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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3 10:55
[한국사] 운요호사건과 청국의 반응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711  

1) 운요호(雲揚號) 사건이 일본정부에 보고된 시점은 1875년 9월 28일 한밤중이었다. 일본정부 입장에서 보면 군함을 이용한 도발은 대성공이었다. 일본의 무력도발에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 정도로 조선의 정보력과 군사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지난해 대만 침공을 통해 청나라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주역들은 조선 침공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게 됐다.

2년 전의 정한론(征韓論) 논쟁 때 유신 주역들은 찬성과 반대로 양분됐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감 부족이었다. 현실적으로 정한론을 실천하려면 조선을 굴복시킬 만한 군사력이 있어야 했고, 나아가 청나라를 제압할 만한 군사력도 있어야 했다.과거 임진왜란의 경험으로 볼 때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면 조선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청나라가 군사를 파병할 것 역시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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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군사적으로 조선과 청나라를 압도하지 못한다면 정한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이와쿠라·기도 등의 생각이었다.하지만 1874년의 대만 침공을 통해 청나라는 군사력이 상상 이상으로 허약하다는 사실에 더해 전쟁을 극력 회피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나아가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의 정보력과 국방력은 더더욱 형편없다는 사실 역시 명백해졌다. 

이런 사실들은 역으로 이와쿠라·기도 등에게 조선 침공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됐다. 그 결과 운요호 사건 이후 메이지 유신 주역들 사이에서 조선 침공을 반대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예컨대 정한론 논쟁 때 외교보다 내치가 우선이라는 명분으로 반대 입장이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역시 조선 침공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다만 기도는 즉각적인 침공에 앞서 외교 협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먼저 외교 협상을 통해 조선이 일본의 요구, 즉 국서 접수와 주요 항구 개항 등을 수용한다면 굳이 침공을 할 필요가 없고, 만약 수용하지 않으면 그때 침공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기도는 스스로 조선 사절이 돼 외교 협상을 맡아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1873년에 사이고가 조선 사절로 가겠다고 했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기도 자신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조선 사절이 되기 위해 기도는 유신 3걸의 한 명으로 꼽히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찬동을 얻고자 했다.이런 뜻을 그는 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알려 오쿠보에게 전하게 했다. 조슈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는 당시 기도의 핵심 측근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기도는 태정대신 산조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조선 사절로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기도는 자신이 왜 기왕의 입장을 바꿔 외교를 우선시하게 됐는지 이렇게 해명했다. 

2) “우리를 적대시하고 있다. 당장 쳐야 한다.”


기도는 1873년에 정한론을 반대한 이유로 내치가 흡족하지 않았다는 점과 함께 조선의 죄가 분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런데 2년 후인 1875년에는 일본의 내치도 흡족하고 조선의 죄도 분명하므로 침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메이지 일본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년 동안 메이지 일본은 근대 해군과 육군을 양성했다. 그 군사력으로 대만을 침공했고, 운요호로 조선에 무력도발을 감행해 성공했다. 그래서 기도 역시 군사력으로 청나라와 조선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조선 침공을 찬성하게 됐던 것이다.그런데 기도의 주장 중에 “지금 조선이 분명히 우리에게 적대했습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운요호 사건이 전적으로 조선 책임이라는 적반하장의 주장이었다. 당시 기도는 유신 3걸로 불리던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그런 기도가 운요호 사건의 내막을 모를 리 없었다.그럼에도 운요호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조선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기도 역시 운요호 도발에 직접적으로 간여됐음을 방증한다. 이는 기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와쿠라를 비롯한 유신의 주역들 모두가 같았다. 그들은 운요호 도발의 공모자였고, 그 도발을 통해 자신감을 가지면서 조선 침공을 찬성하게 됐다.다만 기도는 무력 대응을 주장하면서도 보다 신중한 대응을 요구했다. 즉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기에 앞서 청나라의 의중을 떠보자는 것이었다.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밀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기도는 운요호 사건을 먼저 청나라에 알려 일본대신 해결하게 하고, 청나라가 거절하면 그때 가서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청나라와 조선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인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보면 청나라는 종주국이었고 조선은 속국이었다. 하지만 이는 형식적인 외교의례일 뿐이었고 실제는 각각 정치 주권과 외교 주권을 갖는 독립국이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운요호 사건을 일본을 대신해 해결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먼저 청나라에 알려 일본 대신 해결하게 하자고 한 것은 청나라의 간섭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술책이었다. 

만약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정부는 청나라에 사과, 재발방지, 손해배상 등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런 역할을 청나라가 떠맡을 까닭이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나라가 해결하겠다고 나선다면 조선은 분명 청나라를 일본의 앞잡이로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청나라와 조선의 외교관계가 틀어질 것이고, 그것은 곧 일본이 원하는 상황이었다. 반대로 청나라가 거절한다고 해도 일본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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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곧 종주권의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으므로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다만 일본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상황은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며 군사 개입을 시도하는 경우였다. 이럴 경우 청나라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유신 주역들은 이 경우에도 청나라를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들은 청나라와 전쟁할 경우 조선만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만주까지 침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런 자신감을 은근히 청나라에 내비치기까지 했다.

3) “당신들이 개입한다면 만주까지 삼키겠다”

이런 자신감은 물론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청나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일본과의 전쟁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로까지 확대된다면 조선 문제 개입에 훨씬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만주는 청나라의 발상지인데 그곳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 자체가 청나라에는 큰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가 그런 모험을 무릅쓰려면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청나라는 조선 문제에서 발을 뺄 가능성이 높았고, 그런 예상에서 기도는 청나라에 미리 알려 조선 문제에서 발을 빼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서 발을 뺀다면 메이지 일본이 고립무원의 조선을 침공해 점령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1875년 10월 27일, 우대신 이와쿠라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참의들과 함께 태정대신 산조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운요호 사건에 대한 대책이 토론됐다. 여러 가지 토론이 있었지만, 기도의 의견을 토대로 세 가지 결정이 도출됐다.

첫째는 운요호 사건의 폭거를 조선 정부에 힐문(詰問)한다는 결정이었다. ‘힐문’이란 상대의 잘못을 꾸짖고 그 책임을 묻는다는 뜻으로, 운요호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조선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운요호 사건을 ‘폭거’로 규정해 조선 정부에 힐문하겠다는 것은 곧 조선정부에 사과, 손해배상, 재발방지 등을 요구하겠다는 뜻이었고, 만약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결정이 세 가지 결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인데 이런 결정으로 보면 운요호 사건은 유신 주역들의 음모로 추진됐고, 그 음모는 결국 조선 침공을 목표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결정은 운요호 사건의 폭거를 힐문하기 위해 조선에 사절을 보내 외교 협상을 벌인다는 결정이었고, 

셋째는 청나라에 특명전권 공사를 파견해 조선 침공에 대한 청나라의 의중을 탐색한다는 결정이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결정은 모두 기도가 주장하던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 파견되는 사절은 기도가 맡는 것으로 합의됐다. 하지만 기도에게 중병이 생겨 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가 조선 사절에 임명됐다.메이지 천황은 12월 9일 구로다를 조선 사절에 임명했는데, 그보다 한 달 전쯤인 11월 10일에 외무성 소보(少輔) 모리 아리노리(森有禮)를 청나라에 파견할 특명전권 공사에 임명했다. 모리는 구로다와 마찬가지로 사쓰마번 출신이었다. 당시 29세의 젊은 외교관인 모리는 어린 시절 유럽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도 근무한 외교 베테랑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11월 17일 오전 10시에 모리를 궁으로 불러 특명전권 공사 임무를 잘 수행하라고 격려했다. 접견 이후 모리는 현소(賢所), 황령전(皇靈殿), 신전(神殿)을 참배하고 물러났다.이어서 11월 20일 모리는 메이지 천황의 훈령을 받고 청나라로 출발했는데 그 훈령은 10월 27일에 우대신 이와쿠라가 태정대신 산조 집에서 참의들과 논의한 내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즉 운요호 사건을 조선의 폭거로 규정하고, 그것을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한다는 사실을 청나라에 통고하라는 것이 모리가 받은 훈령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이 통고에 대하여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청나라와도 전쟁을 할지, 아니면 조선만 침공할지를 결정할 작정이었던 것이다.12월 9일 북경에 도착한 모리는 총리아문에 신임장을 제출했다. 

그리고 14일에 운요호 사건에 관한 일본 측 입장을 주장하는 문서를 총리아문에 제출했는데 그중에 “바라기는 조선국이 예로써 우리 사신을 대접하고 우리나라가 요구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영원히 평화를 보장했으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 일이 낭패하게 되면 한국인은 분명 스스로 측량할 수 없는 참화를 받을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일본의 요구를 조선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조선을 침공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셈이었다.

4) 무기력한 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이에 더해 모리는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면 일본은 만주를 침공할 수 있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치기도 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모리는 외교적 왜곡과 책략을 통해 운요호 사건을 정당화하면서 청나라가 어떻게 반응할지 탐색했던 것이다. 모리는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이 조선에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명백히 하면서 그럴 경우 청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자 했다. 특히 당시 북양대신으로서 서태후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이홍장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자 했다.12월 14일 모리가 총리아문에 조선 침공 가능성을 통고한 후 이에 대한 이홍장의 생각은 12월 23일 그가 ‘논일본파사입조선(論日本派使入朝鮮)’이라는 제목으로 광서제에게 올린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에서 이홍장은 운요호 사건을 통해 조선과 일본 양국의 감정이 격화돼 있기에 전쟁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럴 경우 약소국 조선이 일본 침공을 감당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수세에 몰린 조선이 청나라에 군사 파병을 요청할 경우 청나라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있었다.이홍장은 만약 청나라가 파병을 거절한다면 일본은 순식간에 조선을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대로 청나라가 파병한다면 일본이 동삼성(東三省) 즉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을 공격해 점령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같은 이홍장의 예상은 당시 청나라의 군사력으로는 일본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다는 현실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예상에서 이홍장은 조선에 군사 파병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른 체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모른 체하다가 조선이 일본에 점령되면 그 다음은 만주가 표적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조선과 청나라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이기에 현재 청나라가 조선 문제에 군사적인 개입은 할 수 없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므로 다른 방법을 이용해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이홍장이 제시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이 직접 모리와 만나 조선을 침공하지 않도록 설득하는 방법이었다. 
둘째는 얼마 전 북경을 다녀간 고종의 핵심 측근 이유원을 이용해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둘 다 비군사적인 방법이었고, 이런 방법은 근본적으로 청나라의 군사적 열세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12월 28일, 이홍장은 직예총독부로 모리를 초청해 만났다. 모리는 부사 정영녕(鄭永寧)을 대동하고 이홍장을 만났다. 당시 53세의 이홍장은 29세의 모리를 설득해 조선 침공을 막고자 했다. 이홍장은 모리와 술잔을 나누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이홍장과 모리 사이에 오간 대화 가운데 중요한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모리_ 조선은 인도와 함께 아시아에 있고 중국 속국이 아닙니다.
이홍장_ 조선은 청나라로부터 정삭(正朔)을 받드는데 어찌 속국이 아닙니까?
모리_ 각국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단지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것에 불과하며, 중국은 조선으로부터 전량(錢糧)을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의 정치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속국으로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홍장_ 조선이 중국에 소속된 것이 수천 년임을 어느 사람이 모릅니까? 

청일수호조규의 이른바 ‘소속방토(所屬邦土)’의 ‘토자(土字)’는 중국 각성을 지칭하니 이는 내지를 내속(內屬)이라 여겨 전량을 징수하고 정사를 관여함이요, 방자(邦字)는 조선과 여러 나라를 지칭함이니, 이는 외번이고 외속이라 여겨 전량과 정사는 본국에서 관리함입니다. 이는 예로부터 그러했고 청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어찌 속국이 아니라 말하십니까?

모리_ 일본은 조선과 화호(和好)하기를 몹시 원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더불어 화호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홍장_ 이는 귀국과 화호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나라가 작음을 알아 삼가 지키며 감히 응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조선이 각국에 대해 모두 그러합니다. 다만 일본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리_ 일본과 조선은 이웃나라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통호하려 하는데, 조선은 어째서 그렇게 하려 하지 않을까요?

5) “전쟁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홍장_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후 아마도 의혹과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정영녕(모리 수행원)_ 히데요시 이후에 일본과 고려는 일찍이 왕래했는데 중간에 갑자기 끊어졌고 몇 년 전 조선과 사신을 접대하기로 약정한 후, 일본이 의관을 개변한 후, 국서의 제도가 변하자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홍장_ 이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조선은 감히 서양과도 통교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서양제도로 바꾸니 조선은 스스로 당연하게 의혹과 공포를 일으켜 일본과 왕래한다면, 다른 나라도 즉시 따라 올 것이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영녕_ 종전에는 사신을 거절하는 데 지나지 않았는데, 근래에 일본 병선이 조선 해변에 이르러 담수를 취하자 조선이 즉시 대포를 발사해 우리 군함을 손상시켰습니다.
이홍장_ 귀국의 병선이 조선의 해구로 가서 수심을 측량했습니다. 만국공법에 의하면 해안 10리 이내는 본국의 영토에 속한다고 돼 있습니다. 일본이 조선과 통상하지도 않았으니, 본래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이 대포를 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모리_ 중국·일본은 서양 나라와 만국공법을 인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우리와 화약하지 않았으니 공법을 인용할 수 없습니다.
이홍장_ 비록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가까이 가서 측량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일본의 잘못이 앞에 있는 것입니다. 조선이 갑자기 대포를 쏜 것은 작은 잘못이 없다 할 수 없지만, 일본이 또 상륙해 조선의 포대를 파괴하고 조선 사람들을 살상했으니, 이는 또 일본의 잘못입니다. 조선은 가만히 있는데, 일본이 조선을 흔드니 어떻습니까?(…)
정영녕_ 일본은 지금 또 사신을 조선에 보냈습니다. 겨우 사신 1명이 조선에 가서 조선과 협의해 조선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려 합니다. 만약 협상할 수 있으면 일을 복잡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3건의 일을 결정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조선이 이후에 우리 사신을 접대하는 것입니다. 
둘은 일본이 혹 태풍을 만나는 선박이 있다면 대신 보살피는 것입니다. 
셋은 상선이 바다를 측량하는 데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사신이 조선에 도착했는데도 거듭 접대하지 않는다면 해당 사신이 일본에 돌아온 후 분명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바로 군대 출동입니다.

이홍장_ 사신을 보냈는데 받지 않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원나라 때 두 차례 사신을 보내 일본에 갔는데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조(北條) 때 일본이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사신을 살해했습니다.
모리_ (대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이후에 아마도 전쟁을 면하기 어렵겠습니다.
이홍장_ 고려와 일본은 함께 아세아주에 있습니다. 만약 전쟁을 벌인다면, 조선은 중국의 속국에 관계하고, 일본이 이미 화약을 현격하게 어겼으니, 중국이 어떻게든 처치할 것입니다.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일본사신삼유례부사정영녕래서오담절략’(日本使臣森有禮副使鄭永寧來署晤談節略) 1875년 12월 28일]위의 대화를 살펴보면 이홍장과 모리는 조선의 속국 여부 그리고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논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운요호 사건의 책임소재를 놓고 벌어진 논쟁 자체로만 보면 이홍장의 논리가 타당했고 사리에도 맞았다.

6) 조선, 일본의 압박에 직면하다

하지만 모리는 불리할 때마다 전쟁 운운하며 협박조로 나왔고, 그에 대해 이홍장은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홍장이 겨우 내세울 수 있는 논리는 “우리는 한 대륙에 살고 있으니 스스로 의혹과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어찌 구라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정도였다.모리와의 회담을 마무리하면서 이홍장은 ‘도상화기 호무이익(徒傷和氣 毫無利益)’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선물로 줬다. 

‘쓸데없이 화기를 손상하면 털끝만큼도 이익이 없다’는 뜻인데 절대로 조선을 침공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이런 당부만 가지고는 일본의 조선 침공을 결코 저지할 수 없음을 이홍장은 절감했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얼마 전에 북경을 다녀간 이유원을 이용하고자 했다. 본래 이유원은 고종의 원자를 세자에 책봉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 북경에 왔었다. 

고종은 이유원을 파견하면서 특별임무를 맡겼었다.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비밀 외교채널을 구축하라는 임무였다.조선에서 청나라로 파견된 사신들은 관행적으로 예부의 한인(漢人) 관리들을 상대로 외교 실무를 처리했다.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지만 외교 실무에 필요한 한문과 의전을 두루 터득한 여진족이 드물었기에 예부의 실무는 주로 한인들이 맡았다.
그렇지만 한인들은 외교 실무만 맡을 뿐 외교정책 결정이나 극비 정보처리 등에서는 소외됐다. 최고 권력이 여진족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총리아문이 설립된 후 서양 열강과의 외교업무가 총리아문으로 이관되면서 예부는 더더욱 형식적인 기관으로 전락했다. 

일본·미국·프랑스·영국·러시아 등과 관련된 국제정보 및 정책결정은 예부가 아니라 공친왕과 총리아문에서 담당했다.그러나 공친왕과 총리아문을 불신한 고종은 이홍장을 통해 국제정보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고종은 이홍장이 한족 출신이며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 중신이라 해 속을 터놓고 의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유원을 통해 이홍장과 비밀 외교채널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것이다.7월 30일에 한양을 출발한 이유원은 10월 29일 북경에 도착해 외교활동을 시작했다. 이홍장에게도 편지를 보내 양국 간에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협력할 것을 제안했고, 이홍장은 기꺼이 응했다. 

이유원은 11월 말 쯤 북경을 출발해 12월 16일 한양에 도착했다.이유원은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하면서 “청나라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모두 환대해 이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번에 칙사가 오면 우리도 각별히 잘 접대해 서로 신뢰하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했다.이유원은 청나라의 실세인 이홍장을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이렇게 고종과의 신뢰관계가 구축되자 이홍장은 중요한 사안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이름으로 또는 총리 아문의 이름으로 이유원을 통해 고종에게 밀서를 보냈다. 모리와의 회담 이후에도 이홍장은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권고했다. 

다만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고종과 조선 사람들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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