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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백제 본기
근초고왕 26년(서기 371), 고구려가 병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임금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강가에 복병을 배치하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시에 공격하니, 고구려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임금이 태자와 함께 정예군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여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고국원왕]가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二十六年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 急擊之 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高麗王斯由 力戰拒之 中流矢死 王引軍退 移都漢山
◆ 삼국사기 37권 잡지 : 김부식의 주관적 자료 정리
『고전기(古典記)』에는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가 전한(前漢)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위례성(慰禮城)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389년이 지난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빼앗고 한성(漢城)에 도읍을 정하여 105년을
지냈으며, 22대 문주왕(文周王)에 이르러 도읍을 웅천(熊川)으로 옮겨 63년을 지냈다.
26대 성왕(聖王)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는데,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2년을 지냈다.
按古典記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高句麗南平壤 都漢城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移都熊川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年一百二十二
삼국사기 본기 내용과 잡지의 내용이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본기를 우선시 하기 때문에 잡지에 구술된 기억력의 한계 상황을 보려 합니다.
김부식이 언급한 백제의 고구려 남평양 점령설은 본기의 내용을 살펴볼때 오류라고 할수있습니다.
본기와 잡지의 충돌이죠.
1. 본기 : 임금이 병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 남평양을 점령할려면, 군사를 주둔시킨 상태에서 한수 이남의 백성을 옮기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이 더 심각해집니다.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데요...? 도읍을 옮기려면 이삿짐이 많죠 ? 국가의 대사입니다.
점령지로 도읍을 옮기는 동안 군대가 경계태세를 상시 유지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군대를 철수시키면 점령이 가능한가요 ? 불가능한 이야기 입니다.
삼국사기 잡지의 남평양이 근초고왕의 한성이란 주장은 인터넷 검색이 불가능한
고대인이 자주 보여주는 기억력의 한계상황에서 나온 엉뚱한 주장이고요.
삼국사기 집필시에 주변 사관과 의논없이 김부식이 독단으로 진행했다는 느낌을 주는 기록입니다.
2. 근초고왕이 약탈한 평양성에 대해
삼국사기 본기를 보면 고구려~백제 사이에 있는 지명이 나열되어 있고요.
위의 간략화된 지도는 언급된 지명을 나열한 것입니다.
패수 ~ 한수 사이에 남평양이 언급된적은 단1회도 없습니다.
즉,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은 이전의 패하(浿河) 전투에서 강변을 점령한 상황에서
패하를 북쪽으로 도강하여 이루어진 평양성 공격이라 할수있습니다.
그리고 본기 기록을 보면 근초고왕의 한성 위치는 한수 이남에 있었습니다.
한수 이북은 백제 온조왕의 초기도읍 하북 위례성이 있던 곳인데...
한수 이남에 무슨 고구려 남평양이 존재를 합니까 ?
즉 삼국사기 잡지에 나오는 김부식의 남평양 주장은 그가 백제본기에 기록한 내용과 충돌하기에
타당한 보충설명이 빠진 상황에서는 무턱대고 받아들이면 안되는 모순된 주장이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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