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 이어집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문제의 ‘史本記’가 삼국사기냐 아니냐, 유학자들과 불교도들 중 누가 잘못?했느냐 따위에 있지 않다. 여기서 나의 관심은 어디까지나 온조가 건국한 초기 백제 왕가의 성씨 즉 온조의 성씨가 실제로 해씨였느냐, 부여씨였느냐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세 가지 경우의 수에 따른 상기의 가설에서, 각각의 경우에서 온조가 건국한 초기 백제 왕가의 성씨 즉 온조의 성씨는 어느 쪽이 될까?
일단 가설 2와 3에서는 답이 간단명료하게 나온다.
가설 2를 따를 경우,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개변되기 전의 삼국사기에 해씨라고 쓰여 있었으므로 온조는 해씨가 된다.
가설 3을 따를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삼국사기에는 처음부터 온조는 부여씨라고 쓰여 있었던 것이 된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편찬자들이 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대에 더 가까운 사료에서 해씨라고 하였으므로, 역시 온조는 해씨였던 것으로 보아야 맞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설 1의 경우에서는 어떤가?
여기서는 삼국사기와 중요한 차이 즉 온조의 성씨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이른바 ‘史本記’의 정체가 문제가 된다. ‘史本記’는 삼국사기 이후에 다시 편찬된 책인가, 아니면 삼국사기 이전에 있었던 온조와 더 가까운 시대의 사료인가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보다 정확히는 삼국사기 편찬 이후 삼국유사 편찬 전까지의 기간에, 삼국시대의 정사를 다시 편찬했다는 기록이 있었던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없다. 삼국사기 이후로 다음 전시대 正史편찬은 조선왕조의 동국통감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史本記’는 삼국사기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사료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서는 온조가 부여씨라고 하였으나 그보다 이른 시기의 사료인 ‘史本記’에서는 온조가 해씨라고 한 것이므로, 온조는 해씨였다고 보아야 맞다.
결론적으로 가설 1,2,3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느냐는 적어도 이 주제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을 따르든, 어차피 온조는 해씨가 되기 때문이다.
두 사료가 모순될 때 더 이른 시기의 사료를 따르는 것은 무난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친다면 무책임한 취사선택에 불과한 것이다. 이른 시기의 사료가 맞다면, 늦은 시기의 사료에는 왜 틀린 내용이 기록되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설득력 있는 논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건국서문은 왜 ‘잘못’되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 삼국사기에서 채택한 사료, AA에서 옮겨적은 A에서는 왜 온조의 성씨가 부여씨로 되어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먼저, 정말로 A가 ‘온조의 성씨는 부여씨’라고 말하고 있는가, 혹시 많은 독자들이 A를 오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부터 살펴야 한다.
그렇다면 앞 단락에서 피력했던 이야기를 재론할 수밖에 없다. A는 건국서문이다. 기원전 18년 이전의 일들을 간추려 놓은 것이 아니다. 적어도 기원전 18년의 건국 이후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A에서 ‘부여씨’를 운운한 문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를 보자.
A-2
온조는 강 남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서기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
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扶餘)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扶餘)를 성씨(姓氏)로 삼았다.
이 기록에서 주관적 가치판단이 개입되는 인과와 평가 부분을 배제하고, 단지 일의 선후관계만을 뽑아 정리하면 이렇다.
기원전 18년 온조의 십제 건국 -> 비류의 죽음 -> 비류가 세운 나라가 온조가 세운 나라에 병합됨 -> 국호를 백제로 고침 -> 왕실의 성씨를 부여로 삼음
앞 단락에서 말했듯이, 기원전 18년으로 못박힌 온조의 건국 이후에 나오는 일들은 언제 있었던 일인지 밝혀 놓지 않고 있다. 즉 온조의 십제 건국 이후에 따라오는 사건들은 온조왕대의 일인지 의자왕대의 일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A는 백제 왕실이 성씨를 부여씨로 삼았다고 했을 뿐, 온조의 성씨가 부여씨라고 하지 않았다. 밝히지 않은 어느 시점에서부터 백제 왕실이 스스로 부여씨를 칭했다는 말이지, 온조 당대부터 부여씨였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A가, 삼국사기의 건국서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오해의 소지가 있게 쓰여진 기록일 뿐이고, 그것을 무신경하게 읽은 많은 독자들이 오독하였을 뿐인 것이다.
아마도 A의 최초 작성자는 그러한 착각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독자가 무신경하게 읽으면, 마치 온조 때부터 부여씨였던 것처럼 여겨지도록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애매하게 써 놓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온조가 부여씨였다고 날조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에서 역사 기록이란 함부로 날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부로 날조한 거짓말을 역사랍시고 써 놓으면 그 시비를 아는 자에 의해서 오래지 않아 발각될 것이고, 거짓을 날조한 자는 권력에 의해 무거운 책임을 추궁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선전선동의 일인자로 너무나도 흔히 인용되는 괴벨스도 “100%의 거짓보다는 진실과 거짓의 적절한 배합이 훨씬 더 큰 효과를 낸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장황하게 썼지만, 골자는 백제 왕실, 정확히 말해 온조의 성씨가 해씨였다는 간단한 결론이다. 나는 이것이 잃어버린 백제 역사를 복원해 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온조를 부여씨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백제 역사의 진상에 접근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굳이 이처럼 장황한 과정을 통하여 그 간단한 사실을 논증하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