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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7 15:10
[한국사] 고구려의 평양은 요양이다(신동아 기사) -1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830  

중국이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지금의 중국 땅에서 일어났고 관련 유적과 자료가 중국에 있으니 우리는 발만 동동 구른다. 이런 답답함을 타개하기 위해 몇몇 학자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정사(正史)인 ‘요사(遼史)’를 완역했다. ‘요사’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와 함께 제3자의 관점에서 우리 고대사를 알려주는 사서로 꼽혀왔다. 이 때문에 여러 학자가 부분 번역했지만 완역되기는 처음이다. 

번역 기획은 복기대 뇌교육대학원 교수(고고학)가 했다. 복 교수는 중국 유학 시절 ‘요사’와 ‘금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만주지역을 답사해 사료와 맞춰보며 ‘요사’ ‘금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귀국 후 그는 스승인 윤내현 단국대 교수와 ‘요사’ 전문가인 김위현 명지대 교수와 협의한 뒤 교육인적자원부를 설득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밀어붙일 때라 교육부도 우리 국사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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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금사’ 인정 안 하는 중국 

그리하여 ‘역사 기초자료 번역 및 연구 사업’을 입안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을 통해 번역을 지원했다. 단국대 이상훈 교수와 이성규 교수가 실무를 맡아 출판을 하고 번역은 김위현 교수가 제자 김한기 변은숙 씨 등과 함께 했다. 김 교수는 번역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어 세밀히 고증했다.  

중국은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가 이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했다. 이렇게 25개 역사서가 만들어졌다(통칭 ‘25사’). 그런데 선비족이 세운 북위 등 5호16국 시대의 왕조와 요, 금, 몽골족의 원(元), 여진의 후예인 만족(滿族)이 건국한 청(淸)은 한족(漢族)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족이 겁낸 적국인데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했기에 다음 왕조는 그들의 역사서를 제작했다. 그런데 ‘요사’와 ‘금사’를 제작한 것은 한족이 아닌 몽골족의 원나라였다. 두 사서만 비(非)한족이 만든 것이다(반면 ‘원사’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가 만들었다).

이 때문에 중국 역사학계는 두 사서가 부정확하다며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에도 전해져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두 사서는 원나라 말기 몽골인인 탈탈(脫脫)의 주도로 급하게 제작됐기에 약간의 오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를 이유로 두 사서의 기록을 무시한다. 그러나 제3자인 우리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요는 고려와 세 번 전쟁을 했고,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역사를 잘 알고 있었다. 적국 고려의 선조인 고구려와 고조선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으니 이들의 기록은 더욱 객관성을 갖는다. 학자들은 이에 착안해 동북공정에 맞설 객관적 사료 확보를 위해 1월 중순 ‘요사’ 번역본을 내놓았다. ‘금사’는 내년 말 완역본을 낼 예정이다.  

‘요사’에서 주목할 부분은 요나라 지리를 정리한 ‘지리지’다. 그중에서도 요나라 동쪽 지방인 ‘동경도’ 부분이다. 요나라는 동경 서경 남경 상경 중경의 오경(五京) 제도를 갖고 있었다. 요나라는 동경도(東京道)의 중심인 동경을 지금의 요령성 요양(遼陽)에 뒀다. 그때도 요양은 요양으로 불렸다.  

‘요사’ 지리지 동경도 편은 요양이 ‘본래 조선의 땅이었다’는 글귀로 시작한다. 조선은 고조선을 가리킨다. 우리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이 북한의 평양에 있었다고 해놓았는데 ‘요사’에선 도읍지가 요양에 있었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한4군은 만주에 있었다 

고조선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었다. 지리지는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옥에서 풀어줘 그가 조선으로 가자 그 땅에 책봉했다’고 밝혀놓았으니 조선은 곧 기자조선이다. 8조법금은 기자가 만들었는데, 지리지도 ‘그(기자)가 8조법금을 만들었다’고 함으로써 기자조선이 요양에 도읍했음을 재확인했다.  

지리지는 기자조선이 40여 대 왕을 이어오다 중국 연(燕)나라 때 매우 약해져 연나라에 속한 ‘진번’과 ‘조선’이 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나라는 중국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의 연은 진시황의 진(秦)과 다투다 패배한 ‘전국 7웅’ 중의 하나인 연이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은 진시황이 죽자 곧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다 유방이 승리해 한(漢, 서기전 206~서기 220)나라가 등장했다. 

황제가 된 유방(한고조)은 고향 친구이자 부하 무장으로 공을 세운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하고 제후로 삼았다. 유방은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면서도 그들이 한나라 왕실을 넘보지 않을까 의심했다. 한나라군 총사령관으로 항우 군을 궤멸시킨 1등 공신 한신을 특히 의심해, 몇 가지 혐의를 씌워 그의 허리를 잘라 죽였다(요참형·腰斬刑). 그때 한신이 원한에 사무쳐 남긴 말이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한신이 죽임을 당하자 책사 장량은 재빨리 낙향했다. 장량이 은둔한 곳이 오늘날 유명 관광지가 된 장가계(張家界)다. 유방이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해가자 연왕인 노관도 불안을 느껴 흉노의 땅으로 도망갔다. 노관 밑에서 장수를 하던 이가 위만인데, 상사가 달아나자 그도 위기를 느껴 요양으로 도주했다. 지리지는 ‘그때 요양 일대는 빈 땅이었는데 위만이 들어와 왕을 했다’고 밝혀놓았다. 위만조선이 일어난 것이다. 

한나라와 위만조선은 당연히 사이가 나빴다. 이 때문에 유방의 손자로 7대 황제가 된 유철(한무제)이 해륙(海陸)으로 맹공격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을 세웠다. 지리지도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그 땅을 진번 임둔 낙랑 현도의 4군(郡)으로 삼았다고 밝혀놓았다. 그렇다면 한4군은 요양을 중심으로 한 만주에 있었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한4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배웠다 

우리는 요령성 땅을 세로로 가르는 요하(遼河)를 기준으로 동쪽을 ‘요동(遼東)’, 서쪽을 ‘요서(遼西)’로 부른다. 요령성을 관통하는 강을 요하로 부르게 된 것은 거란이 요나라를 세운 다음이다. 요나라가 있기 전 이 강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대의 기록은 중국인만 남겨놓았는데, 요양은 중국인의 역사 무대인 중원(中原)에서 너무 먼 곳이기에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요하의 ‘요(遼)’는 ‘멀 요’자다. 한족은 요하를 ‘멀리 있는 강’으로만 이해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을 ‘요하’라고 불렀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로 통칭됐다.  

산해관 동쪽으로 난하, 대릉하, 그리고 지금의 요하가 있다. 진나라 때의 중국인들은 난하를 요하로 불렀으니 난하 동쪽이 요동이었다. 난하 동쪽은 지금 요하의 서쪽이니, 요나라 이전인 고구려 시절에는 요동이 요서가 된다. 그런데 우리 역사학계는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보고, 고구려 성(城)이 전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던 것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수(隨)와 당(唐)의 성은 지금의 요하까지 이르도록 동진(東進)시켰다. 고구려 영토를 중국에 헌납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는 ‘요양은 진(秦)나라 때 요동의 변방에 속했다’고 밝혀놓았다. 요양은 요하 바로 동쪽에 있으니, 요동의 변방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진나라 시절이라면 요동의 변방에 있는 것이 맞다. ‘요사’는 고대의 요동이 지금의 요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요양이 고구려 수도 평양 

거란의 선조는 고구려와 혈투를 벌이고 패배해 복속됐다가 고구려가 무너진 후 세력을 형성해 고구려를 이은 발해를 멸망시켰다. 이 때문에 고구려와 발해에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리다. 따라서 이들이 고구려와 관련해서 거론한 지리 기록만큼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요사’ 지리지는 고구려와 선비족 간의 싸움을 소재로 고구려 수도인 평양의 위치를 거론한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만리장성을 연결한 것은 북쪽에 있는 흉노의 공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 이후 한나라의 여러 왕이 흉노를 토벌했다. 흉노족이 힘을 잃은 내몽골 지역에서 일어난 게 선비족이다. 선비족에서는 모용부와 우문부 탁발부 등 여섯 부족이 강력했는데, 리더는 부족 이름을 성(姓)으로 사용했다. 

먼저 크게 일어난 것은 모용외-모용황 부자(父子) 때의 모용 선비족이다. 아버지 모용외가 세력을 키우자 아들 모용황은 황제에 올라 연(燕)나라를 세웠다. 사가들은 모용씨가 세운 연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 노관이 이끌었던 한나라 제후국인 연나라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전연(前燕)’으로 표기한다.  

그때 중국에서는 유비와 조조 손권이 다투던 3국 시대가 끝나고 중국인과 북방민족이 뒤엉켜 싸우며 여러 왕조가 명멸하는 위진남북조시대, 일명 5호16국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만큼이나 전쟁이 잦았다. 동쪽에서 팽창하던 고구려는 서쪽에서 확장하던 모용외 세력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고-연전(高燕戰)을 벌인 것이다.

가장 강력한 ‘고연전(高燕戰)’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342년 전연의 초대 황제 모용황 군의 침입으로 일어났다. 모용황은 아버지가 당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고구려군을 대패시키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아내를 생포했다. 그리고 고구려가 감히 대항할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고국원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가져갔다.

이에 고국원왕이 굴복해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주고 어머니도 보내주었다. 그리고 고국원왕을 ‘제후국 고구려’의 왕으로 임명했다. ‘삼국사기’는 전연의 공격을 받기 전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이었는데 침공 후인 343년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천도했다고 적어놓았다.  

낙랑4.jpg



지금 중국 길림성 집안의 압록강가에 가보면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태왕의 능을 비롯한 여러 고분과 광개토태왕비, 그리고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사가들은 전연군에 대패한 고구려가 임시 천도한 곳이 집안 일대가 아닐까 보고 있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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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2 18-05-17 15:39
   
고구려가 망한 후 랴오양은 한반도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그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명·청 시대까지도 랴오양에는 고구려 왕궁 터, 절터 등 많은 유물과 함께 고구려 유민의 후예들도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명대의 조선 사신들이 랴오양에서 듣고 본 것들을 기록한 <조천록>, 청대의 조선 사신들이 남긴 <연행록> 등에 그런 내용이 간헐적으로 실리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대표적인 경우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평양이나 패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시기마다 여러 군데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라고 통탄했다. 랴오양이 과거의 평양이었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랴오양현)이다.”

지금 랴오양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전혀 없을까. 2월22일 오전, 별 기대 없이 찾은 랴오양 박물관에서 크게 전시된 <요사> 지리지의 한 대목을 발견했다. “발해의 왕성인 이곳은 옛 평양성이 있던 곳으로 중경현덕부 자리이기도 하다(遼東盛國忽汗州卽故平壤城也號中京顯德府. 홀한(忽汗)에서 홀은 왕, 한은 성. 즉 왕성이란 뜻).” 평양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후 오랫동안 이곳의 이름은 평양의 앞뒷말을 바꿔 ‘양평(襄平)’이라 불렸다.
----시사in 인용
촐라롱콘 18-05-17 16:05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가 연결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다.
고대의 중국인들은 산해관까지를 영토로 인식했으니, 그곳에서부터 동쪽의 강은 ‘요하’로 통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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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관이 만리장성의 북동쪽 분기점(시작점)이 된 것은 명나라시기 만리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이후입니다.

기원전인 연나라,진나라,한나라 당시의 장성 또는 만리장성의 동북쪽 시작점은 요동이었습니다.

또한 진시황제가 쌓은 만리장성의 시작점에 대해서는 사기 흉노열전에서도 언급되듯이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의 장성을 쌓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요동의 정확한 범위와 기준은 논란이 분분하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연-진장성의

유적이 내몽골 적봉일대를 지나 요하와 가까운 의무려산 일대까지는 꾸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요하를 넘어 양평(오늘날의 요양)일대까지 이어졌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나라-진나라-한나라시기의 유물-유구들은 적어도 오늘날 요동의 요양-천산산맥 일대를 기준으로

그 이서까지는 지속적으로 발굴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짜장들의 주장대로 한반도 압록강~청천강 일대까지 이르렀다는 것은 개소리에 불과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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