도를 고수했다. 북중국 귀족가문들은 대부분 한족이 아닌 이민족 출신이었으며, 이들은 정복왕조 중앙정부의 고위직을 대부분 독차지하였다. 
중국대륙 북부의 선비족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면, 시베리아와 몽골초원 유목민들의 초기 예술적 전통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뿐만 아니라, 당시 선비족들이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위치했던 옛 박트리아와 교류가 있었고, 로마 통치하의 중동과 교역을 했으며, 초기적 불상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와도 접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낯익은 사람들은, 섬서성에서 발굴된 (5호16국 시대) 갑옷을 입은 말 모양의 토기를 보고, 고구려 토기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특히 호흐호트(呼和浩特)에서 출토된(맨손으로 빚어 만든) 말과 마부의 토기는 신라 토기로 오인될 정도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모양의 토기에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복한 중국 땅을 중국식 관료제도로 다스려 다른 유목민족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중심의 유목민 전통을 바탕으로 부족의 정예들로 군대를 조직 해서, 정복한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시종일관 유지할 뿐 아니라, 쳐들어 올 가능성이 있는 다른 유목민족들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모용선비가 시작하고, 탁발선비가 이어받은 2원적 국가조직은 요(遼), 금(金), 청(淸) 같은 정복왕조의 귀감이 되었다. 만주는 거의 모든 정복왕조를 낳고 키운 산실이며 요람이었다. Barfield(1989: 105)는 “한(漢)이 멸망하고 첫 번째 만주족 정복국가(탁발북위)가 등장하기까지는 150년이 걸렸고, 당이 망하고 나서는 75년이 걸렸으나, 명(明)이 망할 때는 거의 동시에 만주족 정복왕조가 들어섰다.

한족왕조가 망하고 나서 정복왕조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은 점점 단축되었지만, 그 방식은 똑같았다.”고 말한다.

요나라

거란(요나라)은 송과 적대적인 대치상태를 지속하다가, 결국 1005년에 송나라가 매년 20만 필의 비단과 10만 량의 은을 거란에게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다.
1005년 조약과 1042년에 개정된 조약은 근 백 년간 평화를 지속시켰다.
송나라 조정은 열등한 지위를 수용하고, 계속 “조공”을 바쳤다.
송나라의 인구는 약 8천만에 달했으나, 티벳으로부터 몽골의 초원지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북방 전 지역에는 대략 5백만 명 정도가 살았다

금나라

북송은 금(金)나라에 의해 멸망했고
남송은 몽골제국(원元)에 의해 멸망했다.

원나라

몽고족은 제1신분으로서 통치하고 색목인(위구르인, 아랍인등)이 제 2신분이었고 다음은 중원땅에 살았던 한인이(거란, 선비족) 3신분을 차지하고 끝까지 원의 지배에 항쟁했던 남송인이(한족) 4신분으로 특히 차별을 받으며 노예 계층으로 분류했다. 원은 몽골어를 공식언어로 지정했고, 과거제를 폐지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한인의 정치진출을 막았다. 
한인들의 역할이 축소된 것은 이미 칭키스칸이 세계제국을 이룩하였기 때문에 아랍인이나 위구르인이 중국에 많이 진출하여 재정과 무역 등의 실무를 맡아서 한 것도 이유로 들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한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통해 그들의 반발을 막으려고 했다. 
(당시 한족들은 사고파는 상품 노예였고 공노제가 일반화된 전형적 착취 노예사회가 다름아닌 서토 정복왕조 원 지배기였음)

청나라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다.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다. 이런 점에서 팔기는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군대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1%에 불과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때를 보인 것 이다』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인가?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다                                  


                                                                                                                                   홍원탁(서울대 교수)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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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시러 18-05-15 21:57
   
선비족 북위의 도성 : 대동 大同 (다퉁시 윈깡석굴이 유명),  대 代 ~ 상곡(장가구) 의 사이

이른바 산해경에서 언급한
 大澤方百里,羣鳥所生及所解,在鴈門北。鴈門山,鴈出其閒。在高柳北。高柳在代北。  東胡在大澤東。
대택 동쪽에 있다던 동호東胡 의 위치와 정확히 일치.
촐라롱콘 18-05-15 23:09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때를 보인 것 이다』]]...???
.
.
0.03%는 다소 지나친 수치상의 오류라고 봅니다...^^

당시 명말~청초 당시의 명나라 인구는 최대 1억 5천만
1억 5천만의 1%는 150만,  0.1%는 15만이고....
1억 5천만의 0.03%라면 고작 4만 5천에 불과하다는 논리인데....

0.3%의 오류가 아닌가 합니다. 0.3%라면 1억 5천만 대비 45만에 해당하기 때문에....
만주족 가운데 여진족 인구 숫자와는 어느정도 비슷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만주족의 범위에는 여진족 뿐만 아니라,
청의 중원진출 이전에 후금~청에 복속된 여진족 북방의 퉁구스계 소수민족들
역시 청의 중원진출 이전에 후금~청에 복속된 만주-내몽골 일대의 몽골계 부족들
요동에 거주했던 한족들... 심지어 후금~청에 투항한 조선인들까지....포함되기 때문에

만주족 인구라고 한다면....당시 명나라 인구대비 최소 1% 이상의 규모는 되었습니다.
     
히스토리2 18-05-16 06:45
   
만,몽 그리고 협력한 한족을 고려할 때, 1%가 맞다고 생각이 듭니다. 수정했습니다
뭐꼬이떡밥 18-05-16 02:20
   
우리만 받아먹은게 읍써...
     
아스카라스 18-05-16 11:20
   
거란 요나라 금나라 여진족 그리고 왜한테 받아 온 조공은 받아먹은 게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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