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시성
0) 당ㆍ송 역대 사서 ㅡ 한나라 안시현 근방
1) 무경총요 ㅡ 현 북진시 근방
2) 요사 지리지 ㅡ 동경 남쪽 70리
3) 독사방여기요 ㅡ 개주위(요양 서남쪽 240리) 동북쪽 70리
2. 안시현
1) 대요수가 안시현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
2) 대요수, 소요수, 마자수(압록수)가 모두 안시 일대에서 바다로 들어간다(신당서 지리지)
3) 안동도호부이자 옛 평양성이 금주시 근방에 위치(조양시 동남쪽 270리, 무경총요)/안시성 거란 동경과 함께 북진시 근방에 위치(무경총요)
4) 이적은 요수 상류를 통해 북쪽 루트로 요동성에 도달, 당 태종은 영주에서 요택을 지나 요수를 건너 남쪽 루트로 요동성과 안시성에 도달(신당서/통전/자치통감/삼국사기)
5) 당 태종이 건넌 요택 200리(신당서/통전/자치통감/삼국사기)/영주~연군성-여라수착 200리(가탐 도리기 제 2도/황화사달기)
3. 개주위
1) 요사 지리지/주해도편/독사방여기요 근거 현 판진시
2) 현지명 근거 잉커우시 남쪽 현 개주시
학계 주류가 주도한 삼국사기 국역에서는
태조대왕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공격했다고 해석을 해놓고 있습니다만
원문 자체로 보면 서쪽 안평현이 아니라 서안평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왜 그러느냐
ㅡ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략하고 있었고
ㅡ 서안평이 아니라 요동군 서쪽 안평현이라면 고구려가 뭔 수로 요동군 서쪽을 공략합니까? 학계 통설을 따르자면 말이죠 즉 서안평이 아니라 서쪽 안평현이라고 주류학계가 해석하는 것은 자가당착,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것이죠
고대 해안선을 토대로 서안평의 위치를 복원하였을 때에
한-공손씨-위-모용씨에게, 그리고 고구려에게 저 위치가 어떤 의미인지 분명해집니다
즉 저 위치가 요동군 서쪽 안평현이 아니라 서안평이어야
대방태수를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노략질 한 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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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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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는 269년 모용부의 대인(大人)인 모용섭귀(慕容涉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에 모용섭귀가 죽자 그의 동생 모용내(慕容耐)가 정권을 장악하고 모용외를 죽이려 하였으나 모용외가 요동으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85년에 모용내가 국인(國人)에 의해 살해되자 모용외가 대인으로 추대되었다.
모용외는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와 사이가 좋지 않아 공격하려 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진과 적대하게 된 모용외는 유주(幽州) 일대를 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서진 무제(武帝)는 모용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으나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또한 서기 285년 부여(扶餘)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慮)를 xx하게 하였다. 서진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모용외는 289년에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段部)의 침입을 피해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겼다.
307년, 모용외는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서진에서 유민들이 모용외에게 귀부하여 오는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력을 크게 키웠다. 이에 서진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유민들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유민들이 듣지 않자 모용외가 억류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18년에 우문부, 단부, 고구려(高句麗)를 끌어들여 모용외를 협공하게 하였는데 모용외는 삼국의 군사를 이간질시켜 위기를 벗어나고 우문부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최비는 모용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결국 319년에 고구려로 망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요동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모용외는 고구려와 적대하여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320년에 동진(東晉)은 모용외를 안북장군·평주자사(安北將軍平州刺史)로 삼았으며, 이후 모용외는 동진에 충성하여 후조(後趙)와 대립하였다. 321년에는 동진에서 모용외에게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거기장군·평주목·요동공(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車騎將軍平州牧遼東公)을 제수하였다. 325년에는 후조에 복속하였던 우문부가 석륵(石勒)의 명령에 따라 모용외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오히려 반격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모용선비 3세기부터 4세기 초까지의 이동
1) 대흥안령 남부
2) 현 하북성 동북 ㅡ 유주공격, 부여 공격
: 유주를 공격하고 부여를 공격하고 서진이 부여를 구원하려면 서진이 부여를 구원하러 가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3) 우문부를 피해 도하 청산으로 이동
: 2의 위치보다 남쪽이어야겠죠
4) 극성으로 이동
: 서진의 평주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갈등을 겪기 시작, 고구려의 서쪽과 가까운 지역이라는 말이죠
5) 용성으로 이동
42.
서기 293~296년, 고구려 봉상왕, 모용외의 침입과 화친(침략지 북부 신성, 고국원)
43.
서기 298년, 백제 책계왕, 가을 9월, 한(漢)나라가 맥인(貊人)들과 합세하여 침범하였다. 임금이 나가서 막다가 적병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44.
서기 302년, 고구려 미천왕, 병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침공,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김
45.
서기 304년, 5호 16국 시대 시작( ~ 439년)
46.
서기 304년, 백제 분서왕, 봄 2월, 몰래 병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현(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낙랑 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
47.
서기 311년, 고구려 미천왕, 요동의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음
48.
서기 311년, 서진의 실질적 멸망(유총에 의한 낙양 함락, 서진 군사 10만여 명 몰살)
49.
서기 313년, 고구려 미천왕,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음
50.
서기 314년, 고구려 미천왕, 대방군(帶方郡)을 침공
51.
서기 315년, 고구려 미천왕, 현도성을 침공하여 깨뜨렸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음
52.
~ 서기 319년, 고구려 미천왕, 진나라(진나라는 이미 망한 상태) 평주자사 최비와 공모하여 우문선비, 단선비와 연합해 모용선비의 극성을 공격하려다 실패, 모용선비의 장통이 고구려 침략
53.
고구려는 계속하여 모용선비의 요동지역을 공격
54.
서기 339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황(慕容皝)이 침입하여 그의 병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임금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감
55.
서기 342년, 고구려 고국원왕,
봄 2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음,
가을 8월, 임금이 환도성으로 거처를 옮김,
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수도를 옮김,
11 월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입해)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감
56.
서기 345년, 고구려 고국원왕,겨울 10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에게 우리나라를 침공케 하여 남소(南蘇)를 무너뜨린 후 수비군을 남겨두고 돌아감
57.
서기 346년, 부여, 백제의 공격을 받은 뒤 서쪽으로 모용선비 영역 근처로 이동
58.
서기 346년, 모용황의 부여 공격(부여왕 현을 포함 5만여 명이 전연으로 끌려가고 사실상 부여 붕괴)
59.
서기 355년, 고구려 고국원왕, 모용선비와 화친, 모용선비는 고구려왕에게 이전과 동일하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征東大將軍營州刺史)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함
60.
서기 366년, 백제 근초고왕, 가야 정벌, 마한의 실질 정복(전남권까지 지배력 확대)
61.
서기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 백제의 치양(雉壤) 침략(고구려와 백제의 사상 최초의 군사충돌)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前漢)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B.C 59)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訖升骨城)[대요(大遼)의 의주(醫州) 부근에 있다.]에 내려왔는데, ★
다섯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왔다.
대요(大遼)의 의주(醫州) => 요사지리지의 려주로 추정
閭州。羅古王牧地,近 醫巫閭山。在遼州西一百三十里 요사 지리지1
고대 해안선에 대하여 한말씀 드립니다.
2번 해안선의 경우 여러 시대에 해안선 변화가 그러 하였다, 생각됩니다.
1번 해안선의 경우. 서안평현이 있던 한나라 시대를 상정한 것이라면, 해안선 관련 연구의 너무 옛날 연구를 참고하신듯 합니다. 이미 태안현(台安縣)의 경우 기원 전후 성곽과 유물들이 다수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시기에는 해안선이 태안현 이남에 존재 하는 것이 확실하며, 태안현 유물 발견 이전의 연구는 해안선 연구로의 의미가 상실된 것입니다.
1번 해안선의 경우 구글 홍수지도에서 살펴보면 대략 15m 전후 해수면이 상승 했을때 가능 한데, 이정도 해수면이 상승하면 산동 반도는 섬입니다.
제가 살펴본 기원전후 해수면은 현재의 해수면의 + 3m 전후입니다.
역사 연구를 하실때는 기본적인 지구과학에 위배되는 주장을 하시면, 지구과학에 필패하십니다. 해안선은 과학적인 주장들을 먼저 참고하셔야지 어떤 역사서를 읽고 서안평이 그 위치이고 서안평이 바닷가에 있으니 해안선이 거기다 ????? 라고 주장하면 곤란합니다.
독사방여기요가 서안평 시대의 사서입니까??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이미 태안현에는 기원전후 유물이 존재합니다.
게다가 해수면이 지금보다 15M 정도 높은 정도를 상정하면 산동반도가 섬이 됩니다.
그시대 산동반도가 섬입니까????
이런 것들은 옛날에는 잘 알수 없었기에 기원 전후 해안선이 선양 인근이라고 연구된것들도 있으나, 그런 예전 추정에 의한 연구는 요즘에는 잘못된것으로 알고 있지요.
제가 홍수지도를 언급한것은 요즘은 구글지도를 이용한 홍수지도를 여러 싸이트에서 제공합니다. 원하는 해수면을 설정하면 전지구의 침수범위를 바로 알수 있습니다.
예) 홍수 지도
http://www.floodmap.net/ http://flood.firetree.net/
이분 참 왜 이렇게 사람의 말을 부정적으로 곡해하여 감정적인 말을 섞는지 모르겠습니다
심바님, 누가 태안 지역의 유적을 무시한답니까?
제가 같은 댓글을 두 번이나 달았지 않습니까?
본문에 지도로서 제시한 고대 해안선이 아니라 요중현 근방이라고 수정했지 않습니까?
바이두백과를 참고해서요
그거 안 읽으셨어요?
본인의 첫 댓글 바로 위에 달았고,
본인의 첫 댓글에 답댓글로 또 달아드렸잖아요?
요중이면 태안현 바로 동쪽 옆 아닙니까?
거기까지 고대 해안선으로, 17세기까지는 판진까지라고 학자들이 연구한 것이
님 기분을 상하게 하기라도 했습니까?
요중까지 해안선이었다고 해서 거기가 바로 무슨 동해바다처럼 찰랑찰랑 거리는 깊이 푹 빠지는 바닷물이 들어왔답니까?
그 근방이었다는 정도이고 저도 그런 식으로 말한 거 아닙니까?
글의 본질과 핵심은 서안평의 위치를 사서와 고대 해안선을 교차하여 제시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람 기분을 건드리면서 말씀하세요?
제가 언제 님 기분 상하게 했습니까?
물음표 참 좋아하시네요??? 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언짢으세요???? 예???
참내 이해가 안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