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07-04 0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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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기록을 따른다. 바로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건국서문이다. A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건너편 고을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이 기록을 인용하여 백제 건국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모든 것이 온조왕 당대에 정리되고 그로부터 백제의 역사가 쭉 이어지는 것처럼 설명한다. 은연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해 세운 나라는 온조의 당대에 쇠망하여, 온조가 위례성에 도읍해 세운 나라-십제에 병합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온조의 당대에 국호를 백제로 고쳤고, 온조 당대로부터 마지막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쭈욱 성을 부여씨로 삼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렇게 무신경하게 받아들여도 상관 없는 문제일까? 이 기록은 건국서문이다. 이후에 이어지는 편년체 기록과는 본질이 다른 글이다. 건국서문이란 글의 특성상 내용 자체의 사실성 여부부터가 문제이다. 이건 날조 혐의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6하원칙을 지키는 편년체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견강부회가 용이하고, 사건의 전후 순서와 관계를 알기 어렵다는 말이다. 설령 그 내용 자체를 모조리 신뢰한다 쳐도, 등장하는 각각의 사건들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 무신경하게 읽으면 사료상의 온조왕 원년-기원전 18년 이전에 일어난 일들을 쭉 설명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무신경함이 유발한 착각일 뿐이다. 백제본기의 글이니 백제본기에서 전하는 백제국의 존재 기간 내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만 확신할 수 있을 뿐, 위례성에 도읍하고 건국한 이후에 따라오는 이야기들은 온조왕대에 일어난 일인지 의자왕대에 일어난 일인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이 기록의 최초 작성자가 노렸던 바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의심의 눈을 뜨고 읽어내려가기 시작하면, 당장 같은 사료에서 바로 이어지는 내용부터가 심상치 않다. B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가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고,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하였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갔다.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모없는 사람같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라 하고,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얼핏 앞의 A와 대동소이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보면 중요한 부분에서 묘하게 다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일단 A는 시조를 온조왕이라 했고, B는 시조를 비류왕이라 했다. 비류와 온조의 출자도 다르다. A에 의하면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 주몽의 아들이다. 그런데 B에 의하면 둘은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고 하는, ‘우태’라는 듣보잡의 아들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고구려를 떠나오게 된 시기와 과정도 다르게 묘사한다. A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된 이후’에,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서’ 10명의 신하와 함께 떠났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B에서는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가 왕위를 이은 이후’에, 비류가 온조를 설득하여 고구려를 떠나게 된 것으로 묘사한다. 이어지는 건국의 경과도 판이하다. A에 의하면 비류는 바닷가인 미추홀에, 온조는 강가인 위례성에 각각 도읍하였는데, 해변가인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 수 없어 비류의 당대에 나라가 쇠망해 버렸다고 했다. 그리고 위례성에 도읍한 온조가 그 백성들을 아울렀다고 했다. 그런데 B가 말하는 역사상은 전혀 다르다. 애초에 처음부터 ‘형’인 비류가 고구려를 떠날 것을 주동했고, ‘아우’인 온조는 그를 따라나섰을 뿐이다. 둘이 의견이 달라 갈라서지도 않았고, 둘이 모두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고 했다. 마치 그 뒤에 무언가 후속되는 내용이 이어질 듯한 뉘앙스이다. 이것은 단지 느낌 따위가 아니다. B의 첫머리에 ‘始祖 沸流王’이라 하지 않았던가? 만약 A의 내용처럼 미추홀의 나라가 비류의 당대에 쇠망해 버렸다면 어떻게 비류가 모종의 기록에서 ‘시조 비류왕’으로 칭해질 수 있는가? 삼국사기가 인용한, 알 수 없는 모종의 기록인 B는 ‘시조 동명성왕’ ‘시조 혁거세거서간’과 마찬가지 격으로 ‘시조 비류왕’을 일컫고 있다. 상식적으로 당연히, ‘시조 비류왕’의 뒤에 이어지는 후계 왕들의 내용이 따라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는 그 뒤에 있었을 것이 분명한 후속 기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신에 묘한 내용이 따라나온다. C 《북사(北史)》와《수서(隋書)》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帶方)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의 딸을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다. A는 이른바 ‘온조 시조설’ B는 이른바 ‘비류 시조설’로 불리고, C는 이른바 ‘구태 시조설’이다. 물론 C는 ‘중국 25사’를 접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기록을 인용한 것일 뿐이다. C는 A, B와 달리 삼국사기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기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C와 중국 사서의 해당 부분을 비교해 보면, 과연 述而不作 원칙에 따라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편자는 이처럼, 얼핏 상이하게 보이는 기록들을 나열해 놓고는 ‘저마다 제각각이라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볼멘소리를 해 놓았다. 이것은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삼국사기 편찬 당시 고려 사대부들의 역사인식 수준은, 흔히 ‘사대주의자’로 불리는 김부식이 ‘중국 역사만 알고 우리 역사는 모른다’고 우려할 정도였다. 애초에 삼국사기의 편찬은 ‘우리 역사를 모르는’ 한심한 사대부들을 ‘교육’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사정이라면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관료와 학자들이라 해서 크게 달랐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은 단지 유학자의 述而不作 원칙에 따라 당대에 존재했던 사료들을 비교 취합하고 편집했을 뿐, 사료의 내용을 이해하려 들지는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를 볼 때는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는, 스스로도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적고 있는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만든 책이다. 그런 수준의 편찬자들이 일정한 목적의식에 맞춰 기록을 왜곡 편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기록을 왜곡 편집하려면 먼저 그 기록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저 글자를 옮겨적는 수준인 자들은 왜곡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목적의식에 따라 편집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왕의 호칭이나 왕실/외교 용어의 격 등의 높이고 낮춤이나, 어떤 것을 기록하고 어떤 것을 버릴 것이냐를 결정하는 정도였을 뿐이다. 그것이 기록을 그저 옮겨적는 수준인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왜곡의 최대치이다. 굳이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수준’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은 이유는, A,B가 C와 마찬가지로, 원사료에서 그대로 옮겨 적은 내용임을 말하고자 함이다. 삼국사기 편자는 아마도 국내 전승이었을 모종의 사료들로부터 A와 B를, 중국 역사서에서 C를 보고는 세 가지를 모두 그대로 옮겨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세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며 불평을 해 놓은 것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아마도 A가 기록된 사료를 가지고 백제본기의 대부분 또는 앞부분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본기의 다음 내용이 A로부터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편집원칙은 A가 기록된 사료를 취하고 B가 기록된 사료를 버린 것이다. 편의상 A가 기록된 사료를 AA, B가 기록된 사료를 BB라고 지칭하겠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AA를 취하고 BB는 버렸을까? 그들이 나름대로 세워놓은 편집의 ‘원칙’에서 BB가 벗어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원칙’이 무엇이었을지를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삼국사기는 ‘삼국’, 즉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 역사의 편집기록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오직 세 나라의 역사다.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본기>만 있다. 고조선이나 부여, 가야 옥저 동예 왜국 등등의 역사는 모두 제외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통해 BB가 제외된 원인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 편자들이 보기에 BB는, ‘백제’의 역사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백제’에 굳이 따옴표를 친 데는 이유가 있다. BB는 ‘백제’의 역사서이지만, ‘백제’의 역사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선문답이나 궤변을 늘어놓고자 함이 아니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의 선택으로 인해 오늘날 볼 수 없게 된 BB에는, 아마도 ‘시조 비류왕’으로 시작되는 왕계와 각 왕들의 치적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보기에, ‘시조 비류왕’에서 시작된 이 나라는 ‘백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시조 비류왕’에서 시작되는 이 BB의 나라를 삼국이 아닌 다른 열국 중 하나로 보았거나, 혹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존재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추측컨대 아마도 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역사만을 취합하고 나며지는 버린다는 원칙에서 볼 때, BB의 나라는 아마도 판단하기가 대단히 곤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어느 쪽이었든, BB는 원칙적으로 ‘삼국’의 사료 취합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편찬원칙에 따라 제외된 BB에 있는 내용이 왜 예외적으로 백제본기 건국서문의 註에 기록되었을까? 대략 추측이 가능하다. AA를 토대로 백제본기를 편찬하던 어떤 편찬자가, 백제 건국에 대한 부분을 서술하던 중에 AA에 나온 이야기와 상당히 유사한 이야기가 취합대상에서 제외된 사료인 BB에도 있었음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북부여가 등장하고, 고구려왕 주몽과 그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비류와 온조가 등장한다.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스토리 라인이 완전히 일치한다. 하지만 디테일에서는 묘한 차이를 보인다. 비록 BB는 ‘백제’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취합 대상에서 제외하였으나, 그 편찬자는 이 오묘하게 겹치는,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만큼은 도저히 그냥 묻어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제의 역사로 채택된 AA로부터 옮겨적은 A의 내용 뒤에, 작은 글씨로 ‘一云’이라 쓰고 註를 달았다. 述而不作의 유학자였을 그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다르게 전하는 기록들은 최대한 취합한다는 원칙에 충실하였다. 그는 취합 대상에서 제외된 사료 BB를 펴들고는, ‘시조 비류왕’으로 시작되는 B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었던 것이다. 그 무명씨의 ‘원칙’ 덕분에, 오늘날 멸실되어 볼 수 없게 된 BB의 앞부분이 삼국사기에 살아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잃어버린 백제 역사의 복원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 너무나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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