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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20 14:15
[한국사] 현 요하 하류 해안선 변화 관련 정보
 글쓴이 : 감방친구
조회 : 7,611  



1.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721360)

전국(戰國)시기 연(燕)나라가 동북(만주)을 개통하고 요동, 요서, 우북평(右北平) 3군(郡)을 설립했다. 요동군 아래 18개 현이 있고 요서군 아래 14개 현이 있었는데 모두 요택소택지 밖으로 분포되었다. 서한(西漢)은 이 소택지 동부와 동남부 인근지역에 요동군 소속인 요양현(역사상 최초의 遼陽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요중<遼中>현 자유타진<茨楡타鎭>), 험독현(險瀆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대안현 동남쪽 손성자<孫城子>마을), 요대현<遼隊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해성 서북쪽의 고타자진<高타子鎭>) 3개 현을 설치하였고 서부 인근지역에는 무려현(無慮縣, 즉 최초의 북진현<北鎭縣>, 위치는 현재 북진 동남쪽의 요돈향 대양갑촌<廖屯鄕大亮甲村>)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요택소택지 북부에다 망평현(望平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신민 전당포진 대고성자촌<前當鋪鎭大古城子村>), 남부에다 방현(房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반금시 대와현 소염탄 부근<盤錦市大窪縣小鹽灘附近>)을 설치하였다. 이 현들은 삼국(三國)시기 전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삼국시기 요택 동남부의 험독현과 방현이 폐기된 후 청나라 말기 대안현을 설립할 때까지 1600여 년 동안 요택지역에는 아무런 현과 주(州)도 없었다. 후연시기에 폐기된 요택 북쪽의 망평현 지역도 200여년이 지나서야 수나라가 비로소 현재 신민 고대자(高臺子)에다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줄곧 사람들에게 포기된 요택은 그냥 황량한 지대였다.

요나라, 금나라시기에 이르러 요하평원지역의 현과 진 및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요택에도 인가가 조금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때 요·금 두 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사신(使臣)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대부분 요택 중간지대를 꿰뚫고 다녔다. 명나라 때, 요택의 소택지를 남쪽으로 돌아가는 길, 즉 남로를 주로 이용했다. 요양에서 요서지역에 이르는 이 길은 도중에 안산(鞍山), 해주(海州, 즉 해성), 우장(牛莊), 사령(沙嶺), 고평(高平), 반산(盤山), 판교(板橋), 십삼산(十三山) 등 역참(驛站)을 설치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계속하여 요택의 그 남로를 이용하는 동시에 요택 북부의 길이가 120리 되는 ‘첩도(疊道)’와 이어진 새로운 ‘북로’를 개척하고 도중에 역참을 설치하였다. 이 길이 그때부터 북경과 심양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간선으로 되었다. 청나라 시기 정부차원의 ‘사람을 모집하여 주둔시켜 개간하는 정책’의 실행과 산해관 서쪽의 사람들이 산해관 동쪽으로 몰려가서 살길을 찾는 민간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요택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진과 마을이 급속히 불어났다. 요하 동쪽의 요택지역은 봉천부 소속 요양주와 해성현에서, 요하서쪽의 요택지역은 금주부(錦州府)에서 관할했다. 그중 현재 북진지역에 광녕(廣寧)현을 설치하고, 흑산지역에는 청나라 초기 팔기병(八旗兵)이 주둔하는 성을 쌓아놓고 진안(鎭安)현으로 개칭하였다. 요택의 남부, 즉 현재 반금지역에는 청나라 초기부터 관아의 말을 기루는 방목장을 설치하였다. 청나라 동치(同治) 2년(기원 1863년)에 이르러 요택지역에서 처음으로 창호(漲湖, 현재 흑산현 사가자 향<四家子鄕> 남쪽)에서 호취자(湖嘴子)까지의 토지를 측량하여 민간에 농사짓도록 풀어주고 아울러 이런 사업을 총괄 추진하는 관아를 반사역(盤蛇驛)에 세워놓았다. 그리고 요택 북쪽 현재 신민지역에다 선후로 거류하순검(巨流河巡檢), 신민청(新民廳), 신민부(新民府)를 설치하였다. 건륭(乾隆) 이후부터 도광(道光) 연대에 이르는 동안 신민 남쪽 유하(柳河) 하류지역의 유하구(柳河溝) 등 지세가 낮은 곳에다 배수도랑을 파고 길과 제방을 수축하여 시골마을 사이의 길이 많이 생겨났다. 이렇게 청나라 중기에 이르러 요택지역의 자연환경이 좀 다스려지기는 했지만 그 기본 상태는 별로 큰 변화가 없었다.

청나라 말기 하요하평원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하요하 양안에 주와 현이 불어난 데다 청나라 광서(光緖) 32년(기원 1906년)에 이르러 요택과 인근 지역에 반산청(치소는 처음에 반사역에 설치했다가 2년 후에 쌍대자<雙臺子>로 옮김)과 요중현을 설치하고 1913년에는 대안현을 증설하였다. 이리하여 요택 전 지역에 마을과 진이 더 많이 생겨나고 인구도 많이 불어났다. 사람들은 제방과 배수도랑 등 수리시설을 수축하고 황무지를 일구며 소택지의 물을 빼고 땅을 말리어 농사를 광범위하게 짓게 되었다. 이렇게 반세기가 넘는 대규모의 개척과 개발로 말미암아 그렇게 넓고 크던 요택이 차츰 사라져 버렸다.

요택지역의 개척사업과 경제발전에 따라 교통상황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1922년에 현도(縣道), 향도(鄕道), 리도(里道) 3급(三級) 도로망 건설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이때 요택 한복판의 대안에서 기타 현으로 통하는 길의 너비가 10m에 달했고, 1924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심양~요중 간 버스가 통행했다. 일제시기 질이 저열하지만 양(量)적으로 적지 않은 도로와 다리들을 건설하여 요택지역에 교통노선이 많이 증가되어 요하 서쪽의 대안, 요중, 대호산(大虎山), 북진, 구방자(溝幇子), 반산 사이에 도로망이 초보적으로 구축되었다. 하지만 1949년 10월 이전까지 일부 사석(砂石) 바닥의 길을 제외한 대부분 도로는 장마철에 질어 차가 통행하지 못하였으며 지대가 낮은 구간은 겨울날 결빙기에만 차가 다녔다. 해방(1949년 10월 1일) 후 나라에서는 경제건설과 함께 교통건설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여 철도와 도로망이 요하평원을 덮어버렸다. 이리하여 오랜 시기 차량 통행이 어려웠던 요택의 교통이 크게 변모하였다. 최근 10여 년 들어 요령성에서 고속도로 건설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여 요택지역과 그 주변 도시 사이에도 고속도로가 통했다. 그리하여 심양, 대련 등 대도시에서 고속도로로 요택지역에 가려면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정말로 상전벽해가 이루어졌다.

요택의 현재 지모를 알아보려고 필자는 승용차로 하료하평원을 가로 세로 지르며 가보기도 하고, 요택의 원래 남·북로와 이어진 주변도로를 따라 요택을 한 바퀴 돌아보기도 하였다. 반산, 대안, 요중, 북진과 흑산의 동부, 해성의 서남부, 심민의 남부, 심양과 요양의 도시 서부지역에 분포되었던 요택의 소택지 모습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대신 넓고 평탄한 평야에 기름진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이 지역은 모두 국가의 유명한 농업생산기지로서 ‘요령의 곡창’과 ‘물고기와 입쌀의 고장’으로 거듭났다. 학자들의 소개에 의하면 옛날 요택의 소택지는 아직까지 좀 남아 있다고 한다. 그곳은 주로 현재 대안경내의 서평(西平)산림공원, 대맥과(大麥科) 습지, 면적의 총화가 1만무(666ha)가 넘는 크고 작은 못과 물웅덩이, 그리고 해성 서남쪽의 삼차하습지, 흑산의 요양하습지, 반금(盤錦) 습지의 일부 구역이다. 그중에 필자가 소개하고 싶은 것은 지금도 옛날 요택과 비슷하다고 하는 규모가 대단히 큰 소택지를 가지고 있는 반금이다.

요하강은 자신의 유별난 자태로 기세 드높게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를 뿌리치고 나와 기복을 이루며 자유분방하게 수많은 개울과 하천들의 물을 모아 바다의 품속으로 달려간다. 요하가 바다로 흘러드는 곳에 커다란 기름진 평원을 충적해 놓았다. 대자연은 은혜롭게 이 신비로운 지방을 현지 사람들에게 선사하였다. 1984년에 국무원의 비준(批准)을 거쳐 이곳에다 반금시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의 판도(版圖) 위에 하나의 신흥 생태도시가 생겨났다. 면적이 4천71k㎡ 되는 땅 위에 한족, 만족, 회족, 조선족 등 28개 민족의 126만 인구가 화목하게 사는 반금은,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금자리로 변했다. 반금의 공업은 석유생산으로 유명한데 전국에서 크기가 세 번째로 꼽히는 요하유전(油田) 본부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반금의 농업은 벼 생산으로 유명하여 이곳이 북방과 요령성의 상품곡물생산기지와 입쌀수출기지로 되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제발전이 빠른 반금은 1990년대부터 전국의 ‘풍요롭게 사는 도시’ 대열에 들어섰다. 반금은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온다. 왜냐면 이곳은 요하가 바다로 흘러드는 순박함과 웅장하고 힘찬 기세가 있고, 근 100만 무가 되는 아득한 갈대밭의 예스럽고 소박함과 힘차게 솟구치는 정서가 약동하고 있으며, 두루미가 가져다주는 보람과 상서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요하입해구 드넓은 간석지에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이한 풍경지대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붉은 갯벌을 의미하는 홍해탄(紅海灘)이라 부른다. 붉은 색상에 보라색이 스며있는 함봉초(함蓬草, 한국에서는 퉁퉁마디 혹은 나문재라 부른다고 한다)들이 붉은 노을처럼 아름답고 눈부시게 바다와 하늘까지 쭉 이어져있는데 마치 백리나 뻗어나간 갯벌에 깔아놓은 거대한 융단 같다. 그리고 거기에 군데군데 자라고 있는 식물들이 청록색으로 단장해 그 정경이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원래 조수가 밀려 나갔다 들어오는 지대다. 바다물이 점차 갯벌에서 물러나갈 때 생명력이 극히 강한 함봉초는 여기에서 뿌리를 내려 자라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밀물과 썰물의 반복적인 이동에 따라 함봉초가 차차로 번져 이런 홍해탄이 형성되었다. 함봉초는 매년 4월에 연한 붉은 색을 띠다가 점점 짙은 홍색으로 변하여 10월이 되면 또 자홍색으로 바뀐다. 밀물이 몰려올 때, 이 천연적으로 아름다운 불꽃들은 넘쳐흐르며 색채가 현란한 생명을 넘실거리게 한다. 만약 이 시각에 당신이 그곳에 있다면 마치 자신도 자연으로 되돌아와 그것들과 서로 융합되어 그 붉은 채색노을의 한 오리의 아름다운 빛깔로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몇 해 전부터 홍해탄에다 목조 부두와 구곡낭교(九曲廊橋), 두루미 등 물새들의 낙원 수금원(水禽園), 월아만습지공원(月牙灣濕地公園) 등 관광구역을 설치해 놓았다.

홍해탄은 살아있다. 그는 언제나 파도의 종적을 뒤쫓아 간다. 이 간석지는 요하강이 휩쓸고 온 진흙과 모래로 말미암아 해마다 50m의 속도로 바다로 뻗어나간다. 그러므로 홍해탄도 따라서 해마다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2. 중국 바이케 백과

(http://www.baike.com/wiki/%E4%B8%AD%E5%9B%BD%E5%8E%86%E5%8F%B2%E6%97%B6%E6%9C%9F%E6%B5%B7%E5%B2%B8%E7%BA%BF%E7%9A%84%E5%8F%98%E8%BF%81)

요동해안선.jpg


3. 독사방여기요/요사 지리지

<독사방여기요>


廣寧衛司西四百二十里。西至山海關五百八十里,西南至廣寧中屯衛百八十里,東南至海州衛二百四十里,南至海百三十里。

秦、漢遼東郡地。晉因之,後沒於高麗。唐復取其地,尋沒於勃海,為顯德府地。遼置顯州奉先軍。金改為廣寧府,亦曰鎮寧軍,初屬東京路,尋屬北京路。元亦曰廣寧府。至元十五年,改為廣寧路。明洪武二十三年,改置衛。今為廣寧縣,屬錦州府。


無慮城今衛治。本漢之無慮縣,屬遼東郡。後漢屬遼東國。元初二年,遼東鮮卑圍無慮。又陽嘉初,鮮卑寇遼東屬國,耿曄移屯無慮城以拒之。晉省。唐置巫閭守捉城。勃海為顯德府地。遼置奉先縣為顯州治,領山東縣。金改山東曰廣寧縣,為州治。元省縣入府。明初因舊城修築,周十里有奇。永樂中,總兵劉江增拓南關,是後數修築。嘉靖三十四年,復增築南關,合於北城,謂之新城。


望平城衛東北九十里。漢置縣,屬遼東郡。後漢因之。晉省。遼置山東縣,屬顯州。金仍分置望平縣。元曰望平千戶所,尋復為縣。明初省。又遼西城,亦在衛東北。遼置遼西州阜城軍,統長慶縣,仍屬顯州。金廢。


險瀆城,在衛東南,漢縣,屬遼東郡。應劭曰:縣依水險,故曰險瀆,後漢屬遼東屬國。後廢。


閭州城在衛東北。遼置。《志》云:以近巫閭山而名。在遼州西百三十里,西北至上京臨潢府九百五十里,金廢。又順州城,在衛東北百二十里。《遼志》:漢遼東郡遼隊縣地也。遼置順州,西北至上京九百里,金廢。○豪州城,在衛東北二百二十里。《遼志》:漢遼東西安平地也,遼置州,西北至臨潢七百二十里,金廢。又渭州城,在衛東北二百五十里,《遼志》亦曰高陽軍,金廢。



<요사 지리지 상경도>


壕州。國舅宰相南征,俘掠漢民,居遼東西安平縣故地。
在顯州東北二百二十里,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戶六千。


渭州,高陽軍,節度。駙馬都尉蕭昌裔建。尚秦國王隆慶女韓國長公主,以所賜媵臣建州城。顯州東北二百五十里。遼制,皇子嫡生者,其文與帝女同。戶一千。


原州。本遼東北安平縣地。顯州東北三百里。國舅金德俘掠漢民建城。西北至上京八百里。戶五百。

福州。國舅蕭寧建。南征俘掠漢民,居北安平縣故地。在原州北二十里,西北至上京七百八十里。戶三百。

橫州。國舅蕭克忠建。部下牧人居漢故遼陽縣地,因置州城。在遼州西北九十里,西北至上京七百二十里。有橫山。戶二百。


鳳州:稿離國故地,渤海之安寧郡境,南王府五帳分地。
在韓州北二百里,西北至上京九百里。戶四千。


4. 중국 역사지도집 요/북송

(호주를 표시하지 않았음. 중국역사지도집은 중국에 불리한 것, 특히 핵심적인 것은 이런 식으로 표시하지 않음)


중요동1.jpg


중요상1.jpg


동경도 상세 지도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31109_281%2Fpavius01_1383968449707mCAzf_JPEG%2F17.jpg


상경도 상세 지도

http://blog.naver.com/storyphoto/viewer.jsp?src=https%3A%2F%2Fblogfiles.pstatic.net%2F20131109_192%2Fpavius01_138396839961871h7B_JPEG%2F15.jpg



5. 논문 <중국 요하 하류부 고대 요택의 공간 분포와 Holocene 중기 이후 해안선 변화>

"The shoreline of Liaodong Bay was progressed seaward 30km/ka during 1000~1100 AD, while 10~40km/ka during late 19 century ~ early 20 century. "


 https://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235679383



6. 고고물질문화상으로 본 요하 하류


<명도전 출토지>

명도분포.jpg


<세형동검 출토지>

동검분포도.png


<BC 8~5세기 물질문화상>

maxresdefault.jpg


<BC 5~4 세기 물질문화상>

bzbz13.jpg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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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6-20 14:31
   
본인은 이곳에서 지난 1년여 압록강을 추적해 왔다
그 지난한 과정이 이곳 동아게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 지난 글 보기를 보시라

삼국사기, 고려사, 요사, 금사, 원사, 송사, 명일통지, 독사, 자치통감, 통전, 무경총요, 신당서, 구당서, 한서 등 무수한 사서를 찾아 교차 분석하여

동요하~요하가 마자수요 압록이라는 것을 밝혔다

마자수는 압록강인데
한서에서는 이 강이 서안평현에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당송 시기 이후 명초 이전 사서에서는 안시(현/성)에서 대요수, 소요수와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했다

명ㆍ청 시대의 지도에 나타난 현 요하지역 해안선이 지금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이 지역이 요하와 그 주변 무수한 하천이 밀어낸 토사로 충적지가 계속하여 형성됐다는 사실과
요ㆍ금, 명ㆍ청 시대에 현 신민시 이남 지역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또한 신민시 이남 지역에서 고고물질문화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본인의 지난 글을 다시 검토하는 과정에서
서안평ㅡ호주 내용을 다시 발견[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1309&sca=&sfl=mb_id%2C1&stx=cellmate&page=20 ]하여
이를 해안선 변화에 접목해 발제한 것이다

즉 한서에서는 서안평현을 제시하는데 왜 당송 시대 사서는 안시현을 제시하는가 하는 해답을
본인은 해안선 변화에서 찾은 것이다
감방친구 18-06-20 15:58
   
도배시러 18-06-20 16:19
   
명도전 출토지 북경~승덕 구간... 저곳 아래가 바다 해안이다보니 분포가 짙게 나옵니다.
승덕은 한대의 지명을 알수없고... 요송때에는 덕승 => 德勝嶺 = 得勝嶺
즉, 우북평의 위치는 요서의 북단 지역... 우북평을 바다속으로 밀어넣는 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지성~영변 사이의 짙은 분포지역
압록강 쪽은 당시에 바다였을 가능성이 높네요.
     
감방친구 18-06-20 16:24
   
요서의 서북이 우북평인 건 맞아요
앞에서 게시한 유주 형국도는 그렇지 않아도 다음에 수정하려 했습니다

저 명도전 표시는 출토량에 따라 표시 크기를 크게 한 거라서
고대 해안선을 침범한 건 아닙니다
          
도배시러 18-06-20 16:39
   
그렇게 되면 조조가 오환족 답돈을 정벌하는 코스가 통설에 가까워집니다.
무종-노룡새-평강-백랑산... 우북평 북쪽 지역을 상실한 후한말기
[노룡새는 당 노룡현의 서북 2백리에 위치]
도배시러 18-06-20 16:25
   
거참... 산융의 옥황묘 문화지역은... 당나라 괄지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요순의 거주지를 말하는 것인데... 문헌적으로 요순시대를 산융과 겹쳐버리는 문제가 있네요.

문헌적으로 북경 북쪽은 요순시대의 거주지, 북경 우측은 산융의 거주지
도배시러 18-06-20 16:35
   
춘추시대 연의 물질 문화

연국이 봉해진 초기 지역은 계[지금의 지현...지도의 북정] 부근으로 보는데...
남양, 고연, 연하도 물질문화를 기준으로 잡는다는것은... 오늘날 생각하는 연나라 중심지에서 서남으로 이동해야..
춘추시대 연나라의 위치를 더 서남쪽으로 옮겨서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 ?

즉, 춘추 연나라 중심지 계 葪 의 위치는 북경 서남쪽 ?
Korisent 18-06-20 18:22
   
오 좋은 자료 잘보고 갑니다.
감방친구 18-06-21 03:40
   
고구려 답사 ㅡ 요택



그(초충순)의 견해에 따르면 요나라 초기까지 요하의 상류 서요하충적평원에도 호수, 소택지, 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초지로 이루어진 요택이라 부르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기후변화와 그 지역 토지사막화로 인하여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말하는 요택은 주로 하요하(下遼河, 심양 북쪽 석불사저수지 남쪽의 요하구간) 평원에 분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부동한 역사시기 그 지리범위도 같지 않다.

먼 옛날부터 진나라와 한나라 시기에 이르기까지 요택은 현재 북진(北鎭, 금주 소속 현급 시)~요중(遼中) 사이에 분포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로 현재 북진, 흑산(黑山), 신민, 요중, 대안(안산시 소속 현), 반산(반금시 소속 현)이 둘러싼 구역이다. 현대 지리 상황을 본다면 이 구역은 요하강 서쪽의 움푹 파인 평원으로서 주변지역이 모두 높게 솟아있는데 서쪽은 요서 구릉이고 북쪽은 요북 낮은 구릉지며, 동쪽과 남쪽 지역은 또 상대적으로 좀 높다. 이런 지세는 하천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하고 또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수많은 호수와 소택지를 형성했다.

삼국시기부터 수나라, 당나라 때까지 요하강 서쪽에 있는 요택의 범위가 더 커졌다. 이 시기 동서방향으로 요택은 기본상 변하지 않았지만 남북방향으로는 더 늘어났다. 삼국시기 요하강 동쪽지역은 공손씨(公孫氏)가 할거(割據)하고 있었고, 요하강 서쪽지역은 선비(鮮卑)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중간지역은 무(無) 관리지역이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때도 이러했다. 때문에 요택 동남부지역에 한나라가 설치했던 험독현(險瀆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대안현 동남쪽 손성자<孫城子>마을)와 방현(房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반금시 대와현 소염탄<盤錦市大窪縣小鹽灘> 부근)은 삼국시기 폐기된 후 청나라 말기에 와서 거기에 대안현을 설립할 때까지 요택지역에는 1천600년이 넘도록 아무런 주(州)와 현(縣)이 없었다.

요택 북부에 있었던 망평현(望平縣, 치소의 위치는 현재 신민시 전당포진 대고성자촌<前當鋪鎭大古城子村>)도 후연(后燕)시기 폐기되어 수나라 때 와서야 신민 고대자(高臺子)에다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요택지역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도 줄곧 황량하고 쓸쓸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동안 이곳의 하천들이 여러 번 넘쳐나 호수와 늪이 많은 소택지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요택은 남쪽으로는 현재 대안현 전부와 반금 동북부지역까지 퍼져나갔고, 북쪽으로는 현재 신민 남부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이때 요택의 동서너비가 200리가량 된다.

명나라와 청나라시기 요하강 동쪽까지 확대된 요택이 또 늘어났다. 이에 앞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때, 전 시대(前時代)에 있었던 요택은 점차적으로 요하강 동쪽으로 번져나갔다.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 이르러 요하강 동쪽의 이 소택지가 심양 서부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청나라 대학사(大學士) 고사기 (高士奇)는 북경에서 심양으로 강희황제를 따라 순방한 과정을 기록해 놓은 <호종동순일록(扈從東巡日錄)>에 이렇게 써 놓았다. “…심양에서 요하까지 100여리 사이인데 지세가 낮아 땅이 온통 진흙탕으로 되어 말과 수레가 다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청태조는 심양을 도읍지로 정한 다음 팔기(八旗, 군사성과 행정성을 띤 청나라의 조직)의 일꾼들을 시켜 너비가 3장되는 첩도(疊道, 흙을 퍼 올려 겹쳐 쌓은 길)를 120리나 수축해 심양에서 거류하(巨流河, 심양 서북쪽의 요하강구역의 별칭)까지 평지처럼 오고 갈 수 있게 해놓았다고 한다. 소택지가 심양 서부지역까지 늘어난 동시에 요양 서쪽에서부터 그 서남쪽으로 해성의 우장(牛莊)까지도 소택지가 형성되었다.

위 두 지역이 소택지로 변하게 된 것은 주로 요하, 태자하·혼하가 범람해 강줄기가 변한 까닭이다. 이 세 갈래 강이 여러 번 넘쳐나고 강줄기가 서쪽으로 몇 번 옮겨져 요하 강변에서 심양서부지역까지 소택지가 넓어지게 되었고, 이 세 갈래 강의 합류점이 그냥 남하(南下)해 요양서쪽에서 그 서남쪽 우장까지의 지역이 소택지가 된 것이다.

요택의 규모가 제일 컸던 명나라와 청나라시기에는 동쪽으로 요양과 심양의 서부지역, 서쪽으로는 북진과 흑산의 동부지역, 북쪽으로는 신민 남부지역, 남쪽으로는 반산과 해성의 우장까지인데, 남북길이가 약 300리 되고 동서너비는 200리가량 된다.



http://m.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5681#imadnews
     
도배시러 18-06-21 04:01
   
● (당나라 초기 660년) 한원서 翰苑 고구려 대요수 요택(遼澤)

漢書地理志曰 遼東郡望平縣 大遼水出塞外 其水西南流合契丹國黃水 又西南經遼東城西八十里 又南入海闊百餘步
高驪記云 其水闊百餘步 平流清深 又多灣潭枝派兩岸生長柳蒙密 可藏兵馬 兩畔彌平
總名遼澤 多生細草雈蒲毛羣羽族 朝夕相霧須臾卷斂 狀若樓雉 即漢書所謂蜃氣也.

한서지리지에 말하길 요동군 망평현 새(塞)밖에서 대요수(大遼水)가 나온다. 대요수는 서남으로 흘러 거란국 황수(黃水)와
합류한다. 또 서남으로 흘러 요동성 서쪽 80리를 지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강폭은 백여보 이다.
고려기(高驪記)에서 말하길 대요수 강폭은 백여보(百餘步) 이다. 평평하게 흐르는데 맑고 깊다. 또 만담(꾸불꾸불 S)이 많고
양쪽 언덕에는 기다란 버들나무長柳 가 빽빽하게 자란다. 병마를 숨기기에 좋다. 양쪽 경계는 두루 평평하다. 요택(遼澤) 이라 한다.

가느다란 세초가 많이 자라는데 (새털 같다).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끼니 쇠뇌(활 卷)를 숨기기 좋다.
(안개)형상은 누치(樓雉, 치雉-고구려 성곽에서 돌출된 부위)와 같다. 한서(漢書)에서는 이른바 신기루(蜃氣)라 하였다.

=> 사진과 전혀 매칭이 안되는 고문헌의 요택설명... 버들나무가 빽빽하다는데 ?
          
감방친구 18-06-21 04:26
   
한서 지리지의 요수~무경/요사 요수는 현 대릉하입니다

". 대요수는 서남으로 흘러 거란국 황수(黃水)와
합류한다. "

 이 지리정보는 잘못된 것이죠

무경총요에서 소요수를 대릉하, 대요수를 요하로 하고 요수는 소요수를 지칭하는 것을 제가 소개한 바 있습니다

대릉하와 의무려산 동쪽(실제로는 북쪽을 끼고 동북쪽)에 있는 요동군의 위치를 고구려 영역 깊숙이에 비정하려 하는 쭝궈 사서들의 애잔한 노력이 지리정보를 흐트려놓는 것입니다
          
감방친구 18-06-21 04:30
   
서남으로 흘러 요동성 서쪽 80리를 지난다. 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강폭은 백여보 이다.
고려기(高驪記)에서 말하길 대요수 강폭은 백여보(百餘步) 이다. 평평하게 흐르는데 맑고 깊다. 또 만담(꾸불꾸불 S)이 많고
양쪽 언덕에는 기다란 버들나무長柳 가 빽빽하게 자란다. 병마를 숨기기에 좋다. 양쪽 경계는 두루 평평하다. 요택(遼澤) 이라 한다.

ㅡㅡㅡ

대릉하와 부신시, 의무려산 북쪽 2개 방면에서 서남으로 대릉하 본류로 흘러드는 2 개의 강줄기를 대입하면 맞습니다

요하는 100보가 아니라 300백 보고, 비가 오면 바다가 되고
강 양쪽에 언덕과 숲이 있는 곳이 아니라 풀밭입니다
               
도배시러 18-06-21 04:34
   
오늘날 요하는 고대 요하 보다 더크고 주변지형이 다르다는 것이죠
          
감방친구 18-06-21 04:36
   
한서 지리지에는 망평현에서 대요수가 나온다는 말이 없습니다
모든 사서가 반복적으로 적고 있는 게 정답입니다
즉 대요수/요수는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것이 그것이죠
모든 사서가 의무려 남쪽ㅡ대릉하 하구ㅡ금주 방면을 안시현이라 하고 있습니다
               
도배시러 18-06-21 04:42
   
하지만 중국학자들은 안시현을 요동반도로 비정.
요수설명과 어긋난다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주류설로 받아들이는 한국사학계
          
감방친구 18-06-21 04:37
   
망평현(望平縣), 대료수(大遼水)가 새(塞) 밖을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현(安市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료양현(遼陽縣), 대량수(大梁水)가 서남쪽으로 료양현(遼陽縣)에 이르러 료수(遼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료음(遼隂)이라 했다.

거취현(居就縣), 실위산(室偽山)은 실위수(室偽水)가 나오는 곳인데, (실위수는) 북쪽으로 양평현에 이르러 량수(梁水)로 들어간다.

고구려현(髙句驪玄),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서개마현(西蓋馬縣), 마자수(馬訾水)가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은) 2개의 군(郡)을 지나고 1100리를 흐른다. 왕망은 현도정(玄菟亭)이라고 했다.
               
감방친구 18-06-21 04:42
   
망평현은 안시현 북쪽, 양평현 근방이라는 얘깁니다

현도군 고구려현 정보는 요동군으로 교치된 다음의 위치정보입니다

교치로 인한 정보 혼잡상은 제가 요사ㅡ무경총요 다루면서 지겹게 따진 바 있습니다

대요수는 대릉하
대량수/량수는 부신ㅡ의현 방면의 물줄기
실위수는 이 량수로 흘러드는 물줄기

양평현은 부신ㅡ의무려 일대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죠

마자수는 말할 것도 없이 요하
                    
도배시러 18-06-21 04:44
   
당나라 이세적이 요수의 근원이 어디인지.... 거란인에게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도배시러 18-06-21 04:02
   
■ 요택 전투 사례 : 고수전쟁

영양왕 23년(서기 612) 2월, 양제가 군대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들어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의 병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나라의 병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1장(丈)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우리의 병사가 강하게 공격하였다. 수나라의 병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벌였으나
우리의 병사들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나라 병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영양왕 [嬰陽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양쪽에서 전쟁이 불가능한데도... 꼴리는데로 추측하는 현대인의 요택 망상
          
감방친구 18-06-21 04:14
   
역사시대의 요택을 끌어다가 현 요하 중하류 요택을 설명하는 중한학자들의 견해는 걸러들어야죠

이 기사문(동일 기자가 작성)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1) 신민시부터 그 아래로 요하를 비롯하여 여러 물줄기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동에서 서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흘렀고 처음에는 신민시ㅡ요중의 남북라인 기준 서쪽에 소택지가 여럿 형성돼 있었는데 요하 물줄기가 심양 쪽에서 북진 방향으로 옮겨가면서 심양의 서쪽에도 소택지가 형성됐다는 사실
2) 4세기부터 20세기까지 근 1600년 동안 태안ㅡ요중ㅡ안산 라인 밑으로는 아무런 취락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
3) 17세기까지 반금이 해안선이었다는 사실
4) 그 이전 시기 신민ㅡ반금 북남 라인과 그 동서 안팎은 소택지가 곳곳에 형성돼 있었다는 사실
5) 명청 시대에 심양 서쪽에 소택지가 여럿이고 길이 없어서 청 초기에 도로를 닦았다는 사실
6) 기원 전후의 해안선은 신민시와 요중 사이로 추정된다는 사실

등입니다
          
감방친구 18-06-21 04:18
   
따라서 기원전후의 한 요동군 서안평은 흑산ㅡ요중ㅡ요양 하한선과 신민ㅡ심양 상한선 사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2세기 고구려 태조대왕이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해 대방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한 사건이 설명이 되는 것이죠
          
감방친구 18-06-21 04:19
   
태조대왕 94 년 (서기 146), 가을 8월, 임금이 장수를 보내어 한나라 요동의 서쪽 안평현(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노략질하였다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ㅡㅡㅡㅡ

즉 이 기사는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죽이고 낙랑~노략질한 1개 장소의 사건이 아니라

3개의 연쇄 사건의 기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1)요동군 서안평을 습격했고
(나아가서)
2) (대방군을 습격해) 대방의 수령을 죽였고
3) (낙랑군을 습격해) 낙랑의 처자를 납치했다

이렇게 해석해야 옳은 것이죠

습격한 대상은 요동군 서안평만이 아니라
ㅡ 요동군 서안평
ㅡ 요동군 서안평을 통해 대방군, 낙랑군
이렇게 3곳을 습격한 것이죠
               
도배시러 18-06-21 04:39
   
현대의 학자들이 만든 요택 때문에
대동강 방면 진입은 어려워 보이네요
                    
감방친구 18-06-21 04:44
   
대동강 해구에 상륙 자체가 어렵답니다
거기는 우리 서해안처럼 개펄이 무진장 길어서 상륙불가

반면에 안산ㅡ잉커우 쪽은 바로 천산산맥이 붙어 있어서 지대가 단단하고
당시에는 판진ㅡ안산 라인 위쪽까지 밑으로는 바다였으므로 패수인 태자하하구에 정박하여 대규모 상륙전 가능
감방친구 18-06-21 04:58
   
598 고구려가 타격한 수나라 요서가 당나라 연주고
이 때에 임유관에서 전투도 치렀는데

고구려 마미주가 조양 근처이고

고구려 국경에 갈석(역산)이 있었는데

당 태종이 미쳤다고 영주를 출발해서 사람도 안 사는 요하 지대로 뭐하러 끼들어가겠습니까

이세적이 출발한 유성은 조양이 될 수가 없어요
고죽과 영지가 다 난하 서쪽인데 유성이 고죽성이라면서 어느 사이에 조양에까지 가져다 붙였어요

난하가 고구려 서한선이니
이세적은 회원진(도배시러님이 고찰한 그 위치)으로 가는 척 하다가 북쪽으로 삥 돌아서 들어오는 겁니다
이세적이 건넌 요수는 당태종이 건넌 대릉하 요수가 아니라 난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옳습니다
     
감방친구 18-06-21 04:59
   
고수전쟁, 수나라의 요서와 회원진
도배시러 작성일 : 18-03-08 20:30 조회 : 533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7010&sca=&sfl=mb_id%2C1&stx=likone&page=4
     
도배시러 18-06-21 05:14
   
난하, 조백하... 둘중에 하나가 한때 요수 였을것이라는 분위기는 있는데...
확증을 못하게 얼버무린게 많아서 저는 유보하고 있습니다

수경주 우북평 지역에서 동북으로 흐르는 하천은 노합하[적봉 부근] 입니다.
하천지도는 애매하지만... 인공위성으로 보면 고대의 물길이 선명하죠 . 백랑수
          
감방친구 18-06-21 06:35
   
분위기가 아니라 실제 그렇죠

영정하ㅡ>조백하ㅡ>난하ㅡ>대릉하.

요동도 마찬가지

통전에서 두우가 좌갈석 어쩌구 개나발 불 때의 요수는 난하죠
왜냐ㅡ북평군이 노룡이고 노룡에 있는 게 우갈석이라 했으니까
     
감방친구 18-06-22 04:23
   
감방친구 18-06-21 09:19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우선 삼국사기 644~645 를 다시 봐야겠습니다
감방친구 18-06-22 01:20
   
1. 신당서/구당서 지리지의 지리정보는 8세기 정보
2. 8 세기 당나라 지리정보로 6~7세기 수/당의 고구려 침략 경로 및 고구려 서계 영역을 고찰하는 것 자체가 오류
3. 수나라의 요서는 현 북경 동북으로 당나라 연주
4. 수나라의 동계는 난하 이서
5. 수나라는 고구려 침략전쟁으로 몇 십 년 못 가서 망한 나라
6. 그 망한 나라를 수습하고 들어선 게 당나라
7. 당 초의 동계는 수나라 동계와 별 차이가 없었을 것임은 당연지사
8. 8세기 당 영주가 현 조양이었다 하더라도 6~7세기 수ㆍ당의 영주는 현 조양이 아니라 난하 서쪽에 있었어야 함
9. 이세적이 떠난 유성도 마찬가지
10. 유성이 고죽성인데 고죽은 난하 서쪽, 고죽국 백이숙제 수양산은 북경 서쪽, 그런데 어느 사이에 1,000여 리 동쪽의 현 조양이 고죽성이자 유성이 돼버림
     
감방친구 18-06-22 01:37
   
644년

7월

1)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였다.
2)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을 파견하여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도독의 병사와, 거란, 해(奚), 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3)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餽輸使)로 삼아서 하북(河北)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하고, 그에게 명령이 없어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4)소경(少卿)ㆍ소예(蕭銳)에게 명령하여 하남(河南)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바다로 들어오게 하였다.

겨울 10월
1)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2)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게 하였다.

11월
1)황제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2)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강(江)ㆍ회(淮)ㆍ영(嶺)ㆍ협(硤)의 병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및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동래주(東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3)태자첨사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게 하였다.
4)황제는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에게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사다리와 성을 공격하는 수레를 만들게 하였다.
5) (황제는)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내려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지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碣石)에서 죄를 물을 것이니, 행군 도중에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645년

봄 정월(음력 1월/봄이라 한 것을 보면 입춘 이후로 양력 2월)
1)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1)황제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여 임금을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했다.)
2)이세적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여름 4월
1)이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의 성읍에서는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 태세로 들어갔다.
2)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은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렀고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은 1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성문을 압박하니, 성 안 사람들이 놀라서 감히 나오려는 자가 없었다.
3)영주도독 장검이 오랑캐 병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내달아 우리의 병사를 물리치고 수천 명을 죽였다.
4)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빼앗아 2만 명을 사로잡고 10만 섬의 양곡을 탈취하였으며, 개모성을 개주(盖州)로 개칭하였다.
5)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는데, 오로지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때 정명진(程名振)이 병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1)(비사)성이 함락되어 8천 명의 남녀가 죽었다.
2)이세적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3)황제는 요동의 늪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지대 동쪽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감방친구 18-06-22 02:05
   
6~7세기 수ㆍ당의 영주는
북위ㅡ북주와 마찬가지로 만리장성 안쪽에 있었다고 봐야 상식적이다

즉 하북성 보정시와 북경 동북 외곽 사이에 영주가 있었던 것이다
          
감방친구 18-06-22 02:11
   
당 태종의
"이제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지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碣石)에서 죄를 물을 것이다"하는 발언을

그 32년 전 수 양제도 똑같이 한 말이다

갈석산은 통전에서 두우가 '요수 건너 고구려 땅의 좌갈석'을 거론하기 전까지 황하 하류의 물길 방향의 왼쪽(황하로 바다에서 오른쪽으로 끼고 들어오는 곳)에 있었다

즉 당 태종과 수 양제 발언의 요동과 갈석에서 요동은 전국~연ㆍ진 시대의 전통적인 요동지방인 현 황하 동북을 가리키고 갈석 역시 그 지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동과 갈석이라는 것은 결국 6~7세기 수ㆍ당 당시 고구려의 서부 국경지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감방친구 18-06-22 03:02
   
유주와 계주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묻겠다?
유주와 계주를 왜 돌아가나?
이런 발언 하나하나에 조작하지 못한 역사의 진실이 숨어 있는 것이죠
          
감방친구 18-06-22 02:14
   
645년 3월 (음), 이세적이 회원진을 향해 떠난 유성(柳城)은 8세기 당나라 평주에 속하기도 한, 중국역사지도집에도 표시돼 있는 현 노룡 근방의 유성(柳城)인 것이다
     
감방친구 18-06-22 01:44
   
제 1차 고구려 원정에서의 당나라 전과

"현도ㆍ횡산ㆍ개모ㆍ마미ㆍ요동ㆍ백암ㆍ비사ㆍ협곡ㆍ은산ㆍ후황 등 10개 성을 함락시키고,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들이 중국으로 옮겨갔다."
          
감방친구 18-06-22 01:45
   
          
감방친구 18-06-22 01:49
   
감방친구 18-06-22 02:16
   
동명다처인
ㅡ 요수
ㅡ 요동
ㅡ 영주
등이 고당, 고수 전쟁 기사에 뒤섞여 있는 것이다
감방친구 18-06-22 02:18
   
5세기부터 7세기까지 난하 동쪽, 의무려 서쪽은 선비계 왕조 및 중원 왕조의 땅이 아니었다
     
도배시러 18-06-22 02:54
   
선비 영역이란 추정은 4세기 이전
5세기부터는 거란과 말갈 거주지... 거란은 고구려의 거수국 개념

우북평 지역의 산명이 단독으로 "서남산"이란 곳이 있었고, 그곳에 내부한 말갈 부락이 있었기에
요수가 말갈 서남산에서 시작한다는 ...
大遼出靺鞨西南山,南曆安市城 신당서
方城川水注之. 水發源西南山下, 東流, 北屈逕一故城西, 世謂之雀目城. 東屈逕方城北, 東入白狼水. 수경주
          
감방친구 18-06-22 03:12
   
여기서 제가 말한 선비계 왕조란 북위, 북주, 수, 당을 가리킵니다
감방친구 18-06-22 02:45
   
역사 시대에 요동은 크게 4곳입니다

ㅡ황하(와 그 지류 및 영정/조백하 등) 동북쪽
ㅡ난하 동쪽
ㅡ대릉하 동쪽
ㅡ요하 동쪽
감방친구 18-06-22 02:47
   
천진/난하 동쪽은 청나라 시대까지도 여전히 요동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현대 지명으로도 남아있어서 구글지도로 확인이 됩니다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68660&sca=&sfl=mb_id%2C1&stx=cellmate&page=10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북직 4)
河間府東至海豐縣三百里,南至山東德州二百五十里,西南至真定府冀州二百三十里,西至真定府定州二百有八里,西北至保定府安州百二十里。自府治至京師四百十里,至南京二千一百四十里。

靜海縣(河間)府東北百八十里。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應劭曰:海之橫出者,曰勃。元行海運,以天津海道為咽喉要地。前朝亦嘗通運於此。嘉靖三十八年,遼撫侯汝翼,以遼東大饑,議移粟天津。其入遼之路,自海口發舟,至廣寧右屯河通堡,不及二百里,中間若曹泊店、月沱、桑沱、姜女墳、桃花島、咸可灣泊,各相去四五十里,無風濤、盜賊之虞。從之。尋復罷。《志》云:天津一隅,東南漕舶鱗集,其下去海不過百里,風帆馳驟,遠自閩浙,近自登、遼,皆旬日可達。控扼噤要,誠京師第一形勝處也。
ㅡ 하간부 정해현 동북 150리는 산동 및 요동과 접경이다(즉 오늘날 이 지역 동쪽부터 요동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음)
ㅡ 요동에 대기근이 들어서 나눠줄 곡식을 천진에서 운반할 일을 의논했다
ㅡ 천진은 요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길목이다)
ㅡ 천진에서 배를 타고 광녕위(현 진저우) 우둔하까지 200 리가 안 된다
ㅡ 천진과 광녕 우둔하 중간에 조박점, 월타, 상타, 강녀분, 도화도가 있는데 모두 정박할 수 있으며 각각 서로 간의 거리가 4~50 리 된다
ㅡ 명일통지에 따르면 천진은 한쪽 모퉁이에 있어서 동남쪽에 선박이 비늘처럼 밀집돼 있으며 그 아래 바다까지 불과 100리밖에 안 되고, 돛에 바람을 받아 빠르게 달리니 멀게는 민저(현 저장, 광둥 일대)로부터, 가깝게는 등주, 요동으로부터 모두 열흘이면 도달한다.
     
감방친구 18-06-22 02:52
   
     
감방친구 18-06-22 02:57
   
징하이 현
중국 톈진 시

https://goo.gl/maps/QKwCJKb8YYr
     
도배시러 18-06-22 02:58
   
독사방에서 말하는 요동은 조백하의 동쪽이네요. 議移粟天津。其入遼之路
          
감방친구 18-06-22 03:00
   
뭐하셨어요? 축구 보셨어요? ㅎㅎ
               
도배시러 18-06-22 03:05
   
넹 ㅋㅋㅋ
          
감방친구 18-06-22 03:04
   
조백하 동북 요동과 난하 동쪽 요동이 혼재돼 있습니다
청나라 시대 고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난하를 기준으로 그 동쪽은 요동이라고 표시하고들 있죠
          
도배시러 18-06-22 03:05
   
아니면... 조백하를 요수로 간주하는 표현인데... 其入遼之路
청나라가 설마 조백하를 요수로 보지는 않았을테고... 조백하 동쪽을 요동으로 본듯...
               
감방친구 18-06-22 03:07
   
조백하 요동은 염철론, 사기 등에 나오는 연진 시대 요동입니다
여기는 계속 요동으로 불렸습니다
                    
도배시러 18-06-22 03:11
   
게다가 청나라때 요동군이란 행정체계는 없었으니...
주류사학이 좋아라하는 포괄적[요동]에대한 청나라의 활용 사례를 알게 되는거죠,
                         
감방친구 18-06-22 03:14
   
역사시대 중국의 요동 개념

조백하/영정하 요동 + 조선/삼한 +한사군 +고구려

이러니 엉망인 거죠
     
감방친구 18-06-22 02:59
   
즉 전국/연진 시대의 요동인 현 조백하 동북쪽의 요동 개념이
난하 동쪽으로까지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靜海縣(河間)府東北百八十里。
海在縣東北百五十里,與山東、遼東接境。古名勃海。
     
도배시러 18-06-22 03:03
   
桃花島
반가운 도화도가 나오네요. 신당서에서 등주에서 동북으로 고구려 갈때 만나는 도화도.
          
도배시러 18-06-22 03:13
   
도화도를 등주와 려순 사이로 밀어넣기는 어려울듯 합니다.
               
감방친구 18-06-22 03:16
   
도화도는 일단 제가 가탐2도 고찰을 수차례 노가다로 했으므로 사서, 지도 교차분석 결과 호로도시 근해가 위치

그러나 이밖의 도화도는 천진 근해, 요동반도 근해에도 존재(주해도편 수록 지도)
그러나 이 두 곳은 가탐2도 도화도 위치와 무관
도배시러 18-06-22 03:20
   
명나라 고지도 주해도를 보니... 명나라 요동遼東 의 시작은 산해관의 동쪽 ~
주류사학이 근거없이 떠드는 요동의 포괄적 개념은 무엇인가 ?
스파게티 18-06-22 06:16
   
글이 길고 복잡해서  질문 하나할께요..

중국  삼국시대  공손 어쩌고가  요동을 지배했다고  삼국지연의에 나오자나요

그 요동이 천진이 아닐런지?


그리고  추가 질문


감방님이  지금하는일  결과가 나오면    정리해서  학자들에게 보낼건가요?
     
감방친구 18-06-22 06:23
   
중한학계 통설로서의 요동은 현 요양ㅡ심양 지역이며
이 공손씨가 한반도 중북부(낙랑ㅡ대방)까지 지배했다는 것이고



춘추전국시대ㅡ진나라 시대의 요동은 현 황하 동북부인 천진 서부(천진은 바다였음)



공손씨가 지배한 요동은 실제로 어디인지 찾아가는 과정으로
최대 동한 대릉하/의무려
최대 서한 북경 동북 외곽
          
감방친구 18-06-22 06:40
   
AD 2~3세기 지도에서 낙랑은 조금 더 서쪽으로 움직여야 하고,
요동 역시 서북으로,
현도 역시 서쪽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감방친구 18-06-22 06:26
   
유튜브 채널 개설해서 한국어와 영어로 연재 하고
책으로 출판할 계획입니다

학계와는 아무런 커넥션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이곳에 드나드는 침묵하는 다수의 관전자들 사이에 학부ㅡ석/박사 과정생들도 있으리라 생각되므로 그들이 보고서 자극을 받기를 바랍니다
          
스파게티 18-06-22 07:20
   
답변  감사합니다
감방친구 18-06-22 10:25
   
논의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문제에 대한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

1) 수나라 영역의 동계는 어디까지인가?

2) 수나라 상곡군은 하북성 보정시에 있었다 동의하는가?

3) 수나라 어양군과 북평군은 현 하북성 조백하에 연접하여 그 동북에 바다를 끼고 산해관 서남에 있었다 동의하는가?

4) 수나라 요서군은 현 북경시 동북 외곽에 있었고 이 자리에 당나라가 연주를 설치했다 동의하는가?

5) 이 수나라 요서군에 수나라 영주가 있었다 동의하는가?

6) 이 수나라 요서군 속현이 유성현 하나이다 동의하는가?

7) 수나라는 고구려 원정에서 겨우 무려라 등 일부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을 설치했으나 이 지역을 전혀 통치하지도 실소유하지도 못 했다 동의하는가?

8) 당나라는 수나라가 고구려에 연전 대패하며 망조가 들었을 때 이를 갈아엎으며 일어선 나라이다 이런 당나라의 초기 영토가 수나라보다 동쪽으로 더 넓을 수 있는가? 없다는 데에 동의하는가?

9) 당나라가 수나라 요서군 지역의 이름을 무덕 1년에 연주로 고치고 요서현, 로히현, 회원현을 두었다. 동의하는가?
(수나라 요서군 ㅡ> 당나라 연주 ㅡ> 당나라 귀덕군 ㅡ> 당나라 연주)

10) 수나라는 대릉하 지역을 소유하거나 다스린 적이 없고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은 현 조양시가 아니다 동의하는가?
(統縣一戸七百五十一 다스리는 현은 1개이고, 가구수는 751호이다 : 수서 지리지 요서군)
감방친구 18-06-22 10:46
   
644년

7월
1) 홍주(洪州), 요주(饒州), 강주(江州)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함
2) 영주도독(營州都督) 장검(張儉) 등을 파견하여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두 도독의 병사와, 거란, 해(奚), 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함
ㅡ 이 영주는 현 조양시가 아니고 될 수도 없음

3)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餽輸使)로 삼아서 하북(河北)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함
4) 소경(少卿)ㆍ소예(蕭銳)에게 명령하여 하남(河南)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바다로 들어오게 함
감방친구 18-06-22 10:46
   
644년

겨울 10월
1)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ㅡ 이 영주는 현 조양시가 아니며 될 수도 없음
2)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게 하였다.
감방친구 18-06-22 10:52
   
644년

11월
1) 황제가 (장안으로부터)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2)형부상서(刑部尙書)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강(江)ㆍ회(淮)ㆍ영(嶺)ㆍ협(硤)의 병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및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동래주(東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함

3)태자첨사좌위솔(太子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게 함
ㅡ 이 요동은 현 요동도 대릉하 지역도 될 수 없음
ㅡ 이 요동은 전통적 요동으로 전국/진 시대 요동인 현 조백하 연접 동북지역

4)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지를 돌아서 요동과 갈석(碣石)에서 죄를 물을 것이다"
ㅡ 유주와 계주는 모두 현 하북성 북경시 일대
감방친구 18-06-22 10:58
   
645년

봄 정월
1)이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1) 황제가 정주(定州)에 도착
2) 이세적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

여름 4월
1) 이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고
2)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은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신성(新城)에 이르렀음
3) 영주도독 장검이 오랑캐 병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 공격
4)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빼앗아 2만 명을 사로잡고 10만 섬의 양곡을 탈취
5) 장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卑沙城)을 습격

5월
1) 비사성 함락
2) 이세적 군대 요동성 진격 후 당 태종을 기다림
3) 당 태종은 요택에 갇혀 있었음(늪 길이 200여 리)
감방친구 18-06-22 11:03
   
1차 고구려 원정시 당 태종의 행적

644년 7월 ㅡ 장안, 원정 명령
644년 11월 ㅡ 낙양(장안과 낙양 거리 800여 리)
645년 3월 ㅡ 정주 도착(지도상 거리는 장안~낙양보다 멂)
645년 5월 ㅡ 요택에 갇힘
감방친구 18-06-22 11:09
   
1차 고구려 원정시 이세적의 행적

644년 11월 ㅡ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와 하주(河州)에서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두 부대가 합세하여 유주(幽州)에 대거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음
645년 1월(양력2월) ㅡ 유주 도착(요동을 거쳐 유주 도착)
645년 3월 ㅡ 유성을 출발(이 유성은 현 조양시가 될 수 없음. 현 조양시는 당시 당나라 땅이 아니었음.)하여 회원진 방향으로 향하다가 북쪽 샛길을 통해 기습적으로 월경
645년 4월 ㅡ 통정을 통해 요수를 건너 현도성 도착
감방친구 18-06-22 11:13
   
조선시대 연행노정
압록강 의주 ~ 북경 2,061리
편도 30일 이상 소요

물론 군대 진군 속도와의 단순비교는 어려움
감방친구 18-06-22 11:18
   
이세적

요동 ㅡ> 유주 ㅡ> 유성 ㅡ>회원진 방향 ㅡ>북쪽 샛길ㅡ>통정ㅡ>요수 도하ㅡ>현도성ㅡ>개모/신성ㅡ요동/백암성
감방친구 18-06-22 11:19
   
당 태종

장안 ㅡ>낙양ㅡ>정주ㅡ>요택ㅡ>요수ㅡ>요동/백암성ㅡ>안시성
     
도배시러 18-06-22 14:27
   
거란열전을 보면 영주에 거주하는 거란인을 만남니다.

정주-영주-요택 -.........
          
감방친구 18-06-22 16:55
   
그게 어딨습니까?
          
감방친구 18-06-22 16:57
   
구당서에

太宗伐高麗,至營州,會其君長及老人等,賜物各有差,授其蕃長窟哥為左武衛將軍。

영주에 간 거는 나오네요
          
감방친구 18-06-22 17:00
   
契丹,居潢水之南,黃龍之北,鮮卑之故地,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東與高麗鄰,西與奚國接,南至營州,北至室韋。冷陘山在其國南,與奚西山相崎,地方二千里。逐獵往來,居無常處。其君長姓大賀氏。勝兵四萬三千人,分為八部,若有徵發,諸部皆須議合。不得獨舉。獵則別部,戰則同行。本臣突厥,好與奚斗,不利則遁保青山及鮮卑山。其俗死者不得作塚墓,以馬駕車送入大山,置之樹上,亦無服紀。子孫死,父母晨夕哭之;父母死,子孫不哭。其餘風俗與突厥同。

武德初,數抄邊境。二年,入寇平州。六年,其君長咄羅遣使貢名馬豐貂。貞觀二年,其君摩會率其部落來降。突厥頡利遣使請以梁師都易契丹,太宗謂曰:「契丹、突厥,本是別類,今來降我,何故索之?師都本中國人,據我州城,以為盜竊,突厥無故容納之,我師往討,便來救援。計不久自當擒滅。縱其不得,終不以契丹易之。」

太宗伐高麗,至營州,會其君長及老人等,賜物各有差,授其蕃長窟哥為左武衛將軍。

<구당서 거란전>
감방친구 18-06-22 11:23
   
고구려성 위치

요동성 기준
동북쪽 ㅡ 개모/신성
서남쪽 ㅡ 안시/건안

박작성 기준
근처 ㅡ 오골/안시

비사성 기준
근처 ㅡ 건안/안시

건안성 기준
북쪽 ㅡ 안시
동북쪽 ㅡ 요동
감방친구 18-06-22 11:28
   
오골성 위치
ㅡ 오골강
ㅡ 압록강 서쪽, 혹은 북쪽, 혹은 서북쪽
ㅡ 안시성과 박작성 사이

오골강 위치
ㅡ (크게 보면)호로도시와 판진시 사이
ㅡ (작게 보면)대릉하와 판진시 사이

박작성 위치
ㅡ 압록강 하구 북안
ㅡ 요동성 남쪽 700리
ㅡ 평양성 서북쪽 100리 안팎

건안성 위치
ㅡ 안시성과 비사성 사이
ㅡ 요동성 남쪽, 혹은 서쪽, 혹은 서남쪽 300리
감방친구 18-06-22 13:15
   
당나라 초기, 그러니까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의 영주는 수나라 영주와 마찬가지로 북경 동북 외곽의 수 요서군 유성현/당 연주에 도독부를 두고 있었다

쭝궈 잡종자들의 역사왜곡의 수법은
수서ㅡ구당서ㅡ신당서
이 3개를 비교해 보면 나타난다
감방친구 18-06-22 13:18
   


본인이 작성한 이 지도상 2번이 수나라 요서군이자 당나라 연주 위치이다
웃긴 것은 정작 중국역사지도집에도 이곳에 요서군과 연주를 표시해 놓고 있는데 반민족 반역사 매국노 집단인 강단 주류사학계가 주도하는 통설에서는 현 조양시에다 비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씨팔 욕이 안 나올 수가 없고 이가 갈릴 정도이다
감방친구 18-06-22 13:24
   
유성의 위치는 여러곳이다
유성은 애초 현 난하 서쪽, 영지 북쪽에 위치했던 고죽국 고죽성 자리였다

그런데 중국 여러 왕조의 흥망성쇄와 이민족의 침입과 격퇴 등으로 들고 남에 따라, 또 이에 영주, 평주가 이리저리 움직임에 따라

ㅡ 난하 서쪽
ㅡ 난하 남서쪽 현 노룡 근방
ㅡ 현 조양시
ㅡ 북경 동북 외곽 수 요서군 자리
ㅡ 하북성 보정시 북위 남영주 자리

하는 식으로 여러 곳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감방친구 18-06-22 13:25
   
즉 당 태종 1차 원정 당시 영주가 저곳이고 이세적이 출발한 유성이 저곳이라는 말이다
     
감방친구 18-06-22 13:35
   


이세적은 회원진으로 향하는 척하면서 고구려 국경 정찰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북쪽 샛길로 고구려에 들어온다

즉 이 지도상에서 난하의 상류 어드메를 돌아서 고구려 경내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는 곧장 통정을 통해 요수를 건너 현도성을 공격한다

Xar Moron River
https://goo.gl/maps/d9b4CQvhjNm

이 구글지도를 열어보시라
승덕(칭더)ㅡ난하 사이의 산굽이(그렇다고 승덕을 통과했다는 말은 아니다 북쪽 샛길이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를 통과하면 펼쳐지는 대평원을 달려 고구려 내부로 창을 찌르듯 곧장 진격한 것이다

이 샛길은 고조선이 연나라를 약탈할 때 이용한 염철론의 그 샛길과 연관있을 수도 있다

<염철론>
大夫曰往者四夷俱強並為冦虐朝鮮踰徼刼燕之東地東越東海略浙江之

대부가 말하길 “예전에는 사이가 강성하여 모두 도적이 되어 사납게 굴었다. 조선은 샛길을 넘어 연나라의 동쪽 땅을 위협했고, 동월은 동해를 건너와 절강 남쪽 땅을 노략질했다ㅡ”
감방친구 18-06-22 16:36
   
<구당서 권 81 위정 열전>

十九年,將有事於遼東,擇人運糧,周又奏挺才堪粗使,太宗從之。挺以父在隋為營州總管,有經略高麗遺文。因此奏之。太宗甚悅,謂挺曰:「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軍行資糧無所取給,卿宜為此使。但得軍用不乏,功不細矣」。

ㅡ 645년
ㅡ 위정의 아비가 수나라 때에 영주총관으로 있으면서 수 문제를 따라 고구려를 경략했었다 挺以父在隋為營州總管,有經略高麗遺文。
ㅡ (위정의 아비는 위충韋冲으로 598년 고구려의 요서 타격 당시의 영주총관)
ㅡ유주 북쪽과 요수 건너 2천 리는 주현이 없어서 군량을 조달하기 어렵습니다 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軍行資糧無所取給

<삼국사기 보장왕 상 644년 11월 기사>

11월, 황제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전 의주자사(宜州刺史) 정천숙(鄭天璹)은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황제는 그가 이전에 수(隋) 양제(煬帝)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 하여, 그를 황제가 있는 곳으로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東夷)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빠른 시기에 함락시킬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수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감방친구 18-06-22 16:38
   
"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軍行資糧無所取給"
          
감방친구 18-06-22 16:47
   
2,000리에 주ㆍ현이 없다는 말은
당나라 땅이 아니라는 말이다
     
감방친구 18-06-22 16:39
   
당나라는 낙양 북쪽 영주, 동쪽 고대인성에 군량 비축

644년
겨울 10월,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하게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군량을 비축하게 하였다.
冬十月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감방친구 18-06-22 16:40
   
여기서 말하는 요수는 조백하, 또는 난하
도배시러 18-06-22 20:18
   
● 구당서 舊唐書 卷77 韋挺
十九年,將有事於遼東,擇人運糧,周又奏挺才堪粗使,太宗從之。挺以父在隋為營州總管,有經略高麗遺文。
因此奏之。太宗甚悅,
謂挺曰:「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軍行資糧無所取給,卿宜為此使。但得軍用不乏,功不細矣」。

645년 요동으로 갈려고 군량미 담당자를 택할때 여럿이 진언하기를 위정(韋挺)이 어려움을 감당할만 하다하니
태종은 그 의견을 따랐다.
위정(韋挺)의 아버지(위충韋冲)는 수나라 영주총관이었다.
수 문제를 따라서 고구려를 경략했음을 고하니 태종이 심히 기뻐하였다. 

위정(韋挺)에게 말하기를  " 유주 이북에서 요수 2천여리는 (당나라의) 주현(州縣 지방행정체계)이 없다.
(그래서) 진군을 할때 자금을 쓸 곳도 없고, 양식을 공급 받을 곳도 없다.
경(卿)은 마땅히 이것을 헤아려 군대가 쓸것을 취하고, 궁핍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러한 공로는 작은 것이 아니다."
     
도배시러 18-06-22 20:45
   
韋挺,京兆萬年人。父沖,仕隋為民部尚書。- 신당서 권98 위정
위정의 아버지는 위충 이다.

帝將討遼東,擇主餉運者。周言挺才任粗使,帝謂然。挺父故為營州總管,嘗經略高麗,故劄藏家,挺上之。帝悅曰:「自幽距遼二千里無州縣,吾軍靡所仰食,卿為朕圖之。苟吾軍用不乏,是公之功。其自擇文武官四品十人為子使,取幽、易、平三州銳士若馬各三百以從。」

自幽距遼二千里無州縣
          
감방친구 18-06-22 21:14
   
왜 이걸 또 적으세요?
               
도배시러 18-06-22 21:15
   
재미로 하는 발번역 ~  신당서는 다른 분이... ㅋ
          
감방친구 18-06-22 21:28
   
이야
여기에는 더 구체화돼 있네요

自幽距遼二千里無州縣,吾軍靡所仰食,卿為朕圖之。

自幽距遼
감방친구 18-06-22 21:26
   
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

유주 북쪽 요수 2천 리
이 문장은 유주의 북쪽부터 요수까지 2천 리인지
유주의 북쪽에 있는 요수로부터 그 바깥으로 2천 리인지 알 수 없게 한다

당나라 유주는 계현이 치소로 그 경계의 북쪽은
백하와 조하가 흘러 만나서 조백하를 이루어 천진 쪽으로 흐른다
이게 고대의 요수 가운데 하나이고 이 강의 동쪽이 전통적인 요동이다

그런데 이 문장의 요수는 조백하가 아닐 수도 있다
유주의 북쪽, 요수, 2천 리, 무주현
이렇게만 제시돼 있으므로
"유주 북쪽 ㅡ 2천 리 무 주ㆍ현 ㅡ 요수"
이런 식으로 정리가 되는 것이다
즉 유주에서 요수까지 2천 리라는 식으로 해석 역시 가능한 것이다

계현은 낙양까지 2,520 리

契丹,居潢水之南,黃龍之北,鮮卑之故地,在京城東北五千三百里。

거란이 있는 곳은 5,300리

영주는 3,589 리

안동도호부는 4,625 리라고 같은 책인 구당서는 적고 있다
     
감방친구 18-06-22 21:30
   
幽州以北遼水二千餘里無州縣<구당서>
自幽距遼二千里無州縣<신당서>
     
감방친구 18-06-22 21:31
   
낙양이 아니라 장안
     
감방친구 18-06-22 21:36
   
장안ㅡ유주ㅡ요수 2천 리는
장안ㅡ안동도호부 거리와 유사하다
     
감방친구 18-06-22 21:49
   
당 유주/연주 ~ 영주 1천여 리
영주 ~ 안동도호부 1천여 리

이렇게 되면 당 태종이 가리키는 요수는 현 요하인 것처럼 보인다
감방친구 18-06-22 23:56
   
일단은
당나라 초기 영주가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이라는 것,
그 유성현이 북경 동북 외곽이라는 것,
그리고 이곳 바깥부터는 수ㆍ당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밝혔다
감방친구 18-06-23 00:08
   
나는 동쪽에서부터 압록과 요수를 추적해왔다
그리하여 여러 사서와 고지도의 교차분석을 통해
수ㆍ당 시기 고구려 서부 영역 안에 있었고 수ㆍ당 침략군이 건넌 요수는 대릉하이며 현 요하는 압록강이라는 것을 밝혔다

자유거요ㅡ유주로부터 요수까지 2,000리 무주현이라는 당 태종의 발언은 이러한 고찰과정에서의 무수한 증거들과 배치된다

따라서 이 발언은 수사적 표현이라 해야 옳을 것이며
혹은
고구려=요동=한사군=낙랑=조선이라는 당 태종을 비롯한 당대인들의 역사인식에서 고구려 중심지를 가리키며 비유적으로 나온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감방친구 18-06-23 04:15
   
한서 지리지와 후한서 군국지 유주 3군 비교

한서 지리지

요동군 총 18 속현
양평, 신창, 무려, 망평, 방, 후성, 요대, 요양, 험독, 거취, 고현, 안시, 무차, 평곽, 서안평, 문, 번한, 답씨

현도군 총 3 속현
고구려, 상은태, 서개마

낙랑군 총 25 속현
조선, 염감, 패수, 함자, 점선, 수성, 증지, 대방, 사망, 해명, 열구, 장잠, 둔유, 소명, 누방, 제해, 혼미, 탄열, 동이, 부이, 잠태, 화려, 사두매, 전막, 부조

3군 총계 46 속현

후한서 군국지

요서군 총 5 속현
ㅡ 낙양 동북쪽 3,300리
양락, 해양, 영지, 비여, 임유

요동군 총 11 속현
ㅡ 낙양 동북쪽 3,600리
양평, 신창, 무려, 망평, 후성, 안시, 평곽, 서안평, 문, 번한, 답씨

현도군 총 6 속현
ㅡ 낙양 동북쪽 4,000리
고구려, 서개조(서개마), 상은태,
고현, 후성, 요양

낙랑군 총 18 속현
ㅡ 낙양 동북쪽 5,000리
조선, 염감, 패수, 탐자, 점선, 수성, 증지, 대방, 사망, 해명, 열구, 장잠, 둔유, 소명, 누방, 제해, 혼미, 낙도

3군 총계 35 속현

요동속국 6현
ㅡ 낙양 동북쪽 3,260리
창료, 빈도, 도하
무려, 험독, 방
     
감방친구 18-06-23 04:17
   
본인은 후한서 군국지 낙랑군 5,000리 기록이
송나라 시기에 왕건 고려=평양=왕검성=낙랑군 프로파간다에 의한 정보에 오염된 것이라고 추정, 주장해왔다
          
도배시러 18-06-23 04:30
   
서진동진 ~< (유)송~량~남제~진>~수~당~송
후한서는 유송시기
               
감방친구 18-06-23 04:33
   
님아, 제가 전에도 쓴 내용인데요
최종 완성된 게 송
게다가 지가 송나라 때 취합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1156222&cid=40942&categoryId=33392
               
감방친구 18-06-23 04:34
   
제가 근거도 없이 억지 추정하겠습니까
                    
도배시러 18-06-23 04:38
   
오호... 군국지 완성 시점이  당나라 이후라니...
몰랐습니다.  꼼꼼하심~
                         
감방친구 19-01-31 04:43
   
     
감방친구 18-06-23 04:18
   
한서에 비하여 후한서론 후한은 유주 자체가 전한에 비해 크게 서남으로 밀려 축소되었다
     
감방친구 18-06-23 04:22
   
낙랑이 현도보다 1,000 리나 더 동북쪽에 있는데
2세기 고구려는 요동군 서쪽 안평현/서안평을 습격하며 대방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납치했다

삼국지와 강단 사학계는 낙랑/대방으로 가는 길 위에서 불시에 당했다고 아무런 근거없이 억지 설명을 하고 있다
     
감방친구 18-06-23 04:26
   
후한서 군국지에서
요동군이 낙양에서 3,600리, 현도군이 4,000리이다
그런데 이를 같은 사서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보자

상곡군(현 북경시 동북지역) ㅡ 낙양 동북쪽 3,200리
요서군(현 천진~진황도 일대) ㅡ 낙양 동북쪽 3,300리

감이 잡히는가?
     
감방친구 18-06-23 09:44
   
612 수양제 고구려 원정군 진격로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은 부여(扶餘)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樂浪)으로 출동하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遼東)으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설세웅(薛世雄)은 옥저(沃沮)로 출동하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玄菟)로 출동하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襄平)으로 출동하고, 우무후장군(右武侯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碣石)으로 출동하고,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遂城)으로 출동하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檢校右禦衛虎賁郞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增地)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감방친구 18-06-23 09:47
   
612년
23년(서기 612)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좌 12군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玄菟), 부여(扶餘), 조선(朝鮮), 옥저(沃沮), 낙랑(樂浪)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黏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提奚), 답돈(踏頓), 숙신(肅愼), 갈석(碣石), 동이(東暆), 대방(蔕方), 양평(襄平)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감방친구 18-06-23 09:48
   
우문술 등의 군사가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100일 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 짧은 창, 긴 창, 옷감, 전투 기재, 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병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촐라롱콘 18-06-23 11:29
   
[[당나라 초기 영주가 수나라 요서군 유성현이라는 것, 그 유성현이 북경 동북 외곽이라는 것,
그리고 이곳 바깥부터는 수ㆍ당 영역이 아니라는 것은 밝혔다.]]

[[우문술 등의 군사가 노하(瀘河)와 회원(懷遠),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100일 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 짧은 창, 긴 창, 옷감, 전투 기재, 장막 등을 주었다.]]
.
.
.
감방친구님의 댓글들 가운데 상호 모순된 내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성의 위치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유성의 바깥은 수-당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수-당전쟁 당시 우문술의 병사들에게 식량과 무기-장비들을 분배한 노하-회원 두 진은

유성에서도 고구려 방면으로 더 진출해야만 나오는 지역입니다.

노하-회원의 위치는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정확한 포인트를 집어내지는 못하겠으나

대략 금주 ~ 대릉하 언저리 일대로 알고 있습니다.

노하-회원 일대가 수나라의 최전방에 근접한 지역이라면,

이에 맞서는 고구려 입장에서의 최전방은 무려라 일대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려라 일대는 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통정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비록 고구려가 전쟁에서 수나라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요하~대릉하 사이에

위치했던 무려라를 비롯한 군사거점들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감방친구 18-06-23 12:37
   
우선 이런 댓글은 감사하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이 게시글에서만 해도 누누히 설명한 것은 보시기나 하셨나 의심이 듭니다

수나라 요서군은
애초 북위의 영주와 영주 소속 6개 군 및 속현이 5세기와 6세기에 크게 두 차례 교치가 되면서 축소가 되었고
북제에 이르러서는 건덕군과 기양군 2개, 그리고 속현으로 룡성, 대방 등 4개 현만 남게 됩니다

이게 수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는 건덕군과 그 속현으로 룡성현만 남아 있었어요

수나라가 이 자리에 옛 한나라 요서군에서 이름을 따서 요서군을 설치하고 룡성현을 유성현으로 개명합니다

이 자리는 현 북경 동북 외곽입니다

이 수나라 요서군은 요서군과 그 속현 유성현이 다인데
수나라는 또한 이 유성현에 영주를 두었어요

이 수나라 요서군을
당나라가 들어서서 연주로 고치고
기존 유성현 외에 로하현, 회원현을 새롭게 설치해 소속 시킵니다
또한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유성현에 영주를 둡니다
이 당 영주의 소속 주로 연주와 요주를 두었습니다

당나라는 수나라를 이은 나라여서 그 초기 영토는
기존 수나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수나라 요서군 위치와 그 자리에 설치한 당 연주는
중국역사지도집 수ㆍ당 지도에도 그대로 표시가 돼 있습니다

무려라 등을 빼앗아 설치한 수나라 요동군은 이름만 있지 전혀 운영이 되지 못 했습니다
수나라가 대패하고 쫓겨갔고 그 수나라가 망했습니다

당 태종이 수나라 당시 영주총관이던 위충의 아들 위정과 나누는 대화(구당서와 신당서)를 위에 소개한 거 보셨죠?
               
감방친구 18-06-23 12:42
   
수 요서군
ㅡ 속현 1개로 유성현
ㅡ 유성현에 영주 설치

당 연주
ㅡ 기존 수 요서군 위치
ㅡ 기존 유성현에 로하, 회원 추가 하여 속현 3개
ㅡ 유성현에 영주를 두고 영주 관할로 연주와 요주를 소속시킴

회원은 유성 근방이면서 이세적의 동정으로 보건데 유성 북쪽, 혹은 동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음
               
감방친구 18-06-23 12:45
   
///그런데 무려라 일대는 수 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을 통해 통정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비록 고구려가 전쟁에서 수나라군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요하~대릉하 사이에

위치했던 무려라를 비롯한 군사거점들의 상당부분을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나라가 대패하고 쫓겨 갔고 곧 망했는데
고구려가 뭔 군사거점 상당부분을 상실해요?
               
감방친구 18-06-23 12:47
   
               
감방친구 18-06-23 12:51
   
제가 만든 위치도에서 보라색 지점이 수 요서군, 당 연주의 위치입니다
이 위치는 중국역사지도집에도 똑같이 표시돼 있습니다



수나라 당시 이 요서군 유성현 인구는 가구수로 751가구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사학계는 이 수나라 요서를 현 조양시에 비정을 합니다
598 영양왕이 여기를 선제 타격했다고요

아니 그리 되면 남한만한 땅 크기에 소속현이 달랑 1개, 가구수가 751가구인데 뭔 수로 유지를 합니까? 돌궐, 거란, 고구려가 가만히 있어요?
감방친구 18-06-23 14:05
   
도배시러님, 통전인가 자치통감에서 이세적이 거란인들에게 요수에 대해 묻는 거 해석 좀 해주세요
저보다 실력이 훨씬 좋아지신 거 같아요
     
감방친구 18-06-23 14:22
   
<통전>

二十一年李勣復大破髙麗於南蘇班師至頗利城渡白狼黃嵓二水皆由膝以下勣怪二水狹淺問契丹遼源所在云此二水更行數里合而南流即稱遼水更無遼源可得也旋師之後更議再行
          
감방친구 18-06-23 14:38
   
정관 21년(648 년),

이세적이 거듭 고구려를 남소성에서 대파하고 군대를 돌려 파리성에 이르러 백랑수와 황암수를 건너는데 어찌된 일인지 모두 무릎 아래로 물 깊이가 얕았다

이세적이 괴이하게 여겨
이 두 강 (백랑수, 황암수)의 물길이 좁아지고 얕아진 이유를 거란에게 물으니/
이세적이 이 두 강의 물길이 좁아지고 앝아진 것을 괴이하게 여겨 요원에 있는 거란인에게 물으니/거란인에게 요수의 근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 두 물줄기가 그 흐르는 방향이 바뀌어서 몇 리를 합쳐 흐르다가/몇 리를 흐르다 합쳐서 남쪽으로 흐르니 즉 요수라 칭한다고ㅡ

전투에 이긴 후이기 때문에 마땅히 다시 바뀌어 흐른다 旋師之後更議再行
          
감방친구 18-06-23 14:48
   
고전번역DB에 관련 내용이 있네요
고려도경에 통전과 똑같은 내용이 있어요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고, 또 일본ㆍ유구ㆍ담라(聃羅)ㆍ흑수(黑水)ㆍ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 남송의 서울 변경)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ㆍ경동(京東)ㆍ회남(淮南)ㆍ양절(兩浙)ㆍ광남(廣南)ㆍ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ㆍ내주(萊州)ㆍ빈주(濱州)ㆍ체주(棣州)와 서로 바라다보인다.
원풍(元豐)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 뒤에 남풍(南風)의 바람 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 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천 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거란[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 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거란에 소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캐 무리가 이미 멸망되었고, 대금(大金)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는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ㆍ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이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고구려를 말함)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서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찍이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9A_0040_010_0020
               
도배시러 18-06-23 17:07
   
충분하네요
                    
감방친구 18-06-24 00:01
   
여기서 포인트는
백랑수는 제2 요수인 난하 북쪽의 지류인데
제 3요수를 대릉하, 제 4요수를 대릉하로 흘러드는 망우하 (牤牛河)로 삼으면서 통전의 이 기록의 위치가 나오는 것
               
도배시러 18-06-23 19:31
   
고려도경 3권
髙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琉球?羅黒水毛人等國犬牙相制惟新羅百濟不能自固其圉為麗人所并今羅州廣州道是也其國在京師之東北自燕山道陸走渡遼而東之其境凡三千七百九十里若海道則河北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往今所建國正與登萊演棣相望自元豐以後每朝廷遣使皆由明州定海放洋絶海而北舟行皆乗夏至後南風風便不過五日即抵岸焉舊封境東西二千餘里南北一千五百餘里今既并新羅百濟東北稍廣其西北與契丹接連昔以大遼為界後為所侵迫乃築來逺城以為阻固然亦恃鴨緑以為險也鴨緑之水源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又西與一水合即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髙麗之中此水最大波瀾清徹所經津濟皆艤巨艦其國恃此以為天塹水濶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西四百八十里自遼已東即舊屬契丹今契丹已亡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為往來之道而已鴨緑之西又有白浪黄嵓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為遼水唐貞觀間李勣來破髙麗於南蘇既渡怪其水淺狹問之云是遼源以此知前古未嘗恃此水以為固此髙麗所以退保鴨緑之東歟
          
감방친구 18-06-23 14:52
   
결국 제가 애초에 말한대로 북표현 방면으로 추정되네요
감방친구 18-06-23 14:18
   
자치통감주 권 72 호삼성의 주

遼隧縣,二漢屬遼東郡;晉志無其地,蓋在遼水東岸。水經注:玄菟郡高句麗縣有遼山,小遼水所出,西南至遼隧縣,入於大遼水。

요대현은 전한/후한의 요동군에 속했는데
진서 지리지에는 요대현이 기술돼 있지 않으나 거개가 요수 동안에 있었다

수경주에서 이르기를,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는데 소요수가 나오는 곳으로 소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ㅡㅡㅡ 제 해석이 그르면 아무라도 딴죽을 걸어주세요

저는 요산을 현 의무려산으로 보고
소요수를 부신시에서 서남으로 의현으로 흐르는 강, 또는 북표현에서 서남으로 대릉하 본류로 들어가는 강 중에 하나로 보는데

이 두 강이 하나는 소요수, 하나는 양수 (대량수)로 보고 있고

대요수는 대릉하 본류

실위수는 북표현 쪽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로 보고 있습니다
감방친구 18-06-23 15:08
   
Heichengzizhen
중국 랴오닝 성 차오양 시 베이퍄오 시

https://goo.gl/maps/DEd3gDeEpwB2
감방친구 18-06-24 00:18
   
645 당 이세적 군대의 침투로 추정

승덕 ㅡ> 적봉 ㅡ>  통요시 나이만기 ㅡ> 망우하 ㅡ>  부신시 북쪽

나이만 기
중국 내몽골 자치구 퉁랴오 시

https://goo.gl/maps/k7LuN7FWY632
감방친구 18-06-24 00:26
   
햄돌 18-06-24 00:51
   
무슨 댓글이 133개나
감방친구 18-06-24 11:42
   
겨울 10월,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황제는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군사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현도ㆍ횡산ㆍ개모ㆍ마미ㆍ요동ㆍ백암ㆍ비사ㆍ협곡ㆍ은산ㆍ후황 등 10개 성을 함락시키고, 요주ㆍ개주ㆍ암주 등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들이 중국으로 옮겨갔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화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冬十月 帝至蒲溝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勑燃火於道以待之 凡捗玄菟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 徙遼盖巖三州戶口 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新城建安駐蹕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감방친구 18-06-24 11:43
   
《卷三十七 山東八》

安市城衛東北七十里。漢安市縣,屬遼東郡。後漢及晉因之。高麗亦曰安市城。唐貞觀十九年,征高麗,攻安市城,不克,引還。咸亨三年,高麗餘眾復叛,遣將高侃擊之,敗之於安市城。後置安市州。渤海改置鐵州,領位城、河瑞、蒼山、龍珍四縣。遼仍為鐵州,亦曰建武軍,改置湯池縣。《志》曰:在東京西南百六十里。金州廢,以縣屬蓋州。元省。今為湯池寨堡。又後黃城在衛東,亦高麗所置。唐太宗攻安市,先拔其後黃、銀城二城。胡氏曰:高麗東境城也,與安市相近。時又拔其橫山、磨米、麥穀等數城。
감방친구 18-06-2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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