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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30 06:52
[기타] 최후의 유목제국 준가르부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2,498  

‘준가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좌익’을 의미한다. 왜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들은 알타이산맥 서쪽의 준가리아 분지와 천산산맥 북방의 초원을 근거지로 유목생활을 하던 ‘오이라트(Oirat)’라는 통칭으로 불리던 서몽골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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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들어와 서몽골 각 부족 사이에서 분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그 원인을 분명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아마 기후의 격변, 유목인구의 증가, 초목지의 부족 등이 지적되고 있다. 아무튼 내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일부 부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호쇼트(Khoshot)라는 부족은 청해(靑海) 지방으로 내려간 반면, 토르구트(Torghut) 부족은 저 멀리 볼가강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1670년대에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준가르 부족의 수령 갈단(Galdan)이었다. 그는 원래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밑에서 승려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본국에서 부친이 사망한 뒤 이복형제들이 자기 친형을 죽이고 부족장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라이 라마의 허락을 받고 돌아가 형제들을 죽이고 준가르의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오이라트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나아가 1680년경에는 오늘날의 신강(新疆)지방까지 장악하면서, 드디어 유목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유목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일단 국가가 건설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가 필요했는데, 취약하고 단순한 유목경제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강 지방의 점령은 갈단에게 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가져다준 셈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즉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몽골 초원의 본령에 있던 동몽골 부족들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내 그 기회는 1687년 동몽골 세력의 내분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동몽골에서는 좌익(=서부)의 자삭투 칸(Jasaghtu Khan)과 우익(=동부)의 투시예투 칸 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갈단의 동생이 이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갈단은 복수를 명분으로 1687~1688년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감행했고, 궁지에 몰린 투시예투 칸, 불교 교단의 수장으로 일종의 ‘몽골의 달라이 라마’ 격이었던 젭춘담바(Jebchundamba) 등 동몽골의 귀족들은 대거 남하하여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몽골고원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강희제는 중재를 시도했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갈단과의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갈단이 러시아와 연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중립시켜 놓은 다음, 갈단을 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드디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섰다. 강희제는 1690년부터 1697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서 친정을 감행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갈단을 제압하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운 기록은 명나라의 영락제가 몽골을 치기 위해 5차례 친정한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친정이 갖는 역사적 의미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건너 초원을 전전하는 동안 북경에 남겨둔 아들에게 쓴 만주어 편지들에서 자신의 아버지다운 인간적 면모와 함께 황제로서의 책임감과 통치철학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강희제와 갈단의 대결과정은 ‘친정평정삭막방략(親征平定朔漠方略)’이라는 거대한 편찬물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전쟁이 끝난 뒤 강희제의 지시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인데, ‘황제의 친정으로 북방을 평정한 기록’이라는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황제의 ‘성무(聖武)’를 기록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편찬된 것이었다.



후일 옹정제와 건륭제도 이를 본떠 유사한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니 드디어 ‘방략’은 청대 특유의 역사기록 장르가 되었다. 따라서 이 기록에 근거한 연구들에서 갈단 행동의 ‘부당함’과 강희제 대응의 ‘정당성’과 아울러 작전의 ‘치밀성’이 강조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갈단 측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방략’에 기록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소화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청 측의 자료들을 가만히 읽어보면 강희제가 기울인 노력, 즉 4차례의 친정과 막대한 병력·물자의 투입에 비해 그 성과는 터무니없이 미미했으며, 오히려 그런 미미한 성과를 아전인수격 해석과 과장으로 포장함으로써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1차 원정의 결과 벌어진 울란 부퉁(Ulan Butung)의 전투에서는 비록 청군이 약간의 우세를 보이긴 했으나 확실한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퇴각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제2차 원정에서 벌어진 자우 모두(Jau Modo)의 전투에서는 서로군(西路軍)이 겨우 갈단의 후방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역시 그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제3차 원정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제4차 원정은 갈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마지막 친정은 갈단이 1697년 음력 3월 13일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도 모른 채 진행되었고, 청조는 이같은 수치스러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의 사망을 원정이 끝난 뒤인 음력 윤3월 13일로 조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갈단의 ‘부당성’과 황제의 친정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갈단이 ‘자결’한 것으로 꾸몄다. 물론 사실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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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위 당시의 건륭제의 초상화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갈단의 패배와 죽음을 가져온 것은 청나라 군사작전의 성공 때문이라기보다는 준가르 내부의 반란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가 동몽골을 침공했을 때 준가르 본거지에 있던 그의 조카 체왕 랍탄(Chewang Rabtan)이 반기를 들었고, 이로 인해 갈단은 졸지에 본거지를 상실하고 소수의 추종세력만을 이끌고 초원을 방황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수백 명의 기병만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청군은 그런 갈단을 잡기 위해 황제가 4차례에 걸쳐 친정까지 감행하고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지만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삭막방략’을 읽어보면 강희제의 놀라운 무공으로 인해 갈단과 함께 준가르도 ‘패망’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되지만, 사실상 갈단은 이미 체왕 랍탄의 권력장악으로 준가르에서는 완전히 소외된 지방세력으로 전락한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준가르는 갈단이 사망한 뒤에도 건재하였다. 오히려 체왕 랍탄과 갈단 체링(Galdan Chering)과 같은 군주들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청나라와의 군사적 대결을 피하고 외교사절을 교환하면서 가능하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유목경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 및 러시아와 교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타림분지 지역에 살던 무슬림(현재의 위구르인)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천산 북방의 일리강 계곡, 즉 오늘날 우룸치 부근을 개간하고 정착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몽골어로 ‘씨뿌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타란치(Taranchi)’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포로로 잡힌 유럽인, 중국인, 만주인들을 활용하여 직물과 종이를 제작하는 공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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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단의 초상(1649~1697)

그러나 1746년 갈단 체링의 사망과 함께 준가르는 갑작스러운 파멸을 맞게 된다. 갈단 체링의 아들들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고 여기에 여러 부족장이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이같은 분쟁에서 밀려난 아무르사나(Amursana)라는 인물이 청나라 변경으로 와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건륭제는 이를 받아들여 아무르사나를 앞장세우고 군대를 파견하여 준가르의 근거지가 있던 일리 계곡을 점령하였다. 이어 4명의 부족장을 각각 ‘칸’으로 임명하는 일종의 분할통치책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청의 도움을 받아 준가르를 장악한 뒤 유일한 칸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아무르사나는 이같은 분할통치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청조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대해서 건륭제는 1757년 조혜(兆惠)라는 장군을 파견하여 아무르사나를 격파하고 준가르를 청에 직속시켜 버렸던 것이다. 아무르사나는 청군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영내로 도망갔지만, 이미 천연두를 앓고 있던 그는 토볼스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최후의 유목국가인 준가르의 멸망은 일종의 ‘인종청소’와 유사한 끔찍한 비극과 함께 막을 내렸다. 1842년 위원(魏源)이 지은 ‘성무기(聖武記)’라는 글에 의하면 준가르인들 가운데 10분의 4는 천연두로 사망하고, 10분의 3은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10분의 2는 카자흐스탄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결국 전 인구의 10분의 1만 원래 고향에 남게 된 셈이다. 건륭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국가의 공문서나 어떤 형식으로도 ‘준가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게다가 1세기 전 볼가강으로 이주해 갔던 토르구트 부족민을 불러들여 준가르인들이 살던 곳에 정착시키기로 했으니, 가히 준가르 말살책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


러시아 정부로부터 날로 심한 압력에 시달리던 토르쿠트 부족민들은 건륭제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옛 고향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1771년 1월 15만명이 넘는 유목민이 얼어붙은 초원을 가로질러 천산 북방의 초원으로 향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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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동하는 동안 카자흐족의 약탈, 추위와 기아 등으로 인해 준가르에 도착한 것은 절반도 안 되는 5만~7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고난을 무릅쓰고 ‘대장정’을 감행한 까닭은 고향에서 자유롭게 유목하며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약속과는 달리 엄격한 청나라 군관들이었고 토르구트인들은 대청황제의 새로운 ‘신민(臣民)’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건륭제는 토르구트의 귀환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 평정이 ‘하늘의 뜻’임을 입증하는 사건이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토르구트전부귀순기(土爾扈特全部歸順記)’와 ‘토르구트부민구휼기(優恤土爾扈特部衆記)’라는 두 개의 비문을 지었다. 건륭제는 이를 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한어 등 4개의 언어로 번역하고 새겨서, 한 쌍은 준가르와 토르구트인들을 직접 통치하던 일리 장군(일리 지역에 파견된 장군)의 주둔지 혜원성(惠遠城) 북문 안쪽에 있는 만수궁(萬壽宮) 앞에 세우고, 또 한 쌍은 열하(熱河)에 있던 피서산장(避暑山莊)의 보타종승묘(普陀宗乘廟) 안에 세우도록 하였다.

그 정치적 의미는 명백하다. 일리는 준가르와 토르구트 같은 서몽골인들을 현장에서 지배하는 총사령부가 위치한 곳이고, 피서산장은 황제가 여름을 보내며 몽골·만주·티베트·조선 등지에서 오는 귀족과 사신을 접견하는 곳이었으니 대륙 서쪽 끝에 살던 토르구트인들도 대청제국 황제의 덕을 흠모하여 자진해서 귀순해왔음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일리에 있던 비석은 후일 파괴되고 말았지만, 열하에 있는 거대한 비석은 지금도 관광객에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토르구트 귀순비는 지난 2000년간 유라시아 초원을 누비고 다녔던 유목민의 최후를 알리는 동시에, 농경민과 유목민 사이의 남북관계가 최종적으로 역전되는 순간을 포착한 기념물인 것이다


[출처] 최후의 유목민 준가르와 대중국의 탄생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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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 18-05-30 14:56
   
러시아에게 겉으로나마 굴복해서 스스로를 보존한 수오미가 생각나게 만드는 준가르... 만약 살아남았더라면 지금쯤 위구르인들과 함께 열심히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었을텐데 저들의 허무하고 비참한 최후가 두고두고 안타깝고 아쉽기만 합니다.
6시내고환 18-05-30 21:01
   
진짜 청나라는 만주의 선물임 중국에 대한 아휴...
촐라롱콘 18-05-30 22:21
   
원래 오이라트의 일파라는 공통된 연원을 두고 있는 준가르부와 토르쿠트부의 운명이 완전히 엇갈렸군요...!!!

준가르부는 건륭제에 의해서 거의 부족 절멸의 운명을 맞았고...

원근거지에서 밀려나 머나먼 볼가강 유역으로까지 이동했던 토르쿠트부는
러시아의 잦은 용병차출과 수탈, 토르쿠트인들의 상징종교인 티베트불교를 탄압하고
러시아정교를 강요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여...

주로 볼가강 동쪽유역에 거주하던 토르쿠트인들을 중심으로 부족대이동을 결행하여
결국 수 천km 떨어진 원거주지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이동한 부족민의 절반 이상은 중도에 목숨을 잃거나 낙오했지만 말입니다.

주로 볼가강 서쪽의 토르쿠트인들은 그대로 현지에 남아 오늘날 러시아연방 내의
칼미크 자치공화국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종교 역시 티베트불교가 주류구요....!!!

청나라 영역확장을 보면서 만주족도 만주족이지만....
만주족이 후금-청으로 발전하면서 중원에 진출하고 몽골-티베트-신강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배경에는 몽골계 부족들의 조력을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누르하치 시기부터 만-몽 혼인을 장려하여 파급된 만-몽의 혈연관계에 의한 동맹은
폭발적인 시너지효과를 불러일으켜... 명나라로 상징되는 한족을 제압했으며....

몽골부족들의 청나라로의 복속은 티베트불교로 몽골과 결속된 티베트까지 자연스럽게
청의 판도에 들어오게 되었고... 준가르부로 상징되는 신강일대의 서몽골부족들을 제압하고 기미하면서
신강까지 청나라의 판도로 만들었습니다.

청나라 뿐만 아니라... 몽골인들은 중앙아시아-남러시아일대까지 폭넓게 분포함은 물론
몽골인 특유의 뛰어난 기동력과 전투력으로(물론 엄밀하게 중앙아시아-남러시아의 몽골인들은
투르크계 민족들과 결합하거나 또는 투르크화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근대 시기에 해당하는 17~18세기까지도 러시아,오스만투르크... 해당 지역 강대국들의
용병으로 활약했으며... 일례로 볼가강 유역에 머물 당시의 토르쿠트인들은 러시아-스웨덴간의
북방전쟁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17세기에 이미 시베리아 동쪽 끝 베링해까지 진출했던 러시아조차도 투르크-몽골족들이 주축인
크림반도와 중앙아시아 일대의 칸국과 회교국들은 18세기말~1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흡수할 수 있었을만큼...... 총포가 전세를 좌우하는 근대시기에조차도 몽골족으로 상징되는
유목민족들의 전투력과 기동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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