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절,
우리에게 신비와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던 금강산(金剛山),
시와 노래로만 만날 수 있었던 금강산을 이제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금강산에는 아직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은 곳이 있다.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峯)이다.
그곳에는 1,000년 전의 유적이 숨 쉬고 있다.
신라(新羅)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유적이 그것이다.
신라가 멸망하자, 금강산으로 들어가 홀로 풀을 베어 먹으며 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
과연 마의태자는 그렇게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했을까?
왕건(王建), 궁예(弓裔), 견훤(甄萱)은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를 풍미했던 주역들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인물이 있다.
신라(新羅)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다.
이광수(李光洙)의 소설에도 등장했던 마의태자는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하자, 금강산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는 비운의 왕자다.
그런데 정말 마의태자의 최후가 우리가 알고 있던 그대로일까?
사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마의태자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유일하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고려에 항복을 하자, 왕자는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밑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으면서 생을 마쳤다."라고 적혀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태자는 통곡을 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서 죽을 때까지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뜯으면서 생을 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가지의 기록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 마의태자가 금강산에서 허무하게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이 쓴 금강예찬(金剛禮讚)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최남선이 금강산을 다녀온 후 쓴 기행문 형식의 책인데, 이 책에는 마의태자에 관한 글이 기록되어 있다.
"태자의 유적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다른 것이다.
이 깊은 골짜기에 들어온 그에게 성(城)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이었을 리가 없다."
이 말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금강산의 유적이라는 것들이 마의태자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금강산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마의태자에 관한 유적이 발견돼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마의태자는 과연 어디서, 어떻게 최후를 맞은 것일까?
마의태자의 유적이 발견된 곳은 강원도 인제군이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마의태자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신라 천년 사직 최후의 장소임을 알리고 있다.
실제 마을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여러 전설들이 남아 있다.
인제군 상남면에는 넓은 들판에 덩그러니 큰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두 개의 돌이 포개져 있는 이 바위의 이름은 '옥새바위'다.
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겨 놨다는 바위다.
마의태자가 숨겨 놓은 옥새를 지키기 위해 늘 뱀이 바위 주변을 맴돌았다는 것이다.
옥새바위가 있는 상남면 옆에 있는 남면의 김부리라는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넘어야 하는 고개가 하나 있다.
이름하여 '수구네미'
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어 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구네미를 넘으면 만나는 마을이 김부리다.
이곳에도 마의태자와 관련된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대왕각(大王閣)은 시골 마을에서 간혹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부리의 대왕각은 신(神)을 모시는 여느 성황당이나 산신각과는 다른다.
전각 안에 모셔진 위패의 주인공은 경순대왕의 태자 김일(金镒), 바로 마의태자인 것이다.
그런데 1940년 이전에 있었던 글귀는 지금과는 달랐다고 한다.
"경순대왕일자지신위(敬順大王一子之神位)"로 김일(金镒)이라는 이름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위패의 주인공은 분명 경순왕의 아들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1년에 두 번 마의태자를 기리며 제사를 지냈다.
오랫동안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일이다.
사실 역사 인물이 신격화되어 모셔지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무속인이 남이(南怡) 장군이나 최영(崔瑩) 장군 같은 특정 인물신을 모시는 것과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역사 인물을 모시는 것은 그 성격이 다르다.
바로 그 마을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왕각의 존재는 마의태자가 이 마을에 잠시라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한 것일까?
마을에는 마의태자 활동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의 전설이 있다.
맹장군이 살았다는 '맹개골'이 있는데, 맹장군은 마의태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최후까지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 재건을 위해 의병을 모으고 군사활동을 한 인물이다.
양구의 '군량리'라는 지명은 신라 부흥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두었던 곳이라고 전해지며, 인제군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의미한다.
마의태자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다무리라는 지명을 낳았다고 마을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인제 지역에는 마의태자에 대한 구체적이고 생생한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었다.
인제 지역에 남아있는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은 평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마의 태자는 풀을 뜯으면서 생을 마친 것이 아니라 신라 부흥운동을 한 것이었다.
물론 이런 주장은 특별한 역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난히 항거에 관련된 지명이 많을 뿐 아니라 매년 두 차례씩 마의태자를 모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분명 범상치 않다.
그러나 인제 지역의 주인공이 처음부터 마의태자였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학자인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란 책에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데 "관동 인제현에 신라 경순왕이 살던 지역이 있어 이곳을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 명명하였다.
읍지에 많은 사적이 실려 있는데 경순(敬順)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金傅)이다.
그리고 인제 지역의 '김부리'라는 마을 이름은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그 주인공은 경순왕이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왔다.
대왕각의 신위를 보면 전설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다.
그러나 '김부대왕동'이라는 지명은 경순왕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신라의 경순왕은 인제에 올 가능성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경순왕이 왕위에 있었던 행적을 살펴보자.
당시 신라의 영역은 지금의 경상도 지역으로 좁혀져 있었다.
따라서 경순왕이 인제까지 올라갈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어떠했나?
삼국사기에는 항복하던 날의 경순왕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왕건에게 항복한 경순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왕건에게 갔다.
경순왕은 고려의 수도인 개성으로 향한 것이다.
개성에 도착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고려사를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태조 왕건은 경순왕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 주었다.
태자보다 높은 자리인 정승으로 봉하고 대궐 동쪽에 신란궁(神鸞宮)을 마련해 주었다.
개성에 정착해 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기록 중에는 과연 경순왕이 개성에 살았는지 의혹을 갖게 하는 부분이 있다.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사심관 제도는 지방에 대한 중앙의 원활한 통치 방법과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는 제도이다.
경순왕으로 비롯된 사심관 제도는 지역 연고자에게 해당 지역의 행정을 총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주 사심관이 된 경순왕이 다시 개성을 떠나 경주로 갔을 가능성을 없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경순왕이 다시 경주로 내려가지 않고 개성에 살았다는 것은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순왕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도 개성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바로 왕릉의 위치 때문이다.
현재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에 있다.
신라의 왕들 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묻힌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 경순왕의 무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개성에서 불과 60리 떨어진 곳, 이것은 경순왕의 최후가 개성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고려의 귀족들은 개성에서 살다가 죽은 후에도 개성에 묻히기를 원했다.
경순왕도 항복한 군주였지만 고려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으며 여생을 보내다가 죽은 후 개성에 묻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가능성만이 남는다.
경주에서 개성까지 항복하러 가는 길에 인제에 들른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시 경순왕의 행렬은 30리에 달할 정도로 길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행렬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신라의 교통로 중 제일 큰 길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계립령(문경과 충주를 잇는 고개)을 통과하는 길이다.
경주에서 계립령이 있는 문경과 충주를 지났다.
그리고 수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양평을 지나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개성으로 갔을 것이고, 육로를 이용할 경우 이천을 지나 서울로 갔을 것이다.
경주에서 개성까지 경순왕이 지나는 길에 인제는 없었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을 봤을 때 신라 경순왕이 강원도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욱이 김부(金富)와 경순왕의 김부(金傅)는 한자가 다르다.
그렇다면 인제와 관련된 인물은 마의태자일까?
하지만 아직도 의문이 남는다.
김부대왕동의 유래가 되는 김부(金富)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치로나 이름으로 봤을 때 김부대왕동과 대왕각은 분명히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대왕각의 신위는 김일(金鎰), 즉 마의태자이다.
마의태자의 이름은 김일(金鎰)로 김부대왕동의 이름과는 전혀 다른 이름이다.
김부(金富)와 김일(金鎰),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런데 얼마 전 인제 갑둔리에서 그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됐다.
인제 갑둔리 어귀에는 5층 석탑이 하나 세워져 있다.
그나마 이곳에서 석탑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탑골'이라는 마을 이름을 근거로 학생들과 함께 주변 지역을 조사해 본 결과 예상대로 탑의 조각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우선 그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모았다.
그리고 하나씩 끼워 맞추어 나가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탑 기단부에서 명문(名文)이 발견된 것이다.
탑 기단부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보살계제자구상주
(普薩戒第子仇上主)
김부수명장존가
(金富壽命長存家)
오층석탑성영충공
(五層石塔成永充供)
양태평16년병자8월일
(養太平十六年丙子八月日)"
명문 중에 '김부리'라는 똑같은 한자의 '김부(金富)'라는 글자가 있었다.
지명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단서였다.
"보살계 제자였던 '구(仇)'가 상주(上主)인 김부(金富)의 수명이 오래되고 그 집안이 잘 보존되기를 기원하면서 5층 석탑을 조성했다."라는 명문의 해석처럼 이 탑은 김부(金富)라는 사람을 위해 조성된 탑이었고 김부(金富)는 사람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적 사람일까?
탑의 형태로 보아 고려 초기의 탑으로 추측되는데 보다 정확한 연대는 명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명문의 "태평 16년'은 요(遼)나라 연호로 고려 정종 2년(1036년)을 말하는데 신라가 멸망하고 100여 년이 흐른 뒤다.
따라서 김부(金富)는 고려 초기 존재했던 인물인 것이다.
탑에 이름을 새기고 기릴 정도라면 제법 영향력이 있던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을까?
고려사에는 6명의 김부(金富)가 등장하지만 모두 명종 재위(1170년 이후)후의 인물들이었다.
결국 고려사로는 김부(金富)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김부를 기리기 위해 탑을 세운 시기와 마의태자가 살던 시기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마의태자 김일(金鎰)과 석탑에 새겨진 이름 김부(金富), 혹시 두 이름 사이에 김부(金富)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단서는 없을까?
당시 표기법이었던 향찰을 이용해 살펴보면 익(益)과 부(富)는 '넉넉하다'는 뜻을 가진 한자로 같이 쓰인다.
따라서 '넉넉하다'라는 뜻의 일(鎰)도 부(富)와 같이 쓰일 수 있는 것이다.
김부(金富)는 바로 김일(金鎰)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런 예들이 여러 차례 보이는데, 그중 지명으로 '머리'란 뜻의 수(首)와 두(頭)가 함께 쓰여 '우수주(牛首州)'를 '우두주(牛頭州)'라고도 하였고, '고을 또는 마을'이란 뜻의 리(里)와 항(巷)이 함께 쓰여 '월명리(月明里)'를 '월명항(月明巷)'이라고도 한다.
사람 이름에도 같은 예가 있다.
부(夫)와 종(宗), 이 두 글자는 음을 틀리지만 그 뜻은 똑같이 '마루'를 뜻한다.
따라서 '이사부(異斯夫)'와 '태종(笞宗)', '거칠부(居柒夫)'와 '황종(荒宗)'은 동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자 할 때에도 같은 뜻의 한자를 이용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거득령공(車得令公)'이란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기 위해 '단오(端午)'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갑둔리 오층 석탑에 새겨져 있는 김부(金富)라는 이름은 마의태자 김일(金鎰)의 또 다른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당시 표기법이었던 향찰이라던가, 또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싶을 때 같은 뜻의 한자를 혼용해서 썼던 예를 볼 때 김부(金富)는 김일(金鎰), 즉 마의태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마의태자와 인제는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의태자는 왜 인제에 머물렀던 것일까?
마의태자의 기록이 남아있는 삼국사기에는 마의태자가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갔다고 적혀있다.
개골산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금강산을 말하는데, 금강산과 인제는 지도상으로 볼 때 그리 멀지 않다.
금강산과 경주, 인제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당시 경주에서 금강산을 올라가는 가장 손쉽고 빠른 길은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다.
그런데 마의태자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마의태자의 마지막 행적의 기록은 전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경주에서 금강산까지 가는 길 곳곳에는 마의태자의 유적과 전설이 남아있어 그 행적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전설이 남아 있는 곳이 충주다.
월악산 자락에 자리 잡은 미륵사(彌勒寺) 대원사지는 마의태자에 의해 세워졌다고 한다.
미륵사 대원사지와 마주보는 위치에 또 하나의 절이 있다.
바로 덕주사(德周寺)다.
마의태자의 동생인 덕주공주(德周公主)가 창건했다는 절이다.
특히 이곳에는 덕주공주가 조성했다는 마애불(磨崖佛)이 전해지고 있다.
덕주사의 마애불과 미륵사의 대원사지는 서로 마주 보는 형국인데 이는 두 남매가 서로 눈길을 마주하는 형국이라고 전해진다.
충주에 이어 원주, 그리고 양평에도 마의태자의 전설이 남아있다.
양평의 유명 사찰인 용문사(龍門寺)에는 불상이나 사찰 건축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곳이 있다.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것은 사찰 안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다.
수백 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이 은행나무의 유래에 마의태자의 전설이 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들렀던 용문사에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그 지팡이가 지금까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인제로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홍천에도 마의태자의 전설이 남아있다.
지왕동과 왕터는 바로 홍천에서 인제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그렇다면 이제 마의태자 전설이 있는 지역들과 신라의 교통로를 접목시킨다면 마의태자의 행적을 추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의태자의 전설이 있는 고을을 따라가 보면 마의태자는 동해안 길을 두고 내륙의 산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마의태자가 간 산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충주와 원주는 통일신라시대 각각 중원경과 북원경으로 불리던 신라 제2의 수도였다.
그리고 마의태자가 지나간 곳은 모두 천혜의 요새들이다.
충주에 있는 미륵사 대원사지와 덕주사도 덕주산성 안에 들러싸여 있어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이 되는 곳이다.
마의태자가 신라의 주요 도시들, 그중에서도 천혜의 요새들만 선택해서 간 이유는 무엇일까?
경주에서 인제까지 마의태자가 선택했던 길에는 신라 부흥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쉬운 해안길을 두고 굳이 내륙의 주요 도시들을 거쳐간 데에는 신라 재건을 도모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현재 인제에 남아있는 전설과도 같다.
그렇다면 마의태자는 인제에서 실제로 신라 부흥운동을 한 것일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김부(金傅)가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자 태자가 이에 반발하면서,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충신과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할 때 말것이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일천년 사직을 쉽사리 남에게 내어 주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태자는 통곡을 하면서 물러섰다고 한다.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결정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태자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쉽사리 금강산에 들어가 운둔생활을 했을까?
더구나 당시 신라에는 경순왕의 항복 결정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당대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도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평생 운둔생활을 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신라가 패망하고 200년이 흐른 뒤에도 신라 부흥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자, 최충헌(崔忠獻)이 '신라 부흥의 소문이 각지로 퍼저 나가니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까지 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신라 부흥운동은 지속됐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때 현재 인제에 남아 있는 전설대로 마의태자는 신라 부흥의 꿈을 가질 수 있었을 법도 한데, 당시 인제는 어떤 곳이었을까?
신라 말 인제는 일찍이 고려에 복속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인제는 고려보다는 신라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이미 6세기부터 신라 장군 이사부에게 점령 당해 신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인제는 군사적 요충지로 외부 세력에 대항하기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한계산성(寒溪山城)이다.
한계령 고개에 있는 이 산성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앞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어 방어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산성은 마의태자가 있던 고려 초기에도 존재했을까?
현재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축성 기법을 통해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한계산성의 축성 기법은 이중으로 쌓은 구조인데 이런 기법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기법이다.
따라서 마의태자가 인제지역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초기에도 산성은 이 자리에 있었다.
산성에는 실제 사용되었음을 짐작하는 흔적이 있다.
산성 꼭대기에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데 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안전을 기원하며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천제단 기둥에는 명문이 남아있다.
너무 희미해 그 의미를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산성이 이용되었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흔적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계산성은 줄곧 이 지역의 방어기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제 지역에서 방어기지 역할을 한 곳은 한계산성만이 아니다.
산성 곳곳에서는 기와가 발견되는데 이와 똑같은 기와가 나타나는 곳이 있다.
백담사(百潭寺)의 전신인 한계사지(寒溪寺址)가 그 곳이다.
우선 한계가 한계산성과 같이 고려초에 이 자리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석탑을 통해 창건 연대를 추정해 보았다.
이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의 석탑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흡사한 구조였다.
고려 초기에 인제에는 한계산성과 한계사지가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같은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절은 일반적으로 부처님을 봉안하고 일반 신자들이 와서 불공을 드리고, 스님들은 여기서 공양을 하고 이러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계사지와 같은 절은 절의 기능만 했다고 볼 수 없고 어떠한 국방의 기능 또는 산성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저항세력이 정착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이어야 한다.
지금 김부리는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났지만 인제 일대는 산간오지이면서도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살기 좋은 곳이었다.
실제 이곳 김부리 일대만 해도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학생들이 발견한 유물들은 제법 많은 편이었다.
유물 중에는 고려 시대 최고급품이었던 청자 접시도 보이고 각종 서민들이 썼을법한 그릇과 단지들도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살기 좋은 지역일 뿐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 인제는 마의태자를 비롯한 신라 세력이 정착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역이었다.
인제는 고려에 대항해 신라 부흥운동을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마의태자의 운명과 함께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송나라 사람이 지은 '송막기문(松漠記聞)'이란 책에는 금(金)나라 건국 시조에 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여진 부족 형태였을 때 추장이 신라인이라는 기록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금나라의 시조는 신라인이라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신라 부흥의 꿈은 좌절된 것이 아니라 만주 대륙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그럴까?
중국과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을 통해서 본 결과 금나라의 역사서인 금사(金史)에도 금나라의 시조가 고려로부터 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금사와 송막기문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송막기문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이라고 적고 있다.
과연 고려인일까, 신라인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시조 함보(函普)가 금나라에 들어간 연대를 확인해 봐야 한다.
시조 함보는 금나라를 건국한 아골타(阿骨打)의 7대조다.
그런데 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한 것이 1115년인데,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해 거슬러 올라가면 함보가 만주 대륙으로 건너 간 연대가 나온다.
바로 900년대 초가 되는데 이때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가 건국하는 격변기였다.
이때 고려인으로도 불리고 신라인으로도 불렸다면 그는 고려에서 간 신라인일 것이다.
실제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금나라로 간 신라인은 누구일까?
고려사에는 그 의문을 풀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금의 조상이 된 사람은 평주의 승려로 그 이름은 금준(今俊), 혹은 김극수(金克守)라는 것이다.
그런데 금준과 김극수, 그리고 중국 기록에 나오는 함보 등 기록마다 이름이 다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 외에 자(字)가 있고, 아명(兒名)이 있고, 호(號)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여러 개가 있을 수 있고 금나라 시조는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기에 동일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나라의 시조는 평주의 승려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황해도 평주는 통일신라시대의 중요 지역이었다.
또한 신라 멸망 이후 귀족이나 왕족들 중 상당수가 속세를 떠났다.
마의태자의 동생도 절로 들어가 승려가 됐으며 최치원도 해인사로 들어갔다.
따라서 평주의 승려도 경순왕의 항복에 불만을 품은 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만주 대륙으로 올라간 평주의 승려 김극수는 부족의 지도자가 되는데, 금사에는 그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금사에 의하면 당시 두 부족 간에는 오랫동안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함보가 지금으로 치면 법규에 해당하는 조항을 만들어 부족 간의 싸움을 끝맺게 했다는 것이다.
이후 함보는 여진족의 신망을 받으며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김극수는 부족의 지도자가 됐고 200여 년이 흐른 후 그 후손이 금나라를 세웠다.
훗날 금나라 건국의 발판이 된 것은 바로 신라 재건의 의지였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로 고려에 순응하지 않았던 마의태자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두세 줄의 기록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마의태자의 최후 행적을 추적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인제에 남아 있는 유적이나 전설들에서 쓰러져 버린 신라를 재건하려 했던 마의태자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부흥 의지가 있었기에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만주 대륙으로 이어져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출처] 역사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