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주대첩을 끝으로 고려는 거란과 형식상으로 군신의 관계를 맺으며 기나긴 전쟁을 종식 시킨다. 이후 정종 시대를 시작으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 이 때, 鴨淥江(요하)를 경계로한 서쪽 국경이 완성됨
2) 그러다 11세기 말 완안부의 추장인 오고내(烏古迺)와 그의 아들 영가(盈歌)가 완안부를 급속도로 성장시키기 시작하며 여진족 내부의 갈등이 촉발된다.
여진은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체였는데 이 중 완안부 여진의 편에 서는 부족들과,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부족들과의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의 갈등은 고려에게로 불똥이 튀게 되는데, 숙종 9년(1104년) 1월에 동여진 사람 1753명이 귀부해왔고 이와 동시에 완안부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여진의 또다른 부족장인 부내로(夫乃老)과의 갈등으로 인해 부내로를 쫒아 기병을 이끌고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는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이 여진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물어본 결과 완안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침공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급히 허정과 나불을 감금하고 이를 개경에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임간(林幹)에게 부월을 주며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정주성으로 보내 대비토록 함과 동시에 여진족이 오고가는 마천령 일대를 차차 점령해 남하해오는 여진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임간은 공에 눈이 먼 나머지 오아속의 여진군을 자기 마음대로 선제 공격했고, 오히려 여진의 석적환에게 크게 패하며 조정에서 그들의 패전을 물어 파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교련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고려사절요》 권 7, 숙종 9년 2월.
임간의 패배에 고려는 급히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며 정주성에 위치한 여진족을 치게 했다. 벽등수(闢登水)에서 마주친 고려군과 여진군은 소규모 결전을 치뤘으나 고려의 패배로 끝났고 승리를 거둔 여진은 일대를 약탈한후 유유히 돌아가버린다.
결국 여진이 1104년 6월에 형식상으로 사절단 68명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청하고, 고려는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려에 귀화했던 (친고려파) 6명의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내주면서 당장의 갈등은 어찌어찌 봉합하였다.
그러나 선제 공격을 하고도, 이전까지 자신들의 제후국 혹은 야인 정도로만 여기던 여진 무리 따위에게 어이없이 깨진 충격은 고려에게 있어 컸다. 숙종은 이때의 패배에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천지신명이시여. 만약 저새퀴들을 조지게 되면 그 땅에다 신을 받드는 사원을 짓겠습니다!"라고 할 정도였고 당시 수도 천도의 실패(남경 ,현 한양) 이후 자신의 분노를 여진정벌에 쏟아 부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임금이 분노하여 천지신명에 고하니, 음덕을 빌려 적경을 소탕해 그 땅에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王發憤告天地神明, 願借陰扶 掃蕩賊境 仍許其地創佛宇.
3) 윤관에 의해 동북9성 확보 그러나 결국 동북 9성은 돌려줌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
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길주로 추정)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므로 관성을 설치하여 그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빼앗은 뒤 보니 수륙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듣던 바와 매우 달랐다.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3년 5월
결국,,,,, 동북9성의 반환과 서쪽의 압록강(요하) 경계를 고려했을 때, 고려의 영토는
단, 정안국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슴(아무리 오래잡아도 1010년을 넘지 못함)
(정안국 영역은 발해 부흥운동의 지속성 표시임... 대발해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