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야기 관련해서 삼국사기를 뒤적이다가 언뜻 본 부분이 흥미로워서 써봅니다.
三國史記 > 髙句麗本紀 第十 > 보장왕(寶藏王)
26년(667) 가을 9월...... 곽대봉(郭待封)이 수군을 거느리고 다른 길로 해서 평양에 다다랐다.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식량과 무기를 싣고 가서 공급하게 하였으나 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대봉의 군대가 굶주림으로 고생하였다.
글을 지어 이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 그 허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군사(軍事)가 매우 급한데 어떻게 시로써 하는가? 반드시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해석하니 이적이 이에 다시 식량과 무기를 보내 주었다.
만경이 격문을 지어 말하기를 “압록의 요해를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천남건이 답하여 말하기를 “삼가 명을 듣겠다.”고 하고 곧 병력을 옮겨 압록강나루에서 웅거하니 당의 병력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이를 듣고 만경을 영남(嶺南)으로 유배를 보냈다.
기록이 다소 난잡하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골자는 이겁니다.
1.당군 곽대봉 부대가 수로를 통해 고구려 수도 평양에 다다랐다.
2.당군 총사령관 이세적이 곽대봉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풍사본 부대에게 보급품 수송을 지시했다.
3.풍사본 부대는 임무에 실패했고, 평양 근교에 상륙한 곽대봉 부대는 굶주렸다.
4.(곽대봉 부대가 보급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군가가 이세적에게 암호문으로 알렸다.
5.이세적이 암호문을 이해하지 못해 열폭하였는데(...) 원만경이라는 자가 암호를 해독해주자 이세적은 곽대봉 부대를 위한 보급품을 다시 수송할 것을 지시했다.
6. 공을 세워서 신이 났는지 혹은 이세적의 지시였는지, 원만경은 고구려측에 보내는 격문을 썼는데 거기에 "압록의 요해(鴨渌之險)를 지킬 줄 모른다." 운운했다. 고구려의 연남건이 그 격문을 받아보고는 압록강나루(鴨渌津)의 수비를 강화했다.
7. 당군은 '압록'을 건널 수 없었다. 당고종이 원만경을 처벌했다.
살펴보면, 당 수군이 평양에 근교에 상륙한 후부터 핵심 요충지로 '압록'이 등장합니다.
즉 '압록'은 평양을 방어하는 핵심 요충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듬해의 기록을 보면 이것이 한층 명확해집니다.
27년(668)......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쳐서 빼앗았다. 이적이 이윽고 대행성을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만나 진격하여 압록책(鴨淥柵)에 이르렀다. 아군이 막아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백여 리를 쫓아 달려와서 욕이성(辱夷城)을 쳐서 빼앗으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이어졌다. 계필하력이 먼저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 아래 도착하니 이적의 군대가 뒤따랐다. 평양을 포위하기를 한 달이 넘자......
당의 대군이 '鴨淥柵'이라는 곳에 이르자 고구려군이 반격하였으나 패배합니다.
鴨淥柵이 무너지자, 곧바로 당의 육로군 선봉대가 평양에 다다르고, 이어서 이세적이 이끄는 본대가 도착하여 평양을 포위합니다.
鴨淥柵과 평양은 지척에 있었고, 鴨淥柵은 평양으로 진입하는 관문이었다는 의미입니다.
鴨淥柵을 무너뜨리면 더 이상의 큰 방해물 없이 바로 평양성을 포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압록강'과 지금 한반도의 '평양'이
지리적으로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