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냥의 대략 정리
0. 서북한 기자, 단군 유적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
1. 고구려 초기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 약탈. 낙랑군은 후에 등장.
2. 고구려 초기 낙랑은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고구려 남쪽에 등장. 낙랑 등이 군이 아닌 국으로 불리기도 한 것은 2세기 원위 군국 설치 시기.
3. 백제 초기 낙랑은 백제(는 고구려와 패수를 경계) 동쪽, 고구려 남쪽, 신라 북쪽에 위치. 대무신왕 낙랑 정벌 후 낙랑유민 신라 유입 후 신라사와 백제사에서 낙랑 사라짐. 한 낙랑군과 다른 존재. 이 시기는 요동군과 현도군이 고구려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간 시기.
4. 고구려는 ~2세기 한 요동군, 현도군을 요하 서쪽으로 밀어내면서 성장
5. 서북한 bc 1~ad 3세기 물질문화는 실제로는 ‘북방 문화 + 토착 문화 + 토착화된 중원 문화(문성재 박사 분석)’
6. 황해도 일명 대방태수 장무이묘는 북방계통(고구려)에 중원식 방식을 응용한 북방계통 무덤이며 유물 역시 조작이 의심됨(정인성 박사 연구)
7. ~ad 3세기 서북한 지역에 북방 (고구려)계 무덤 및 물질문화 다수 분포
8. 2세기 고구려가 요동군 서쪽 안평현 공격시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
9. 원위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시 낙랑태수와 삭방(대방)태수가 관구검과 함께 현도군에서 출정
10. 태강/진서 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기술 정보는 3세기 말 모용선비의 북평군 방면 침입을 막고자 당빈이 성보를 보축하며 활동한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학계 비주류, 주류 공통견해
11. 즉 태강/진서 지리지의 낙랑군 수성현은 이르면 3세기 말, 늦으면 서진 말기(~316)에 노룡 지역으로 교치
12. 서진의 낙랑군과 모용외가 설치한 낙랑이 서진 말기에 병존했을 가능성이 있음
13. 한서부터 수서/당서까지 요동, 현도, 낙랑 호구수 비교시 계속하여 줄어듦. 뿐만 아니라 3~4세기 정보를 담은 진서 지리지를 보면 이 시기에 급격히 줄어드는 것이 나타남
14. 북위 시기가 되면 낙랑군이 북경을 거쳐 보정시로 교치가 되고, 북위시절 북조와 남조에게서 고구려왕이 받은 작위(지배권)가 ㅡ 호동이교위, 영평 (영주, 평주) 2주, 요동, 요해(발해) 등임
15. 애초 한사군은 서에서 동으로 요서ㅡ낙랑ㅡ요동ㅡ현도로 위치했다 보는 것이 가장 타당
16. 연진 시대의 요수는 영정하, 요동은 노룡/창려 일대
17. 연나라 동쪽에 요동과 조선이 있었고, 진나라 동쪽에 발해와 조선이 있었고, 진나라의 새는 황하를 따라 설치가 됐음
18. 은주교체기, 춘추전국시대부터 연진시대, 진한 교체기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유민들이 고조선으로 유입됨
19. 후한 말기에도 유주, 기주 등지의 유민들이 무수히 많이 고구려에 유입됨
20. 낙랑군이 최초 대릉하~현 요하 사이에 있었다면 왕검성을 비롯한 위만조선 중심지가 그곳이었다는 말
21. 후한서 군국지와 구당서 지리지 지리정보 비교시 낙양 기준 동일 지점 거리가 적게는 400, 많게는 800리 가량 차이가 남. 이는 서로 리수척이 다름을 의미. 이러한 수척 차이를 고려 적용시 낙랑ㅡ요동ㅡ현도는 대릉하ㅡ요하ㅡ개원 등으로 위치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