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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11 14:26
[기타] 한국 전쟁 - 북한군의 침공과 지연전
 글쓴이 : 관심병자
조회 :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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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남침과 수도 서울 함락

 

북한군의 남침개시와 남한의 미숙한 초기대응

 

북한군의 주요 작전은 남한을 동서로 나누어 주공인 제1군단이 서부지역을 담당하여 옹진-개성-동두천을 통해 포천-의정부를 거쳐 서울을 조기 점령하는 동안 조공인 제2군단이 춘천-홍천 축선을 통해서 강원도를 점령한 후 수원 방향으로 우회하여 남한의 전방사단을 조기에 포위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나누면 북한군 제1군단 중 주공인 제6사단과 제1사단이 개성-문산 지구로, 제4사단과 제3사단이 의정부 지구로 각각 향하고 조공인 북한군 3경비여단과 6사단 소속의 14연대가 옹진반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또한 북한군 제2군단은 다시 주공인 제2사단과 제12사단이 춘천지구를 공격하는 동안 조공인 제5사단이 강릉지구로 향하는 한편 제945육전대와 제766유격대가 정동진 및 임원진 일대에 상륙하여 후방교란임무를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AD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38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던 북한군이 일제히 38선을 넘기 시작하면서 3년간의 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를 상대해야 하는 한국군은 서부전선 중 개성-문산 지구를 제1사단이, 의정부 지구를 제7사단이 각각 방어하고 있었고 웅진반도에는 제17연대가 주둔 중이었으며 또한 동부전선의 춘천지구는 제6사단이 담당하고 있었고 강릉지구는 제8사단이 배치된 상태였으나 대부분의 부대가 장병들의 절반 가량이 주말 외출과 외박을 실시하고 있어 병력 공백이 컸다. 더욱이 남한의 육군본부에서 북한군의 남침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당직장교는 나중에 거물 정치인이 되는 김종필 중위였다. 김종필은 즉각 당직사령에게 전군 비상사태 선언을 건의하였으나 당직사령은 자신에게 그럴만한 권한이 없다며 거절하고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에게 연락하였다. 그러나 채병덕도 단순한 국지전일 거라고 생각하고는 전군 비상사태 선언 제의를 거절하였고 또한 신성모 국방부 장관 역시 "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는 이유로 전화를 받지 않으면서 신속한 초기대응에 실패하였다. 


개전 후 3시간이나 지난 7시가 되어서야 단순한 국지전이 아님을 깨달은 육군본부에서 전군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휴가 및 외출ㆍ외박 중인 전 장병에게 재빨리 원대복귀하라는 방송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북한군의 남침소식이 보고된 것은 오전 9시가 되어서였고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채병덕은 여전히 북한군의 전면공격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 전차와 S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있는 데 반해서 한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T-34 전차를 격파할 대전차무기조차 없었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한군의 남침소식과 함께 비상소집이 시작되었지만 장병들의 부대복귀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대부분의 전방 진지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북한군의 진격과 수도 서울의 함락


의정부 지구 방면


의정부 전투


AD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군 제1군단(군단장 김웅 중장)이 38선에 인접한 동두천과 포천, 그 후방의 의정부를 향해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 지역의 방어는 한국군 제7사단(사단장 유재흥 준장)이 맡고 있었다. 북한군 제3사단(사단장 이영호 소장)이 포천을 방어하던 한국군 제9연대을, 북한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이 동두천의 한국군 제1연대을 각각 공격하기 시작했다. 포천과 동두천 방면은 3번 도로를 비롯하여 동측의 43번 도로와 서측의 316번 도로가 남북으로 뻗어있었고 광천 산맥과 천보 산맥이 험준하여 기계화 부대의 공격에 용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포천 방어를 담당하던 한국군 제9연대장인 윤춘근 중령은 북한군의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상부에서 "재량에 따라 주말외출을 실시하라"는 지시에도 불구하고 전 병력을 영내 대기시킨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화력을 가진 북한군의 선제공격에 38선 방어를 직접 맡고 있던 제2대대가 삽시간에 무너지자 나머지 제1대대와 제3대대가 포천 신북면 만세교 부근에서 지연전을 펼치기 시작했으나 결국 개전 당일 의정부 방면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또한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받은 동두천의 한국군 제1연대(연대장 함준호 대령)는 제2대대가 소요산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동안 제1대대가 마차산에, 제3대대가 봉암리에 각각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나섰다. 한국군 제1연대가 잠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기도 하였으나 북한군 제4사단이 오후 3시 경 제107전차연대를 선봉으로 내세우고 맹공격을 펼치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국군 제7사단이 맥없이 개전당일에 의정부 방면으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총참모장인 채병덕은 6월 26일 01시에 제7사단에게는 동두천을 탈환하도록 하고 대전으로부터 증원된 후방 예비병력인 제2사단에게는 포천 방면으로 향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전선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내려진 무모한 반격작전이 성공할 리 없었고 오히려 진격하는 북한군을 방어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이 되었고 결국 6월 26일 오후 1시에 의정부마저 내어주고 한국군 제7사단과 제2사단이 창동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펼치게 되었다. 



창동-미아리 전투

 

북한군은 개전 당일인 AD 1950년 6월 25일 하루만에 첫번째 목표인 의정부-문선 선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자 곧바로 퇴계원-창동-봉일천 등의 3개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특히 수도 서울의 동북쪽 경계인 창동을 상실할 경우 북한군이 그대로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은 사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다. 의정부 지구를 잃어버린 한국군 제7사단의 유재흥 준장은 도봉산-수락산의 구릉지대에 방어선을 형성하기 위해서 철수부대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는 전차가 기동하기 용이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한국군 제7사단은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후퇴하여 전라남도 광주에서 급하게 증원 온 이응준 소장의 제5사단이 지키는 미아리 고개까지 밀려나야 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전차 앞에는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6월 27일 미아리 방어선까지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한국군은 개전 4일 만인 6월 28일 수도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서 다시 방어선을 펼치게 되었다.


개성-문산 지구 방면


개성-문산 전투


개성-문산 지구의 방어를 맡은 한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6월 25일 오전 7시경 북한군의 남침소식을 전달받았다. 이때 백선엽 대령은 서울에서 가족을 만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복귀하였지만 이미 북한군 제6사단과 제7사단이 T-34 전차를 앞세운 공격에 제12연대(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38선 방어선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개성을 내어준 채 임진강 철교를 통해 후퇴하고 있던 상태였다. 수색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문산으로 서둘러 이동하였고 제11연대가 임진강을 건너자 철교를 폭파하고자 하였으나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이제 한국군 제11연대는 임진강철교를 확보하려는 북한군 제6사단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기 시작했다.


한편 개성부터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까지 20km에 이르는 38선을 맡고 있던 한국군 제13연대(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파평면의 파평산을 방어하고 있었다. 6월 26일 북한군의 T-34 전차부대가 내려오자 한국군 제13연대가 2.36인치 로켓포(바주카)를 사격하였지만 사격술이 미숙하여 단 1대도 파괴하지 못했다. 이에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전선줄로 묶어 만든 급조폭탄을 직접 들고 전차의 무한궤도를 파괴하는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한국군의 필사적인 방어에 북한군은 잠시 물러나게 된다.

 

비록 백선엽의 한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철교와 파평산에서 북한군을 사력을 다해 저지하고 있었지만 포천-동두천에서는 한국군 제7사단이 의정부까지 내어주고 밀려났기 때문에 우익이 매우 위험해졌다. 더욱이 6월 26일부터 임진강철교로 북한군이 T-34 전차를 투입하기 시작하자 제대로 된 대전차포도 가지지 못한 한국군의 임진강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한국군 제1사단은 6월 26일 오후에 방어선을 파주의 봉일천 부근까지 후퇴시켜야 했다. 



봉일천 전투와 한강 도하


AD 1950년 6월 27일 오전 10시경 북한군 제6사단이 봉일천으로 물러선 한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한국군에게는 북한군의 전차를 방어할 만한 대전차무기가 제대로 없기 때문에 전차 안으로 직접 수류탄을 던져넣기 위한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한국군 제15연대의 제3대대장인 최병순 소령이 직접 수류탄 특공조를 이끌고 돌격하였고 전차의 기관총 사격에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켰지만 최선두와 최후미의 전차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넣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하여 북한군의 전차 6대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북한군은 일단 후퇴하게 되었다. 이렇게 육탄공격을 불사하는 병사들의 희생 덕분에 한국군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은 반격으로 전환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6월 28일 정오쯤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고 이어서 한국군의 육군본부에서는 한강을 건너 철수할 것을 권고하자 어쩔 수 없이 한강도하를 위해 후퇴해야만 했다. 


수도 서울 함락과 한국군 방어선 재편성


수도 서울을 내준 한국정부는 대전으로 그 위치를 옮기면서 서울을 진입한 북한군의 한강 이남 진출을 막기 위해 한강 교량을 파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되고 만다. 아직 한강 이북에서는 철수명령을 받지 못한 채 적과 싸우고 있던 한국군 부대가 많았는데, 한강 교량 파괴로 이 부대들은 퇴로가 차단당한채 포위되고 말았다. 봉일천에서 후퇴하던 한국군 제1사단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강 교량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한강도하를 위해 행주 및 이산포 나루터로 향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군은 한강도하를 통한 철수계획을 수립한 적이 없었고 북한군의 맹공에 밀려난다는 사실에 많은 병사들이 충격받은 상태였다. 결국 먼저 선박에 타고자 무질서하게 서로 다투는 상황이 되었고 그 사이 북한군이 공격해오면서 많은 피해를 입고 말았다. 6월 29일 겨우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하여 부대 재편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모든 중장비와 차량, 곡사포ㆍ박격포ㆍ기관총 등과 같은 무기는 대부분 남겨둔 채 도하했기 때문에 제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되었다. 


더욱더 큰 문제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채 서울에 남아있던 서울시민이 한강교 폭파사실을 모른 채 한강으로 이동하였다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죽게되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한국정부는 한강교 폭파로 분노한 군과 국민의 분노를 달래고자 한강교 조기폭파의 책임을 물어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키게 된다. 참고로 AD 1964년 재판부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최창식 대령 부인의 항소심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하게 된다. 또한, 이때 도쿄에 있던 맥아더가 현지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서울로 날아와 육군 총참모장인 채병덕에게 한강방어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봤으나 채병덕은 "200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시켜 침략을 격퇴하겠다"라는 허황된 답변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과의 독대시에 채병덕의 해임을 요구했다. 결국 6월 30일 채병덕은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어 "경남지구 편성군 사령부"로 좌천되었고 대신하여 정일권이 후임 총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6월 28일 수도 서울을 내어주고 무질서하게 한강을 건넌 한국군은 크게 2방향에서 재집결이 이루어졌다. 의정부 방면의 병력은 서울 동쪽의 광나루와 뚝섬을 건너 수원으로 항했고, 문산 방면의 병력은 서울 서쪽의 마포 및 행주 나루터를 건넌 후 시흥에서 부대 재편에 들어갔다. 한국군 육군본부는 용산에서 수원으로 지휘소를 옮긴 후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곳에서 건제와 병과를 따지지 않고 혼성부대를 편성했다. 이렇게 하여 임선하 대령의 혼성 제2사단과 유재흥 준장의 혼성 제7사단, 이종찬 대령의 혼성 수도사단이 편성되었지만 총규모가 완편된 사단 규모에도 미치지 못했고 혼성 부대의 특성상 지휘관이 지휘병력의 얼굴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병사들도 원소속부대를 찾으면 그쪽으로 이동해 버리기 일 수 였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채 말죽거리-양화교에 이르는 한강 남쪽 강변에서 방어선을 펼첬다. 특히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가 남아있던 노랑진 일대가 가장 핵심적인 한강 방어선이 되었다. 

 

한편 개성-문산 방면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북한군 제6사단이 김포반도의 힌강 건너편에 나타났다. 김포반도가 북한국 수중에 들어가면 한강 방어선의 좌측면이 그대로 무너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한국군 육군본부는 급히 남산의 육군정보학교장 계인주 대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김포일대에서 가용한 병력을 모두 맡겼다. 하지만 수도 서울이 위급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전투병력의 지원이 어려웠기 때문에 김포 방면으로 후퇴한 제1사단 소속의 제12연대 제2대대를 중심으로 그동안 밀양에서 무장공비를 토벌하던 보국대대를 문래동에서 급파하고 시흥의 보병학교 후보생과 김포의 공병학교 학생 일부까지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한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인 M-8 장갑차를 보유하였던 한남동의 독립기갑연대 일부까지 증파하였다.



한강방어선 붕괴


한국군의 한강 방어선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고 시간을 벌기위해 유일하게 남은 한강철교를 폭파시키고자 하였으나 북한군의 방해와 변변한 폭파수단이 없던 한국군의 사정상 완전히 절단하지는 못했다. 노랑진에서 도하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6월 29일 정오부터 산발적으로 여의도 북단으로 도하하기 시작했고 7월 1일 새벽부터는 마포 나루터에서 뗏목과 나룻배를 동원하여 여의도 옆의 밤섬을 전진거점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서쪽의 김포반도에서도 6월 26일 북한군 일부가 김포반도 북단에 상륙하면서 김포비행장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6월 28일 김포읍이 북한군에게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김포방어를 맡은 계인주 대령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나중에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서 발견되면서 적전도주한 것으로 판명된다.


7월 2일 노량진을 지키던 혼성 제7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이어서 영등포를 지키던 혼성 수도사단도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7월 3일 노량진-영등포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이는 그동안 한강이라는 천예의 방어벽에 막혀있던 북한군 전차가 다시 투입된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미군이 부산에서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벌고자 한국군 육군본부는 패퇴 중인 혼성 제7사단과 혼성 수도사단에게 병력을 수습하여 시흥-안양 축선에서 지연전을 펼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북한군 전차의 진격을 막을 방법이 없던 한국군의 시흥-안양 방어선이 단 하루 만에 무너졌고 육군본부는 수원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국군의 분전, 춘천 지구 방면

  

춘천 전투


중부전선을 담당한 한국군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에 제7연대, 홍천 북동쪽에 제2연대를 배치하고 제19연대를 예비로 원주에 배치하여 전방을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은 방어지역의 서측인 북한강과 전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소양강을 이용하여 제7연대를 북안에, 제2연대를 남안에 각각 배치하고 있었으나 제2연대는 불과 개전 5일 전인 6월20일이 되어서야 사단에 예속되었으므로 이곳에서 제8연대와 진지교대를 마쳤고, 제19연대 또한 5월에 예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직 작전지역의 방어준비는커녕 지형조차도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더욱이 다른 한국군과 마찬가지로 병력의 3분의 1이 외출 및 외박을 한 상태에서 북한군의 남침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이 개시되기 이전인 6월19일 생포한 포로의 진술과 화천, 양구일대에서 수집된 정보를 분석한 사단장인 김종오 대령은 조만간 적의 도발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사단 자체로 경계조치를 취해 두고 있었다.


이러한 대비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제2사단은 SU-76 자주포를 앞세워 불과 2시간 만에 화천과 춘천을 연결하는 요충지인 모진교를 점령하고 손쉽게 춘천 외곽인 역골, 지내리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은 조기 방어선 붕괴에도 불구하고 질서정연하게 후방의 계획된 주저항선인 소양강 방어선을 점령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후방에서 올라온 제19연대의 증원과 제16포병대대의 지원을 받은 제7연대는 소양강을 방어막 삼아 협로에 북한군이 진입하기를 기다린 후 기회를 포착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후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한 효과적인 지연전을 통하여 북한군 제2사단 전력의 40%를 감소시켰다. 한편 제6사단 제2연대도 홍천 북방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7사단을 맞이하여 말고개 일대에서 11명의 특공조가 육탄으로 공격해 북한군의 SU-76 자주포 10여문을 파괴 또는 노획하는 등 순차적인 매복과 역습을 통해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처럼 개전 초기 거의 모든 전선에서 한국군이 일방적으로 밀려나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군 제6사단 만은 3일간이나 춘천을 확보하면서 북한군 제2군단의 춘천-홍천 축선의 진출을 지연시키는 데 성공한다. 춘천 전투에서 한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에 상대하여 적 살상 6,800명, 포로 120여 명, 전차와 자주포 18대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고, 전사 200명, 부상 350여 명, 그리고 1,300여 명의 실종자가 나왔으나 실종자의 대부분은 대부분 부대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서부전선은 이미 서울이 함락 직전이었기에 제6사단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원주를 거쳐 충주로 전략적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이 공으로 김종오 대령은 7월 15일 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한국군 제6사단이 철수한 뒤에야 북한군 제2군단은 비로소 춘천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이미 작전 계획보다 2일이나 지연된 상태였다. 이로서 북한군 제2군단이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 방향으로 진출하여 한국군의 주력병력을 포위 격멸한다는 북한군의 최초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고 한국군은 개별적으로 후퇴한 패잔병들과 낙오병들을 긁어모아 편제를 유지하고 있던 일부 부대와 합치는 식으로 방어선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7월 초에 춘천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북한군 제7사단을 제12사단으로 개칭하고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 그리고 제2군단장을 교체하였는데 이는 개전 초라는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써 춘천 전투 실패가 북한군에게 얼마나 뼈아프게 작용했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릉 전투


북한군 제2군단 중 제5사단(사단장 마상철 소장)이 침공을 개시한 강릉지구는 한국군 제8사단(사단장 이정일 대령, 나중에 이성가로 개명)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개전 직전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유격대 60명을 오대산과 계방산으로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시킨 상태였고 개전 당일인 6월 25일 새벽에는 제945육전대와 제766유격대를 정동진 및 임원진 일대에 상륙시켰다. 그리고 새벽 4시경 7번 도로를 축선으로 주문진을 향해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하였다. 북한군의 강력한 화력에 38선 방어를 맡고 있던 한국군 제8사단 제10연대가 지연전을 펼치면서 강릉과 연곡천-사천 일대로 물러나 방어선을 재편하였고 정동진과 임원진에 상륙한 북한군을 상대하기 위해 강릉 남쪽 12km 지점의 군선강에서 방어진지를 급편하였다. 

 

주문진 일대를 확보한 북한군은 6월 26일에는 잠시 진격을 멈추었으나 6월 27일 새벽이 되자 한국군 제8사단의 방어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10연대의 제2대대가 임의로 후퇴하여 한국군의 방어선 일부가 무너지는 위기가 닥쳤으나 때마침 삼척에 있던 제21연대가 도착하면서 방어선이 붕괴되는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였다. 이렇게 한국군 제8사단이 강릉을 개전 후 3일간이나 지켜내자 북한군은 목표를 강릉이 아닌 원주로 변경하였고 이에 퇴로를 차단당할 것을 우려한 한국군 제8사단도 강릉을 포기하고 평창을 거쳐 제천으로 퇴각하였다. 


미군의 참전과 지연전


미 제24사단의 참전과 한국군 재편


6월 29일 한국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6월 30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있던 미국 극동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 7월 1일 미군이 부산에 상륙했다. 개전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에게 비로소 원군이 도착한 것이었으나 맥아더 원수는 미군이 참전한다는 것을 북한군이 알게 될 경우 진격을 멈출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규슈에 주둔 중이던 미 제8군 제24사단 제21연대 소속의 제1대대를 선봉부대로서 우선 파견했다.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이어서 미 제24사단의 제21연대 나머지 부대와 제34연대를 파견하여 부산을 거쳐 대전으로 향하게 하였다. 


미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강방어선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해야 했던 서부전선의 한국군은 7월 4일 평택 부근에서 재집결하고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제1군단으로 변경시켰다. 본래 한국군은 개전 초기에 8개사단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단이 병력을 소진하였으므로 비교적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던 춘천의 제6사단과 강릉의 제8사단, 대구의 제3사단을 제외한 나머지 5개사단을 수도사단, 제1사단, 제2사단의 3개사단으로 재편하고 제1군단의 휘하에 배속시켰다. 이와 별도로 해체된 제5사단, 제7사단을 재건하고 부산에서 제9사단을 신규 창설하고자 하였으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가용한 인원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여 실현되지는 못하고 만다. 이제 한국군 제1군단장이 된 김홍일 소장은 경부본도를 미군에게 맡긴 후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산악지형을 이용한 지연전을 펼치며 미군과 보조를 맞추기 시작했다. 또한 춘천에서 물러선 한국군 제6사단은 충주 부근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진격을 저지하도록 했고 강릉에서 철수한 한국군 제8사단 역시 단양에서 북한군 제8사단과 전투를 벌이도록 했으며 마지막으로 대구의 한국군 제3사단은 동해안의 7번국도를 방어하는 역할을 맡았다. 



경기도 방어선 붕괴


오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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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동아시아 게시판 공지사항(2014. 5. 15) (9) 관리B팀 05-16 171076
16261 [한국사] 고수/고당 전쟁 시 고구려와 수/당의 주요 접경지 지… (20) 감방친구 06-24 618
16260 [기타] 흉노, 스키타이 관련/ 잡설 (1) 관심병자 06-24 659
16259 [한국사] 신라 김씨왕조가 진짜 흉노인가요 (14) 햄돌 06-24 1217
16258 [한국사] 과연 단군은 우리의 선조일까. (30) 마구쉬자 06-23 906
16257 [한국사] 현 요하 하류 해안선 변화 관련 정보 (137) 감방친구 06-20 1554
16256 [한국사] 익산 미륵사지석탑, 20년만에 일제 땜질 떼고 본모습… (10) Attender 06-20 1767
16255 [한국사] 현 요동지역의 고대 해안선과 서안평의 위치 (65) 감방친구 06-18 1674
16254 [한국사] 낙랑군 등 전한(BC 1세기) 유주 형국도 시각화 (7) 감방친구 06-17 952
16253 [한국사] 백정이 백인이었다고 선동질하는 위조 족보 노비 출… (11) ep220 06-17 2532
16252 [한국사] 고조선부터 삼국시대(5세기)까지 역사영토 시각화 (15) 감방친구 06-17 1143
16251 [한국사] 요서 백제 추적(bc 3세기~ad 5세기) (23) 감방친구 06-16 1164
16250 [기타] 목참판 묄렌도르프 관심병자 06-15 806
16249 [기타] 신라의 마의태자는 어디로 갔나? (4) 관심병자 06-15 1225
16248 [한국사] 장수왕은 남하한것이 아니라 서진 했다. (24) 도배시러 06-15 1857
16247 [한국사] '낙랑군재평양설 증거No.1' 효문묘동종 분석글 지수신 06-14 797
16246 [한국사] 책소개 -- "세계에 널리 자랑할말한 잃어버린 한국의 … (1) Attender 06-13 1395
16245 [한국사] [단독]“임진왜란때 왜적 혼 빼놓은 ‘원숭이 기병대… (4) 패닉호랭이 06-13 2185
16244 [한국사] 김정민박사 강의 - 고대사_ 고구려,부여는 몽골 부… (8) 조지아나 06-13 1397
16243 [한국사] 선비는 부여와 동본 (3) 감방친구 06-13 880
16242 [기타] 한국 전쟁 - 북한군의 침공과 지연전 관심병자 06-11 1642
16241 [한국사] 일본은 왜 김해김씨 족보 발행을 금지 시켰을까? (10) 피닉 06-11 3469
16240 [기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패전사-유재흥 (3) 관심병자 06-10 935
16239 [한국사] 一道安士 복원 열국왕력 3 (7) 지수신 06-10 746
16238 [한국사] 一道安士 복원 열국왕력 2 (4) 지수신 06-10 447
16237 [한국사] 一道安士 복원 열국왕력 1 (4) 지수신 06-10 766
16236 [한국사] 재야사학자 一道安士의 저서, <삼한사의 재조명> 지수신 06-10 486
16235 [기타] 고구려와 거란, 선비 잡설 (3) 관심병자 06-10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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