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스포츠
토론장


HOME > 커뮤니티 > 동아시아 게시판
 
작성일 : 18-07-17 06:30
[한국사] 진한 초기 우두머리를 했던 석씨, 박씨는
 글쓴이 : 마마무
조회 : 3,742  



저는 원래 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후 흉노의 김씨가 진한을 장악했고 친백제(마한) 성향 석씨, 박씨는


일본으로 도망가 마한(백제) 왕 계보에 흡수됬다고 봅니다.


김씨는 비로써 지증왕때 신라란 국명을 얻었고요.


그리고 강원도에 자리 잡은 예국과 실직국은 흉노에 소멸되서


일본으로 도망가 명문가 하타씨족이 되었구요. 


결론은 한반도 남단은 마한이 지배했고 


진한과 변한은 피지배계층으로 동쪽지방에 얻쳐 살았고


그들의 초기 우두머리는 석씨와 박씨가 했다는 결론이 가장 신빙성 있다고 보네요.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가생이닷컴 운영원칙
알림:공격적인 댓글이나 욕설, 인종차별적인 글, 무분별한 특정국가 비난글등 절대 삼가 바랍니다.
도배시러 18-07-17 06:47
   
실직국의 위치는 함경도 부근으로 봐야 합니다. 함초령비/마운령비
     
마마무 18-07-17 06:51
   
실직국은 위로는 고구려와 밑으로 신라 인접이니 강릉에서 삼척까지입니다.

함경도는 고구려(옥저)
          
도배시러 18-07-17 06:57
   
그런식으로 접근하면 마운령비, 함초령비는 설명이 안되요.
마운령/함초령 정복기념비가 아니라 순수비 입니다. 원래의 영토를 방문하는 행위로 세운 비석

진흥왕때 정복한 지역이 아니라 이전부터 신라의 영토라는거죠.
그러면 언제부터냐 ? 그 지역 최북단의 위치는 언제부터 형성되었나 ?

파사 23년(서기 102) 가을 8월 실직(悉直) 압독(押督) 두 나라 임금도 와서 항복하였다.

지마이사금 14년(서기 125) 봄 정월, 말갈(靺鞨)이 북쪽 변경을 크게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가을 7월, 그들은 또다시 대령(大嶺) 목책을 습격하고 니하(泥河)를 넘어왔다. 임금이 백제에 서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백제는 다섯 명의 장군을 보내 돕게 하였다. 적병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이 사건 이후에 북쪽 지역을 추가로 점령한 기록이 없습니다. => 진흥왕때도 없음
계속해서 신라의 영토로 유지되었다고 볼수밖에 없습니다.

※ 실직 과 니하는 묶음지역 입니다.

===> 이 논리를 부수려면... 실직국 북쪽을 점령한 기록이나 실직국 보다 북쪽의 지명이 필요
               
마마무 18-07-17 07:02
   
그 이전 예국에 침략 당했고 고구려도 실직국 지배했던 사례가 있는데요??
                    
도배시러 18-07-17 07:07
   
침략이 중요한게 아니라 정복/점령이란 단어가 필요하죠.
침략은 대개 왔다가 되돌아가는 겁니다.

고구려가 실직을 진흥왕 이전에 지배한 사례를 제시하면 됩니다.
                         
마마무 18-07-17 07:11
   
정복했어요.;;;

내물왕때 실성을 고구려 인질로 보냈고 우곡현, 죽현(죽서루) 망경(삼척근덕) 에

고구려 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장수왕때는 더 밑으로 포항까지 점령당했습니다.
                         
도배시러 18-07-17 07:23
   
내물왕때 실성을 고구려 인질로 보냈고 ===> 문헌 확인
우곡현, 죽현(죽서루) 망경(삼척근덕) 에 고구려 군을 세웠습니다. ==> 기록 없음

장수왕때는 더 밑으로 포항???까지 점령 ===> 요거는 해석의 문제이죠.
실직과 니하는 지척에 있습니다. 점령이라기 보다는 침략이나 약탈 수준
                    
도배시러 18-07-17 07:14
   
정정 하면서 다시 주장할게요.
고구려의 입장이 아니라 신라의 입장이 필요합니다.

신라가 실직 보다 북쪽을 지배한 기록이 있는가 ? 고구려가 실직을 점령한 문제는 제외
신라가 실직보다 북쪽을 지배했다면 관련 신라의 지명은 무엇인가 ?

마운령/함초령비 지역의 신라 명칭은 무엇인가 ?
                         
마마무 18-07-17 07:22
   
일단 신라가 고구려보다 실직을 먼저 지배한 사실은 없습니다.

신라가 실직을 지배했을때는 지명은 명주가 됩니다.
                         
도배시러 18-07-17 07:24
   
저는 문헌을 제시 했습니다.
파사왕과 지마왕의 실직과 니하 관련 기록입니다.

*** 고구려가 실직을 습격 : 신라의 고구려 실직 습격기록은 이전에 없음
11년(서기 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
가을 9월,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니하(泥河)[니하를 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에 성을 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비 마립간 [慈悲⿇⽴⼲]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마마무 18-07-17 07:28
   
저는 정식 한국사 국사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사기 교차검증
                         
마마무 18-07-17 07:29
   
아~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 내용에도 나옵니다.
                         
도배시러 18-07-17 07:31
   
국사책은 후대에 작성된 것이라 참고할 서적이죠.

1,2차 사료 위주로 대조해야 진실에 접근할수있습니다.
                         
마마무 18-07-17 07:34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사기 교차검증이라구요;;;

태왕비 비문에도 명확히 나오고요
도배시러 18-07-17 07:36
   
광개토호태왕비문 에 나오는것은
신라의 어려운 상황과 왜구를 소탕한 기록입니다.

이후에 그것을 빌미로 신라의 영토를 점령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도배시러 18-07-17 07:40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 (第三面) ***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 고구려가  신라를 돕고서 후퇴하니... 신라왕이 직접 고구려를 방문하여 조공
     
마마무 18-07-17 07:42
   
어떻게 믿고 싶은것만 골라 믿습니까??

교차검증은 아예 안하시고.

증거는 차고 넘쳐요..



삼국유사 :

왕의 아우인 복호(卜好)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원도 고성으로 길을 떠나 고구려의 수도(국내성)로 들어가 복호의 탈출을 도왔고, 복호는 고성의 포구에서 신라측이 마련한 배를타고 도망쳤다.


삼국유사 :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보내어 뒤쫓게 하였는데 고성에 이르러 보해를 따라잡았다. 그렇지만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 늘 주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어 모두들 화살촉을 뽑고 쏘았다. 그래서 드디어 죽음을 면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삼국유사 :

눌지왕(417~458)의 동생인 보해(삼국사기엔 복호)가 동해안으로 도망쳐 배를 타고 경주로 돌아온 기록이 남아있다.


광개토태왕비 :

눌지마립간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다.
광개토대왕시대 5만명의 병력이 주둔했다.


삼국사기 :

삼척군(三陟郡)은 원래 실직국(悉直國)으로써 파사왕 때 항복하여 왔는데 지증왕(智證王) 6년 즉, 양 천감(天監) 4년(서기 505)에 주로 만들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죽령현(竹嶺縣)은 원래 고구려의 죽현현(竹峴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명주편>


삼국사기 :

남행한 고구려군은 퇴각이후 일부가 남아 신라 영내에 머물렀고, 그 대가로 실직국 옛영토를 장악했다. 그 흔적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마마무 18-07-17 07:43
   
참고로 중국측 동이전은 뺐습니다.

그것까지 합하면 증거는 수십가지 차고 넘침.
               
도배시러 18-07-17 07:47
   
중국 동이전에 실직국이나 마운령비 언급은 없습니다.
                    
마마무 18-07-17 07:56
   
마운령비는 진흥왕이 568년 8월에 그곳을 돌아보고 간 것을 기념하여 세운 이 비이지

그 이전 실직 지역을 고구려가 점령했던 사실적 자료가 많다는 이야기인데

무슨 자꾸 물타기를 하십니까??
                         
도배시러 18-07-17 07:59
   
그 지역의 신라 명칭이 뭐냐구요 ?
신라의 지명 중에 실직/삼척주 위에 있던 지명이 뭐가 있습니까 ?

신라의 최북단이 실직이라면.... 유물로 알려진 신라의 최북단은 마운령비 지역이죠.
                         
마마무 18-07-17 08:01
   
명주요.
                         
도배시러 18-07-17 08:04
   
명주는 **군이 여러개 포함되어 있고요.[삼척군, 곡성군....]
명주의 최북단은 삼척군이 됩니다.
          
도배시러 18-07-17 07:47
   
삼국사기 :

삼척군(三陟郡)은 원래 실직국(悉直國)으로써 파사왕 때 항복하여 왔는데 지증왕(智證王) 6년 즉, 양 천감(天監) 4년(서기 505)에 주로 만들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삼았는데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지금도 그대로 부른다. 이 군에 속한 현은 넷이다. 죽령현(竹嶺縣)은 원래 고구려의 죽현현(竹峴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삼국사기 잡지 명주편>

===> 삼국사기 본기를 무시한 잡지의 기록이라 맘에 안들지만
출처를 제시한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나머지 기록의 출처도 부탁합니다

글내용을 보면 앞뒤가 안맞죠 ?
삼척군(三陟郡)은 원래 실직국(悉直國)으로써 파사왕 때 항복하여 왔는데.....
...
죽령현(竹嶺縣)은 원래 고구려의 죽현현(竹峴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이다.
=> 죽령현(竹嶺縣)은 원래 실직국의 ***현이었고, 파사왕때 ***현이라 했다. 이런식으로 전개되어야죠.
          
도배시러 18-07-17 07:51
   
광개토태왕비 :
눌지마립간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다.
광개토대왕시대 5만명의 병력이 주둔했다.

===> 이거는 누가 소설 쓴건가요 ?

원문은... 이렇습니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
기록은 [단기간] 5만병력을 지원했다는 것이지
장기간 신라에 고구려군이 버티고 있었다는 문장은 없습니다.

여기서 진도를 나가면 신라성을 구원하고.... 신라 영토 바깥의 임나가라 종발성에서
고구려군이 눌러 살았다면 억지 연관성은 보입니다.
               
마마무 18-07-17 07:58
   
저거요.

실직군주에서 가야쪽까지 왜 침범을 구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

481년 고구려에 의해 실직군(悉直郡)이 설치되었고 산하에 우곡현(羽谷縣.羽谿縣;강릉시 옥계면),죽현현(竹峴縣.竹嶺顯;삼척시 하장면, 태백시),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삼척시 원덕면)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군)의 5개 현을 관할했다.
                    
도배시러 18-07-17 08:01
   
3년(서기 481) 봄 2월, 비열성(比列城)에 행차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지 마립간 [炤知⿇⽴⼲]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 기록은 고구려가 할려다가 실패했다는데... 뒷 문장을 마저 보지 않은듯...
                         
마마무 18-07-17 08:03
   
머가요??진흥왕은 576년인데

이미 481년 고구려에 의해 실직군(悉直郡)이 설치되었고 산하에 우곡현(羽谷縣.羽谿縣;강릉시 옥계면),죽현현(竹峴縣.竹嶺顯;삼척시 하장면, 태백시),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삼척시 원덕면)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군)의 5개 현을 관할했는데요??
                         
도배시러 18-07-17 08:06
   
그래서 481년 삼국사기 기록을 제시하쟎아요 ?
고구려가 관할하려다가 천여명의 목이 베였으니... 고구려 귀신이 관할 ?

사서를 읽고서 앞부분만 오려서 국사책 만드는거 보신겁니다.
사서의 뒷문장은 못본척 하고 만든 주장이네요
                         
마마무 18-07-17 08:12
   
481년 기록

481년 장수왕대에 고구려의 남침을 받아 신라는 포항일대까지 북쪽 영역을 할취당했다. 이시기에 신라의 세력관 하에서 자치를 허용받던 실직국도 고구려의 지배하에서 자치권을 박탈당해 중앙권력의 지배를 받는 지방행정단위로 전락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했다.

481년 고구려에 의해 실직군(悉直郡)이 설치되었고 산하에 우곡현(羽谷縣.羽谿縣;강릉시 옥계면),죽현현(竹峴縣.竹嶺顯;삼척시 하장면, 태백시),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삼척시 원덕면)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군)의 5개 현을 관할했다.
                         
마마무 18-07-17 08:14
   
한참 이전 증거제시


고조선이후에 실직국이 들어섰고 인근에 울진의 파조국(波朝國,또는 파단국(波但國)), 강원도 대부분의 동예와 공존했다.

서기 50년 경, 실직국이 파조국을 합병했다.
60년 경, 동예의 침공을 받자 안일왕(安逸王)은 일시 나라를 파조국으로 옮겼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 안일왕 산성이 있다.
102년 경 동해안일대로 대거 세력을 확장한 실직국은 경주시 안강읍에 있던 음즙벌국과 분쟁을 벌였다. 오랜 분쟁으로 양국이 지친데다 결말이 나지 않자 결국 진한의 종주국인 신라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신라는 오히려 중재과정의 사건을 빌미로 두 나라를 침공해 음즙벌국과 인근의 압독국을 합병했다.


님 논리라면 압둑국, 음즙벌국은 함경도에 있어야 정상입니다.
                         
마마무 18-07-17 08:17
   
대부분 삼국사기,삼국유사 내용입니다.
                         
도배시러 18-07-17 08:17
   
신라의 문헌상 최북단 지역은 실직, 니하
신라 유물의 최북단은 마운령비

마운령비 지역 = 실직... 뭐가 잘못된거죠 ?

마운령비 북쪽에 신라 유물이 나온다면 실직의 위치는 북상 가능합니다.
이게 문헌- 유물의 관계 아닌가요 ?
                         
마마무 18-07-17 08:21
   
유물 이야기 하셨는데요??

실직국 유물 100%는 동해시 송정동, 발한동, 삼척시 교동, 정라동, 근덕면

여기서만 나왔습니다.
                         
도배시러 18-07-17 08:24
   
실직이란 단어가 포함된 유물이 나왔다구요 ?

삼척도 아닌 울진에서 관련 금석문이 발견되었다는데...

둘다 틀린거죠 ? 울진봉평신라비 悉支道使 悉支軍主

悉支道使 烏婁次小舍帝智 居伐牟羅 尼牟利一伐宜智 波旦只斯利一▨智阿大兮村使人」
奈尒利杖六十葛尸条村使人奈尒利居▨尺男彌只村使人異▨杖百於卽斤利杖百 悉支軍主

님이 거론한 자료로 하면 동해 삼척이어야 하는데....
금석문은 더더더 남쪽의 울진에서 발견되고... 어케해야 할가요 ?
누가 삼척에서 발견된 금석문을 울진으로 몰래 옮긴거 ?
                         
마마무 18-07-17 08:56
   
???

실직군 왕릉이 현존 동해삼척에 있는데요??
                         
도배시러 18-07-17 09:03
   
실직국 말하는거여 ? 실직군왕(경순왕 손자) 말하는거여 ?

실직군왕릉 (悉直郡王陵)
삼척 김씨의 시조이며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위옹의 묘소이다. 실직군왕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신라 경순왕의 복속을 받아들이고 실직군왕으로 책봉하여 대우하면서 유래한 것이다.
                         
마마무 18-07-17 09:06
   
네..실직군왕요.

실직국 지배관할이 동해삼척울진 입니다.

님 상상처럼 함경도가 아님요.

일단 함경도에 실직국 관련된 유물, 집터, 서적, 왕릉, 등등

아무것도 나온 사례가 없습니다.
                         
마마무 18-07-17 09:08
   
아 그리고 울진은 원래 음즙벌국 관할인데.

이후 실직국으로 통합된겁니다.
                    
마마무 18-07-17 09:09
   
이후 실직국은 경주근방까지 영토를 넓힐려고 했으나 사로국의 뒷통수 때문에

실패하게 됩니다.
                         
도배시러 18-07-17 09:15
   
시간의 순서를 너무 무시하시는듯...

경순왕의 손자와 실직국을 엮는것은 시간차가 너무 많이 나요.
                         
마마무 18-07-17 09:17
   
애초 기원전후 실직지역은 강원도라는 말입니다.

님 상상대로 진흥왕때 함경도에 실직관련 유물 단 한점도 없어요,
                         
도배시러 18-07-17 09:19
   
신라 문헌의 북단 = 실직
신라 유물의 북단 = 함경도

이렇게 보면 마운령비는 실직관련 유물이 되는거죠. 쉽죠 ?
                         
마마무 18-07-17 09:21
   
그럼 실직에 관련된 신라의 자료 삼국유사,삼국사기 말은 다 거짓인가요???
                         
도배시러 18-07-17 09:26
   
님이 제시한 자료도 삼국사기를 거짓으로 보지 않나요 ?

481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을 공격하다가 천여명의 목이 날아갔는데도
그 고구려 귀신들이 실직을 점령했다고 주장하던 자료는 뭐죠 ?
                         
마마무 18-07-17 09:28
   
481년 고구려에 의해 실직군(悉直郡)이 설치되었고 산하에 우곡현(羽谷縣.羽谿縣;강릉시 옥계면),죽현현(竹峴縣.竹嶺顯;삼척시 하장면, 태백시), 만경현(滿卿縣.滿鄕縣;근덕), 해리현(海利縣.波利縣;삼척시 원덕면) 우진야현(于珍也縣;울진군)의 5개 현을 관할했다.


삼국사기 내용인데요??


http://www.samcheok.go.kr/intro/00372/00377.web
                         
도배시러 18-07-17 09:32
   
삼국사기 내용인데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42684&cid=49615&categoryId=49615&expCategoryId=49615

3년(서기 481) 봄 2월, 비열성(比列城)에 행차하여 병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주었다.
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지 마립간 [炤知⿇⽴⼲]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마마무 18-07-17 09:11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팩트.

실직국은 예로 기원전후 부터 태백산 제사를 지냈다고.

분명하게 기록에 나옵니다.

태백산은 삼척 옆 황지 근방이죠.
호랭이해 18-07-17 09:34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下部 拔位使者 補奴

新羅土內幢主는 관직명, 下部는 출신부명, 拔位使者는 관등명, 補奴는 인명이다. 신라토내당주라는 관직명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군 사령관이란 의미로, 당시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부는 고구려 5부의 하나로, 『翰苑』注에 의하면 絶奴部·北部·黑部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발위사자는 『翰苑』注에 인용된 『高麗記』에 의하면 일명 儒奢로 14등급으로 이루어진 고구려 관등조직에서 8번째이며, 從5品에 비견된다고 한다.

중원 고구려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うまかひ)라고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일본서기
     
도배시러 18-07-17 09:41
   
중원 고구려비문 앞면

5월 중 고려대왕(高麗大王)의 조왕(祖王)께서 영(令) ...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世世)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려고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多亏桓奴) 주부(主簿) 귀도(貴道) 등이 ... 로 가서 궤영(跪營)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 ... 尙 ... 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寐錦)의 의복(衣服)을 내리고 建立處 用者賜之 隨者 ... . 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敎)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敎)를 내렸다.
동이(東夷) 매금(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寐錦) 토내(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이) 고구려 국토 내의 대위(大位) 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受敎)를 궤영에게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東夷) 매금(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敎)를 내렸다.

전부 대사자 다우환노와 주부 귀도(貴道)가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당주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 내의 주민을 모아서 ... 로 움직였다.
     
도배시러 18-07-17 09:43
   
고구려병사 5만 주둔설에 비해 적은 병사가 있었네요.
그냥 1~300명은 연락병 수준으로 보입니다.
          
감방친구 18-07-17 09:59
   
5만 주둔설은 금시초문인데요?
               
도배시러 18-07-17 10:03
   
마마무님 댓글중에...........

광개토태왕비 :

눌지마립간때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 없었다.
광개토대왕시대 5만명의 병력이 주둔했다.
                    
감방친구 18-07-17 10:19
   
5만 병력을 파병하여 신라를 구원한 것이지
5만 병력을 주둔시켰다니 ㅎㅎ
관심병자 18-07-18 02:48
   
경명왕이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고, 또 경명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경애왕(景哀王)이 더욱 친고려정책(親高麗政策)을 추진하자 견훤이 이를 견제하고자 신라를 침공하였다. 신덕왕(神德王), 경명왕, 경애왕은 아달라계(阿達羅系)의 후손으로 박씨 왕계였다.
-중략-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되고 난 다음,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덕왕부터 경애왕까지 이어진 박씨 왕계가 다시 경순왕이 옹립됨으로써 김씨 왕계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순왕 [敬順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94329&cid=46620&categoryId=46620

옥모부인이 고구려왕의 황자를 낳았다. 물론 옥모의 딸이었던 월정 역시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 되어있다. 하이고 오늘 날로 치면 정말 개판 이긴 하다 ㅠㅠ
이 쯤에서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 당시 신라의 왕은 옥모부인의 둘째 아들인 첨해왕이다. 즉 첨해왕은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가 고구려 중천왕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심지어 본인은 중천왕의 황자가 되었다는 것. (하이고 이땐 신라가 약소국이라는 것을 매우 강조!!)

261년 첨해왕이 사망한다. 첨해왕의 자녀에 대해서는 기록에는 마땅히 나와있지않다. 그렇다면 다음 왕은 누가 되었을까?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었다. <조분>의 사위인 <미추>가 섰다. <미추>는 <옥모>의 동생이다. {<미추>가} 글을 올려 <신라국>황제를 세움에 대하여 청하길; “조카인 황제가 나라를 등졌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신에게 감국 하라고 하나, 신은 재주가 용렬하여 즉위하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누님이신 후와 형황께서 될 만한 사람을 택하여 주심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은, <옥모>와 <단궁>에서 동침하다가, 이 급보를 듣고는, <옥모>에게 “당신 동생 <미추>가 조신하고 후덕하기가 가장 나으니, 또한 해 볼 만하지 않겠소?”라 물으니, <옥모>가 눈물 흘리며 답하길; “첩은 이미 나라를 짊어지고 와서 지아비를 따르고 있습니다. 지아비이신 황상의 뜻이 소첩의 뜻이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이윽고 <명림어윤>을 시켜 칙명을 받들어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동해>대왕・우위대장군을 봉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과 면{면류관}・포{황제나 왕의 관복}를 내렸다. 그날이 바로 임오년{단기2595년/AD262} 정월 25일이었다.
<남당유고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제12대 중천대제기>
그렇다. 첨해왕의 다음 왕은 옥모부인의 남동생인 미추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즉 지금 껏 박씨, 석씨의 왕족들이 왕위를 이어오다가 처음으로 김알지의 후손이자 김씨 성을 가진 미추가 왕위에 오른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된다.
<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 제2>
https://blog.naver.com/tnrwlschl/221219854826
관심병자 18-07-18 03:26
   
-전략-

즉 위에서 나온 두 가지 설보다는 이미 미추의 즉위로 김씨 가문이 강해진 상황에서 미추의 사위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을 것으로 추정되는 후대의 석씨 왕들이 제대로 된 세력 확장을 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국 김씨 가문에게 왕위를 내줬다는 해석이 더 맞다고 본다.
그리고 석씨 왕실이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이유는 자신 세력의 피가 섞인 실성이 내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데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후 눌지가 실성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면서 석씨 왕실도 같이 몰락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a) 이매계 석우로에 대하여)
 
석우로는 10대 내해왕의 아들로서 조분왕의 시대에는 태자의 자리에 있었다.
내해왕의 유언에 따라 석우로를 대신하여 왕이 된 조분왕은 석우로를 태자로 삼아 다음 왕위를 이을 수 있게 하였다. 때문에 원래는 조분왕의 뒤를 이어 석우로가 왕이 되어야 했지만 조분왕의 아우인 첨해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230년 3월에 왕위에 오른 조분왕은 7월에 내해왕의 태자였던 석우로를 이찬에 임명하고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경북 김천시 개령) 토벌을 명한다. 우로는 감문국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속군으로 만들어 신라 땅으로 만들었다. 이에 가야와 관계가 깊던 왜군이 231년 4월에 금성으로 쳐들어고, 신라는 간신히 이를 막아냈고 왜군은 병력 1천여명을 잃고 퇴각한다. 하지만 232년 5월에 왜군이 다시 쳐들어 온다. 조분왕은 우로를 앞세워 왜군을 대적하게 했는데 우로는 바람과 화공을 이용하여 두 달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던 싸움을 대승으로 이끌었고 왜군은 전함을 모두 잃고 전 병력이 몰사했다.
 
이 싸움 이후 왜 왕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다. 244년 조분왕은 석우로를 재상격인 서불한에 임명하고 병사를 겸하게 한다.
이에 신라군은 북진정책을 펼쳐서 245년에는 북한강을 건너 칠중하(임진강) 근처까지 이르게 된다. 이에 고구려의 동천왕은 그해 10월에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우로가 군대를 지휘하여 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마침 위나라가 관구검을 앞세워 평양으로 쳐들어 올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게 되면서 전선은 교착상태로 빠져든다. 그런 와중인 245년 5월에 조분왕이 승하한다.
 
조분왕 사후 원래 석우로가 왕위를 승계했어야 하나, 왕위를 이은 첨해왕은 석우로나 미추보다도 오히려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왕위에 오른다(그의 죽음도 석연치 않다) 첨해왕은 외교에 있어서도 조분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고구려에 사진을 보내 화친을 맺었고 왜와도 화친관계를 맺게 된다
 
b) 골정계 첨해 이사금: 재위기간은 247년부터 261년까지이다. 일명 이해(理解)·점해(詀解)라고도 한다. 조분이사금의 동모제(同母弟)로, 아버지는 골정(骨正)이고, 어머니는 옥모부인(玉帽夫人)이다. 즉위년(247)에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에 봉하였다.
 
따라서, 점해이사금의 즉위를 형제상속으로 보기도 하고, 골정계(骨正系)의 독립이라는 점에서 가계내의 계승으로 보기도 한다. 248년 고구려와 화의를 맺었고, 255년 백제가 봉산성(烽山城 : 지금의 경상북도 榮州로 추정됨)을 공격해 왔으나 이를 빼앗기지 않았다.
 
한편, 영토의 확장에 노력하여, 달벌성(達伐城 : 지금의 大邱)을 쌓았으며 사벌국(沙伐國 :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이때에 이르러 사로국(斯盧國)은 진한의 전지역을 통일하였다. 261년 12월에 갑자기 병이 들어 죽었다.
 
이에 당시 국정을 맡고 있던 석우로는 이를 못마땅히 여겨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왜 왕을 모독하는 이런 욕설을 하게된다.
 
"조만간에 너희 국왕(왜 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왕비는 찬부(식모)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석우로의 말이 왜국 사신의 귀에 들어가면서 왜와 신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었고 왜 왕이 군대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게 된다. 이에 첨해왕은 석우로로 하여금 왜군 장수 우도주군을 찾아가 사과를 하도록 했다.
하지만 왜장 우도는 석우로를 화형시킨 뒤 본국으로 귀국한다. 석우로가 비록 말실수를 하긴 했으나 한 나라의 왕족이요 재상인 그가 화형 당했음에도, 첨해왕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때문에 첨해왕은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큰 원망을 듣게 됩니다.
 
이런 첨해왕이 갑자기 죽은 이후(반정으로 죽은 듯 함) 조분왕의 사위인 김씨 미추왕이 왕이 되게 된다. 미추왕은 석우로와 함께 조분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평소에도 친한 사이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미추왕의 시대에는 266년 8월에 백제가 봉산성을 급습해 왔으나 성주 직선이 2백 명의 군사로 물리친다. 274년에도 백제가 신라 변경을 침입해 왔고 278년에는 신라의 전초 기지인 괴곡성을 포위하였다가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게 된다.
 
283년 9월에 다시 변경을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고, 10월에는 괴곡성을 포위하였다가 물러가게 된다. 석우로가 왜군에게 화형당해 죽은 이후 석우로의 부인 명원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미추왕이 즉위한 뒤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왔는데 우로의 아내는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미추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미추왕이 승낙하자, 그녀는 왜국 사신들에게 술을 잔뜩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부리고 있던 장사를 시켜 그를 뜰에 내려놓고 태워 죽이도록 하였다.
 
이 일로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에 침입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나, 왜군은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5. 결론

결국, 석씨는 골정계와 이매계의 싸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리려던 김미추가 어느쪽에 힘을 주었느냐로, 서로간의 승/패가 나뉘게 되는 상황이었고, 김미추는 골정계와 이매계 두 쪽 모두와 팽팽히 접촉하며 결국 이매계로 대표되는 석우로를 골정계왕 첨해를 통해 제거했고, 첨해는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하여 골정계 조차도 굴복시켰다고 볼 수 있다.
비록 미추가 조분의 사위의 신분으로 왕이 되었기에 유례이사금 이후 두세대를 기다려야 했지만, 국정의 주요 키는 김씨가 좌지우지 하는 상황에서, 석씨는 내분과 혈연의 단절이라는 두가지를 모두 잃고,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왕조 성립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거기다, 김씨 사이의 내전인 실성-눌지간의 전쟁에 끼어들다, 결국 실성계로 몰려 실성왕 세력과 함께 멸문 당한것으로 보인다.             
[출처] 석씨왕조의 몰락|작성자 히스토리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1233146452

---

박씨에서는 통일신라 말기까지도 왕이 나왔었음.
김씨가 왕위에 처음 오른직후에도 석씨에서 왕이 나왔었음.
첫 김씨왕이 석씨왕의 사위, 이후의 석씨왕이 김씨왕의 사위.
석씨 가문은 왜와는 원수라 왜로 넘어갔을리는 없음.
신라 김씨왕들 사이의 세력경쟁에 어느 한쪽에 붙었다가 가문이 몰락했을 가능성이 큼.
 
 
Total 19,96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공지] 게시물 제목에 성적,욕설등 기재하지 마세요. (11) 가생이 08-20 85197
19942 [한국사] 우리 고대사 #5 : 맥족과 예족 윈도우폰 03-22 430
19941 [한국사] 우리 고대사 #4 : 단군조선과 토템 윈도우폰 03-22 345
19940 [한국사] 우리 고대사 #3 : 홍산문화와 적봉지역 주민 윈도우폰 03-22 440
19939 [한국사] 우리 고대사 #2 : 하화족과 동이족 윈도우폰 03-22 238
19938 [한국사] 우리 고대사 #1 : 우리 민족의 조상 윈도우폰 03-22 440
19937 [한국사] 《인류와 한국조선의 변천사 - 한경대전》 (1) 에피소드 03-21 258
19936 [한국사] 아래 지도에 대한 내 관점... 고조선 중심의 열국시대… (5) 윈도우폰 03-21 533
19935 [한국사] 위만조선 시기 판도 (2) 위구르 03-20 389
19934 [한국사] 우리는 동이가 아니다. (2) 윈도우폰 03-19 744
19933 [한국사] 2022년 고고학계의 경주 월성 발굴조사 보고서 (6) 홈사피엔스 03-19 458
19932 [한국사] 삼국사기 이해 (1)신라사 (7) 홈사피엔스 03-16 853
19931 [한국사] 《(고)조선의 "가르침"과 직접민주주의 "국민의원"》 에피소드 03-14 406
19930 [한국사] 《고구려 최초의 이름은 '홀본(일본)' 이다》 에피소드 03-14 633
19929 [중국] 대륙계보? 아랫글 관련... (6) 윈도우폰 03-11 715
19928 [한국사] 《안문관,연운16주,송나라.. 화하족 관점 대륙계보》 에피소드 03-09 773
19927 [한국사] [한겨례] 2024/3/8 [단독] 고대 일본 권력층 무덤 장식품… (2) 외계인7 03-09 568
19926 [기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감미로운 모지혜(다니엘) - 인… 아비바스 03-08 737
19925 [한국사] 《고려 조상님들이 건축한, 서경(북경성)의 모습》 (8) 에피소드 03-08 825
19924 [기타] 동아시아에서의 국가의 형태라면? 그냥 잡설 (3) 윈도우폰 03-06 954
19923 [한국사] 발해 멸망 이유 - 야율아보기의 쿠데타 (4) 하늘하늘섬 03-05 2059
19922 [한국사] 역사적 관점에서 조심해야할 사항 (8) 하이시윤 03-04 618
19921 [기타] [K-POP] MZ돌 뉴진스 <한복> 2023 추석특집 방송 아비바스 03-04 513
19920 [한국사] [ FACT ] 역사학자 <임용한> , 고려거란전쟁 전투씬… 아비바스 03-04 506
19919 [한국사] 《고려도경으로 알수있는 정확한 "고려 서경" 위치》 (2) 에피소드 03-03 668
19918 [기타] MZ돌 높은 영어 실력 ㄷㄷ (1) 아비바스 03-03 579
19917 [중국] 자강두천 가슴이 옹졸해지는 <삼국지> 시리즈 ㅋ… (1) 아비바스 03-03 499
19916 [한국사] [ FACT ] MZ세대가 생각하는 <고구려 제국> 밈 3 (1) 아비바스 03-03 455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