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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10 11:35
[기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패전사-유재흥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934  


현재 휴전선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통로로 경의축선과 경원축선이 있다는 사실은 군사 문외한이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국군의 최정예 부대들이 이중, 삼중으로 배치되어 철통 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철원에서 경원선을 따라 서울로 내려오는 경원축선은 임진강이나 한탄강처럼 커다란 하천을 건너지 않기에 대규모 기갑부대의 진격로로 아주 적합한 통로로써, 그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큽니다.




이는 1950년 당시에도 마찬가지여서 적 주력이 남침 통로로 삼을 것이 확실한 이곳을 국군의 제 부대들 중에서 최강의 전력을 가지고 있던 부대가 담당하였는데, 바로 유재흥이 지휘하는 제7사단이 이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하지만 전쟁 발발직전에 7사단은 적의 전차부대가 철원 쪽에 집결 중에 있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였으면서도 대전차 방어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그러면 제일 먼저 적 전차의 공격에 국군이 일방적으로 후퇴하였다는 관념적인 연상이 먼저 떠오릅니다.  흔히 국군 장병들이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전차가 전선에 갑자기 출몰하자 놀라서 제대로 공격해보지 못하고 퇴패하였다는 것이 상식 아닌 상식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괴군이 전차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물론 일선 병사들 중 전차를 처음 본 경우도 많았겠지만 적어도 지휘부이상이면 전차가 어떤 무기인지 잘 알고 있었고 일부는 중일전쟁 등에서 대전차전을 경험하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북괴군 전차에 대응하기 위해 미군사고문단에게 전차 공급을 요청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는 세계에서 가장 못살았던 지역인 당시 남한도 그랬지만 북한도 전적으로 외부의 지원에 군비를 의존하던 상태였습니다.

소련은 북한에게 전차를 공급하여 주었지만 미국은 전차 지원이 어려우면 효과적인 대전차무기라도 지원해 달라는 국군의 요청을 애써 거부하였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어쩌면 이승만 정부 스스로가 벌인 만용 때문에 그랬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선전전이었지만 툭하면 대놓고 북진통일을 외치고는 하자 미국은 공격 무기를 공급하는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적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식한 사단장 유재흥은 당시까지 보유하였던 57mm 대전차포 및 2.36인치 로켓포로 방어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으나 사실 이들 무기는 북괴군 T-34를 막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일부 떠도는 자료에 유재흥이 경계도 소홀히 하였다고 비아냥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7사단이 경계를 게을리 하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초전에 해체될 정도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부대는 7사단뿐이었습니다.  전쟁 발발 전에 38선을 담당하던 부대는 서에서 동으로 17연대~1사단~7사단~6사단~8사단이었는데, 6사단은 춘천대첩의 기적을 선보였고, 1사단과 8사단은 지연 방어에 성공하면서 효과적인 후퇴전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본토와 떨어져 옹진반도에 고립되어있던 17연대는 주력 대부분을 보존하며 탈출에 성공하였습니다.


압도적인 적의 공세에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대부분은 이처럼 선방하였지만 7사단은 부대 해체라는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전력의 열세여서 어쩔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타 부대의 전과와 비교한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참혹한 결과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다음 편에 언급할 것처럼 사단장 유재흥에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유재흥이 7사단을 지휘하면서 범하였던 실수는 크게 사전 대처가 미흡하였다는 점과 병력을 축차 투입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준비 부족은 앞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북괴군이 38선 일대에 집결하고 있음을 사단 정보망이 포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초보적인 대전차 훈련만 하였지 진지 보강 같은 실질적인 방어선 정비에는 소홀하였습니다.


아마 유재흥은 당시 적의 동향을 이전에 자주 발생하던 국지적 도발 준비로 판단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차들이 대거 포착되었다면 전면전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특히 7사단 담당 지역은 부대 간 횡적 연결이 힘들어 방자(防者)에게 불리한 반면 공자(攻者)에게는 종심을 깊숙이 타격할 수 있는 천혜의 기동로여서 더욱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전까지 대처가 미흡하였습니다.


현지 부임한지 불과 보름 만에 전쟁이 발발하여 시간이 부족하였던 점도 문제였지만 비슷한 경우였던 6사단의 대처와 비교한다면 못 내 아쉬운 부분입니다. ( 관련글 참조 ) 그런데 유재흥에게 책임을 묻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당시 7사단 편제에 문제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7사단은 제1, 3, 9연대와 제5포병대대로 편제된 몇 안 돼는 완편 사단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6월 15일자로 예하 3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배속 변경을 하였습니다.


대신 육군본부는 충남 온양에 주둔 중인 제2사단 25연대를 같은 날 7사단 예하로 배속 변경하였지만 여러 문제로 이동이 7월 15일로 연기 된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축선을 담당하여야 할 7사단에 예비대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이없게도 육군본부는 당장 보충할 준비도 하지 않고 전방 부대를 먼저 빼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던 것인데, 더구나 당시는 북괴군의 행태가 예사롭지 않다며 비상경계령을 유지하던 중이었습니다. 


7사단이 담당하던 경원 축선은 크게 경원선 철도가 통과하는 동두천 회랑과 동쪽에서 나란히 병진하는 포천 회랑으로 나뉩니다.  38선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내려 온 이 두 길목은 의정부에서 합류하여 서울로 향하는데 옆으로 가까이 접했지만 협곡에 의해 단절되어 동두천을 담당한 1연대와 포

천을 방어하던 9연대가

유사시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더욱 후방에 있어야 할 예비대의 중요성이 컸습니다.


더구나 회랑 정면을 1개 대대로만 경계하고 나머지 2개 대대는 후방으로 빼어놓아 38선 전면의 방어력은 더욱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회랑의 폭이 좁아서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보았지만 정작 북괴군은 제1군단예하 3, 4사단이 통로를 하나씩 담당하여 돌파할 예정이었을 만큼 압도적이었고 더구나 이들 사단들은 제105땅크여단 예하 땅크연대를 각각 하나씩 배속 받아 전력이 대폭 증강된 상태였습니다.


당시 아군의 방어 계획은 적의 남침이 개시되면 단지 예정한 고지를 선점한 후 증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적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단행 된 대대적인 부대 재편으로 말미암아 투입이 예정 된 예비대가 배후에 없었

고 증원을 위한 구체적인 세부 시행 방안조차 전무하였습니다.  게다가 압도적인 적의 초전 기습에 철저하게 당하며 예정된 고지의 선점도 제 때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7사단의 몰락에 대한 책임을 가장 먼저 사단장 유재흥에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휘관은 승리하였을 때 가장 먼저 공(功)을 칭송받지만, 패했을 때는 당연히 과(過)에 대한 업보도 먼저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울 방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고 있던 부대의 예비대를 대책도 없이 빼어놓은 채병덕 총참모장을 비롯한 육군본부도 함께 비판 받아야 함은 당연합니다.


개전 초에 7사단의 방어선이 쉽게 뚫렸던 가장 큰 이유는 보유하고 있던 대전차화기로 적의 T-34을 저지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만큼 압도적인 전력 차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폭이 좁지만 단지 1개 대대만으로 북괴군이 전력을 집중하여 쐐기처럼 밀고 내려오자 초전 방어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설령 진지 보강이 제대로 되어있었어도 결국은 돌파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부터였습니다.


전초가 돌파 당하였다면 일단 다음 진지로 후퇴하여 적을 막아야 했지만 전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때까지 후속 방어선이 제대로 구축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유재흥은 최선을 다하였지만 이처럼 방어 거점이 없다보니 조급함에 이끌려 얼마 안되는 예비대를 축차적으로 전선에 몰아넣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그런 방식으로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방어전에서 전력의 축차투입은 금기시되는 사항입니다.


예를 들어 10 : 10으로 싸움을 벌일 때, 한 번에 모두가 싸움을 벌여야지 10명의 적을 향하여 1명씩 차례대로 뛰어드는 것은 당연히 전멸을 의미합니다.  병사들의 분투로 일시나마 진지를 탈환한 곳도 있었지만 잠시 동안의 효과만 있었고 결과적으로 나뉘어서 앞으로 달려 나간 병사들은 압도적인 적의 화력에 차례차례 사라져 갔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적들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던 과욕이 부른 참사였습니다.


동부전선의 6, 8사단도 초전에 밀렸지만 포병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더불어 예비대를 적시에 투입하면서 적의 진공을 훌륭히 막아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축선을 담당하던 정예 7사단도 최선을 다해 용전분투하였지만 전쟁 직전 단행 된 부대 재편으로 예비대가 부족하였고 이마저도 축차투입하면서 방어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말려야 할 육군본부가 오히려 오판을 부추기고 강요하였다는 점이 사실 더 큰 문제였습니다.


경원축선의 중요성을 잘 아는 육군본부는 대부분의 예비대를 이곳으로 급파시켰습니다.  사실 전쟁 초기에 후방에서 전개 된 부대들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던 부대도 7사단이었습니다.  북괴군이 정예 부대들을 이곳으로 집중하였을 만큼 돌파에 심혈을 기울였던 이유도, 또한 아군이 다른 전선을 포기하더라도 모든 전력을 집중시켜 이곳 만은 어떻게라도 방어하려 애썼던 이유도 바로 서울 때문이었습니다.


총참모장 채병덕은 가장 먼저 동원이 가능하였던 수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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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대왕 18-06-11 19:58
 
한국의 무다구치 렌야~
위구르 18-06-12 10:54
 
히든 제너럴에도 나왔었죠 ㅋㅋ 유재흥
푸른마나 18-06-13 04:24
 
7사단 괴멸..2군단 전멸...3군단 패배등 맡은부대마다 패배를 한 한국역사상 최악의 장군이죠....
제일 가관인건 3군단 포위되니 부군단장 대리로 지정하고 자신은 항공기로 군단본부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제생각엔 도망간거라고 봅니다....이때 부대 인원의 40%만 살아왔다고 하죠.. 이 전쟁이 한국역사 최악의 3대패전중 하나라고 합니다...아무튼 이 사건으로 작전 지휘권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죠...
결론적으로 유재흥은 한국역사 최고의 패전장군이죠.. 한번의 패전으로 무능력을 증명했는데 군에 연줄이 상당했는지 그후로도 2번이나 장군이 되어서 패배를 해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나게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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