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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7 11:30
[기타] 네르친스크 조약: 청과 러시아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965  

1689년 8월 27일, 러시아와 청나라의 대표단이 네르친스크(Nerchinsk)라는 변경도시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727년 캬흐타(Kiakhta) 조약에 의해 보완되면서 러·청 양국의 외교적인 기본틀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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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러시아와 청, 이 두 세력이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것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진행된 유라시아 대륙의 분할과정, 즉 러시아가 대륙의 서쪽에서 흥기하여 시베리아로 진출하다가 마침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만주족이 대륙의 동쪽 끝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하고 몽골을 비롯한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단순히 러·청 양국의 국경 설정과 교역조건에 관한 내용을 담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21세기 오늘까지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즉 ‘중앙유라시아의 분할’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의미를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청이라는 두 제국의 탄생과 팽창 과정, 나아가 제3의 세력인 몽골의 동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만주족의 등장과 팽창에 대해서, 다음 주에는 몽골족의 동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명대 말기 동북 변경의 만주지역에는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 측 자료에는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주르첸(Jurchen)’이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며, 이들은 과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한 금(金)나라를 건국한 민족이다.
당시 중국인은 변경의 여진인을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 및 문화적 발전 정도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건주(建州)여진, 그 북쪽에 해서(海西)여진, 가장 먼 곳의 야인(野人)여진이 그들이다. 건주여진은 중국이나 조선의 변경과 비교적 가까웠고, 해서여진은 초원과 접하여 몽골인과 접촉이 많았으며, 가장 멀리 떨어진 삼림지대에 살던 야인여진은 주로 수렵을 생업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집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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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제국의 기틀은 놓은 사람은 누르하치(Nurhaci·1559~1626년)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건주여진 출신의 수령으로 여진 집단에 대한 내적 패권은 물론 주변 몽골부족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립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과거 중국의 북부를 지배한 금나라에서 찾으면서 나라의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칭했으나 이 명칭은 그의 후계자인 홍타이지(Khongtaiji·1592~1643년)에 의해 ‘대청(大淸·Daicing)’으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여진’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신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명칭을 채용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여러 차례 중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요동지방의 웅관(雄關)인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홍타이지의 뒤를 이은 순치제(順治帝·재위 1643~1661년)는 불과 여섯 살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국사는 섭정들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의 실력자는 그의 숙부 도르곤이었다. 마침 그때 만주족에게 산해관을 돌파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남부에서 반란이 격화되고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상하면서 수도가 함락되자, 위협을 느낀 산해관의 사령관 오삼계(吳三桂)가 1644년 스스로 청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자청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주족 팔기군은 활짝 열린 산해관의 문을 통해서 북중국으로 쇄도해 들어갔고, 오삼계와 함께 이자성을 물리치고 드디어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1644년의 이 사건을 ‘입관(入關)’이라 부른다. 물론 문자 그대로 풀자면 이 말은 산해관을 통해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에 불과하지만, 동북방의 만주인들이 세운 청나라가 드디어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식 왕조’로 전환에 성공했음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어왔다.


마치 과거 몽골제국의 쿠빌라이가 1260년 카라코룸에 있던 수도를 북경 지역으로 옮기고 ‘중통(中統)’이라는 중국식 연호를 세운 것을 두고, 유목적인 몽골제국에서 중국식 왕조 원(元)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상징적인 계기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만주의 황제들은 한족이 쌓아올린 전통적인 중국 문화의 위대한 수호자로 묘사되었고, 황제를 위시한 최고 지배층은 물론 만주족이었지만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 만한병용책(滿漢倂用策)을 썼고, 마침내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에는 황제를 제외한 최고위 집권층마저 한인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644년의 ‘입관’은 청나라가 드디어 한, 당, 송, 원, 명의 뒤를 잇는 중국의 왕조가 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인 셈이다.


그러나 ‘대청(Daicing)’이라는 나라는 결코 ‘중국’의 왕조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청나라는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티베트, 몽골, 만주를 포괄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했고 과거 명나라의 영역이던 소위 ‘본래의 중국(Proper China)’은 그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군주는 한족의 지배자인 ‘황제(皇帝)’이자 동시에 만주족과 몽골족을 지배하는 ‘카간(Qaghan)’이었고, 나아가 티베트의 불교도들을 보호하는 세속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Chakravartin)’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다수 학자는 청나라를 다민족·다문화·다언어의 제국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경향을 가리켜 ‘새로운 청대사(New Qing History)’라는 이름까지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청나라의 이 같은 ‘다중성’이 소위 ‘입관’하고 나서 중국·티베트·신강·몽골을 지배하게 된 뒤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입관’하기 전, 즉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에 이르는 시기에 거의 그 원형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와 문화 방면에서 몽골의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만주어로 ‘수령’을 뜻하는 ‘버일러(beile)’를 칭하던 누르하치는 1607년 주변 몽골부족을 복속시킨 뒤 ‘한(han)’을 칭함으로써 과거 몽골제국으로 소급되는 중앙유라시아 전통의 군주권을 표방하기 시작했고, 1635년 홍타이지는 몽골의 군주였던 릭단 칸(Lighdan Khan)이라는 인물을 격파하고 원나라의 국새(國璽)를 받게 되는데, 그는 이것을 ‘천명’이 자기에게로 옮겨온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가 ‘후금’이라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족 통치자들의 주변에는 ‘박시(baksi·중국어 ‘博士’라는 말에서 기원)’라는 칭호로 불린 다수의 문관이 포진돼 국가의 문서행정은 물론 통치 일반에 관한 광범위한 자문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만주와 몽골, 중국과 조선 등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체득한 사람들이었으니, 다민족·다언어 국가인 청제국의 지향과 잘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한 학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경계인(境界人·transfrontiermen)’이라고도 불렀다. 무엇보다 초기 만주인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게 한 조직으로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된 팔기(八旗)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몽골제국 시대의 천호제(千戶制)로 소급되는 몽골 유목사회의 사회군사조직을 본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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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rchinsk -러시아 자바이칼 지방의 소도시. 인구는 1만 5천 명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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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청의 변경도시 네르친스크를 묘사한 동판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치제는 비록 중원의 지배자가 되긴 했지만 섭정왕들에 의해 휘둘리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1661년 강희제의 즉위와 함께 청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팽창을 시작한다. 1654년 출생한 그 역시 여덟 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1669년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후 1722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2년이라는 재위를 누린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에 삼번(三藩)의 난(1673~1678년)이 진압되고 대만에 근거를 두던 정성공(鄭成功)의 세력이 평정되는 등 중국 지배는 요지부동의 기반 위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외적인 팽창도 놀라웠다. 특히 러시아와의 충돌 및 협상, 그리고 몽골세력의 평정이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다. 

현재 우리가 몽골인을 나눌 때 보통 내몽골과 외몽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용례는 사실상 만주인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즉 먼저 청나라에 복속한 고비사막 이남의 몽골인을 ‘내몽골’이라 부르고, 다음에 복속한 고비사막 이북의 몽골인을 ‘외몽골’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몽골인의 기본적인 구분은 이처럼 만주와의 정치적 관계에 기초해서 남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알타이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의 칭기즈칸 후예에 의해 통치되는 ‘동몽골’과 서쪽의 비(非)칭기즈칸 계열이 지배자로 있는 ‘서몽골’로 나뉘는 것이었다.


 강희제가 즉위할 무렵 청나라는 동몽골 중에서도 고비사막 이남의 내몽골인만을 복속시켰을 뿐, 나머지 몽골인은 교역을 위해서 ‘공납’을 바치는 시늉만 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제 겨우 중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청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여전히 두려운 기마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우려는 1687년 말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지원을 받는 갈단(Galdan)이라는 인물이 서몽골을 통합한 뒤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 것이다.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 세워진 대사원 에르데니 주우(Erdeni Juu)는 파괴되었고, 갈단이 이끄는 ‘준가르(Junghar)’ 기마군의 공격에 겁을 먹은 동몽골의 귀족과 유목민 수만 명은 고비사막을 넘어서 청나라 변경에 와서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와 아무르 강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몽골 방면에서는 평화가 유지되기를 희망했다. 

이에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달라이 라마가 보낸 대리인과 황제의 특사 그리고 이해당사자인 몽골의 수령들이 ‘쿠리엔 벨치르(K?riyen Belchir)’라는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파탄을 맞고 말았고, 갈단은 강희제에게 도망간 동몽골 지배자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제 강희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만약 그가 그들을 넘겨줄 경우 갈단은 동서몽골을 모두 통합하고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청나라로서는 끔찍한 악몽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강희제에게는 전쟁의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는 먼저 러시아와 서몽골의 관계를 떼어놓아야 했고, 따라서 하루 속히 아무르 지역에서의 전투를 종식시키고 러시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체결된 것이 바로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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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빌(d’Anville)의 지도 가운데 외몽골 할하 부분. ​
 

협상의 대표로 만주 측에서는 송고투(Songgotu)를, 러시아 측에서는 골로빈(Golovin)을 파견하였다. 양측 통역은 중국에 주재하던 제주이트(예수회·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선교사 두 사람, 즉 제르비용(Gerbillon)과 페레이라(Pereira)였다. 양측의 가장 첨예한 대립은 아무르강 너머에 있는 알바진과 같은 지역의 영유권이었는데, 러시아 측은 무주지 선점의 원칙을 주장한 반면 청 측은 원주민과의 조공관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는 아무르강 너머의 지역을 포기하고 알바진에서 철수했다. 후일 골로빈의 회고록에 의하면 네르친스크 주변을 포위한 청군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교역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조약문은 완성되었고 제주이트 선교사들이 통역을 했기 때문에 중립적 언어인 라틴어 조약문이 정본이 되었고, 이를 기초로 만주어, 러시아어, 몽골어 번역문이 만들어져서 교환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문은 이 4종의 정본·부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희제 시대 청제국의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앙유라시아로 팽창을 계속하던 러시아와 청나라가 마주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결과다. 그러나 이로써 러시아의 손을 묶어놓은 강희제는 본격적으로 준가르의 갈단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고, 갈단에 대한 그의 승리는 결국 고비사막 이북의 외몽골이 청제국의 판도 안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691년 5~6월 강희제와 동몽골의 왕공(王公)들이 내몽골 초원에 모두 모여 충성과 동맹을 서약한 소위 ‘돌론 노르(Dolon Nor)의 회맹(會盟)’은 유목세력으로서의 몽골의 쇠퇴를 알리는 조종(弔鐘)이기도 하였다.                  


                                                                                                             아틀라스 유목사 인용, 편집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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