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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7 00:03
[한국사] '청나라판 300' 한국사 최악의 패전 쌍령전투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176  

병자호란 때 있었던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과 더불어 조선군에게 치욕을 안겨준 전투이다. 4만의 조선군이 팔기군 300명에게 패배한 유명한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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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령 전투의 전개

1637년 인조를 구원하기 위해 북상한 경상도 속오군 4만명은 1월 3일 아침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기병 위주의 청군과 마주치게 된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은 경상 우병사 민영과 경상 좌병사 허완이었으며 4만 군사의 대부분이 조총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이 중에 실제 투입된 병력은 8천으로 이들이 허완, 민영의 지휘하에 전투에 참여했는데, 한번에 4만 명을 다 동원할 수 없어서 먼저 집결한 병력으로 추정된다.. 

청나라군의 선봉 33명이 나무 방패를 들고 돌격해왔는데, 지휘권도 없는 경상 감사 심연의 종사관 도경유가 제멋대로 비장 박충겸을 참수하고 총포 사격을 명한다. 총포 사격으로 청군은 100보 떨어진 지점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포수들이 공명심에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떨어지고 만다. 

그 덕분에 화약을 더 달라고 소리치고 경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청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돌격하여 목책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안동의 영장 선세강이 직접 지휘하여 화살 30여 발을 쏘았지만 나무 방패에 맞고 나중에는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결국 적의 칼에 사망하고 만다. 

청군이 목책 안으로 들어오자 조선군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져 달아나고 허완은 겁을 집어먹고 3번이나 말에서 떨어진 끝에 도망치던 아군에게 밟혀 죽었다. 일설에선 허완이 말에서 3번 떨어지고 분전하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다른 설에선 청군의 칼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이것으로 좌군은 완전히 무너지기에 이른다. 그나마 평지였기 때문인지 다수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기는 했으나 지휘부가 전멸하여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참고로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허완은 나이가 많고 겁에 질려 출병을 할때 눈물을 흘렸고, 그 주변 사람들은 나라가 망했다며 통곡을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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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민영이 지휘하는 군은 그나마 허완 부대에 비해 군기가 잡혀 있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지급된 10발의 탄약을 모두 소모 한 탓에 다시 탄약을 나누어 주고 있는데 종사관 도경유에게 처형당한 비장 박충겸의 아들이 원한을 품고 폭발 사고를 일으켰다. 

결국 탄약을 보급하던 수령 2명과 군사 수십이 폭사하고 조선군은 동요하게 된다. 이 때 팔기군 300기가 공격을 감행하자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은 그대로 붕괴됐고, 진을 친 곳도 후퇴에 불리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부대는 확실하게 전멸을 당했다. 한편 경기도 여주 부근에 주둔하던 경상 감사 심연은 쌍령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자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후퇴한다.

청군이 소수의 병력으로 조선군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나머지 병력으로 전과 확대전을 벌였기에 조선군 지휘부는 완전히 소멸했다.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적어도 2,6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7만의 병력 중 1천이 전사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이다. 나머지는 생환했으나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지휘부가 전멸한 상황이라 수습되지 못하고 그대로 흩어져버렸다. 경상도 근왕군은 건재했으나 이 패배를 접하고 사기가 꺾여 반격을 하지 못하고 조령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직후 인조가 항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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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쌍령 전투에 대한 평가

a) 4만 병력 패퇴설

이 전투가 유명해진 이유는 4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고작 300기의 청나라 기병에게 패퇴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인데, 이 청나라 기병 300명이 당시 전투에 참여한 모든 청군의 숫자라고 단정할 근거는 희박하다. 물론 전체 청나라 병력 수는 300명이 아닌 6,000여명 정도로 추정이 되지만, 민영이 이끄는 조선군 부대와 교전한 청나라 팔기군의 숫자는 300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인조 34권, 15년(1637년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2월 26일 2번째 기사).

우선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을 지휘했던 장수는 『청사고』와 『청태종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아이신기오로 요토'로 추정되는데,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성해응도 그의 문집인 『풍천록』에서, 쌍령 전투 당시를 '至如同時雙嶺之戰 虜帥岳託乃以三十三人'라 서술하여 적의 사령관을 요토와 33인의 장수로 책정한 바가 있다. 

요토는 거의 바닥에 가까운 우리 나라에서의 인지도와는 달리 누르하치의 사실상 장남인 '다이산'의 장남, 즉 누르하치의 손자로 청 태종 홍타이지를 황제로 옹립시켜준 실력자이며, 당시 팔기군 중 한 부대인 양홍기의 대장이기까지 했다. 

당시 팔기의 기군 하나 당 책정된 병사가 만주 팔기의 경우 7500명이 상한이라는 점, 『황조문헌통고』에 '(청 태종이) 숭덕 원년(1636년) 12월에 요토 등으로 하여금 3000명의 군대를 이끌게 했다'는 기록과 이후 병력 증원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는 점을 고려해보면 쌍령 전투 당시 요토가 이끈 병력은 3000명은 넘겨도 최대치인 7500명에는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요토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철군할 때 후방 부대를 통솔하는 임무를 맡게된다.

그러나 의주 부윤 임경업이 요토를 백마 산성으로 끌여들여 술 잔치를 벌이는 척하면서 요토를 베었다. 
또한, 지휘관이 요토 말고 1명 더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화 전투에서 지휘를 했던 유림이 훗날 병자호란이 끝나고 쌍령 전투에 참전한 군관에게 그 놈들 지휘관이 누구길래 우리 조선군은 그렇게 엿 먹은거임?라고 물어보았는데, 그 군관은 "오곽사라는 자와 왕족인 아이신기오로 요토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그래서 요토 말고 오곽사라는 장수도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승정원 일기에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의 전투 상황을 술회하며 올린 상소가 기재되어 있는데,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라며 쌍령 전투 당시 청군이 수천 명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방 전사 편찬 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도 비록 근거가 되는 사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쌍령 전투에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완의 반대편 진영에 주둔했던 민영을 사령관으로 하는 조선 병사들은 불과 팔기군 300명의 돌격에 허무하게 전열이 무너져내린 것은 사실이다. 애초 허완과 민영은 각각 집결한 조선군 병력을 두 부대로 나누어 쌍령 고개 양쪽에 진을 쳤는데, 그 중 민영이 이끌고 있던 수천 병졸들이 팔기군 300명의 돌격에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허무하게 와해 및 전멸한 것인데, 실제 참전한 병력이 8천이고 그 중 절반이 4천이니까 무려 10배 이상에 달하는 병력차를 극복한 것이다.

b) 지휘관 무능설

정신적으로 잘 훈련되지 않고 머릿수만 불린 병사, 급히 출진하느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물자, 무능한 장교들의 형편없는 지휘와 갑작스레 이루어진 지휘관의 처형이 낳은 총체적 비극이란 인식이 있으나, 지휘관이었던 허완은 사람 보는 눈이 매우 깐깐한 이순신 장군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유성룡에게도 천거받아 여진족을 상대로 승전 경험도 있던 장수였다. 

위의 글에서도 적혀있듯이 허완이 3번 낙마했단 사실 자체가 전열이 붕괴되는 상황에도 지휘권을 유지하기 위해 낙마를 했음에도 말에 세번씩이나 다시 탔단 이야기며 조총수들은 탄약과 화약을 부족하게 보급받은 것도 아니었다. 

속오군의 훈련도를 가지고 뭐라 그러는데 훈련도가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조선군 지휘관들이 몰랐던 것도 아니고 훈련도를 감안하지 않은 작전을 세웠다가 무너진 것도 아니다.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도 속오군이 주축이 되어 이긴 전투였고, 훈련 수준이 낮지만 그래도 전의가 남아 있는 속오군을 어떻게든 추스려 그나마 사상자가 최소화되고 방어가 용이한 전장에 배치하고 지휘관이 적극적으로 지휘를 하니 비록 전투 직후 탄약이고 뭐고 다 떨어져 퇴각해야 하긴 했지만 우세한 청군을 적어도 한 번 막아낼 수는 있었다. 

따라서 쌍령 전투의 가장 큰 패인은 군무에 무지한 문신이 제멋대로 지휘에 개입하면서 총 지휘관이 제대로 부대를 통제할 수 없어진 것에 있다.

승전이었던 광교산 전투와 김화 전투는 모두 지휘관이 무신이었고 지휘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제로 쌍령 전투를 고증해본 결과 패장인 허완의 지휘는 군사의 배치부터 지휘 요소에선 부족함이 없었다. 단지 최전선을 맡은 하급 지휘관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아군에게 목이 잘려 부대의 통제가 힘들어진 상황을 감안하지 못한것이 결정적인 원인인데 이 경우가 워낙 상식을 벗어난 일인지라 허완의 책임 요소는 없다고 봐야 한다. 부대 통제를 위해 만든 장교단이 아군에게 박살나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즉 군사에 무지한 문관이 정신나간 훈수질로 역사에 남을 패전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역으로 승리하거나 패했어도 상식적으로 패할 만해서 패한 전투는 다 지휘관이 제몫을 한 전투였다. 

허완의 부대가 후퇴했더라도 다른 부대가 남아있었기에 방어는 가능했을 수도 있으나 민영 역시 문관인데다 적도 아닌 멍청한 문관에게 참수당해 죽은 박충겸의 아들이 탄약고를 날려버려 방어에 실패하고 남은 부대도 후퇴했다.

c) 여타 패인

참고로 근대 영국군은 다른 나라에 비해 속사를 추구하면서도 전투 경험 많은 부사관에 따른 사격 통제를 극도로 중시하였는데, 바로 위에서 좌군이 무너지던 것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적군이 다가오면 사람은 공포심이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겨버리게 되고, 일단 옆에서 누군가 쏘기 시작하면 그 분위기가 퍼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경험을 통해 이를 알고 있었던 영국군은 적군의 눈에서 흰자가 보이게 될 때까지 이를 악물고 사격을 참도록 훈련시켰으며, 부사관의 지시보다 앞서 방아쇠를 당긴 병사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응징이 가해졌다. 

사실 전열 보병 전술이 극대화되려면 가혹한 군기와 통제가 필수이다. 영국 전열보병 레드 코트가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두 가지 요인은 실탄 사격 훈련과 엄정한 군기였다. 

쌍령 전투의 경포수들은 기본적으로 사냥꾼들이었던만큼 화승총을 다루는 데에는 익숙했으나 군기가 부족했다. 이런 군기를 잡는게 지휘관인데 전투 직전 목이 잘려나가고 교체되면 군기고 뭐고 없게 된다. 참고로 레드 코트들의 엄격한 군기는 엄중한 형벌에 기반했는데, 그 정도가 '확실하게 맞아 죽는 후퇴를 하느니 확률적으로 살 가능성이 있는 전열을 지킨다'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철저히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가혹 행위로 보아서는 안된다. 

어떠한 행위에는 태형 몇 대라는 식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순신 장군 또한 해전에서 멋대로 포격을 감행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최소 참수형을 시행하였다. 군대에 있어서 통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인다.

3. 기타

병자호란 부분은 대략 어떤 전투들이(승전, 패전을 가리지 않고) 벌어졌는지 지도로 표기가 안되어 있기에 교과서에는 대개 실려있지 않다. 심지어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승리한 승전인 광교산 전투 와 자모산성 전투도 실려있지 않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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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병자 18-05-27 09:26
   
속오군의 편제인 속오법은 영장(營將) 통솔하의 영(營)을 분군 편제상 최상의 단위 부대로 삼았고, 영에는 5개 사(司)를 두고, 1사에는 5개 초(哨), 1초는 3기(旗), 1기는 3대(隊), 1대는 화병(火兵) 1명과 합쳐 11명의 병사로 조직되며, 사에는 파총(把摠), 초에는 초관(哨官), 기에는 기총(旗摠), 대에는 대총(隊摠)을 각각 지휘관으로 두었다. 따라서 한 개의 영에는 영장 1명과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및 2,475명의 병사로 편성된 셈이다.
속오군제가 시행되면서 각 지방의 주민은 대부분 속오군에 편성되었다. 이들은 병농일치제에 따라 평상시에는 농사와 무예훈련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소집되어 국가 방어에 동원되는 체제로서 국가의 물질적 급여는 없었고, 다만 부분적으로 보인의 지급이 이루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속오군 [束伍軍] (두산백과)

당시 경상도 속오군은 2만 4천이었고, 위 링크의 속오군 편제상 대부분이 조총병이었을수가 없음.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간때가 12월 14일.
쌍령전투가 1월 2일
2주만에 경상도 속오군 2만 4천을 집결시킨후 경기도까지 행군해서 싸웠다고?
조선시대 자동차가 개발되 무슨 차량화 기동부대가 있었나?
조선 지방군이 마라톤 선수급의 체력을 가졌고, 현대의 국가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통신능력, 도로 인프라, 동원능력이 갖춰져 있어야 됨.
그리고 총병력이 2만 4천인데 어떻게 4만이 참전해서 전멸할수가 있는가.
상식적으로 봤을때 쌍령전투같은 일제때 조선의 전쟁사에 대해 정리해 놓은 내용은 믿을수가 없음.
기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조선은 언제 전쟁이 터져도 바로 대응이 가능할만큼 전쟁준비를 충실히 갖추고 있었다는것이됨.
     
촐라롱콘 18-05-27 13:24
   
인조 남한산성 입성 : 12월 14일
청군의 침략과 인조의 근왕군 소집 급보가 경상도 일대에 하달된 것은 12월 19일
경상감사 심연 또는 경상우병사 민영의 병력이 충주에 이른 것은 12월 23일

참고로 당시 경상감영은 대구, 경상우병영은 울산, 경상좌병영은 진주에 소재해 있었습니다.
급보를 접하고 대구 출발 기준으로도 불과 만 4~5일 만에 경상도권역을 벗어나 충주에 이를만큼
신속한 진군 속도였습니다.

저 정도 속도라면 충주에서 남한산성 또는 광주 쌍령 일대까지는 여유잡고 가도 만 3일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 정상적인 속도라면 12월 26일 경에는 남한산성 또는 쌍령 인근에
도달해야 정상적인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쌍령전투는 다음해 1월 2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충주 일대에서 6~7일 가량을
지체한 셈입니다.
그 이유는 12월 19일 직후에 출발한 병력은 경상감영와 경상좌우병영 인근 병력,
또는 오늘날 경상북도일대 병력만 급하게 출발했기 때문에.....다시 말해 예정된 경상도 일대의
대부분 병력이 12월 23일 무렵에 아직 충주에 집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경상남도 일대에서 소집되어 북상하는 병력들을 기다리느라 지체했다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일 것입니다. 

경상남도 일대의 병력들이 동원된 근거로는 진주, 울산에서 출발한 경상좌우병사 뿐만
아니라... 쌍령전투 전사자 명단에 창원부사 백선남 또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경북 일대의 지휘관인 상주영장, 안동영장 등도 전사자 명단에 들어있음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는 경상도병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수 천명 규모에 달하는 충청병사 이의배의 병력까지 가세했습니다.
(이의배 또한 쌍령전투에서 전사했음은 물론입니다)

관심병자님이 위 댓글에서 언급한 인조시기의 경상도 속오군 병력규모는
대체로 2만 4천명 가량이 틀리지는 않지만 저 병력규모에는 보인은 제외된 숫자입니다.
(유사시에는 보인들 또한 동원대상입니다.)

그리고 서류상이기는 하지만 보인까지 포함한 경상도 일대에서 동원가능한 병력규모가
무려 10만 이상에 달할 정도로... 오늘날에도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영남지역의 인구가 상당하듯이
그 당시에도 전국 팔도 가운데 경상도의 병력자원 규모가 타도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리고 유사시 한양을 포함한 수도권에 파견될 어영군 병력규모 가운데 경상도에 할당된
8천명 가량 또한 속오군과는 별개의 제외된 숫자입니다.
쌍령전투 당시 어영군 8천은 경상우병사 민영이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
.
결과적으로 쌍령전투에 참전한 병력은 경상도속오군이 주축이기는 하지만....
그밖에 보인, 경상도에 할당된 어영군, 충청병사 이의배 휘하의 충청도군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면 쌍령전투의 조선군 총 병력이 4만 병력에 달한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봤을때 쌍령전투같은 일제때 조선의 전쟁사에 대해 정리해 놓은 내용은
믿을수가 없음.]]...........??????
.
.
쌍령전투의 경상도군 4만 규모는 동시대 나만갑의 병자록,
당대보다 100여 년 이후이기는 하지만 조선후기에 저술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동일하게 나오는 규모입니다.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일제타령, 식민사관 타령 하시는군요....^^)

게다가 쌍령전투 직후 1차로 청나라군이 보이는 시신들을 모아 무더기로 불태웠으며....
2차로 쌍령전투에서 전사한 병력들의 가족과 문중에서 사람들을 보내 시신을 수습했는데도
전란이 끝나고 쌍령 일대에 버려진 시신을 수습한 숫자만 8천여 구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전란직후에 대대적으로 시신들을 수습한 이후에도... 오랜 시기에 걸쳐
쌍령을 포함한 광주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무더기 백골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쌍령전투에서의 전사자만 2만규모라는 숫자가 결코 과장된 숫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
.
전사자가 2만에 달했다면... 결론적으로 쌍령전투에 참가한 총병력규모가
4만에 달했다는 것도 과장된 숫자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국산아몬드 18-05-27 17:51
   
본문을 안보셨나?
1. 8천명이 투입되었다고 추정된다는데 4만명 병력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 이 중에 실제 투입된 병력은 8천으로 이들이 허완, 민영의 지휘하에 전투에 참여했는데,
 한번에 4만 명을 다 동원할 수 없어서 먼저 집결한 병력으로 추정된다

2 전사자가 2600명이라고 하는데 2만 전사자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요?
 - 용인 전투 때와 달리 적어도 2,600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7만의 병력 중 1천이
  전사 한 용인 전투 때보다 훨씬 큰 피해이다

관심병자님 의견처럼 속오군 외에 더 많은 군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1주일만에
그만한 병력을 어떻게 모으고 배치하고 출동시킵니까? 현대에서도 불가능한데
본문처럼 8천의 군사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로 보이며 전사작 2600명이
합리적입니다

3. 허완이 이끄는 좌군에는 수천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하는데 300명은 또 뭐요?
 - 승정원 일기에는 허완의 아들 허장이 자신의 아버지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대해 당시
  의 전투 상황을 술회하며 올린 상소가 기재되어 있는데, '날이 밝자 적기 수백이 진
  앞까지 쳐올라왔는데, 이어 수천의 적기가 산성으로부터 엄습해오니, 바야흐로
  산위에서 총탄과  화살이 서로 오고갔습니다.'
 - 우리나라의 국방 전사 편찬 위원회에서 나온 『병자호란사』도 비록 근거가 되는
  사료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쌍령 전투에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군 민영의 군대는 300명 청기병만 참전했어도 좌군의 허완군대는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잖아요

본문 내용은 보지도 않고 청군 300기명에 의해 4만 병력에, 2만 전사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진짜 끈금없는 사람이네
               
촐라롱콘 18-05-27 21:56
   
1.[전사자가 2600명이라고 하는데 2만 전사자는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나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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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자 2,600명이라는 언급은 아마도 아래 인용 부분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충청 감사 정태화(鄭太和)가 치계하기를....
"남한 산성과 금화(金化)에서 전사한 군사들에게는 모두 급복(給復)하고 모조(耗租)를
주었습니다. 본도의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천 6백여 명이니, 똑같이 휼전을 시행하는 것이 온당할 듯합니다. 또한 전사한 군사 중에 부모가 있는 자는 마땅히 조정의 분부에 따라 모조를 지급해야 하는데, 수량이 부족합니다. 원곡(元穀)을 첨가해 각각 2석씩 지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충청도 출신으로 험천, 쌍령, 강화도에서 전사한 이들이 2,600여 명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당대 기록인 병자록에 의하면....쌍령전투 직후 청나라군이 보이는 죄다 시신을
모아다가 죄다 불태우고... 이후에 전사자 가족들이 상당수 시신을 수습한 이후에....
전란이 끝난 직후 쌍령 일대에서 수습한 시신만 8,000여 구에 달하며....
이후에도 오랜 시기에 걸처 쌍령과 광주 일대에서 무더기 백골이 여러 차례 발견이 되는데
전사자가 고작 2,600이라니....^^

더구나 쌍령전투 당시 비교적 후방인 여주일대에 있었던 경상감사 심연을 제외하고는
경상좌우병사, 충청병사, 안동영장, 상주영장, 창원부사... 주요 수뇌부들 상당수가
전사한 전투에서 전체 전사자가 2,600명이라는 것도 상식적으로 상당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2. [[실제 투입된 병력은 8천으로 이들이 허완, 민영의 지휘하에 전투에 참여했는데,
 한번에 4만 명을 다 동원할 수 없어서 먼저 집결한 병력으로 추정된다]]
.
.
.
기록에는 경상우병사 민영이 거느린 어영군만 8,000명이라고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상좌병사 허완이 거느린 병력은...??
경상감사 심연이 거느린 병력은...?? 충청병사 이의배가 거느린 병력은..??

그리고 어영군 이외에 속오군, 보인, 충청도병력은 왜 제외를 하시는지...???


3.[[우군 민영의 군대는 300명 청기병만 참전했어도 좌군의 허완군대는 6000명의
청군이 참전했다잖아요 본문 내용은 보지도 않고 청군 300기명에 의해 4만 병력에,
2만 전사라니?]]..........???
.
.
.
저는 쌍령전투 청군 규모가 300명이라는 언급을 한 적이 없는데요....???
                    
국산아몬드 18-05-28 00:02
   
일단 병자록은 사료가 아닙니다
나만갑이라는 조선의 문신이 작성한 개인 기록일 뿐입니다. 그러니 개인기록에서
시신수를 1000이던 10000명으로 적었던 검증된 기록이 아니란 뜻이죠

님이 말한 본도의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천 6백여 명이니.. 가 바로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쌍령전투에서의 사망자 숫자인데 왜 은근 슬쩍 넘어갈려고 하죠?

이 블로그를 보시면 왜 전사자가 2600명이 합리적인지 설명이 됩니다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180228474

근거로는
1.조선이  빠르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어도 5일 내로 4만은 무리
2. 쌍령 전투 이후 4만을 잃은 상태에서 경상도군이 조령으로 진격하여 대규모 군세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더욱 이해가 안감
3. 대쌍령의 229고지와 125고지는 대규모 병력이 들어가기에는 공간이 협소함
4. 청군은 조선군을 상대할 때 정면 돌파를 절대 시도하지 않았음을 을 감안하면
  조선군은 실제로 훨씬 적은 규모였으며 청군은 이들보다 더욱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왔음을 의미함

[출처] 쌍령 전투에서 과연 조선군은 4만이었는가에 대한 고찰|작성자 오로라
                         
촐라롱콘 18-05-28 00:08
   
[[본도의 험천(險川)·쌍령(雙嶺)·강도(江都)에서 전사한 자들이
도합 2천 6백여 명이니.]]
.
.
제발 위 글에서 "본도"라는 언급을 눈여겨 보세요....!!!

저 숫자를 언급한 이는 충청감사 정태화이며.. 본도(충청도) 출신으로서
험천,쌍령,강도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이 2,600명이라는 말입니다....!!!

쌍령전투에서의 전체 전사자 숫자가 아니라요....!!!

어디서 듣보잡 블로그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아무런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하다니...



[[쌍령 전투 이후 4만을 잃은 상태에서 경상도군이 조령으로 진격하여 대규모 군세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보면 더욱 이해가 안감]]............???
.
.
쌍령전투 직후 쌍령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여주 일대에서 대기했던 경상감사 심연은
오히려 충주도 모자라 문경새재(조령)까지 후퇴한 상황인데요....???
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180도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게다가 심연의 경상감영군 1,000여 명 이외에 조령에 있었던 추가병력은 고작
수 백명 수준인데요.....???

게다가 험천, 쌍령, 광교산 전투....경상-전라-충청도 근왕군들이 용인-광주일대에서
큰 타격을 당한 뒤로는... 특히 청군이 밀집되어 있었던 한양-남한산성일대와
비교적 가까운 충청도권은 조령 바로 인근의 괴산까지...

오늘날의 충남방면으로는 청주(오늘날 충북이긴 하지만), 공주, 논산일대까지
청군이 진출했고... 심지어 청군이 일시적으로 전북에 해당하는 익산 일대까지
출몰하기도 했습니다.

충청-전라 익산일대까지 출몰한 청군 병력은 고작 수 백 단위의 비교적
소수병력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충청-전라에서 이를 제지하지 못했을 정도로....

당시 충청-전라의 가용한 병력들 대부분이 경기 지역으로 차출되어 큰 타격을 입고
와해되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나마 전란의 기간이 짧아 영남권으로는 청군이 진입하지 못했고
호남권으로도 호남 최북방의 익산-완주 일대를 제외하면 청군이 진입하지
못했던 것이 다행일 것입니다.
                         
국산아몬드 18-05-28 00:19
   
당신은 그러니까  충청감사 정태화의 말에서
충청도 군이 경기도의 험천(險川)·쌍령(雙嶺), 그리고 강화도인 강도(江都)에까지 가서
싸웠단 말인가요?

그리고 충청도군의 지휘부는 이전의 험천 전투에서 거의 전멸당했어요
그런 충청도군이 어떻게 스스로 군대를 조직해서 쌍령과 강화도에서 싸워요?

그리고 경상감사 심연의 휘하 부대가 4만명인데 전부 쌍령전투에 투입되어 패했다면
 심연은 무슨 병력으로 조령으로 후퇴든 진군이든 한단 말입니까?

당신 제정신인가요?

정세규(鄭世規)가 험천(險川)에서 전투를 치룰 때 좌영장 최진립(崔震立), 우영장 심일민(沈逸民), 별장 황박(黃珀), 중군 이건(李楗), 참모관 이경선(李慶善), 방량차사원(放粮差使員) 이상재(李尙載), 군기차사원 김홍익(金弘翼), 심약(審藥) 이시량(李時亮)을 대동하고 갔는데, 심일민은 힘껏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을 뻔하여 벗어났고, 최진립 이하는 모두 진중에서 죽었습니다. 해조에게 표창하고 증직하게 하고 심일민은 관직을 상으로 주게 하소서."

[출처] 쌍령 전투에서 과연 조선군은 4만이었는가에 대한 고찰|작성자 오로라

듣보잡 블로그라도 충분한 근거와 논리가 있으면 됩니다
                         
촐라롱콘 18-05-28 00:26
   
험천전투는 충청감사 정세규가....

쌍령전투는 충청병사 이의배가...

강화도에서는 충청수사 강진흔이 수군을 거느리고 참전했습니다.

이제는 원글을 인용해드려도 아예 해석도 못하시네요...!!! ^^



[[당신 제정신인가요?]]........???
.
.
님이야말로 제정신인가요.....??
     
페닐 18-05-27 14:46
   
조선 동원체계는 상당한 수준이였고, 병기 준비도 항상 전시 수준이였음
딴지걸때 모르는걸로 딴지걸면 욕만 먹음...관심병자라니 이해는 가지만...
기록의 나라 조선답게 모든게 체계적으로 기록 되고 정리 되어 남아있으니 조금만 뒤져봐도 알수 있는건데...ㅉㅉ
히스토리2 18-05-27 10:13
   
그럴수 있겠네요 ^^ 제가 언급한 내용은 암튼 300에 까진 당시의 슬픈 현실입니다.....  저도 간간히 관심님과 비슷한 생각을 적었는데요, 암튼 이 전투로 인해서 모든게 끝나버렸지요
     
국산아몬드 18-05-27 18:02
   
모든게 끝난게 아닌데요

쌍령전투 이후로도 1월에 4번의 전투가 더 있었고 그중 광교산 전투와 백동전투에서 청군 수천명을 죽이는 대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유재란에서 청군의 출혈도 컸습니다
청나라의 실력자 요토와 청태종의 매부까지 전사했지요

정유재란 패인은 남한산성에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광교산 전투(승)
  1637년 1월 4일부터 1월 6일까지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전라도 근왕병이
  청나라 군사 수천명을 죽여 승리한 전투이다.청태종의 매부 전사

강화성 전투(패)  :
  1637년 1월 21일  강화도 수비군이, 청군에 맞서, 강화성을 수비하던 전투를 말한다

탑동 전투(패)
  1637년 1월 26일 평안도관찰사 홍명구와 평안도병마사 유림과 순안현령 허노가 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김화에서 청군을 만나 싸워 1000명 전사

백동 전투(승) 
  1637년 1월 28일 홍명구의 패잔병을 쫓다가 유림의 조선군의 진지의 진입해 벌인 전투로 
 청의 군사중 90%인 5000명의 청군이 전사함.

 

  백동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물자부족으로 퇴각하는 바람에 인조는 패전한 것으로 착각하고

 투항의 계기가 되었답니다
          
촐라롱콘 18-05-27 22:15
   
1.[[그리고 정유재란에서 청군의 출혈도 컸습니다 청나라의 실력자 요토와
청태종의 매부까지 전사했지요 정유재란 패인은 남한산성에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
.
정유재란이 아니라 병자호란이겠지요....^^
그리고 요토가 병자호란에서 전사했다니...?? 이 무슨 역사왜곡인지....???
요토는 병자호란 이후인 1639년 명나라 산동-제남 원정에서 전사했는데....???

그리고 남한산성에서 인조와 조정은 식량이 떨어지기 이전에 강화도 함락으로
전의를 상실했고(왕실과 신하들 가족들이 죄다 포로로 잡혔으니...)

대략적으로 강화도 함락 이후 시기부터는 정작 싸워야 할 남한산성에서 농성중인
무관들과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버틴 오랜 농성을 견디다 못해,
1월 20일이 넘어가는 시점부터는 화친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또한 척화파 문신들을
위협하면서... 임금에게는 이들을 죽이라고 농성하는 형국에까지 이르렀는데.....   


2. 백동 전투에서 병안병사 유림의 병력이 청군 90%를 전사시켰다면
어째서 전투가 끝나고 야음을 틈타 남은 병력이 10% 1,000명도 안되고
그나마 부상자들도 상당했을 한줌도 안되는 청군들 몰래 전장을 철수했을까요...??

전라병사 김준룡의 광교산 전투도 역시 마찬가지....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는 청군을 물리치고
청군 고위급 지휘관인 양고리를 전사시키고 청군에게 큰 타격을 가한 것은 사실이지만...
김준룡의 전라도군도 큰 피해를 입었고, 무기-화약 소모가 커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는 것이
어려워 야음을 틈타 전장을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월 28일의 백동전투와 인조투항과는 아무련 관련이 없습니다.
1월 28일경에는 이미 인조가 청태종에게 투항을 전제로 강화조약의 세부조건까지도
이미 결정된 시기였습니다. (1월 30일 삼전도 항복의식이 거행되지요)
.
.
그리고 각 전투마다 수 천명의 청나라군을 전사시켰다는 언급은 좀 순화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목숨을 잃은 청나라군 총사망자 규모는 모두 합쳐 7,000명 규모입니다.
개중에는 전사자 뿐만 아니라 부상이 악화되어 죽은 이들, 병사자까지 포함된
숫자입니다.

실제로 청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직후 청태종만 서둘러 조선을 철수한 것도
당시 청군 병영에 천연두가 유행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히스토리2 18-05-27 12:26
   
부대 편제 등을 보면 3천~7천500명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 숫자를 인정하더라도 쌍령전투는 치욕스러운 패전이다.

지휘관 무능과 병사 훈련 부족 등이 복합 패인이다.
     
촐라롱콘 18-05-27 14:15
   
청나라 팔기군 편제를 보면,
300명 가량이 1니루,  5니루가 모여 1잘란(1,500명 가량)
5잘란이 모여 1구사(7,500명 가량)이며    구사=1기와 동일한 개념입니다.

따라서 1기의 병력규모 또한 7,500명 가량이 맞기는 하지만
대체로 만주팔기는 위의 숫자에 근접하거나 또는 초과되는 경우도 있었고
몽고팔기는 1니루가 대체로 200명 내외일 정도로 니루,잘란,구사의
전반적인 병력규모 또한 대체로 만주팔기에 비해 2/3 이하였습니다.


쌍령전투에서의 청나라군 지휘관이 1기의 수장이자 청태종의 조카인
요토인 것으로 미루어볼때 3천~7천5백이라고 추산하는 것 같은데

청나라군 입장에서 대외원정일 경우에는.....대체로 1기의 병력 가운데
1개잘란(1,500명) 규모에 해당하는 병력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근거지에 잔류병력으로 남기고 출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1기의 정원 가운데 7,500명 가운데 실제 조선에 출정한 병력은
6,000명 가량으로 추산되는 것이며....
(이는 정친왕 제이합랑이 이끄는 1기는 명나라에 대비하여 심양에 잔류시키고
조선에 출정한 만주7기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쌍령전투에 참가한 요토의 청나라군은 최대 6,000명으로 추산되며....

또한 최소 3,000명으로 보는 시각은 조선에서의 주둔지에서도 전 병력(6,000명)을
출정시켰다기보다는.....주둔지 잔류병력을 제외하고, 쌍령이 아닌 인근 지역에서
작전중이거나, 또는 쌍령으로 함류할지도 모를 다른 조선군들을 대비하여 여러 길목에
분산시킨 병력들까지 제외시킨 나머지 병력의 추산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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