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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3 11:28
[한국사] 류큐분할론과 미국의 역할1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484  

1) 청일의 국교수립  
1877년(고종 14, 광서 3, 메이지 10) 음력 7월 하여장(何如璋)은 이홍장의 추천으로 초대 주일공사가 됐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북경에서 필요한 절차를 마치고 하여장이 도쿄에 도착한 때는 음력 10월이었다.

임무 수행에 앞서 하여장은 메이지 천황을 예방하고 광서 황제의 국서를 전달했다. “대청국 대황제가 대일본국 대황제에게”로 시작하는 광서 황제의 국서는 특기할 만했다. 고대로부터 중국 황제가 공식적인 문서에서 일본 천황을 ‘대일본국 대황제’라 지칭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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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본에 상주사절을 보낸 것 역시 처음이었다. 그와 같은 일의 배후에 이홍장이 있었다. 이홍장은 청나라가 서구열강에 대항하자면 일본의 협력이 필수적이라 판단해 1871년 청·일수호조규를 체결했고, 1877년에는 초대 주일공사로 하여장을 파견했던 것이다.

하여장의 공식 임무는 청나라와 일본의 협력 증진이었다. 하지만 내막은 그렇지 못했다. 동북아 ‘대표 국가’인 청나라와 일본이 협력해 서구 열강에 대항해야 한다는 명분에 앞서 양국의 국익이 심각하게 충돌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은 류큐(琉球)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류큐는 일본 규슈 남쪽에서 대만 북부 사이에 죽 늘어선 섬들로 구성된 왕국이었다. 동남아에서 중국의 상해, 일본의 나가사키 또는 조선의 부산 등으로 가려면 류큐 열도를 통과해야 했고, 반대로 동북아에서 동남아로 가려 해도 류큐 열도를 거쳐야 했다.

이 같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류큐 왕국은 이른 시기부터 동북아와 동남아의 국제교류를 중개해 부를 쌓았다. 그 같은 국제교류를 보장받기 위해 류큐 국왕은 명나라 때부터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왔다. 조선에도 사절을 파견해 교린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609년(광해군 1) 일본의 사쓰마(薩摩) 번주가 류큐 왕국을 침공해 국왕과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후 류큐 국왕은 즉위할 때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으면서 동시에 사쓰마 번주의 허가도 받았는데, 이를 양속(兩屬)관계라고 했다.

다만 사쓰마 번에서는 혹시라도 이런 사실을 청나라에서 알고 항의할까 두려워 양속관계를 비밀로 했다. 당시만 해도 사쓰마 번은 청나라의 힘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은 일본과 미·일(美日) 화친조약을 체결한 후 류큐로 가서 미·류(美琉)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류큐는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과도 화친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완전한 독립국으로 행세했다.

이렇게 청나라와 일본에 대해서는 속국이고, 또 서구 열강에 대해서는 독립국인 류큐의 생존은 아슬아슬했다. 사쓰마 번이 류큐를 병탄하지 못한 이유는 청나라 때문이었는데, 그 청나라가 아편전쟁 이후 급속도로 약화됐다. 그 틈을 타고 메이지 일본은 류큐 왕국을 병탄하려 들었다. 

1872년 메이지 일본은 기왕에 류큐 왕국이 서양 각국과 체결한 조약을 외무성이 관할하겠다고 공포한 후 류큐에 외무성 출장소를 설치했다. 이렇게 류큐 왕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탈취됐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1875년 메이지 일본은 류큐왕국으로 하여금 청나라에 조공을 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일본 연호와 일본 법률을 시행하라 요구했다. 외교권에 이어 국왕 통치권까지 탈취하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류큐왕국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항의해 류큐 곳곳에서 반일 독립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힘입어 류큐의 지도자들은 메이지 일본에 청원해 청나라에 조공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조공을 계속하는 한 청나라에서 류큐의 독립을 지켜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류큐를 병탄하려는 메이지 일본에서 그 청원을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자 류큐 사람들은 1877년 초 청나라 복건성으로 밀항해 구원을 요청했다. 이홍장은 초대 주일공사로 부임하는 하여장으로 하여금 사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세우게 했다.

도쿄의 하여장은 은밀하게 류큐 사람들을 만나 관련 사실을 조사했다. 아울러 일본의 내부 사정과 군사력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일본의 군사력은 예상 외로 허약한 듯이 보였다. 당시 일본 육군은 3만 명, 해군은 4000명으로 조사됐다. 근대 군함은 15척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 일본 내부는 심각하게 균열돼 있었다.

하여장이 도쿄에 부임하던 해인 1877년에 일본은 서남전쟁이라고 하는 내전을 1년 가까이 겪었다. 지난 1873년의 정한론에서 패배해 낙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사무라이 2만여 명을 동원해 1877년 봄에 군사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고시마(鹿兒島)에서 봉기한 사이고는 규수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사이고는 6만여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결국은 패배해 1877년 가을 자결했다.

사이고가 군사반란을 일으킨 가고시마는 도쿄에서 봤을 때 서남쪽에 위치했다. 그래서 사이고의 군사반란은 서남전쟁이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일본은 사이고의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1년 국가예산에 해당하는 돈을 써야만 했다. 그 결과 열악하던 국가재정은 더더욱 열악해졌고, 정부 부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하여장이 도쿄에 부임해 조사한 일본은 서남전쟁의 후유증, 사무라이들의 불만 그리고 열악한 국가재정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렇지만 사이고의 군사반란은 메이지 일본에 유리한 면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서구 근대화 추진에 가장 큰 걸림돌이던 사무라이들이 퇴장했다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본래 메이지 일본은 사무라이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겠다는 존왕양이 운동 결과 탄생했다. 존왕양이의 이념으로만 본다면 서구 근대문명은 사무라이 전통과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타도 대상이었다.

하지만 메이지 주역들은 서구 근대문명의 우수성을 확인하면서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추진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이고와 사무라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서남전쟁이었다. 역설적이지만 서남전쟁으로 사무라이들이 일시에 사라지면서 메이지 일본의 서구 근대화는 더욱 가속도를 내게 됐다.

사이고의 군사반란은 메이지 주역들의 세대교체를 불러오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은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합작으로 가능했다. 그래서 유신 3걸로 불리는 사쓰마 번의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그리고 조슈 번의 기도다카요시(木戶孝允)가 메이지 유신 직후의 실세 중 실세였다. 


2) 류큐 문제로 의견차 드러낸 이홍장과 하여장 

하지만 사이고의 군사반란으로 사이고는 자결했고, 오쿠보는 사이고 자결 직후 암살됐으며, 기도는 사이고의 군사반란 중 병사했다. 이렇게 사라진 유신 3걸의 자리는 다음 세대 인물들이 차지했다.

예컨대 조슈 번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리고 사쓰마 번의 사이고 쓰구미치(西鄕從道)가 대표적이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고의 군사반란을 진압하면서 차세대 육군지도자로 떠올랐다.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를 뒤이어 내무경이 되면서 차세대 정치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대만 침공군의 총사령관이던 사이고 쓰구미치는 차세대 해군 지도자로 자리 잡았다. 그렇기는 했지만 아직 이들 3명의 영향력은 과거 유신 3걸에는 미치지 못했다.

1878년(고종 15, 광서 4, 메이지 11) 음력 4월 하여장은 그동안 조사한 결과와 더불어 대책을 정리해 총리아문과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서에서 하여장은 류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 4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류큐에 즉각적으로 군함을 파견하자는 제안이었다. 류큐의 독립과 청나라의 종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장 무력을 사용하자는 의미였다. 하여장의 제안대로 군함을 파견할 경우, 일본이 류큐에서 물러나면 문제가 없지만 맞대응으로 군함을 파견할 경우 전쟁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군함을 파견하려면 당장 전쟁을 각오해야 했고, 당장 전쟁을 각오하려면 승산이 있어야 했다. 하여장은 현재 일본의 정부 재정과 군사력이 약화됐고, 내부 역시 분열돼 있으므로 승산이 충분하다는 판단에서 즉각적인 군함 파견을 제안했다.

둘째는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류큐의 독립을 보증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할 경우 일본이 반발해 항의하거나 아니면 굴복해 물러설 것으로 예상됐다. 굴복해 물러설 경우 문제가 없지만, 만에 하나 일본이 무력을 동원하면서까지 반발할 경우 전쟁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따라서 이 제안은 즉각적인 무력 개입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는 무력 개입까지 염두에 두고 류큐의 독립을 보증하자는 제안이었다.

셋째는 말로 항의하자는 제안이었다. 하여장이 제시한 첫째 대책과 둘째 대책은 근본적으로 전쟁을 각오한 대책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첫째 대책은 즉각적인 전쟁을 각오해야 했고, 둘째 대책은 장기적인 전쟁을 각오해야 했다. 이에 비해 셋째 대책은 전쟁 가능성을 배제한 대책이었다. 전쟁을 배제하면 결국 남는 것은 말이었다. 하여장은 한 번 말해서 들어주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말로 항의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을 세계에 폭로하자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류큐를 일본에 넘겨주는 대신 다른 곳의 땅을 받거나 배상금을 받자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할 경우, 청나라는 얼마 정도 돈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든 조공 국가들로부터 심각한 불신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조공 국가인 류큐를 넘겨주고 돈을 받자는 것은 결국 체면이나 명분 대신 현실적인 실리를 택하자는 제안이었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대책 중에서 하여장은 첫째 대책을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반면, 이홍장은 첫째 대책을 아주 비현실적이라 판단했다. 당시 청나라의 상황으로는 일본과 전쟁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일본과 전쟁할 경우, 그것은 일본을 끌어들여 서구열강에 대항하겠다는 이홍장 자신의 구상이 깨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큰 틀에서 봤을 때, 청나라에도 불리하고 일본에도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혹시라도 일본과 전쟁을 벌였을 때,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열강이 침략한다면 청나라는 양쪽에서 협공 당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하여장의 네 가지 대책 중에서 말로 항의하자는 셋째 대책을 채택했다. 이치를 들어 말로 잘 타이르면 일본이 이해하고 수용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였다. 이홍장은 넷째 대책에 대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
청나라가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해도, 조공 국가를 넘겨주는 대신 돈 몇 푼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이홍장은 대국의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3) 서구열강은 수수방관, 청나라는 속수무책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총리대신으로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09년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다​

1878년 음력 5월 이홍장은 하여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답장에서 이홍장은 춘추시대의 ‘위인멸형(衛人滅邢)’과 ‘거인멸증’ 두 가지 역사를 거론했다.

‘위인멸형’은 위가 형을 병탄했을 때 강대국 제(齊)가 무력 보복을 하지 않았던 역사이며, ‘거인멸증’ 역시 거가 증을 병탄했을 때 강대국 진(晉)이 무력 보복을 하지 않았던 역사이다. 춘추 5패로 불리던 제와 진은 마음만 먹으면 무력 보복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를 이홍장은 지세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제나 진은 형이나 증을 살리기 위해 무력 보복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득이 포기했다는 의미였다. 요컨대 이홍장은 현재 청나라는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진 류큐를 살리기 위해 전쟁할 수는 없다고 답장한 셈이었다.

다만 이홍장은 류큐 병탄 다음에 벌어질 사태를 우려했다. 류큐가 일본에 병탄되는데도 청나라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더 큰 욕심을 부릴 가능성이 있었다. 예컨대 류큐 다음에 대만과 조선, 더 나아가서는 청나라 본토 자체를 노릴 수도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홍장은 대만 방어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일본에 말로 항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홍장은 우선 대만에 군함을 보내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은 혹시라도 청나라가 무력 보복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 할 가능성이 있고, 설사 불안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대만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같은 조치 후 일본 정부를 향해 말로 항의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홍장은 하여장에게 보낸 답장에서 항의하는 방법 두 가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첫째는 하여장이 직접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방법이었다. 
둘째는 류큐와 화친조약을 맺은 미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서구열강으로 하여금 일본 정부에 항의하도록 공작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에 따라 하여장은 자신이 직접 일본 정부에 항의했다.

반면, 일본 정부는 1609년부터 류큐는 양속관계였고, 1874년 대만 침공 이후부터는 명실상부 일본 영토라는 논리로 맞섰다. 즉 류큐는 일본 내부 문제이기에 청나라의 항의는 곧 내정간섭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하여장이 말만 가지고 하는 항의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서구열강으로 하여금 항의하도록 만들려는 공작 역시 효과가 없었다. 미국·프랑스·네덜란드 등 서구열강은 청나라와 일본의 갈등에 괜히 말려들려 하지 않았다. 서구열강은 모두 수수방관이었다.

설상가상 일본 정부는 청나라에서 류큐 문제를 쟁점화하자 더 강력하게 나왔다. 아예 류큐 왕국을 병탄하고 그곳에 현(縣)을 설치했던 것이다. 현을 설치한다는 것은 류큐 왕국을 일본의 내지 영토로 편입함으로써 청나라의 항의를 내정간섭으로 공식화하겠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더 이상 항의하면 내정간섭으로 간주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류규 왕국을 병탄하고 현을 설치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는 1878년 양력 5월 14일에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자 다음날 내무경에 임명됐다. 이토는 류큐 문제는 일본 내부 문제라 주장하며 내무경인 자신이 앞장서서 류큐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토는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의 항의 배후에 류큐 사람들의 독립 청원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아울러 청나라가 무력 조치는 취하지 않고 말로만 항의하는 것은 전쟁 의사가 없다는 뜻임도 잘 알았다. 그래서 일본이 류큐 왕국을 병탄하고 현을 설치하더라도 청나라가 무력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4) 이홍장, 미국 통해서 ‘대역전’ 노렸으나 

이토는 내무 대서기관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에게 명령해 류큐 병탄 대책을 강구하게 했다. 마쓰다는 류큐를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만들고, 번주는 도쿄로 옮겨 살게 하자는 초안을 마련했다. 그런데 곧바로 그렇게 할 경우, 류큐 사람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이 점을 우려한 마쓰다는 류큐 국왕이 스스로 외교권과 사법권을 일본 정부에 귀속시키겠다는 각서를 제출하게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류큐의 외교권과 사법권은 이미 외무성 출장소와 내무성 출장소에서 장악하고 있었지만, 이를 류큐 국왕으로 하여금 공포하게 만들자는 의미였다.

만약 제안대로 각서를 제출하면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류큐를 현으로 편입하고, 제출하지 않으면 또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무력 점령해 현으로 편입하자는 것이 마쓰다의 구상이었다.

1878년 양력 12월 27일 마쓰다 초안은 각의(閣議)에 붙여졌는데 논의 결과 류큐에 마쓰다를 파견해 국왕으로 하여금 일주일 이내에 외교권과 사법권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제출하게 하고, 만약 거절한다면 무력을 써서 점령하기로 했다.

마쓰다는 1879년(고종 16, 광서 5, 메이지 12) 양력 1월 8일 요코하마를 출항해 25일 류큐에 도착해 각의 결정을 전달했다. 하지만 류큐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마쓰다는 “본관은 곧바로 귀경해 복명할 것이니, 마땅히 처분을 기다리시오”라고 최후통첩을 보내고는 일본으로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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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879년 양력 3월 11일 메이지 천황은 류큐를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다는 칙명을 내렸다. 다음날 마쓰다는 경찰 160명, 군사 400명을 인솔하고 요코하마를 출항해 25일 류큐에 도착했다. 뒤이어 양력 4월 4일에 류큐 왕국을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한다는 명령서가 류큐 곳곳에 공포됐다. 이로써 류큐 왕국은 공식적으로 일본에 병탄(倂呑)됐다.

결과적으로 말로써 류큐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홍장의 시도는 이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홍장과 이토의 대결에서 이토가 승리했던 것이다. 이렇게 류큐 병탄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을 대표해 충돌했던 이홍장과 이토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결을 지속해나갔다.

그런데 그 즈음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을 역임했던 그랜트가 청나라를 방문했다. 그랜트 전 대통령은 미국의 남북전쟁 때 북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돼 1869년부터 1877년까지 8년 간 재임했다.

1879년 당시에도 차기 대통령 출마를 준비하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랜트 전 대통령은 일본의 류큐 병탄이 청·일 양국의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을까 우려해 현지 조사차 청나라와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이홍장은 1879년 음력 윤3월 21일에 그랜트의 방문소식을 들었다. 그때 이홍장은 그랜트를 이용해 이미 결판난 류큐 병탄 문제를 역전시키고자 했다. 당시 이홍장은 “일본 사람들은 미국을 마치 호부(護符)처럼 받든다”고 평가했다.

그랜트는 1879년 음력 4월 8일 천진에 도착했고 이후 북경에 가서 공친왕을 면담했다. 뒤이어 음력 4월 23일에 그랜트는 천진 북양아문에서 이홍장과 회담했다. 이홍장과 그랜트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 당시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미국의 영향력을 이홍장이 어떻게 이용하려 했는지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홍장과 그랜트의 대화 중 핵심 내용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랜트: “이 일은 내가 일본에 가서 주일 미국공사에게 물어보고 자료를 조사한 후 다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홍장: “만약 주일 미국공사가 말하기를 ‘일본이 이미 류큐를 병탄했으니 말해봐야 소용없습니다’라고 한다면 귀하는 버려두고 논의하지 않을 것입니까?”

그랜트: “주일 미국공사가 그런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일 미국공사는 내가 대통령 재임 시 일본에 공사로 파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명정대하고 명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주일 미국공사로 있으니 류큐 사태와 관련된 문제는 그에게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설령 끝내 주일 미국공사에게 묻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직접 일본 천황과 대신에게 묻고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부(副)영사 페식(W.N.Pethic): “주청 미국공사가 함께 일본에 가서 주일 미국공사를 도울 것입니다.” 

"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홍장: “중·미 조약 제1조는 ‘만약 타국이 어떤 불공정하고 경멸하는 일이 있으면, 상호 간에 알린 후 서로 도와 잘 조치한다’ 등으로 말했데 지금 일본의 류큐 병탄은 진실로 청나라에 대해 불공정하고 경멸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랜트: “(영어 조약문을 한 번 자세히 본 후) 진실로 불공정하고 경멸하는 일에 관계됩니다. 미국이 조정하는 것이 또한 조약의 뜻과 서로 일치합니다.”

이홍장: “(중국과 일본의 수호조규 제1관 ‘양국의 소속 방토는 각각 예로써 대우하여 침월함이 없이 해 안전하게 한다’는 등의 구절을 가르쳤다.)”

그랜트: (영어 조약문을 한 번 자세히 봤다.)

부영사 페식: “애석합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홍장: “방은 속국이고, 토는 내지이니, 방이 곧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랜트: “류큐는 스스로 한 나라인데, 일본이 마음대로 병탄해 스스로 팽창하고자 하니, 중국이 다투는 것은 몹시 타당합니다. 또한 앞으로는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운다면 좋을 듯합니다.”

이홍장: “귀하의 소견이 아주 대단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이홍장 [여미국격전총통오담절략(與美國格前總統晤談節略)], 광서 5년(1879) 4월 23일]

위에 따르면 그랜트는 이홍장의 논리에 크게 공감을 표시했다. 이에 따라 그랜트는 도일한 후 청나라의 입장에서 류큐 문제를 거론하게 됐다. 이는 동북아 문제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그것도 청나라의 입장에서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미국을 이홍장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했고, 그 결과 미국의 동북아 개입은 더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위의 대화에서 조선과 관련된 내용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부영사 페식의 “애석합니다. 일본과 조약을 맺을 때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라는 발언이었다. 청·일수호조규에서 ‘소속 방토’라고만 애매하게 표현하지 않고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명기했다면 일본의 류큐 병탄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소속 방토’라고 애매하게 표현하지 말고 ‘조선·류큐 등 속국’이라고 명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였다. 그랜트 역시 ‘앞으로는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운다면 좋을 듯합니다’라고 동조했다. 이에 대해 이홍장은 ‘귀하의 소견이 아주 대단합니다’라고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결국 이홍장은 류큐가 독립을 유지한다면, 서구열강과 화친조약을 맺을 때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울’ 작정이었고, 장차 조선이 서구열강과 화친조약을 맺을 때도 ‘속국에 관한 조항을 별도로 세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류큐 병탄을 거치면서 동북아 문제는 이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변수에 더해 ‘청나라의 속국에 관한 별도의 조항’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해 더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그것은 동북아 국제관계에서 열강의 목소리는 더 커지는 반면 속국의 목소리는 더 작아진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독립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속국은 마치 류큐 왕국처럼 열강의 흥정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월간중앙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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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9 [한국사] 평상복 입은 명성황후 추정 초상화 공개 (1) 엄빠주의 08-14 1381
3418 [한국사] 근데 위만 조선이라는게 원래 있던 내용 (2) 굿보이007 04-24 1381
3417 [한국사] 이승만정권때 친일분자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그들에… (3) 스리랑 12-17 1381
3416 [한국사] 유사 사학의 論理 전개 4 (35) 위구르 03-17 1381
3415 [다문화] 백날 그래봐야 다문화 해체하지 않습니다. (2) 상진 10-12 1380
3414 [한국사] 식빠들은 왜 이러나요?? (4) 호랑총각 01-13 1380
3413 [기타] 홍산문화를 둘러싼 아전인수 해석 (6) 고이왕 06-09 1380
3412 [한국사] 학계 통설에서의 가탐도리기 해로 경유지 비정 (4) 감방친구 03-15 1380
3411 [한국사] 김치중국전통 음식? 사천성_ 가야사 허황후가 태어… (13) 조지아나 01-12 1380
3410 [한국사] 조선 궁궐 지붕에 잡상에 갓 모자 (27) 예왕지인 11-08 1380
3409 [한국사] 1900년 대한제국 1인당 GDP 815달러, 아시아 2위, 서유럽 … 국산아몬드 10-03 1380
3408 [한국사]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관계가 배 다른 형제 일까요 … 뉴딩턴 12-14 1379
3407 [북한] '북한 핵 공격으로 300만 명 사망'시뮬레이션&#… (3) 돌통 06-23 1379
3406 [기타] 지금 동남아 유전자로 도배하는 인간 (3) 워해머 09-24 1379
3405 [기타] 동이족(사고전서) (1) 관심병자 10-19 1379
3404 [세계사] 로마제국 말기 3장요약 (4) 설민석 06-02 1378
3403 [기타] 서양화 모음.jpg (4) 레스토랑스 06-07 1378
3402 [기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3) 황금 11-11 1378
3401 [일본] 일본은 자민당 경선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총리가 되… 플러그 06-07 1378
3400 [한국사] 고려 철령과 철령위는 요동반도에 있었다. (1부) (10) 보리스진 09-11 1378
3399 [세계사] 전열보병 시절 유럽이 타 문명권 강대국에서 날뛸 수… (8) 툴카스 06-19 1377
3398 [한국사] 고구려 천문관측지 추정 (2) 감방친구 06-25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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