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군사조직은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한 6정(六停)이었다. 그렇지만 신라의 삼국 통일과 함께 그 기능과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화에 발맞추어 새로운 군사조직을 설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앙군으로서의 9서당(九誓幢)과 지방군으로서의 10정(十停)이었다.
원래 9서당도 583년(진평왕 5)에 조직된 서당(誓幢)에서 비롯되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이미 법당(法幢)과 6정(六停)이 있었으므로 이 서당은 아마도 그들과는 성격이 다른, 소모병(召募兵)으로 구성된 군사조직이었을 것이다. 이 서당은 나중에 녹금서당(綠衿誓幢)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625년(진평왕 47)에 낭당(郎幢)이 조직되었고, 672년(문무왕 12)에 장창당(長槍幢)이 조직되었다. 이 군단들은 모두 신라인들 가운데에서 모집하여 조직된 것으로, 정규부대와는 달리 왕권과 밀착된 특수한 성격의 부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낭당은 677년(문무왕 17)에 자금서당(紫衿誓幢)으로, 장창당은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각각 개편되었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피정복민들로써 새로운 부대를 조직해 나갔다.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이 평정된 지 1년 뒤인 672년(문무왕 12)에 백제인들로 구성된 백금서당(白衿誓幢)이 조직되었다. 신라가 책봉했던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을 왕경으로 불러들인 다음 해인 683년(신문왕 3)에는 고구려인과 고구려 지배 아래 있던 말갈인들로써 황금서당(黃衿誓幢)과 흑금서당(黑衿誓幢)을 각각 조직하였다.
그리고 687년(신문왕 7)에 백제의 잔민(殘民)으로 구성된 청금서당(靑衿誓幢)을 조직함으로써 마침내 9서당의 조직은 정비되었다.
9서당은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큰 규모의 중앙군단으로, 왕경에 주둔하고 있었다. 소속 군관(軍官)의 종류나 인원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이 이러한 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9서당은 군복의 색깔[衿色]에 의해 구별되는 획일적인 부대 명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통일성은 삼국 통일 이전의 귀족적 전통을 부인하는 것이었으며, 국왕에게 직속된 부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9서당은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전제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9서당 [九誓幢] (두산백과)
통일 이전인 진평왕 때 녹금서당(綠衿誓幢, 신라인)·자금서당(紫衿誓幢, 신라인)등 2개의 서당이 조직되었는데, 통일이후 문무왕때 백금서당(白衿誓幢, 백제인)·비금서당(緋衿誓幢, 신라인)이 설치되고, 신문왕 때 황금서당(黃衿誓幢, 고구려인)·흑금서당(黑衿誓幢, 말갈인, 실상은 동예인)·벽금서당(碧衿誓幢, 보덕국인)·적금서당(赤衿誓幢, 보덕국인)과 청금서당(靑衿誓幢, 백제인)이 추가되어 9서당으로 완성되었다.
9서당은 신라인뿐만 아니라 피정복민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체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대당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민족적 융합이 요구되었다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백제·고구려인에게도 국정참여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새로운 민족국가의 출범을 확인하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또 군복 옷깃의 색깔에 의해 구별되는 획일적인 부대명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획일성은 통일 이전의 귀족적 성격의 군단과는 달리 전제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조직이었음을 말해준다.
[네이버 지식백과] 9서당 [九誓幢]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