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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31 22:02
[기타] 부여성 전투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851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5736645&qb=6rGw656AIOuLuSDsoITsn4E=&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Tw/qHwpySEsssZc3Wu8ssssstPs-005766&sid=SQlYwjWGFIC/D%2BFcRL3pzg%3D%3D

당과 발해는 698년 건국 후에, 대조영의 탁월한 외교술로 측천무후의 거듭되는 발해멸망 시도가 무위로 돌아갔으며, 이어 713년 당현종으로부터 책봉의례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719년 3월에 등극한 고왕 대조영의 아들 무왕 대무예는 강력한 자주국가실현과 중앙집권체제로의 변환, 국력향상,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사의 수를 늘리는 한편으로 개원하여 인안이라 칭하고 왕호를 성왕, 가독부로 자칭했다.

 

이는 당의 심기를 크게 자극하였고, 719년 6월 정묘일에 다녀간 당의 사신 오사겸에 의해 발해의 사정이 꼼꼼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당은 마침내 발해에 대한 정벌을 감행했고, 이로 인해 당과 발해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당은 사서에 사사로이 개원하고, 사사로이 시호를 올렸다고 심한 불만을 드러내는 반면, 모든 사서에서 다음해 벌어진 가장 큰 2가지의 전투를 삭제했다. 그것은 부여성전투와 동천릉전투인데, 전자는 정사에 기록이 있고, 후자는 거의 설화에 가깝다.

 

우선 정사의 기록을 살피자.

 

[부여부는 발해의 거란도로서, 거란을 통해(영주로 가는 길목) 당에 조공을 바치는 길이다. 당은 '몇번' 군사를 파견해 취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원 8년(720년)에도 군사를 파견했으나, 얻지 못했다. "요사지리지"]

 

요의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개원 8년(720년)에 부여성에 군사를 파견했지만, 얻지 못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을 빌려보면, 발해 무왕의 칭제건원에 당은 무력으로 응징하려 했다. 발해 무왕은 이전의 고구려의 태왕들처럼 독특한 '천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기록만으로는 대체 어느 정도의 병력을 누가 어떻게 지휘하여 어떤 경로로 진군했는지 전혀 알길이 없다.

 

야사에는 야율아보기가 "저 부여성은 불과 수백년전, 당나라 현종이 10만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얻지 못했던 성이다.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지만, 정사에 싣지 않은 것을 보아 신뢰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아무튼 720년 당이 부여성을 공격했을때 그들의 병력을 대강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10만까지 유추할 수 있다.

 

부여성은 926년 당시 군사 7천여명이 주둔했다고 요사에 실려있으므로, 720년 당시에 부여성엔 적게는 2천에서 많게는 1만명까지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주민들까지 다 동원하면, 성내의 총인원은 2만명쯤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키려고 한다면 당군의 규모는 최소 3만에서 최대 10만까지 가능하다.

 

그런데, 이어서 설화에는 동천릉(潼川陵: 목단강, 홀한하의 산언덕)에서 당나라의 30만 군대가 발해왕(무왕)이 이끄는 10만 정도의 군사들에게 대패해서 습양(濕凉: 구체적으로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 발해고를 통해서 보면 휘파허(휘발하)부근인 것으로 보인다. 서경압록부쪽으로 편입되어 있으나, 자세한 위치는 모른다고 되어 있다.)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설화에서는 부여성을 지킨 장수가 "연충린" 혹은 "설지환"으로 되어 있다. 이중 연충린은 대진국본기에도 발해의 수비장수라고 하는 야사적측면의 기록이라도 있으나, 설지환은 글쎄다. 야사에도 없는 이름이다. 어쨌거나 연충린이라고 하는 장수가 부여성으로 쳐들어온 당의 군대를 저지하며, 시간을 끌자 다른 한패의 당군이 병력을 쪼개 직접적으로 수도인 동모성(구국,돈화)으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발해왕(무왕)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동천릉으로 나와 당의 30만 군대를 격퇴했다고 되어 있다. 설화의 내용도 사실 자세한 편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당군의 편제방식이나 그리고, 당군의 주병력, 그리고 발해왕(무왕)이 구체적으로 무슨 전략으로 어떻게 자군의 3배가 넘는 군대를 그것도 야전(野戰)에서 대패시켰는지 알수가 없다. 이것이 720년에 벌어진 당과 발해의 숨겨진 전쟁이다.

 

양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있다.(단, 설화상) 현지의 설화를 빌리면, 가장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세 인물이 있다. 충왕 이준과 장수규, 거란사람 이사고(?), 이소고(?)라는 이름이다. 이들은 곧바로 721년 거란봉기 때 이름이 다시 나온다. 그러니까 당현종의 명령을 받고, 발해를 침공한 당나라의 장수로는 왕족 충왕 이준과 그리고 장수규, 거란 사람 이소고(?), 이사고(?)라고 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 발해를 침공한 당시 지휘관인지는 사서삭제로 알수 없다.

 

대강 윤곽을 그리면, 충왕 이준이란 사람이 아무래도 왕족이다보니 그가 원정군을 이끈 총사령관일 가능성이 높고, 장수규는 현장에서 각군을 지휘하는 그런 형태의 대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의 관계처럼 장수규가 총사령관이고, 충왕 이준이 부총사령관일수도 있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이 원정을 이끈 최고지휘관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거란 사람 이소고(?), 이사고(?)는 이름으로 보았을 때는 사서에 표기된 거란군주 이소고가 맞을 것이다. 그는 군량의 수송, 후방안정, 그리고 거란용병파견 등으로 임무를 맡은 것 같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전략은 대충 이런 것 같다. 우선 부여성을 얻어, 거점을 확보한 이후에 발해의 왕도를 각각 두 방향에서 협공해서 무너뜨린다는 그러한 "협공(協攻)"에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그런데 삐꺼떡거렸다. 부여성이 의외로 잘버티면서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되었고, 더욱이 발해의 서쪽변방을 책임진 대야발이 부여성방어를 위해 원군을 보내오고(이 부분은 설화적인 요소), 배후를 소란하게 만들었다.(이것도 설화적 요소), 그러자 죽도밥도 안돼게 생기자 부여성을 막은 상태에서 우선 발해의 왕성부터 점령하자고 한패가 길을 돌아 동천릉(목단강)방면으로 돌렸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동천릉으로 무왕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나와서 고지를 차지하는 바람에 양측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당군이 패해 습양으로 달아났다고 되어 있다. 이어 부여성을 공격하던 충왕 이준의 군대도 결국 점령에 실패하고 달아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부여성을 공격한 사람은 충왕 이준이고, 동천릉으로 군대를 이끌고 온 사람은 장수규라는 말인데 두 사람 다 패해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허무하게 돌아갔다는 말이 된다.

 

설화를 빌리자면, 부여성공격에 동원된 당군은 십만대군이란 표현으로 되어 있고, 동천릉으로 진군한 당군의 병력은 30~40만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성공격에 투입된 당군은 십만대군이란 식의 표현으로 보아 실제론 5, 6만에 지나지 않은 것 같고 동천릉으로 진군한 당군의 병력이 주공병력으로 보인다. 대충 30만명 정도 같다.

 

그러니까 부여성을 함락시킬 조공부대가 동모성(구국)의 측면을 공격하면, 주공부대는 홀한하(목단강)를 넘어 정면을 치고 들어가겠다는 그런 형태의 전략으로는 추측할 수 있다. 부여성이야 공성전이었으니, 탁월한 근성과 민관군 공조체제로 수성에 성공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발해왕이 십만군대를 이끌어서 당나라의 30만군대를 물리쳤다는 동천릉전투는 불사사의하다. 전통적인 고구려의 전술방침을 생각해본다면, 이미 부여성에서 당군의 협공전술이 막히고 작전에 차질을 빚은 상태에서 설화대로 대야발이 후속병력을 이끌고 계속 방해를 놓자 직접 수도를 찌르는 모험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병력이 발해 중앙군보다 3배나 많다고 해도, 조공부대가 한쪽에서 막혀있고, 또한 배후가 튼튼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도를 찌르고 들어오는 행동은 오히려 당나라 측이 작전상 무모한 모험을 했다고 할수도 있다. 그렇게해서 동천릉으로 쳐들어오자 무왕은 기병을 동원해 여기저기서 지치게 해놓고선, 홀한하를 넘어오는 적을 동천릉(지형 자체가 천문령과 다소 유사하거나, 아니면 천문령보단 비교적 덜 험했던 것으로 보임)에서 매복작전으로 다수의 함정을 파놓고 물리쳤다고 볼수도 있다.

 

아무튼 이 두가지는 사료적근거가 희박한 가운데서 양대전투가 모두 사료에서 달아난 상황이라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현실적이라고 볼때 무왕은 이미 집권하자마자 당나라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것 같다. 이것이 720년에 벌어진 당과 발해의 무력충돌의 전말이다.

 

소설을 쓰시는 분들은 이 부분을 삼국지(?)방식의 전술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생각보다 재밌게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가들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부여성전투는 인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동천릉전투는 미지수로 보인다. 사료부족의 현실 속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분의 몫 이지만, 동천릉전투에서 3배나 많은 적의 대부대를 무왕이 과연 어떻게해서 어떻게 물리쳤는지는 아무래도 읽는 분들의 상상에 맡겨야 할 것으로 보인다.

 

 

- ' 겨레의 역사 문화 나눔터 ' 카페에서 퍼온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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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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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르칸 18-05-31 22:07
   
좋은정보 ㄳ요.
6시내고환 18-05-31 22:44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동천릉 전투는 정말 새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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