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6-06 17:33
[한국사] 만주상실의 아쉬움: 친고려계 동여진을 적으로 돌린 고려의 여진정책
 글쓴이 : 히스토리2
조회 : 4,341  

정종 시대를 시작으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11세기 말 완안부의 추장인 오고내(烏古迺)와 그의 아들 영가(盈歌)가 완안부를 급속도로 성장시키기 시작하며 여진족 내부의 갈등이 촉발된다. 여진은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체였는데 이 중 완안부 여진의 편에 서는 부족들과,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부족들과의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ce6944f67ebf0b22ad3003ee0703b8bc417f802cd384373f949c13823173655d430a019ca3ad0719dc71b9d4be4eea9c69358c8d60c2022bc1c0764b6c477b0b87595eee381e5086fe3ddc7666a69c85.jpg



1. 1차 여진전쟁의 패배 

이들의 갈등은 고려에게로 불똥이 튀게 되는데, 숙종9년(1104년) 1월에 동여진 사람 1753명이 귀부해왔고 이와 동시에 완안부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여진의 또다른 부족장인 부내로(夫乃老)과의 갈등으로 인해 부내로를 쫒아 기병을 이끌고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는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이 친고려계 여진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물어본 결과, 완안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침공이라는 말을 듣게 되고, 급히 허정과 나불을 감금하고 이를 개경에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임간(林幹)에게 부월(왕이 내리는 도끼)을 주며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정주성으로 보내 대비토록 함과 동시에 여진족이 오고가는 마천령 일대를 차차 점령해 남하해오는 여진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임간은 공에 눈이 먼 나머지 오아속의 여진군을 자기 마음대로 선제 공격했고, 오히려 여진의 석적환에게 크게 패하며 조정에서 그들의 패전을 물어 파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5adc367a9d8f2032f0edf6839e13fc7c035261413a69378dae1acec8ec2d4fbd90552137beb4864fbdf7116a569cc9af15df68103b4101085b6c2e3a7aa31350ee3cca392e88b6cd07ed316468d0b9b2.jpg


2. 친 고려계 여진 부족장의 숙청(가장 황당한 일)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제후국만으로 생각했던 여진의 국방력이 강성한 것을 알게된 고려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윤관은 이 패배를 바탕으로 "고려는 기병을 상대로 불리한, 수성 중심의 보병 편제로 이루어져있는 것이 문제다."라며 이전까지는 없었던 국민의 직위에 상관없이 차출하며, 능력 위주의 부대를 만들자는 건의를 하게되고 숙종이 승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별무반이다. 좌군 병마사 문관, 중군 병마사 김한충, 우군 병마사 김덕진이 육군을 담당했으며, 병선 별감 양유송과 원흥도부서사 정숭융이 수군을 담당했다. 

고려군은 출전 이후 우리 20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간다!라는 소문을 퍼트림과 동시에, 최홍정, 황군상을 장주와 정평으로 보낸 후 여진족에게 "우리가 예전에 사로잡았던 친고려계 여진인 추장인 허정과 나불을 돌려보내 줄 것이며. 이 참에 환송식이나 거하게 해줄테니 다들 오시오"라는 말을 전한다. 

여진은 이 말을 듣고 400여명의 친 고려계 추장들이 달려왔고, 장춘역에서 윤관은 이들을 환대히 맞이했다. (장춘역의 위치는 어디인가?) 

그리고 즐겁게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틈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金富弼)과 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이 이끄는 고려군이 이들 추장을 기습해 모두 살해하고 막사에 들어오지 않았던 여진족들도 최홍정이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몰살 시켜버린다.

진짜 문제는 이러한 기습 몰살 작전이 실제로는 되려 이후 전쟁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어, 동북 9성을 취하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허정과 나불은 친고려파 여진족인데 이들을 데리러 온 자들이라면 친고려파거나, 최소한 완안부 여진과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자, 아군으로 만들수도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것인데, 이후 여진족들이 결집하여 소모전 양상이 되어버린 전쟁에서 이러한 작전은 아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까지 적으로 만들어 결집시켜버리는 엄청난 실책이었다. 

여진 추장을 제거한 고려군은 총 4갈래로 나누며 동시 타격을 시도한다. 이때의 위용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고려사》에는 군대가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먼지 구름을 만들어 냈고 이를 보고 도망간 여진의 수를 헤아릴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전투는 본군이 마주했던 문내니촌에 있던 동음성이었고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최홍정의 활약으로 함락한 윤관의 본군은 석성(石城)으로 곧바로 이동한다. 석성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진족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우리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여진의 답을 들은 고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예상 외로 고전하게 되자 윤관은 척준경을 부르게 된다. 척준경은 "과거 저의 과오를 용서해주셨으니, 오늘이야말로 그 도움에 보답할 것입니다."라는 간지 폭풍인 발언과 함께  칼 한자루와 방패 하나를 둘러매고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병 수명을 죽였고 이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석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석성 전투가 종료된 후 최홍정·김부필·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에게 병력을 주어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며 여진 정벌은 마무리 되었다. 여기까지 본군, 중군, 좌군, 우군이 사살한 여진족만 4,940명이며 파괴한 부락은 135개, 여진족 포로는 1,030명이었다.별무반의 뛰어난 전투 능력과, 고려 지휘부의 적절한 판단력, 그리고 척준경을 비롯한 무장들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고려는 단 한달만에 예상했던 목표를 완료하고 영주, 웅주, 길주, 복주에 성을 쌓게 된다.

3. 고려의 사민정책의 대 실패  

이때 고려가 추진한 사민 정책에 동원된 백성의 수는 무려 6만 9천호로 1호당 4명씩만 잡아도 27만 6,000명이다.《송사》에는 고려의 인구가 210만 구(口)라고 언급했는데 이 기록을 신뢰한다고 보았을때, 따라서 최대 전체 인구의 약 10%를 이주 북방의 저 추운 동네로 이주 시킨 것이다.  이 때문에 인구수를 호수로 오기 했다는 설과, 단순히 계획만 그렇게 한 것이고 실제로는 훨씬 적은 수가 갔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그러나 사민 정책이 다 그렇듯 당시 고려군 지휘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는데, 당시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김한충 열전에 의하면 당시 윤관은 각 부대에 9성 지역의 내성의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에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 계획을 들고 나왔다. 

당시 9성 지역은 민간인이 많이 거주하지 않아서 부대가 주둔할 만한 요새는 있어도 마을 전체를 보호할 만한 외성이 없었기 때문에 윤관은 사민 정책과 함께 마을을 보호할 만한 외성을 먼저 축조하려고 내성을 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성이라는 시설의 특성상 마을 전체를 넓게 둘러야 하다 보니 건설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한충은 이 계획에 대해 "만약 외성 다 쌓기도 전에 무슨 일이 터지면, 내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키려고 저러시나? 아무리 원수의 명령이지만 이건 따를 수 없다"라고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한충이 반발하면서 나타낸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고려군이 9성을 개척하자 살 곳을 잃어버린 여진족은 충격과 공포에 빠진다.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烏雅束)은 사냥 도중에 17만 고려군이 자신의 동포들을 몰아내고 (병사들이 곧 백성이던 유목민이었기에 오아속에게, 이 9성의 축성은 매우 엄중한 상황이었다)  9개의 성을 축성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급히 지도자들을 소집해 대처를 논의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힘으로 짖누르던 강경한 국가인 요나라로 성장한 거란군을 격파했던 고려인데다 이번에 정벌로 동원된 17만명 병력의 수준은 전부 최정예였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도 승승장구하던 완안부 여진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던 상황이었고 요나라가 고려 편에 서서 자신들의 뒷통수를 갈긴다면 망할 수가 있어서 그 때문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때 오아속의 동생 아골타가 "겁에 질려 있다면 다른 부족들도 우리를 겁쟁이 취급 할테고 그렇다면 우리 부족의 생존은 장담하지 못한다. 차라리 맞서 싸우는 편이 낫다!"라고 주장했고 별다른 수가 없었던 완안부 여진은 갈라전 탈환을 목표로 삼게 된다.이때 고려군은 큰 오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고려군은 점령전 계획을 세울때 갈라전 일대 지리를 숙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해당 지역이 병목 지역이란 첩보를 가지고 9성을 쌓아 순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실제론 우회로가 너무 많아 9성이 동시다발적으로 공략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36f7be55c2eb022befd54fbbdaf29c9c5c1a434c118a6af72447d186acebdead699e09b8190733d1fdf772eb2c26441ef4b87db7065d5bc0ad12783206262804d2b67262881040f71ec82d1020b24eca.jpg



전방과 후방을 구분해 세워 놓은 기지들이 전부 전방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1년간 버틴게 용할 정도였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

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길주로 추정)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므로 관성을 설치하여 그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빼앗은 뒤 보니 수륙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듣던 바와 매우 달랐다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3년 5월

윤관은 전 병력의 집중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영주성으로 전 병력을 집결 시켰는데 이때 공험진에서 군대를 이끌고 내려오던 권지승선 왕자지가 도중에 여진군과 만나 대패하고 왕자지는 말까지 잃어버려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척준경이 급파해 왕자지를 구해주고 적진으로 들어가 철갑 기병이 타고 다니는 말 한필을 빼앗아 왕자지에게 주기도 했다. 같은 해 2월 11일에는 여진의 알새가 이끄는 병력 수만이 최홍정이 지키는 웅주성을 포위했고, 최홍정은 성문을 열고 뛰쳐나가 기습 공격을 감행해 한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전세는 서서히 불리해져가 성이 점령되기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최홍정은 척준경에게 "그대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오."라며 원병 요청을 지시하자 척준경이 허름안 옷을 입고 야밤에 줄을 타고 성벽 밖으로 나가 혈혈 단신으로 여진족 진영을 돌파하고 정주성까지 달려가 병력을 요청하는데 성공한다. 
척준경과 구원군은 통태진(通泰鎭)과 야등포(也等浦)를 거친 후 길주에서 여진군을 크개 격파하며 웅주성의 포위를 풀어내는데 성공한다. 웅주성을 포위했던 여진은 어쩔수 없이 영주성을 공격했으나 이곳에서도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게 된다.
같은 해 4월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에 도달한 여진은 웅주성 일대를 목책으로 둘러싸 겹겹이 포위하기에 이른다. 임언과 최홍정이 이끄는 웅주성의 고려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고, 4월 23일에 웅주성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오연총에게 1만의 병력을 주며 급히 지원을 보내게 된다. 

여진은 이 소식에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병력을 배치해 고려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려군은 두차례 접전 끝에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웅주성 일대를 둘러싼 여진의 목책 뒤에 진지를 구축 앞뒤로 공격당할 위기에 빠진 여진은 웅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4. 고려의 동북9성의 포기 

보통 동북 9성은 지속된 여진족의 지속된 침략에 방어가 힘들어지고 피해만 늘어나는 상황에 여진족이 간절히 요청해서 돌려주었다고 두루뭉술하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금사 사묘아리전 을 살펴보면 여진족의 맹장이던 사묘아리가 고려군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로 인해 고려가 동북 9성을 포기하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구원군이 끊긴 길주성은 독자적으로 항전을 지속해 나가는데 여진족은 눈엣가시 같았던 길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고려와 화친 협상을 하는 동안 수만 대군을 동원해 총공격을 시도한다. 이로 인해 수비 병력이 2,000밖에 되지 않는 길주성은 성이 무너져 함락 직전까지 갔으나 날이 저물어 여진족은 물러났고, 성을 지키던 허재와 이관진은 밤 사이 내성을 새로 쌓았다. 

다음날 새롭게 만들어진 성벽을 본 여진족은 단체로 공격 의지가 빠져 길주성 공격을 포기한다. 이때까지 길주성이 버틴 게 무려 130일이 전투로 어떻게든 동북 9성을 유지해야한다는 고려 조정의 여론은 달라져서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는 여론이 높아지게 된다. 때마침 여진의 화친 요청을 받은 고려는 결국 화친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동북 9성을 반환한다.

군사적인 부분을 보자면, 앞서 고려사절요에서 언급된 내용대로 동북 9성은 애당초 고려의 전략 목표인 여진족의 위협 완화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지형이 아니었다. 

병목을 틀어막겠다는 윤관의 전략 자체가 지형 파악 미비에서 비롯된 잘못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 또한 친고려파 여진을 학살하면서 여러 이득을 고려 자신이 발로 찬 것도 있다.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지속적인 공격을 당했으며 여진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 점령지가 안정적이지 못하니 사민 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가게 되며 백성들이 살려 하지 않으니 정벌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다만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은 윤관이 기껏 얻은 땅을 매우 무능한 문관들이 돌려줘버렸다 정도에 가까운데 완전히 잘못된 이해다. 당시 고려는 사회 시스템상 여진과의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 무리였다. 

한 시대의 뒤인 조선 만큼의 지방 행정망을 갖추지 못했고 국력의 완전한 동원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고려의 사회 구조는 봉건제에 가까워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일일히 지방 토호들과 합의를 봐야 하는 게 고려였다. 그런 조건 하에서는 뽑아 낼 수 있는 저력이 한정되어있는데 이미 그 짓을 4년이나 했다. 

하물며 이건 방어전도 아니고 훨씬 국력의 소모가 큰 원정이었으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거란족들이 쳐들어 와서 나라 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갔다. 즉, 문관들이 여진과의 화친을 주장 했던것은 단순히 국가의 대계를 보질 못했던 어리석은 수구 꼴통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전쟁치르다 나라가 망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려 조정은 1107년과 1108년 초반까지는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 서라도 동북 9성을 유지하는 것에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여진 정벌을 망설이던 예종에게 숙종이 남긴 유언장을 보여주며 설득한 것이 바로 고려 조정의 문관들이었다. 그랬던 문관들조차도 막대한 피해들이 누적이 되며 나라가 휘청거리고, 마침 여진이 고개를 숙이고 화친을 해오자 찬성한 것이다.

5. 친고려계 여진족의 붕괴와 고려의 실책  

이 전쟁 이후 친 고려파 여진족은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다. 완안부를 비롯해 여진족들이 고려에 공물을 바쳐오면서 형식적 제후국 관계를 이어가고는 있어서 겉보기론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내부적으로 이전과 많이 달라졌는데 

1) 완안부 여진족과 대립을 하기 전까지만해도 동여진족들은 사실상 고려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악한 상태였고 

2) 동여진족의 추장과 부족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주, 기미주, 고려의 영토로 편입 시켜달라고 요청한 여진족들이 빈번했다. 

3) 그래서 오히려 고려 쪽에서 너무 급하다며 그들을 다그치며 미루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었다 

 -> 즉 동여진을 편입은 못시킴
     (현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자진해서 행사하지 않음)

그러나 이 전쟁에서 윤관의 친 고려파 여진족들 추장을 살해하는 모습과 모든 여진족들을 몰아내면서 

동여진이고 완안부 여진이고 할것없이, 모든 여진족들을 몰아내는 고려의 모습과 터전을 빼앗긴 자신을 지원하고 고려의 대군에 결국 승리한 완안부의 모습에서 결국 고려에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전쟁 과정과 결과를 생각한다면 

동여진족들 입장에선 믿었던 고려는 자신들을 배신을 했고 자신들을 치고 있던 완안부 쪽에서 오히려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결국 고려와 화친을 이뤄내면서 9성 전부를 반환받고 부하들을 돌려받는 것을 직접 지켜본 것이다. 

힘도 자신들보다 강한데다가 고려는 배신, 심지어 고려쪽에서 자신들의 관리를 완안부에게 떠넘긴거나 마찬가지인 그 상황에서 완안부를 버리고 고려에게 붙는 것은 실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괜히 일제시대 학자 때부터 이 동북 9성 반환으로 여진은 더 커졌다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이 반환으로 여진족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영토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심점과 위상, 명분을 얻어서 커졌다는 의미도 된다. 이후 완안부를 중추로 금나라가 세워진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Total 19,94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3878
19679 [한국사] 낙랑古墳群(고분군) 하이시윤 03-18 947
19678 [한국사] 왕광묘와 왕간묘에서 출토된 印章(인장) 하이시윤 03-18 956
19677 [한국사] “夫租薉君(부조예군)”, “夫租長(부조장)”등의 銀… 하이시윤 03-18 934
19676 [한국사] 孝文廟銅鐘(효문묘동종) 하이시윤 03-18 835
19675 [한국사] 秥蟬平山君神祠碑(점선평산군신사비) 하이시윤 03-18 857
19674 [한국사] 춘추 전국 진 서한시대 요수의 위치 (6) 하이시윤 03-14 1225
19673 [한국사] 위만정권ㅡ한 전쟁 당시 발해의 위치 (3) 하이시윤 03-14 1184
19672 [한국사] 후흐호트 방언 위구르 03-11 1121
19671 [기타] 세종대왕 관모와 어진의 유래가 무엇 일까요? (ft. … (4) 조지아나 03-09 1521
19670 [한국사] [영상] 복기대교수가 임둔태수장 관련 논문을 쓴 이… (1) 하이시윤 03-04 1187
19669 [한국사] [블로그]임둔태수장 관련 블로그소개 (2) 하이시윤 03-04 1022
19668 [한국사] [논문소개]복기대교수의 임둔태수장에 관한 논문 결… (1) 하이시윤 03-04 941
19667 [한국사] 윤내현교수 (4) 하이시윤 03-03 991
19666 [한국사] 김정민이는 애초에 역사학 논문하나없이 (4) 하이시윤 03-03 1035
19665 [한국사] 사이비역사학자 김정민 (15) 하이시윤 03-03 1272
19664 [기타] 개인적으로 김정민 박사에게 굉장히 실망한사건 (6) Marauder 03-02 1561
19663 [기타] 국제관계학과 역사 (9) 조지아나 03-01 924
19662 [한국사] 김정민 박사, 책보고와 인터뷰 ㅣ한국사의 혁명 2인 (13) 파스크란 02-23 1973
19661 [기타] 발해의 유민들은 카자흐스탄의 케레이족이 되었다 (5) 관심병자 02-21 1937
19660 [한국사] 파스크란님의 글이 역사학 글이 안되는 이유 (27) 하이시윤 02-20 1085
19659 [한국사] 운남 대리국이 후백제였다 (2) 파스크란 02-20 1486
19658 [한국사] 등주(登州),청주(靑州)만 찾아도 고려의 산동 강역을 … (15) 파스크란 02-20 1321
19657 [한국사] 역사관련 자료를 찾을때 유용한 사이트 모음 (4) 파스크란 02-19 956
19656 [한국사] 축의 시대 (2) 하이시윤 02-19 889
19655 [한국사] 고구려인의 재산목록 1호는 수레였다 (1) 하이시윤 02-19 983
19654 [한국사] 강소성 양주 고려 왕성과 그 영토 (3) 파스크란 02-19 927
19653 [한국사] 송나라 고지도에 나타난 고려 서북계 (1) 하이시윤 02-19 107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