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5-19 16:30
[중국] 중국의 당나라 시기 남조에 대하여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954  

다운로드.jpg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윈난[雲南]에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종족들이 각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는 타이족, 이족[彛族], 먀오족[苗族], 바이족[白族], 나시족[納西族], 누족[怒族] 등 20여 민족들이 분포한다. 얼하이호[洱海]주변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고, 여러 종족이 함께 거주하며 문화와 종교 등의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 지역의 중심지인 다리[大理]는 한(漢, BC 202∼AD 220) 시대부터 중국과 인도를 잇는 남방(南方) 실크로드의 주요 경유지로 번성하였다. 

222001-복사본(2).jpg

DSC09889.jpg

DSCN3477.jpg



한(漢) 시대에 이 지역의 종족들은 ‘서남이(西南夷)’라고 통칭되었으며, 염방(冉駹), 수(巂), 작(筰), 야랑(夜郞), 전(滇)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109년 한(漢) 무제(武帝, BC 156~BC 87)는 이 지역을 공격해 익주군(益州郡) 등 6개의 군(郡)을 설치하였다. 

당(唐, 618~907) 시대에 얼하이호 유역에는 몽수(蒙嶲), 월석(越析), 시랑(施浪), 등섬(邆賧), 낭궁(浪穹), 몽사(蒙舍) 등 6개의 큰 부락(部落)이 나타나 연맹을 형성했는데, 이들을 6조(詔, 部 혹은 長의 의미)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몽사조(蒙舍詔)는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남조(南詔)라고 불렸다. 649년 티베트·미얀마계 부족(部族)인 오만(烏蠻)의 세노라(細奴羅, 高祖 奇嘉王)가 몽사조(蒙舍詔)를 일으켜 대몽국(大蒙國)을 세웠고, 당(唐)과 독자적으로 수교(修交)하였다. 당(唐) 고종(高宗, 628~683)은 세노라(細奴羅)를 외주(巍州) 자사(刺史)로 임명하였고, 다른 5조(詔)는 점차 토번(吐蕃)의 영향 아래 놓였지만 남조(南詔)는 꾸준히 당(唐)과 친교(親交) 관계를 유지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唐)은 토번(吐藩)을 견제하기 위해 남조(南詔)가 다른 5조(詔)를 병합해 가도록 지원하였다. 737년 남조(南詔)는 석화성(石和城, 지금의 鳳儀)과 석교성(石橋城, 지금의 下關)을 공격하며 주변의 25개 부족을 병합해 갔으며, 당(唐)은 어사(御史) 엄정회(嚴正誨)를 파견해 이를 지원하였다. 738년 남조(南詔)의 피라각(皮羅閣, 歸義王)은 6조(詔)를 통일하여 남조국(南詔國)을 세웠고, 739년에는 도읍을 웨이샨[巍山]에서 태화성(太和城, 지금의 大理 蒼山 太和村 부근)으로 옮겼다. 당(唐)은 남조(南詔)의 왕을 운남왕(雲南王)으로 봉(封)하며 친교(親交) 관계를 유지하였다.

Southeast_Asia_800AD.jpg



하지만 748년 당(唐) 현종(玄宗, 685~762)이 얼하이호 지역에 안녕성(安寧城)을 세워 이 지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당(唐)과 남조(南詔)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피라각(皮羅閣)의 뒤를 이어 새롭게 남조(南詔)의 왕이 된 각라봉(閣羅鳳, 神武王)은 운남태수(雲南太守) 장건타(張虔陀)를 죽이고 요주(姚州) 등 37개 군(郡)을 점령하며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까지 세력을 넓혔다. 

당(唐)은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 양국충(楊國忠)과 이휘(李暉)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남조(南詔) 정벌에 나섰지만, 남조(南詔)는 토번(吐蕃)과 동맹을 맺어 대응하였다. 당(唐)은 751년 이후 여러 차례 대군을 파견했지만 모두 남조(南詔)에 크게 패배하였다. 특히 754년의 침공에서는 7만여명의 당군(唐軍)이 전멸되는 피해를 입었고, 지금도 윈난성[雲南省]에는 ‘만인총(萬人冢)’이라고도 부르는 ‘대당천보진망전사총(大唐天寶陣亡戰士冢)’이 전해진다. 당시의 전쟁을 당(唐) 현종(玄宗)의 연호(年號)를 따서 ‘천보전쟁(天寶戰爭)’이라고 한다. 

각라봉(閣羅鳳)의 뒤를 이은 이모심(異牟尋, 孝恒王)은 779년 양저미성(羊苴咩城, 지금의 大理)로 도읍을 옮기고, 토번(吐蕃)의 영향을 물리치고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9세기에 남조(南詔)는 북으로는 쓰촨성[四川省] 서부의 다두강[大渡河],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 서로는 인도와 미얀마, 동으로는 구이저우성[貴州省]과 광시성[廣西省]의 일부까지 세력을 넓혔다. 

남조(南詔)는 대몽국(大蒙國)을 세운 고조(高祖, 재위 649~674) 세노라(細奴羅)부터 마지막 왕인 효애제(孝哀帝, 재위 897~902) 순화정(舜化貞)에 이르기까지 13대에 걸쳐 25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남조(南詔)는 다양한 부족들이 연합해서 이루어진 국가로서 각 부족의 독립성이 강해 왕권이 제한되었다. 오만(烏蠻)이라고 불리는 티베트·미얀마어 계통의 종족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으며 백만(白蠻)이라고 불리는 종족을 융합해 나라를 구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만(烏蠻)은 오늘날의 이족(彛族)과, 백만(白蠻)은 바이족(白族)이나 타이족 등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유목민족-_남조시대_3탑3.jpg



전국을 10탐(賧), 6절도(節度), 2도독구(都督區)로 나누어 통치했으며, 8세기 이후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지배층을 중심으로 불교 문화가 화려하게 발달하였다. 10대 소성왕(昭成王, 재위 823~859) 권풍우(勸豊祐)는 천심탑(千尋塔)으로 불리는 높이 69m의 ‘법계통령명도승탑(法界通靈明道乘塔)’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남조(南詔)는 여러 부족(部族)들이 각각 독립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어 왕권이 약했고, 결국 9세기 말 정(鄭)씨, 조(趙)씨, 양(楊)씨 등에게 번갈아 왕위를 빼앗기는 혼란에 빠졌다. 897년 권신(權臣)이었던 정매사(鄭買嗣)는 반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으며, 902년 13대 효애제(孝哀帝, 재위 897~902) 순화정(舜化貞)을 대신해 스스로 대장화국(大長和國)을 세워 왕이 되었다. 

그리고 927년에는 검천절도사(劍川節都使) 양간정(梁干貞)이 대장화국(大長和國)을 멸하고 대천흥국(大天興國)을 세워 청평관(清平官) 조선정(趙善政)을 왕으로 세웠다. 양간정(梁干貞)은 곧바로 조선정(趙善政)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대의녕국(大義寧國)를 세웠지만, 937년 통해절도사(通海節都使)였던 단사평(段思平)에게 몰려났다. 

단사평(段思平)은 남조(南詔)의 계승을 선언하며 938년 대리국(大理國)을 세웠으며, 대리국(大理國)은 1253년 원(元, 1271∼1368)이 침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남조국의 풍습과 습성

오늘날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나라는 당나라 이다. 

한당성세(漢唐成世)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사에서 한나라와 당나라는 강력한 제국이었는데, 당나라의 번영과 막강한 국력은 한나라보다 더 했다. 한나라도 평정시키지 못했던 북방 유목민족을 50년 동안 완전히 굴복시켰고, 수나라가 1백만 대군을 보냈다가 참패했던 고구려마저 당태종과 당고종을 거치면서 기어이 멸망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렇게 강대한 당나라조차 끝내 이기지 못하고 고전했던 상대가 있었는데, 북방 유목민인 돌궐이나 동방의 고구려도 아닌, 그들보다 훨씬 약소국이었던 남조(南詔)와 운남 및 사천의 이민족들이었다. 


특히 남조는 뛰어난 수장인 힙라봉의 지휘 아래, 무려 8만의 당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세우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당나라는 서남부 방면에 대군을 보내는 등 비상이 걸렸다가, 마침 안록산의 반란이 일어나 천하가 대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남조가 위치한 곳은 중국 서남부인 운남성 일대인데, 여기는 지금도 중국에서 가장 개발이 덜 된 오지이다.

그 밖에 귀주와 사천 일대의 이민족들도 당나라에게 적지 않은 골칫거리였다. 

우선, 서남부 이민족들 중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남조에 관한 내용부터 보도록 하겠다. 신당서의 남만전에 보면, 남조에 관한 기사가 꽤 상세하게 나온다.  

남조는 본래 육조(六詔)라고 불리었는데, 몽수조와 월석조와 낭궁조와 등섬조와 시랑조와 몽사조 등 여섯 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연맹체 비슷한 집단이어서 여섯 개의 조라는 뜻인 육조로 불렸다. 

이들은 서로 세력이 비슷해서 연맹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 몽사조가 여러 부족들의 남쪽에 있어서 남조라고 칭했다고 한다.

그런데 서기 649년에 접어들면서, 이들 여섯 부족들은 가장 강성했던 남조의 주도로 대몽국(大蒙國: 649~738)으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대몽국은 738년에 다시 국호를 남조(南詔: 738~859)로 바게된다.

남조는 당나라를 본따 관직을 정했으나, 중국과는 다른 호칭을 썼다. 중국 황제가 스스로를 짐(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남조왕은 자기를 원(元)이라 불렀으며, 신하들을 가리켜 중국식 호칭인 경(卿) 대신 창(昶)이라고 불렀다. 그 밖에 남조는 중국의 재상과 비견되는 최고 관직으로 청평관(淸平官)이라는 직책을 만들어 사용했다.

당나라처럼 남조 역시 국민개병제를 택했다. 전쟁이 벌어지면 성인 남자들은 모두 군사가 되어 전쟁터로 나가 싸웠는데, 말을 가지고 있으면 기병이 되었고, 말이 없는 자는 자연히 보병으로 편입되었. 

병사들에게는 매년 가죽으로 만들어진 상의와 하의가 나라에서 지급되었다. 각 마을 간의 거리에 따라서 군을 4군으로 나누고, 4군에 장수 한 명씩을 두었다. 만약 적이 국경을 넘으면 그 지역을 지키는 장수가 막도록 하였다. 

한편, 남조왕을 지키는 친위대 병사들은 주노구저(朱弩仇)라고 불렀다. 구저는 남조말로 가죽으로 된 허리띠를 뜻했다. 

이밖에 남조에서는 각 지방에서 그 지방 사람으로 조직하여 훈련시킨 병사인 향병(鄕兵) 중에서 선발하여 나저자(羅?子)라는 부대를 조직했다. 나저자 병사들은 각자 붉은색의 가죽 투구를 쓰고, 물소 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리 방패를 들고서 맨발로 다녔는데, 험한 곳을 달리는 속도가 마치 나는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보통 남조군에는 1백명 당 나저자를 지휘하는 나저자통(羅?子統)이 한 명씩 두었다고 한다.  

남조의 군대가 출정할 때는 국가에서 양식을 지급하지 않고, 병사 각자가 알아서 양식을 준비해야 했는데, 한 사람 당 1두(斗) 5승(升)씩을 마련해 2500명을 한 단위로 한 영(營)을 만들었다. 남조의 군법은 다소 특이했는데, 먼저 다친 사람은 치료해주지만, 나중에 다친 사람은 베어 죽였다.

남조인들은 중국과는 다른 특이한 무기도 만들었다. 그 중 몇 가지만 거론하면 탁초(鐸?)와 낭검(浪劍)과 울인(鬱刃) 등 이다.

먼저 탁초는 끝이 예리한 일종의 칼로 그 모양이 부러지고 남은 칼날 같았고, 구멍이 있어서 옆으로 이을 수 있었다. 탁초는 주로 여수(麗水)에서 나며 칼 자루를 금으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으로 내려치면 뚫리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탁초는 남조를 비롯한 서남부 이민족들이 보물로 여겼는데, 달마다 희생의 피를 바쳐 제사를 지냈다. 

울인은 일종의 창인데, 주조할 때 독약을 함께 섞어서 단련하였다. 그러면 만들 때 별처럼 빛이 났는데, 완성되는 시간이 무려 1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울인은 말의 피로 담금질하고 단단한 무소뿔로 창 머리를 장식했는데, 이것으로 사람을 찌르면 모두 즉사했다.

낭검은 낭인이 만드는 이유로 낭검이라 불렀는데, 주로 남조왕이 차고 다니는 검이었다.

이밖에 남조의 주변에 위치한 이민족들도 나름대로의 무기와 전쟁에 관한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 와족의 선조인 망저만(望?蠻)은 운남성 서북쪽에 살고 있었는데, 남녀가 모두 용맹하고 민첩하여 안장이 없이도 말을 타고서 창과 칼을 잘 사용했고, 짧은 갑옷으로 가슴과 배를 가리며, 가죽으로 된 투구에는 모두 야크의 꼬리를 꽂고, 빠르게 돌격하는 모습이 귀신 같았다고 전해진다. 

망저만족은 남조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전쟁이 벌어지면 남조는 망저만족에게서 군대를 징발했다. 이를 망저자 라고 불렀는데, 망저만족은 이들을 항상 선봉에 내세웠다.

남조의 영토인 노강(怒江) 상류 일대에는 심전만(尋傳蠻)이라는 소수 민족이 살았다. 심전만은 남조에 복속된 민족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낙후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비단이나 명주로 지은 옷을 입지 않았고, 맨발로 다니는데 엉겅퀴나 가시를 밟아도 아파하지 않았으며, 고슴도치를 사냥해서 그 고기를 날로 먹었다. 또한 심전만족은 싸울 때, 대나무로 만든 벙거지를 머리에 쓰고 투구 대용으로 삼았다.

심전만의 서쪽에는 나만(裸蠻)이라는 소수 민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동굴에 살고 있어서 야만(野蠻)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이들 나만족들은 옷이 없었고, 나무 껍질로 몸을 가리고 살았다. 나만족은 산 속에 흩어져 살았는데, 우두머리가 없고 목책으로 만든 집에 거주했다. 나만족은 남조의 왕인 합라봉이 심전만을 평정하고 나서 그들로 하여금 산 속에 흩어져 살게 한 이후부터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나만족은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모여서 남조에 복종했기 때문에, 전쟁이 나면 소집하는 즉시 군사가 되었다. 나만족들은 특이하게도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았는데, 그래서 한 명의 남자가 다섯 명이나 열 명의 여자들과 함께 살면서 그녀들에게 공양을 받았다. 나만족 여자들은 온종일 활을 가지고 있으면서 외부에서 침입자가 나타나면 즉시 쏘아서 내쫓았으며, 농사를 짓지 않고 산속에 들어가 곤충과 물고기와 산나물과 민물 조개 등을 채취하여 먹고 살았다.

마만(磨蠻)과 사만(些蠻)과 여만과 순만(順蠻)은 남조의 영토인 운남성 안에 사는데, 씻지를 않고 남녀가 모두 가죽옷을 입으며, 술과 노래를 좋아하는 풍속을 지녔다. 

망만(茫蠻)은 높은 건물을 짓고 살았지만 성벽을 쌓지는 않았으며, 이빨에 옻칠을 하거나 금칠을 했습니다. 이들은 코끼리를 길들여 농사짓는데 사용했다.

운남성 남쪽에는 오만(烏蠻)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대대로 남조와 결혼 관계를 맺는 동맹국이었습니다. 오만은 모두 7개의 부족으로 나누어졌으며, 소와 말을 많이 길렀으며, 무당과 귀신을 믿었습니다. 이들의 말은 중국어와 매우 달라, 네 번이나 통역을 해야 겨우 중국인과 말이 통할 정도였다. 부족의 우두머리를 귀주(鬼主)라고 불렀는데, 큰 부족에는 대귀주(大鬼主)가 있었고, 1백개의 집으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마다 소귀주(小鬼主)를 두었다.  

지금의 운남성 곤명 호수 일대에는 곤명만(昆明蠻)이 살았다. 이들은 머리카락을 변발하고 옷을 왼쪽으로 입는 풍습이 돌궐과 비슷했다. (역자 주: 옛날에 중국 서남부 소수민족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운남성에는 목초지가 많아 좋은 말들이 많고, 또 운남의 소수민족들은 말을 매우 잘 탄다고 했다. 일설에 의하면 운남의 소수민족들은 원래 북방 몽골 지역에서 내려온 유목민의 후손이라서 승마에 능숙하다고도 한다.

곤명만족은 물과 풀을 따라서 목축을 하는데, 여름에는 높은 산에 살며 겨울에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이들은 싸우다 죽는 것을 숭상하고, 병으로 죽는 것을 싫어하는 용맹한 전사적인 풍습을 지녔다. 또, 곤명만족은 불교를 믿었는데, 수만 명의 승병들을 거느렸다고 한다

운남의 서북쪽에는 박자만(樸子蠻)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재빠르고 사나우며, 대나무로 만든 활을 잘 쏘아서, 숲에 들어가 새나 쥐를 쏘면 모두 맞추었다.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쓰지 않았고, 나뭇잎을 깔고 먹었다 박자만족은 체구가 컸고, 방패를 진채로 삼모창을 잡고 싸웠다. 이들은 신발 없이 맨발로 다녔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78
19760 [한국사] 대고구려제국(大高句麗帝國) 다큐 아비바스 09-03 1167
19759 [한국사] 고대 한국인, 예맥제국(濊貊帝國) (1) 아비바스 09-02 1285
19758 [한국사] 알려지지 않은 고조선(古朝鮮) 설들 아비바스 09-02 950
19757 [한국사] 역사 매국부역에 지분 태우지 말라 (1) 금성신라 08-23 1365
19756 [한국사] 태극기 민족 티벳 (충격) (6) 금성신라 08-23 2507
19755 [한국사] 400년전 보도검열 실태 ㄷㄷ (1) 금성신라 08-22 1391
19754 [한국사] 공험진을 반박할수없게되자 학계에서 뿌리는 요상… (4) 금성신라 08-22 1314
19753 [한국사] 고려의 국경 동계는 잠수함 감시용 해안초소인가? (3) 금성신라 08-22 1126
19752 [한국사] 강화도에 10만 인구가 38년간 거주한 흔적이 있능가? (4) 금성신라 08-21 1288
19751 [한국사] 노걸대 실로 놀라운 발음기록 ㄷㄷ (1) 금성신라 08-21 1036
19750 [한국사] 붓다 사카무니의 씨족명, 국명 금성신라 08-21 934
19749 [한국사] 금나라는 신라다 (2) 금성신라 08-21 1248
19748 [기타]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증조부의 비석을 파헤친 후손 관심병자 08-18 964
19747 [기타] 북한군이 촬영한 한국전쟁 관심병자 08-17 1449
19746 [기타]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삶 관심병자 08-16 1119
19745 [기타] 세금 1억 들어간 춘향이 그림..여러분의 의견은 (4) 관심병자 08-03 2682
19744 [한국사] 미국 옥션에 나온 신라금관 Korisent 07-30 3414
19743 [기타] 무능했던 제국 그리고 시작된 관동군의 폭주(황고둔… (1) 관심병자 07-27 1637
19742 [기타] 칭기즈칸의 마음을 홀랑 빼앗은 고려 여인은 누구일… (7) 관심병자 07-27 2268
19741 [기타] 옛날 사람들도 봉급을 받았을까? 관심병자 07-24 1183
19740 [한국사] 동아게가 주의하고 싸워야할 점 (3) 하이시윤 07-18 1190
19739 [한국사] 서악 華山 이동과 馬邑山 즉 평양성 (2) 구르뫼 07-18 1439
19738 [한국사] 윤내현교수의 기자신고 요약 (9) 하이시윤 07-13 1506
19737 [기타] 한국사는 미스테리한 점이 많지요 (20) 관심병자 07-11 2389
19736 [기타] 잡설) 청동거울은 일반적인 거울이라고 보기는 힘들… (2) 관심병자 07-11 1345
19735 [한국사] 5백년전 명나라 지도, 明과 高麗 등 지명 분석 #대명… (5) 레종 07-09 2310
19734 [한국사] 정읍 시의원 - 중국 본토에서 삼국사기 백제의 정… (2) 조지아나 07-06 1710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