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陽行宮.
지금의 충남 아산시 온천대로 1459에 있던 조선시대의 행궁으로 다른 공적 행사나 임시로 머물기 위한 다른 행궁들과는 달리 온천욕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이용하는 일종의 요양소라는 점이 특이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첫째 임금 태조부터 온천을 자주 찾은 기록이 나타난다.
태조는 한 때 황해도 평산에 있는 평주 온천에 거동했으나 도읍을 옮긴 뒤로는 300리나 떨어져 있으므로 신하들이 자제할 것을 청하기도 했는데 태조는 자신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애초에 직접 가는 본인도 멀다고 느꼈으므로 평주온천은 차츰 덜 찾게 되고, 1396년도에 충청도 온천으로 행차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확한 지명을 표기하지는 않았지만 온양온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부터 온양온천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태종과 세종도 평주, 이천 등의 온천을 찾았으나 그래도 뛰어난 치료 효능 및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 등으로 차츰 온양으로 온천욕을 떠나게 되고 현종부터는 완전히 온천은 온양으로 인식이 굳어지며. 아예 이 곳에 머물 수 있는 행궁을 따로 짓고 일부는 정사도 볼 수 있게 하는 공간을 마련했다.
온양행궁에 장기간 머물렀던 왕은 세종, 세조, 현종, 숙종, 영조 등 5명이 있으며 사도세자도 이용했다. 특히 사도세자는 다양한 한약재를 온천에 넣어 이용했다고. 공통점은 전부 피부병으로 고생한 왕이라는 것. 참고로 제일 많이 찾은 왕은 이 중에서도 재위 기간 내내 심한 종기와 피부병 시달린 현종이다.
참고로 왕이 찾지 않는 시기에는, 왕의 전용 공간과 세자궁 침실 빼고는 다른 사람들도 들어올 수 있게 했고 재상 및 사족의 부녀 또한 남쪽 탕에 한해 목욕하는 것을 허락하여 일반인들도 온천욕을 즐길 수 있게 하였다.
* 건물 구성
온양행궁전도
정조가 온양에 왔던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며 그 자취를 기록한 책인 '영괴대기(靈槐臺記)'라는 책 속에 '온양행궁전도'가 실려 있는데 이 그림에 따르면, 구성은 왕의 침소인 내정전(內正殿)과 집무실인 외정전(外正殿)이 있고 초가지붕 또는 기와지붕으로 된 홍문관, 승정원, 상서원, 사간원, 수문장청 등의 건물들과 수라간도 있었는데 단순히 음식만 만드는 게 아닌 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대거 머물렀기에 임금의 공간을 제외하고 제일 규모가 컸다. 중앙에 12칸짜리 욕실과 양방, 협실 등이 갖춰진 온천당이 있고 그 건물에 바로 천연 온천 탕실이 있었다. 탕실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통로로 보이는 협루가 있고, 찬바람을 쐴 수 있는 방이 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다. 온돌을 깐 욕실은 동서 양쪽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