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5-24 07:07
[한국사]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홍종우와 조선의 길 2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053  

홍종우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군권을 강화한 가운데 국체를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그가 사상 최초로 불역한 ‘심청전’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프랑스인들이 우리 조선 사람들이 선조가 세운 정부 형태에 집착하는 것을 탓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것은 기질의 문제일 뿐이다. 국민의 관습에 미치는 기후의 영향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증명된 바 있다. 나라마다 다른 정치체제가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 정부 형태를 그대로 지켜 나가면서 유럽문명을 이용하고자 한다〉

그의 이런 입장은 동양의 전통 위에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소위 ‘東道西器論(동도서기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기는 하나, 여기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다. 동도서기론은 서양의 문명을 단지 기술적인 차원에서 도입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해 홍종우는 동양 전래의 통치제도 및 통치사상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토대로 서양 통치사상 및 제도의 도입을 선별적으로 도입코자 한 것이다.

홍종우는 기본적으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갖고 있었다.

1 (6).jpg
홍종우를 후원했던 기메 박물관장

1 (7).jpg
구한말 남대문 안쪽에 무우  배추 등 일종에 야채 아침 시장이 열리고 있다.

이는 레가메가 홍종우와 헤어질 때의 정황을 묘사해 놓은 다음 기록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그와 헤어지면서 문득 “프랑스의 나쁜 점이 무엇이라고 보느냐”고 묻자, 그는 즉시“이기주의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2년 넘게 살게 해 준 사람들의 호의에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도 생각지 않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회색의 긴 한복을 입은 채 똑바로 앉은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홍종우는 서구문화가 일종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의 전통과 서구문명을 조화시켜 독립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분명 성리학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추구한 척사위정파와 달랐지만, 김옥균이 이끄는 개화당과 같이 무조건적인 서구화에 반대했다.


그는 <심청전>의 서문에서 조선의 지정학적 상황을 이탈리아와 비교해 제국주의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양국 간의 유사점을 강조하면서 중• 일 • 러의 조선 침략 정책을 경계한 바 있다.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 ‘르 피가로’가 그의 식견을 높이 평가하면서 ‘조선의 개화파에 속하면서 옛 제도와 싸우고 있는 사람’으로 소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옥균과 개화당의 한계

홍종우는 애국심 면에서 김옥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파리에 있는 동안 늘 상투를 튼 채 한복을 입고 있었다. 김옥균이 화복을 입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것과 대조된다. 홍종우가 ‘여행가 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건국연대가 기원전 2000년 이전으로 올라간다”고 강조한 것은 뜨거운 애국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홍종우가 김옥균을 저격한 것은 그의 이런 강렬한 애국심이 발동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 인사들은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자신들의 조급한 일처리 등에서 찾기는 했으나, 근본적으로 일반 민중의 몰지각에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1948년에 나온<서재필 박사 자서전>에 나오는 다음 대목이 그 증거이다.


〈독립당의 계획은 부실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패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 몰지각이었다〉


독립당들의 ‘반 외세’는 정확히 말하면 일종의 ‘반청’에 불과했다. 이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전후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의 사회에 적용시킨 H 스펜서의 소위 ‘사회적 진화론’에 함몰된 나머지 조선을 제국주의 열강의 하부기구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는 곧 이들이 내심 반근대화를 반서구화 내지 일본화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올바른 근대화 방안이 나올 리 없었다. 이를 간파하고 이들의 무모한 책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견해가 당시에도 있었다. 박은식은 일찍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개화당을 이같이 비판했다. 

‘대체로 갑신혁명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했고, 일본에 속았고, 독립운동을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조속히 이루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김옥균의 삼화론에 반대

김옥균이 청나라로 가기 전에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이와다 슈사쿠에서 다시 이와다 미와로 바꾼 것은 한국과 청나라, 일본의 공존화합을 통해 서양에 대응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 다.

그러나 이는「일본을 맹주로 한 동아시아 3국이 문명화하여 서양의 침공에 대항해야 한다」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일본맹주론’을 번안한 것에 불과했다. 김옥균에게는 한국을 중심으로 한 방략이 빈약했다.

홍종우는 조선독립이라는 뚜렷한 주체의식과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가 1893년 가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일본에 기항하던 중 이일직 등과 만나 모의 끝에 김옥균을 상해로 유인해 저격하게 된 진정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홍종우는 김옥균을 ‘일제의 나괄수’ 정도로 간주했다. 홍종우는 김옥균을 살해 후 청나라 관원에 의한 신문 과정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때 죄 없는 사람을 대거 살해하고, 국왕을 선동해 나라를 혼란케 만들고, 외국 군사를 이끌고 궁중에 난입하고, 아시아 3국의 국제관계에 큰 해를 끼쳤다”

홍종우는 외세에 의존한 급격한 쿠데타로 인해 조선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마침내 조선과 일본은 물론 일본과 청나라의 관계가 급랭해 조선이 전쟁의 화를 입을 것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개화를 반대하고 수구파 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김옥균을 살해한 것이 아니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그런 것은 더욱 아니었다.

갑신정변 당시 개화당에게 살해당한 민태호 등의 부자형제들이 홍종우의 저격에 감격해한 나머지 그를 초대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을 때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일의 형세로 말하면 여러 대신들을 대신해 원수를 토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소. 그러나 소생의 본지는 결코 제 공의 사적을 토멸하는 것에 있지 않소. 또한 그가 갑신의 역적이고 국가 의 공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소. 그의 생존이 동아 3국의 화맹을 방해하고 있고, 이로 인해 이들 3국이 한바탕 전쟁을 치룬다면 동아시아의 전란도 헤쳐나갈 길이 없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소.”

이는 김옥균이 주장한 소위 ‘三和論(삼화론)’의 허실을 통찰한 발언으로 이해된다. ‘일본외교문서’에 따르면 홍종우는 상해에서 환국한 뒤 어느 세도가와 대담하는 자리에서 이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비록 가난하지만 그 누구도 우리나라의 내정을 조종할 수는 없다.”

‘위로부터의 근대화’ 추구

척사위정파의 맹목적인 애국론에서 탈피해 열강의 세력균형론을 올라탄 자주외교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꾀하고자 하는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후 7차에 걸친 상소를 통해 時弊(시폐)에 대한 개혁론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의 상소는 기본적으로 열강의 조선 이권침탈에 대한 결사반대와 국내 상업의 흥기를 통한 재정의 확충, 군사권의 확립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는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과 달리 왕권의 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왕권의 강화는 재정의 확충과 군사권의 확립으로 요약된다. 이는 전국시대 말기에 한비자가“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엄격한 법치를 통한 군제의 강화 및 병농일치를 통한 군권의 강화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그의 이런 주장은 대한제국 후반기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면서 점차 힘을 잃고 말았다. 반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소위 ‘문명개화론자’들이 득세했다. 중앙정계의 거물이었던 그가 제주목사로 내려가게 된 것은 이런 세태 변화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종우는 비록 김옥균과 같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구했으나 그 방법론만큼은 현저히 달랐다. 그는 조선황실을 강화한 가운데 이를 달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의 정황에 비춰 홍종우의 방략이 훨씬 시의 적절하면서 현실적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출처] : 크리스쳔헤랄드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54
19949 [한국사] 우리 고대사 #7 : 맥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40
1994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2 : 한민족과 재가승 윈도우폰 03-22 280
19947 [한국사] 우리 고대사 #11 : 한반도의 왜(倭) 윈도우폰 03-22 167
19946 [한국사] 우리 고대사 #10 : 진국의 한(韓)족 윈도우폰 03-22 289
19945 [한국사] 우리 고대사 #9 : 고조선 유민과 신라 윈도우폰 03-22 109
19944 [한국사] 우리 고대사 #8 : 고조선의 이동 윈도우폰 03-22 244
19943 [한국사] 우리 고대사 #6 : 예족의 이동 윈도우폰 03-22 90
19942 [한국사] 우리 고대사 #5 : 맥족과 예족 윈도우폰 03-22 251
19941 [한국사] 우리 고대사 #4 : 단군조선과 토템 윈도우폰 03-22 99
19940 [한국사] 우리 고대사 #3 : 홍산문화와 적봉지역 주민 윈도우폰 03-22 263
19939 [한국사] 우리 고대사 #2 : 하화족과 동이족 윈도우폰 03-22 111
1993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 : 우리 민족의 조상 윈도우폰 03-22 292
19937 [한국사] 《인류와 한국조선의 변천사 - 한경대전》 (1) 에피소드 03-21 156
19936 [한국사] 아래 지도에 대한 내 관점... 고조선 중심의 열국시대… (4) 윈도우폰 03-21 381
19935 [한국사] 위만조선 시기 판도 (2) 위구르 03-20 263
19934 [한국사] 우리는 동이가 아니다. (2) 윈도우폰 03-19 567
19933 [한국사] 2022년 고고학계의 경주 월성 발굴조사 보고서 (6) 홈사피엔스 03-19 265
19932 [한국사] 삼국사기 이해 (1)신라사 (7) 홈사피엔스 03-16 579
19931 [한국사] 《(고)조선의 "가르침"과 직접민주주의 "국민의원"》 에피소드 03-14 332
19930 [한국사] 《고구려 최초의 이름은 '홀본(일본)' 이다》 에피소드 03-14 541
19929 [중국] 대륙계보? 아랫글 관련... (6) 윈도우폰 03-11 602
19928 [한국사] 《안문관,연운16주,송나라.. 화하족 관점 대륙계보》 에피소드 03-09 688
19927 [한국사] [한겨례] 2024/3/8 [단독] 고대 일본 권력층 무덤 장식품… (2) 외계인7 03-09 493
19926 [기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감미로운 모지혜(다니엘) - 인… 아비바스 03-08 663
19925 [한국사] 《고려 조상님들이 건축한, 서경(북경성)의 모습》 (7) 에피소드 03-08 642
19924 [기타] 동아시아에서의 국가의 형태라면? 그냥 잡설 (3) 윈도우폰 03-06 757
19923 [한국사] 발해 멸망 이유 - 야율아보기의 쿠데타 (4) 하늘하늘섬 03-05 1795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