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이 되어있으나,
1) 종속된 여진지역에, 고려 법령의 적용이 안되는 점
2) 종속된, 여진지역에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는 점
3) 종속된 여진인을 자국민으로 생각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무차별적으로
살육한 한 점
4)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땅에 사민정책을 실시하려 한 점은 분명히
고려에 대한 여진인에 대한 생각이 들어 난다고 볼 수 있다.
(즉, 같은 동류의 민족으로 여기지 않았슴을 보여준다
물론 예외적으로 흑수부 출신 재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고려의 만주에 대한 영향력 관련 사서를 보자
①『고려사』현종 17년(1026) 병인 윤 5월
甲子 契丹遣御院判官耶律骨打 來請假途 將如東北女眞 不許
갑자일에 거란이 어원판관(御院判官) 야율골타(耶律骨打)를 보내어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빌리려 하였는데 불허(不許)하였다.
* 고려의 영토가 함경도 일대뿐이였다면 거란이 고려에게 길을 빌릴
이유가있었을까.
이는 당시 고려가 여진으로 가는길목을 영토로 삼고있었음을 방증 하는것이라 볼수있다
② 『고려사』지리서(地理序)
惣京四 牧八 府十五 郡一百二十九 縣三百三十五 鎭二十九 其四履 西北 自唐以來 以鴨綠爲限 而東北則以先春嶺爲界 盖西北所至不及高句麗 而東北過之 今略據沿革之見於史策者 作地理志
모두 합하여 경(京)이 4개, 목(牧)이 8개, 부(府)가 15개, 군(郡)이 129개, 현(縣)이 335개, 진(鎭)이 29개였다. 그 사방 경계를 보면, 서북은 당(唐)나라 이래로 압록(鴨綠: 압록강)을 한계로 삼았고 동북은 선춘령(先春嶺)을 경계로 삼았다. 서북은 그 이르는 곳이 고구려에 미치지 못했으나 동북은 그것을 넘어선 것이다. 이제 대략 사책에 나타난 연혁에 근거하여 지리지(地理志)를 짓는다 (여기서 압록은 요하를 일컫는다)
* 고려의 동북쪽 경계가 고구려를 넘어 섰다고 기록하고있다 (발해의 경계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예상된다)
③ 『고려사』지리서(地理序)
其所管州郡 共五百八十餘 東國地理之盛 極於此矣
다스리는 주군(州郡)이 모두 오백팔십여 개였으니 동국(東國:여기서는 아국[我國]과 비슷한 의미) 지리의 번성함이 여기서 극치에 달했다.
* 고려의 영토가 우리가 배운 대로 압록강선과 천리장성에서 멈춰 큰 변화가 없었다면 지리의 번성, 즉 영토의 넓어짐을 이러한 표현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몽골비사』에는 쿠빌라이칸이 말하기를
* 고려는 만리나 되는나라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친히 쳐들어가도 항복을 받지 못하였으나,그 태자가 직접 내 앞에 오니... 라고 기록한것을 보아
당시 고려의 영토 작지않았음을 짐작하게한다,
설령 만리가 정확한 수치가아닐 지라도 당시 고려가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수있다.
(김창현 저 - 윤관과 묘청, 천하를 꿈꾸다 인용)
고려의 여진지배는 문종때에 절정기에 다다랐다.
문종27년 2월에는 이미 고려에 귀순한 동여진 귀순주의 도령대상大常(고려의 관작), 고도화古刀化,창주昌州 의 도령 귀덕장군(고려의 관작) 고사高舍, 그리고 전성주氈城州 -공주恭州- 복주服州-온주溫州-성주誠州의 도령(지도자) 등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 안으로 붙어 군현이 되기를 요청했다.
아예 고려의 지방행정 구역으로 편입되어 귀화해 고려인으로 살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수용되었다.
동북 변방 15주州 바깥의 동여진이 서로 이어 귀부하자 문종이 27년 4월에 그들을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편입했다.
5월에는 서여진의 여러부족이 동여진의 사례에 의거해 고려의 주군州郡이 되기를 요청하니 허용했다.
7월에는 흑수역어(통역관) 가서로加西老가 동여진을 설득해 고려의 주현이 되도록 만드는 데 공로를 세웠다며 그를 고려의 무반인 산원(정8품)에 임명하고 고맹高孟이라는 성명을 하사했다.
이는 흑수 즉 북만주의 흑룡강 일대까지 고려의 영역으로 편제되었음을 시사한다.
고려의 북동쪽 영역은 허인욱의 연구(2001)에 의하면 만주 장광재령까지 뻗어나갔는데, 발해의 상경 용천부가 있던 지역,
즉 현재 중국의 지린(길림) 일대, 송화강 유역을 포함하는 거대한 땅이었다.
거란 요나라조차 용천(발해 상경 용천부) 까지는 고려의 북쪽 국경으로 인정했다.
(이 용천에 대해서는 길주 근처라는 이론도 있다)
고려정부는 귀순한 여진족 부락을 자치권을부여해 귀순주를 통해 지배하거나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해 직접 지배했다.
고려가 여진족 거주지에 여러 주州들을 설치하거나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시켰으니, 이러한 여진족은 단순히 고려를 형식적으로 사대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고려의 통치를 받았다.라고 주장한다.
고민)
1. 고려는 여진에 대해 융합의 의도가 있었는가? : 고려는 여진을 같은 민족으로도 생각하지 않았고, 학살을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는데, 귀부의 형태가 주현제가 포함되었다 라는 것 만으로 북방 만주지역을 고려의 영토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기미주 형태가 주현제로 포장된 영향력의 지역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20만명의 하삼도 주민의 사민정책의 실시는, 여진족에 대한 인종청소의 의도를 가진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 그리고 고려가 만주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 기간도 사실 따져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고려가 만주에 영향력을 행사할 무렵 갑자기 완안부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친 고려계와 친 완안부계로 나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제 영향력을 만주전역에 준 기간이 오랜기간은 아니었다는 고민을 하게된다.
특히 여진이 금을 건국하고, 중원으로 간 이후, 만주에 대한 관리를 고려가 어떻게 해 왔는지도 고민의 사항이다. (다만 포선만노가 요양에서 동진국을 빠르게 건설하여, 동만주 지역으로 이동한 것을 보면, 또한 그러한 행위에 고려의 반대가 없없던 것을 보면 고려의 지배가 금의 건국이후에는 완전히 멸실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3. 결국 고려가 복속한 동여진이나 서여진에 대해 일정한 정도의 동화정책을 펼쳤더라도 상당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을 텐데, 의지가 없었는지 아니면 여진을 동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친 고려계 동여진에 대한 추장 학살이나, 고려로 피난온 친 고려계 여진 추장에 대한 완안부 송환 그리고 무리한 사민정책은 오히려 전체 여진을 반 고려로 몰아 넣어, 완안부를 고려대신에 섬기에 한 것은 크나큰 실책이 아닐 수없다.
4. 그러면, 만주에 대한 고려의 지배는 간접인가 아니면 직접적인 통치였는가?
a)만주는 정식 고려의 영토였는가 아니면
b) 거란과의 싸움의 승리로 인한 잠시의 스쳐지나간 권력공백과정의 산물이었는가
c) 마지막으로 고려가 원한 만주에 대한 지배는 여진족을 축출하고, 완전한 고려민만의 영토를 만들려는 것인가(20만이나 되는 사민정책)로 결론이 모아지고 조금 더 구체화 한다면,
a')고려는 만주를 직접통치 했는가 아니면,
b')영향권에 두었는가로 종결되는데
어떻게 결론을 내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