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에서 가난한 향리 곡산 척씨의 시조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고 호장, 부호장 쯤 되면 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는데,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과거에 무과가 따로 없던 고려 시대, 그것도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이리저리 떠돌던 중에, 경주로 흘러들었고 고려 11대 왕 문종의 3남 계림공 왕희의 집에 종자로 들어가게 된다.
나중에 그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얽히게 되는 고려 인종은 숙종(왕희)의 손자가 된다. 이래저래 척준경과 왕실은 인연이 많았던 셈이다. 이 때의 인연으로 왕희가 어리고 몸이 약했던 14대 헌종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을 때(사실상 찬탈) 추밀원의 말단관원으로 들어가 시설점검, 행사준비 같은 잡일을 하며 지냈다.
제 1차 여진 정벌
1104년 2월, 여진족이 정주성을 침공했을 때, 전면패주의 위기에 몰린 총사령관 임간 막하에서 뛰어난 용력을 발휘하며 정평과 선덕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는 공을 세운다. 이 때, 척준경은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인 별가(別駕) 직책에 있었다. 이 직책은 향리(鄕吏)의 자손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작은 벼슬이었다.
척준경은 총사령관 임간(林幹)에게 직접 말 한 필과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품계도 없는 듣보잡이 사령관에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매우 건방진 행동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임간은 척준경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기회를 잡은 척준경은 적장 2명을 죽여 여진족 추격대를 뿌리쳐 고려군이 전면패주하는 상황을 막았다.
아군이 패배하자 척준경은 임간에게 부탁해 무기와 갑옷 입힌 말을 얻은 다음 적진으로 돌진해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아군 포로 두 명을 되찾았다. 그런 뒤 교위(校尉) 준민(俊旻)·덕린(德麟)과 함께 활을 쏘아 각각 한 명씩을 거꾸러뜨리자 적들이 약간 물러났다. 척준경이 퇴각하는데 적 1백기(騎)가 추격해오자 또 다시 대상(大相) 인점(仁占)과 함께 적장 두 명을 사살했다.
적들이 전진하지 못하는 틈을 타 아군은 무사히 성으로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이 공으로 천우위(千牛衛) 녹사참군사(錄事參軍事)벼슬을 받았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척준경
그런데 이 때 뭔가 잘못되었는지, 공을 세웠음에도 옥에 갇혀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왜 투옥되었는지는 사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유추해보면 품계도 없는 하급관리가 건방지게 총사령관에게 요구한 게 높으신 분들의 눈에 거슬려서 괘씸죄를 적용했다거나, 공을 세운 것에 우쭐하다가 사고를 쳤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척준경의 공을 시기하여 엉뚱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투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때 그의 목숨을 구해주고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사람이 바로 윤관이다. 곤경에 빠진 것을 구해준 인연으로 윤관을 따라서, 여진족 정벌에 참가했고, 인간으로는 보기 힘든 무공을 세우게 된다.
제 2차 여진 정벌
1. 석성 전투
윤관이 이끄는 17만의 별무반은 진격을 하던 도중 함흥 인근의 성에서 여진족이 성에 틀어박혀 거세게 저항했다. 여진족 족장들을 다소 비겁한 함정에 빠뜨려가며 마비시킨 윤관은 시일이 지체될 경우 여진족의 대응체계가 굳건해질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척준경을 불러 장군 이관진의 지원 아래 성을 함락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척준경은 "죄를 지어서 죽을 몸이었던 저를 살려주신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칼과 방패를 들고 홀로 성벽 위로 올라가 추장 서너 명을 죽였다.
이걸 보고 사기가 오른 이관진 휘하 고려군은 기세를 올려 성을 함락시켰다.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가한목 · 영주성 전투
이후 병목 지형을 믿고 깊숙히 들어왔던 윤관은 우회로를 통해 침투한 여진 대부대의 기습을 받고 소수의 부하들만 거느린 채 포위된다. 부사령관 오연총이 화살에 맞고 윤관도 위기에 빠졌을 때, 척준경이 결사대 10명을 이끌고 윤관의 활로를 뚫으려 하자, 낭장(郞將) 계급으로 함께 전투 중이던 동생 척준신(拓俊臣)이 미친행위라면서 뜯어말리지만, 척준경은 "나는 한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늙으신 아버님을 부탁하마!!" 하며 돌격한다. 이렇게 척준경이 윤관을 구출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이유는, 윤관이 먼저 자신을 알아주고 구해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척준경이 여진병사 10여명을 해치우며 악전고투하는 사이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해 윤관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척준경 역시 털끝 하나 안 다치고 살아돌아왔다.
이 때 윤관은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앞으로 너를 자식처럼 생각할 테니 너 역시 나를 아버지처럼 보라!"라면서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윤관은 패잔병을 수습해 영주성으로 물러났는데 며칠 후 여진의 명장 알새가 군사 2만을 끌고 영주성을 공격해왔다.
고려군은 한차례 큰 패전으로 기세가 꺾인데다 병력과 군량이 모두 부족했다. 윤관 등 다른 모든 장수들은 "적이 많고 우리 군은 적으니 농성을 하면서 버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척준경은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인데, 성 안의 식량은 얼마 남지 않았고 외부에서 구원도 오지 않는데 어떻게 농성을 하는가?" 이라며 홀로 반대했다.
그리고 전투에 나서길 자청했다. 결사대를 이끌고 성을 나선 척준경은 여진군을 몰아내고 19개의 수급을 취했다. 척준경이 피리를 불며 개선하자 윤관 등 성 안에 있던 장수들이 누대에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절을 하며 맞이했다고 한다.
2.공험진 전투
두번이나 척준경 덕분에 구사일생한 윤관은 갈라전 각지에 넓게 분산된 병력을 한곳에 모아서 대응하기 위해 영주로 각 지역의 고려군을 소집했다. 권지승선 왕자지(王字之)는 윤관의 명령에 따라 공험진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영주로 향하다가 사현(史現)이 이끄는 여진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갑작스런 기습이라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왕자지는 타고있던 말까지 잃어버려 걸어야 했다. 급보를 들은 척준경은 구원에 나섰다. 척준경의 구원군이 도착하자 사현의 군대는 일거에 패해 도망쳤고 척준경은 말을 잃은 왕자지를 위해 철갑마 한 필을 노획해 선물해주었다.
3. 제 1차 웅주성 전투[편집]
동년 2월 알새는 고려 주력군이 집결한 영주성 대신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공격했다. 최홍정이 이끄는 고려군은 여진군이 완전히 자리잡지 못했을때 성문을 열고 일시에 공격하는 방법으로 한 차례 대승을 거두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여진군의 포위는 더욱 견고해졌다. 최홍정은 성 안에 있던 척준경에게 "당신이 포위를 뚫고 외부로 나가 구원군을 이끌고 오지 않는다면 성 안의 사졸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척준경은 밤중에 해진 옷을 입고 성벽을 타고 내려와 단신으로 포위망을 돌파한 뒤 고려 국경인 정주까지 내달려 병력을 집결, 통태진, 야등포, 길주를 거치며 만나는 여진군을 모두 격파한 다음 최종적으로 웅주성 방어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한 여진군을 격파해 웅주성을 구해냈다.
척준경이 군사의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가 정주(定州)로 돌아와 군사를 정돈하여 통태진(通泰鎭)으로 가서, 야등포(也等浦)로부터 길주(吉州)에 이르러 적을 만나 교전해 대패시키니 성 안 사람들이 감격해 울었다.
4. 기동대를 이끌고 여진을 막다 『고려사』 권96, 열전9 윤관
이후 완안부가 유격전으로 전략을 바꿔 10개 대로 나뉘어 돌아가면서 고려군을 기습하자 척준경은 왕자지와 함께 일종의 기동부대를 편성해 유격전을 벌이는 여진군과 교전을 벌였다. 각각 함주와 영주에서 여진의 기동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8월 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 영주(英州) 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9월 계해일. 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고려사』 권12, 세가12 예종1
9성 원정 후반부는 고려군이 갈라수에서 5~7만의 군사를 잃고 참패하는 등 전체적으로 답답한 진행이 이어졌는데 그나마 기동대를 이끈 척준경과 왕자지는 소소하게나마 전과를 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