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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한(漢)과 조선의 갈등이 첨예화하던 기원전 2~3세기 ‘단군(檀君)’, 즉 ‘텡그리 임금’의 나라 탁리국(橐離國)에서 떨어져 나와 남하한 일단의 무리가 만주 땅 쑹화(松花)강 유역 창춘(長春) 지역의 예족(濊族)을 흡수해 부여를 건국했다.
‘텡그리’ 신봉한 부여
‘탁리’는 ‘텡리 또는 텡그리(Tengri, 하느님)’를 음차한 것으로 부여의 원류는 ‘하늘의 신(하느님)’ 텡그리를 신봉하는 부족이다. 부여는 물론 부여를 기원으로 한 고구려도 ‘하늘의 신’을 섬겼다는 것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鄒牟)의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解慕漱)로 알려진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여기서 ‘해(解)’는 음차로 우리말 ‘해(태양, 太陽)’를 뜻한다.
부여의 주류를 형성한 부족이 외부에서 이주해왔다는 사실은 부여 건국설화 ‘동명성왕(東明聖王) 이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즉, 동명성왕 설화는 남부 시베리아-북몽골·북만주 일대에 거주하던 부족의 남하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부여는 기원전 107년 한나라에 멸망당한 조선보다 동아시아 역사에 더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나왔고, 고구려에서 백제가 잉태됐으며, 백제는 왜(倭)와 연결된다.
선양(瀋陽)과 창춘 사이에 금강 유역의 ‘부여(扶餘)’와 똑같은 이름의 도시 ‘푸위(扶餘)’가 있다. 왜 금강 유역 부여로부터 북쪽으로 1600㎞ 넘게 떨어진 쑹화(松花)강 유역에 부여라는 도시가 하나 더 있는 걸까.
강원 강릉(江陵)과 경남 함양(咸陽)은 통일신라 이후 중국 후베이(湖北)성 장링(江陵)과 산시(陝西)성 셴양(咸陽)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금강 유역 부여는 훗날 부여족의 원류가 되는 탁리국 출신의 한 무리가 남부 시베리아 일대를 출발해 쑹화강과 압록강, 한강을 거쳐 금강 유역까지 수천㎞에 걸친 민족 이동의 결과로 생겨났음이 분명하다. 부여족이 만주 쑹화강 유역과 금강 유역에 각기 ‘부여’라는 이름의 도시를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부여는 어떤 나라였을까.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부여는 ‘초기에는 오랫동안 어느 나라에도 패해본 적이 없다 한다.’ 고구려가 융성하기 시작한 3세기 중엽 이전까지 부여는 만주 지역 최강국이었다. 2세기경 부여는 보기(步騎) 7만~8만을 동원해 다링허(大凌河) 유역으로 진출해 동한군(東漢軍)과 싸울 정도였다. 부여는 494년 고구려 문자왕(文咨王)에게 멸망하기까지 고구려, 모용선비(慕容鮮卑), 읍루(挹婁) 등과 싸워가면서 700여 년간 나라를 유지했다.
나라가 멸망한 5세기 이후 부여의 지배층 대부분은 고구려 지역으로 이주했다. 잔류한 부여인들은 오늘날의 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몽골계 부족과 힘을 합쳐 ‘두막루(豆莫婁)’를 세웠다. 두막루는 300여 년간 나라를 이어가다가 726년 발해 2대왕 대무예(大武藝)에게 멸망당했다. 부여의 흔적은 쑹화강 상류의 백금보-한서2기 문화 및 지린(吉林) 일대 서단산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한무제(漢武帝)의 공격적 대외정책은 북방의 흉노는 물론, 동방의 선비(鮮卑)와 예맥(濊貊), 서방의 저·강(氐羌), 월지(月氏), 남방의 월(越) 등 인근 부족에 큰 영향을 줬다. 문화와 문화, 부족과 부족이 혼화(混化)했으며, 발전이 뒤처지던 다양한 부족이 한나라와 흉노에 자극받아 스스로 나라를 세우는 등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졌다. 기원전 1세기 부여를 이탈한 일단의 무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해모수)의 아들’로 알려진 추모를 지도자로 랴오닝(遼寧)성 동남부 압록강 중류 지역으로 남하해 원주민을 흡수한 후 졸본(Chorbon, ‘새벽별’이라는 뜻의 고대 터키어)을 근거로 고구려를 세웠다. 고구려의 수도가 ‘Chorbon’으로 불렸다는 것은 고구려에 투르크적 요소가 포함됐음을 뜻한다.
100개의 나루, 百濟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와 비류(沸流), 온조(溫祚)가 이끄는 해상 연계 세력이 이탈했다. 이들은 서해 뱃길을 타고 내려가 한강 하류 서울 일대를 점거하고 ‘100개의 나루(항구)를 가진 나라’라는 뜻의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곧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두각을 드러냈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을 전후해 낙동강 좌안, 오늘날의 경주 지역에는 신라(新羅), 낙동강 우안, 오늘날의 김해 지역 등에는 가야(伽耶)가 출현했다. 신라나 가야의 건국 모두 북방에서 남하한 부족과 한계(韓係) 원주민이 혼화한 결과였다.
무제의 증손자인 선제(宣帝)는 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 즉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고 흉노에 공세를 취하는 등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흉노는 한나라군의 잇단 공격, 불순한 기후에 따른 기아(饑餓), 선우 계승 문제가 겹친 끝에 기원전 55년경 동·서로 분열했다. 동부를 대표하는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한나라에 항복하는 등 흉노는 존망의 위기에 내몰렸다. 서부를 대표하는 질지(郅支) 선우는 탈출구를 찾아 북쪽의 정령(투르크족의 한 갈래)과 서쪽의 견곤(투르크족의 한 갈래로 키르기스인의 조상)을 정복했다.
또한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강 유역의 강거(투르크족의 한 갈래)를 복속시킨 후 오손(투르크족의 한 갈래)을 합병해 키르키스의 추(Chu)강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 서부 아랄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서흉노는 기원전 41년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에 큰 성을 쌓았다. 서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공격은 집요했다. 한나라와 동흉노 연합군 7만여 명이 성을 에워싸고 격렬히 공격해왔다. 끝내 성은 함락되고 질지, 선우 등 서흉노 지도부 1500여 명이 살해당했다. 한나라도 선제를 마지막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선제의 아들이자 유교적 이상주의자인 원제(元帝)와 방탕한 쾌락주의자 성제(成帝)를 거치면서 난숙기(爛熟期)의 퇴락을 경험하고, 기원후 8년 외척 왕망(王莽)의 신(新)에 나라를 찬탈당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하구려’
한나라를 빼앗은 왕망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해 서주(西周)에서 시행됐다’는 정전제(井田制)를 도입하는 한편, ‘한나라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존의 정부 기관명과 지명 또한 거의 다 바꿨다. 심지어 외국인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망전(王莽錢)을 도입하는 등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며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해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하고, 소금과 철, 술을 비롯한 중요 산물을모두 정부 통제하에 뒀다.
왕망의 섣부른 경제·사회개혁은 경제난을 가중시켰으며, 호족(豪族)은 물론 그가 보호하려던 소상인과 농민도 불만을 품게 했다. 왕망의 실패는 이전 왕조(王朝)의 것은 덮어놓고 부정한 데서 출발했다. 과도한 이상론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
농민의 불만은 ‘녹림적(綠林賊)의 난’ ‘적미(赤眉)의 난’ 등 전국 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왕망은 왕읍(王邑)과 엄우(嚴尤) 등에게 40만 대군을 줘 막 국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녹림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공격 목표는 녹림군의 장수 왕봉(王鳳)과 유수(劉秀)가 수비대장으로 있던 허난성 소재 곤양성(昆陽城)이었다.
유수는 13기(騎)만 거느리고 포위된 곤양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수는 성 부근에서 구원병 7000명을 모아 다시 곤양성으로 향했다. 유수의 탁월한 지휘와 병사들의 일당백 전투력 등에 힘입어 녹림군은 곤양성 전투에서 신나라 40만 대군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신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이다.
승세를 탄 갱시제군은 신나라의 수도 낙양(뤄양)을 점령한 데 이어 장안(시안)도 손에 넣고, 새 정권의 도읍으로 삼았다. 갱시제 유현은 유수를 경계했다. 유현은 기주(冀州)와 유주(幽州) 즉, 허베이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수를 허베이 지역에 파견했다. 유현과 그의 측근들은 유수가 사라지자 권력에 도취했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의 유래
유수의 군대가 허베이 지역을 떠돌 무렵 한나라 성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왕랑이 이끄는 세력이 황하 중하류에 면한 한단(邯鄲)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왕랑의 세력은 급격히 불어났다.
유수는 허베이 지역의 최강자가 진정왕 유양이라고 판단한 후 그에게 접근했다. 유수는 다리를 놓아 유양의 질녀인 곽성통을 아내로 맞이했다. 유수는 유양을 후원자로 두면서 그가 거느리던 10만 대군을 확보했다. 유수의 인품과 능력을 눈여겨보던 어양(漁陽), 상곡(上谷) 등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지방관들이 휘하에 모여들었다. 결국 유수는 왕랑을 손쉽게 격파했다. 어양은 지금의 베이징시 일원, 상곡은 산시성 북부 일대로 흉노, 선비, 부여, 고구려 등 북방 민족 나라들에 접한 곳이다.
유현은 왕랑이 제거된 것에 기뻐하기보다 유수의 세력이 커진 것에 불안을 느꼈다. 유수의 군대는 지방 호족과 옛 한나라 관리의 군대까지 흡수해 수십만 명에 육박했다. 유수는 기원후 25년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이제 천하 패권의 향방은 유수와 갱시제 유현, 그리고 번숭(樊崇)이 주도하는 적미군으로 좁혀졌다. 광무제 유수는 유현을 압박했으며 세가 불리해진 유현은 적미군에 투항했다. 유수는 적미군과 천하를 건 일전을 준비했으나 거듭된 한발과 기아로 인해 오합지졸이 돼버린 적미군은 기원후 27년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는 적미군의 항복을 받은 후 독자 정권을 수립하고 있던 간쑤성 동남부 롱(隴)의 외효(隗囂)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세력을 멸했다.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또 한 가지를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의미하는, 즉 롱을 얻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촉을 노린다는 뜻의 ‘득롱망촉(得隴望蜀)’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어쨌거나 광무제 유수의 한나라, 즉 동한(東漢)이 기원후 36년 모든 적대 세력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再)통일한 것이다.
고구려의 베이징 침공
유수군과 갱시제 유현군, 적미군, 왕랑군 등이 얽히고설킨 내전이 지속됐지만 약화될 대로 약화된 흉노는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흉노가 약화되고, 한나라 멸망에 이은 신나라 왕망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20여 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는 등 중원이 혼란에 빠져들자 만주와 한반도에서 새로 일어난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자기들끼리는 물론, 한족과 선비·오환족, 왜족 등과도 존망을 건 전쟁을 벌였다.
특히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동예와 옥저 등 인근 부족은 물론 동한 등 외부 세력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취했다. 5대 모본왕(慕本王)은 기원후 49년 동한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틈을 노려 선비·오환족 기병과 함께 멀리까지 휘몰아 쫓아가 장성 이남의 북평, 어양, 상곡, 진양 등을 침공·약탈하는 등 동한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에 따르면 ‘모본왕이 기원후 49년 북평, 어양, 상곡, 태원(진양)을 침공했다’고 한다. 삼국사기도 ‘모본왕이 49년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했다”고 기록한다.
북평, 어양은 오늘날의 베이징·허베이 일대, 진양(태원)은 산시(山西)성 성도(省都) 타이위안(太原)시다. 한족과 북방 민족이 혼거하던 베이징과 타이위안 일대는 언제나 북방 민족의 작전 범위 안에 들어가 있었다. 고구려가 초기부터 다링허와 롼허 유역을 넘어 베이징과 타이위안 등 중국 내지(內地) 깊숙이 군사를 보낸 것을 특별한 일로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수가 왕망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끝에 재건한 동한은 일종의 호족연합체제(豪族聯合體制) 국가였다. 유수는 고향 허난성 난양(南陽) 인근 출신인 음(陰), 등(鄧), 래(來), 양(梁)씨와 허베이성 진정(眞定) 출신 유(劉), 곽(郭)씨 등 호족의 협조에 힘입어 동한을 창건하는 데 성공했다.
동한은 ‘난양 유씨 회장’ 밑에 호족이 지분을 가진 ‘호족 주식회사’ 형태의 나라였다. 동한은 광무제에 이어 명제(明帝)와 장제(章帝) 때까지는 융성했으며, 흉노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취했다. 장제를 계승한 화제(和帝)도 고구려와 흉노 등 북방 민족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동한의 정치 공작과 심각한 한발이 야기한 내전 탓에 동흉노는 기원후 48년 남·북으로 분열했다.
흉노, 카스피海 거쳐 유럽으로
북흉노가 재기하자 동한은 기원후 73년 두고(竇固)와 경병(耿秉)을 시켜 흉노 정벌을 재개했다. 동한은 반초(班超)를 시켜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하는 등 통상로를 망가뜨리는 방법으로 북흉노의 경제력을 고갈시켜 나갔다. 동한은 또한 85년 남흉노, 정령, 선비·오환을 사주해 북흉노를 공격게 했다. 북흉노는 외몽골 전투에서 남흉노 연합군에 대패했으며, 20만 명 이상이 남흉노에 항복했다. 87년 선비의 공격을 받은 북흉노는 또다시 패배했다. 91년 서몽골 알타이산 부근에서 유목하던 북흉노는 동한의 대장군 두헌(竇憲)의 공격을 받아 세력을 거의 잃고, 잔여 10여만 호가 선비에 합류했다. 또한 단석괴(檀石槐)가 몽골을 중심으로 선비제국(鮮卑帝國)을 세우자 몽골 지역에서 흉노의 존재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선비에 항복하지 않은 북흉노 본류는 키르키스 탈라스강 유역의 동족들과 합류해 서천(西遷)했다. 이들은 아랄해와 카스피해, 남부 러시아(키흐차크) 평원을 거쳐 4세기 무렵에는 훈족의 모습으로 로마 동북부 변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남흉노는 남천(南遷)했다. 한지(漢地)로 이주한 남흉노는 산시(山西), 산시(陝西), 간쑤(甘肅), 닝샤(寧夏) 등지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동한 말과 삼국시대, 서진(西晉)을 거쳐, 5호 16국 시대에 민족 최후의 불꽃을 피웠다. 이들은 사마의(司馬懿)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을 멸망시키고 중국 내지에 한(漢), 전조(前趙), 후조(後趙), 하(夏), 북량(北凉) 등을 세웠다.화제 이후 유씨 황실은 계속 약화되고, 외척을 포함한 호족 세력은 강화됐다. 등(鄧), 염(閻), 양(梁)씨 등 외척이 득세하면서 동한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나라가 됐다. 유소년이던 질제(質帝)는 외척 출신 권신 양기(梁冀)에게 독살당했다. 질제를 이은 환제(桓帝) 시기에 이르러서는 양기를 타도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환관(宦官)이 호족을 능가하는 권력 집단이 됐으며, 환제를 이은 영제(靈帝) 때는 이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영제는 십상시(十常侍)를 포함한 환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심지어 환관 장양을 아버지, 환관 조충을 어머니라 부르기도 했다.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들은 친인척을 대거 관리로 기용했으며, 수탈과 탐학(貪虐)으로 날을 지새웠다. 환관들의 행태는 일반 백성뿐 아니라 호족들의 이익 또한 심각하게 침탈하는 것이었다. 동한의 호족과 사대부 관료들이 십상시를 포함한 환관을 얼마나 증오했는지는 이민족인 강족(羌族) 군단을 배경으로 한 서량 군벌 동탁(董卓) 집권 초기 호족 등이 그를 전폭 지지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호족이 동한 조정에 등을 돌림으로써 동한의 지배 체제는 뿌리째 흔들리기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