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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05 12:38
[한국사] 일제의 한국 주둔군의 역사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1,907  

일제의 한국 주둔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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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관 수비대(1880)-->한국주차대(1896)-->한국주차군사령부(1904.3.)-->조선주차군사령부 (1910.8.)-->조선군(1910)-->조선군사령부(1918.6.)-->조선군관구사령부.제17방면군사령부(1945.2.)

소공동 한국주차군 사령부.jpg
       소공동의 한국 주차군 사령부 


1882년 임오군란 결과 체결된 제물포 조약으로 일본 공사관 수비대가 서울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1개 중대의 병력은 남산 북쪽의 기슭을 거점으로 남산동, 저동 일대를 점유하며 일본인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이때까지 일본군의 수는 3천여 명에 달했던 청나라 군대의 1/20에 지나지 않았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듬해 1월 일본은 육군 2개 대대와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와서 한성조약 체결을 조선에 강요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공사관 경비를 구실로 일본군 1개 대대가 증가되었으나, 곧 청과 일본 사이에 톈진조약[天津條約] 체결로 일본군은 1885년 6월에 철수하였다.

10여 년 뒤인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은 청국이 톈진 조약을 어겼다며 보병 11연대를 위시한 5천여 명의 일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청군이 동학 농민군과 가까운 아산에 주둔했던 것과는 달리, 일본군의 핵심 병력은 인천과 서울에 배치되었다. 일본군은 1894년 청일전쟁 때 효창원 일대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假司令部)를 둔 적이 있다.

같은 해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 정부를 확실하게 장악한 다음 청일전쟁을 감행하여 전쟁에 승리하였고,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명성황후 살해와 단발령에 반발한 을미의병의 진압을 위해 2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이후 대한제국의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였던 일본은 1896년 5월 「고무라 웨베르 각서」에 의해 절반이 줄어든 200여 명의 헌병을 주둔시켰다. 이때부터 일본군이 1년씩 교대하며 조선에 주둔하였고, 1903년 12월 한국 주차 사령대(韓國駐箚司令部)가 서울에 설치되었다. 이제 일제가 무력을 기반으로 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난 것이다

필동의 한국주차군사령부와 조선헌병대 사령부.jpg
필동의 한국주차군 사령부와 조선헌병대 사령부 

이어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04년 2월 강제 체결된 「한일 의정서」에 따라 지금의 용산역 동쪽 광장에 3,940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짓고 육군 임시 철도감부(陸軍臨時鐵道監部) 청사로 사용하였다. 육군 임시 철도감부는 만주까지 이르는 군용 철도를 부설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용산역의 본격적인 군용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1908년 10월 1일에는 현재의 중구 필동에 있던 한국 주차군 사령부도 용산 군사 기지로 이전하였다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시아와 교섭을 중단하고 서울을 군사 작전의 근거지로 선점하기 위해 한국 임시 파견대를 보냈다. 2월 8~9일 인천항에 도착한 일본군 함대가 러시아 군함을 격침시킴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2월 23일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고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일본군이 요구하는 모든 편의를 제공하도록 강요하였다.

​1904년 3월 10일 도쿄[東京]에서 한국 주차군의 편제와 사령부를 편성하였다. 처음 한국 주차군의 관할 지역은 대동강~원산 이남이었는데, 러일전쟁의 전선이 점차 만주로 올라가면서 압록강변까지 확대되었다. 1905년 1월 한국 주차군 아래에 압록강군이 편성되었는데, 이 군대는 같은 해 4월 만주군 사령부로 편입되었다.

​1905년 10월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독자적 지위를 확보한 일본은 이후에도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서울 이북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였다. 즉, 함흥에 사령부를 둔 제13사단과 평양에 사령부를 둔 15사단을 주차시키는 등 함경도를 중심으로 병력을 강화하였다. 남부 지방에는 보병 제30여단을 배치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때 한국주차군사령부를 두면서, 일본군은 용산 일대의 300만평을 군사기지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의 군사기지는 일본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1906년 4월 사격장,  1908년 보병78연대 병영, 7월 한국주차군사령부, 9월 한국주차사령관사, 위수병원, 10월 사단장관사, 병영, 연병장, 11월 육군창고, 용산병영 기지창,무기고, 12월 사단사령부 청사,  1909년 4월 보병여단사령부청사, 9월 육군위수형무소(위수감옥) 등 수 많은 군사관련시설이 건립되었다. 1914년 6월에는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조선군 사령부로 개칭하였다.

​1916년부터 일본군은 한반도에 2개 사단(師團)을 상주(常駐)시켰고, 사령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용산에 두었다. 일제는 도성의 바로 밑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경의선,경원선)를 이용하여 만주 또는 러시아 등의 국경으로 병력을 쉽게 파견할 수 있는 구상으로 용산의 군사기지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산의 군사 기지는 비단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를 염두에 두고 건립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1905년 12월 대한제국 정부에 강요한 「을사조약」에 의해 통감부를 설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통감은 경찰력을 확장시켜 대한제국의 치안을 유지할 생각으로 군사상 군대가 필요 없는 지점에 경찰을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서 1906년 10월 조선 주차 헌병대를 제14헌병대로 축소시켰으며, 제15사단을 일본으로 복귀시키고 제13사단만 남겨 두었다.

​제13사단은 사단 사령부와 1개 연대를 제외한 전 병력을 서울 이북에 배치하였다. 일본은 여전히 제1의 가상 적국을 러시아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본군의 방침은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작전이 러시아와 소련에 대한 것에서 대미 작전 중심으로 바뀌는 1945년 1월까지 변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해산당한 대한제국의 군대가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 전쟁이 확대되자 일제는 다시 한국 주둔 병력을 증강시켰다. 같은 해 9월 26일 임시 파견 기병대를 편성하여 주로 서울 이남에 배치하고, 10월에는 제14헌병대를 다시 한국 주차 헌병대로 개칭하여 병력을 대폭 증강시킨 뒤 1908년 1월 2,074명을 분산 배치하였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 달리 호남 지방의 의병 활동이 1908년 하반기에 들어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1909년 5월 임시 한국 파견대 사령부를 편성하여 남부 지방에 주둔시켰다.

새로 편성된 임시 한국 파견대 사령부는 1909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으로 국내에서 전개된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일본은 1910년 거리낌 없이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대한제국의 경찰권까지 박탈할 수 있었다.

용산의 조선군 사령부(1918).jpg
용산의 조선군 사령부 

용산병영.jpg
용산의 일본군 병영 

조선군 군사령관 관저.jpg
조선군 사령관 관저 


​이 용산 기지는 1945년에 미군이 인계하여 최근까지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다. 

[출처] 용산 8군 기지의 일본군 흔적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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