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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19 21:52
[한국사] 전환시대의 지성인 리영희 그리고 사모함과 비판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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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령' 출신의 군인이었지만 한국적 좁은 시야를 깨고 광활한 세상을 엿보다. 

 

  한국인에게 부과된 덫이 두개 있었다. 근대화,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대신 눈과 귀를 멀게하는 것이었다. 당대 이렇듯 '눈과 귀'를 멀게하는 이데올로기를 속칭 '반공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생성한 주인공은 바로 '박정희'라는 이름의 무려 18년을 대통령에 재임한 사람이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이 빛나게 되는 것은 장준하라는 이름이 빛났던 것과 비슷했다. 장준하 이 분이 독립지사로서 '일제시대' 저항의 정당성에 터하여 박정희 정부에 저항했다면, 리영희 선생은, 대위에서 전역했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섰던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는 것은 '빨갱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의 60년대와 70년대는 반공에 '이의'를 가하는 것이 곧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는 험학한 시대였다.  

  결국, 한국인의 시야는 엄청나게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과거 '옆구리'에 두고, '호수'를 건너 다니듯 중국 대륙에 빈번하게 왕래했던 한국인들의 대중국 왕래가 끊겼다. '휴전선'에 의해 대륙으로 나아가는 길조차 막혔다. 한국은 영락없는 섬나라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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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냉전해체'의 현 시대를 예견하다 

 

  '섬나라 한국'은 '섬나라 일본'처럼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쉽지 않은 기회를 잘 잡아채서, 베트남 전쟁에 젊은이들이 피흘린 댓가까지 '밑바탕' 삼아 오늘의 한국을 이룩한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한국은 오직 '비행기'를 타고 '동서남북' 중에, '서쪽으로가는 것이 '금지'된 채, 동남북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인위적인 '죽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과거 '한국'에 문물을 전래했던 중심지 중국이 갑자기 한국인들에게 접근 금지의 '중공'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붉은 중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냥, '빨갱이'들이 '지옥'을 만들었거니 했다.  

  

리영희 선생은, 두가지 방향으로 한국인의 좁은 시야를 깨는 일을 했다. 외국어에 능통했고 '합동통신'사에 입사하여 외신부 기자를 한 덕분이었다. 그에게 지구는 비밀스런 모습을 가끔씩 드러냈고 그는 '미국'과 '중국'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히 여기는 상황까지 혁명적 발전의 길을 열었다. 물론 그 사이에 중국은 이제 '붉은' 측면보다 자본주의적인 '푸른' 측면이 강화되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미국의 실체에 대한 접근의 성과물이었다. 오늘날 냉전이 해소되고 한국 자본이 중국에 투자하는 시대에 이르러, 이 저작을 다시 살펴 보면, 정말 냉정하고 폭넓은 시야로 국제정치적 '사실'을 냉정하게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대 이 서적은 불온이었다. 오늘날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보다도 더 심각한 '금기'를 건드린 불온서적이었던 것이다.  


삶과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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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평창이다. 평안북도 운산군 출신이다. 평북 영림서 공무원 리근국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의주사범학교와 경성공립공업학교(현 서울공업고등학교) 중 후자를 택하게 되어 경성에서 고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50년에 국가에서 학비와 숙식비를 전액 부담하는 국립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순사건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진압군 병력을 수송하는 선박에서 항해 실습을 하다가 여수항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항해학을 전공했으나 수업은 영 재미가 없었고, 영문학 작품에 심취하여 다수의 책들을 섭렵했다고 자술했다. 이후 경북 안동에 있는 안동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해 그 해 군에 자진 입대한 뒤 전방에서 3년 반, 전후 후방에서 3년 반 총 7년간 복무했다. 국군 장교로 임관해 통역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에 미군 고위 장교들은 사적으로 통역관들을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을 부대로 들여보내 재미 좀 보려는 고문관들의 태도와 한국인을 무시하는 모습에 격분해 권총결투를 신청한 적도 있다 한다. 

그리고 이 때 목격한 민간인 학살(11사단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 각종 제1공화국의 악행과 각종 부패상을 체험한 것은 그가 훗날 진보성향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포병이나 공병, 보병과는 달리 의무나 통역같은 특수보직은 인원이 적었기 때문에 장기복무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후방에서는 미군 의료FM을 번역하거나 국군인쇄창에서 보병장교신분으로 재직했으며, 전훈을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나 인사기록 부실로 누락이 되었고, 소령으로 제대 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를 지냈다. 5명 뽑는데 200명넘는 지원자가 몰렸는데, 그 중 앞의 4명은 전부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 출신이고 자기가 5등으로 들어왔다 한다. 1960년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 언론대학원을 연수했다. 196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를 거쳐 1965년부터 1968년 7월까지 조선일보와 합동통신 외신부장을 각각 연임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하는 내용의 사설들을 여러차례 기고한것이 문제되어 중앙정보부로부터 반공법위반으로 구속되어버리고, 이후 68년 7월 조선일보를 퇴사.(말이 '퇴사'지 실상은 강제해직이었다) 1971년까지 합동통신 부장만을 지냈으며 위수령 등에 항의해 ‘64인 지식인 성명’참가로 강제 해직되었다.

1980년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로 반공법 2년형을 살고 출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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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부터 한양대 문리대학교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던 중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76년 해직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지내고 1980년 3월 복직됐으나, 그해 5월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되었다. 1984년에 복직했으나 1985년 일본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독일 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구하고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의 정식 부교수로 초빙되어 '평화와 갈등' 특별강좌를 강의하는 등 전두환 정권 내내 해외에 있어야 했다. 이후 귀국했으며 1988년 한겨레신문사 이사 겸 논설고문에 취임했다. 1995년 한양대학교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간경변으로 투병하다 2010년 12월 5일 81세를 일기로 서울특별시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타계. 묘지는 광주광역시의 5·18 민주묘지(5.18 묘역)에 있다. 


평가[편집]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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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우상과 이성』

리영희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기존의 권위주의 독재 정권 시절, 정권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 한국 현대사에서 왜곡된 국제적 사실들을 밝히는 데 공적을 남겼다. 단적인 예를 들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는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은 이념대립이 아닌 반제국주의 성향이 짙다.'고 최초로 정의내린 인물이었다. 후에도 베트남 전쟁 때의 대한민국 국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도 했으며 보수정부들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밖에도 단순한 반공논리만이 주입될 뿐 외부 정보가 거의 차단되었던 1970년대에 세계의 객관적 시각들과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소개하여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매카시즘을 조장하는 기존 방송이나 언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문제나 미국의 동북아 전략 등이 국가의 통제를 넘어 제대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하였던 것.

이 때문에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작)는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책으로 간주되었는데, 문재인이 가장 좋아한 책으로 꼽기도 했다. 

2005년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에 출연했을 때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같이 출연하여 과거의 자신에게 끼친 리영희 저작의 영향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이른바 유신시대와 5공 시대 운동권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 때문에 보수쪽 이들에게는 당연히 눈 밖에 나버리게 되었고, 이들은 그를 '빨갱이'라는등 인신공격을 맹렬히 퍼부었다. 다만 리영희 자신은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비판을 가했다. 단적인 예로 1998년에 방북해 고위직 인사들과 회담을 나눈적이 있었다. 

리영희는 북한의 경직된 체제와 우상화를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북의 고위직 인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비전향 장기수(비전향 장기수중에는 6.25 전쟁때 학살범들도 많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와 문제에 대해서 '북한 당국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책임을 강하게 묻기도 했었다. 

그러나 반공법으로 잡혀들어갔을 때 도저히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 이북 출신이긴 하지만 가족 모두가 한국 전쟁 이전에 남한으로 이주했고 한국 전쟁에 통역장교로 임관하여 전후까지 합쳐 7년 동안이나 직위에 있었던 예비역 소령인데다가, 비록 인사체계의 부실로 인해 없어졌지만 은성무공훈장까지 수여받은 터라 잡아낼 건덕지가 없었다. 

결국 재판에서 11심까지 갔으나 1심에서 이미 당시의 정권으로부터 2년형을 때리라고 밀서가 온 터라 감옥에 부당하게 갇히게 되었다. 정치범으로 서대문형무소 독방에서 모친의 부음을 듣게 된다. 이 때의 아픔을 바탕으로 <서대문형무소의 기억>에선 일제 시대 재소자들보다 더 열악한 처우를 비판하며 법조인들은 임관 전에 자기 집 냉장고에 하루라도 갇혀보라는 일침을 날리기도 했다.

김삼웅 독립운동관장이 아직 대상자가 살아있던 시기(2010년 4월 19일)부터 쓰던 평전이 있다. 그는 리영희를 "한국의 소크라테스"로 평했다.

비판 및 반박(편집)

그러나, 일부 보수인사들은 냉전기에 사상의 은사인 그의 역할은 인정하나, 과오도 상당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과거 마오이스트를 자처했다가 뉴라이트로 전향한 안병직 교수 등이 그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시장주의를 강력히 옹호하였다. 그리고, 반박 항목들을 보면,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어떤진단을 내려서인지 뭔가 성급하고 미래에 대한 혜안이 좀 부족해 보인다는 느낌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 있고 현대에 있어 리영희가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미래 예측이나 사안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의 부정확함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해당 시대와 그 시대 한국 사회의 한계 때문에 정확한 판단이 어려웠던 점을 참작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리영희의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되는 '문화대혁명 옹호'의 경우, 문화대혁명의 전모와 실체가 거의 드러난 21세기 이후에 이를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리영희의 《8억인과의 대화》가 쓰여진 것은 1977년이다. 

그렇다면, 30년간의 시차를 감안하지 않고 두 입장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또한, 리영희와 동등하게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다른 한국 학자들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어떤 의미있는 분석을 내놓았던가? 이는 결국 '대상에 대한 충분한 자료와 객관성을 가지고 내릴 수 있는 후세의 평가'와 '정보도 불충분하고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지만 대상과 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고, 후세의 평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당대의 평가'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런 고려는 리영희 자신이 비판해마지 않던 친일파 지식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친일파 지식인들이 당시의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차라리 일본 정부에 협력하여 동등한 시민자격을 획득하자는 판단을 하는 것을 "수십년의 시차"를 감안하지 않고 비교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리영희 자신이 자신과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비판하는 인물들에게 가차없었던 만큼(친일파, 선우휘, 김대중 주필 등...) 그 본인에게도 엄격한 잣대가 매겨져야 할 텐데, 문화대혁명의 수십만에서, 대약진운동의 수백만 단위의 희생자(보수적으로 잡아도 사망자가 2천만명 이상임)가 발생했던 사건을 찬양했던 것을 '정보도 불충분하고 객관성도 확보하기 힘들지만 대상과 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고, 후세의 평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당대의 평가'로 미화할 수 있다면, 5.18에 대한 "북한군 침투" 주장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나무위키 생애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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