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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22 14:55
[일본] [일본서기]백제 왕족이 매기르는 법을 가르치다
 글쓴이 : 호랭이해
조회 : 1,134  

일본서기 권11, 권13


매기르는 법을 가르치다




신라가 의사를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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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여름 4월 무인삭 갑오(17일)에 군신에게 “지금 짐이 이 나라를 둘러보니 들판과 못은 넓은데, 전지는 부족하다. 또 하천은 제멋대로 흐르고 하천 하류는 흐름이 빠르지 않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바닷물이 역류하여 거리에서 배를 타야할 지경이 되고, 도로 또한 진흙탕이 된다. 이에 군신들은 함께 이러한 상황을 살펴 물길을 바로잡아 바다로 통하게 하고 역류하는 것을 막아 전지와 택지를 안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겨울 10월에 궁전65 북쪽의 들에 수로를 파서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서쪽66 바다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래서 이 물을 굴강(堀江;호리에)67이라 불렀다. 또한 북쪽 하천의 홍수를 막기 위해 자전제(茨田堤;마무타노츠츠미)68를 쌓았다. 이때 쌓으면 무너져 막기가 어려운 곳이 두 군데 있었다. 그때 천황의 꿈에 신이 나타나 “무장인(武藏人;무사시노히토) 강경(强頸;코하쿠비)69과 하내인(河內人;카후치노히토) 자전련삼자(茨田連衫子;마무타노무라지코로모노코)70[삼자는 코로모노코(莒呂母能古)라고 읽는다.] 이 두 사람을 하백(河伯)71에게 바치면 막을 수 있을 것이다72.”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하백에게 제사지냈다. 이에 강경은 울먹이며 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 곧 그 제방이 완성되었다. 다만 삼자는 온전한 박 두 개를 가지고 막기 어려운 곳으로 갔다.
그리고 두 개의 박을 강의 신에게 던지며 “강의 신을 두려워하여 저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 제가 왔습니다. 기어이 저를 얻고자 한다면 이 박을 가라앉혀 뜨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진정한 신이라 여기고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만약 박을 가라앉힐 수 없다면 자연히 가짜 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찌 헛되이 제 목숨을 끊을 것입니까.”라고 말하였다.
이때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을 끌어다 물속에 넣었다. 박은 물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가라앉지 않았다. 빠른 물결에 떠서 멀리 흘러갔다. 이 때문에 삼자는 목숨을 잃지 않고 제방을 완성할 수 있었다. 삼자는 재능에 의해 몸을 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두 곳을 가리켜 강경단간(强頸斷間;코와쿠비노타에마)73, 삼자단간(衫子斷間;코로모노코노타에마)74이라 불렀다.이 해에 신라인이 조공하였다. 그래서 이 공사에 종사시켰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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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古事記』 인덕천황단에도 「天皇登高山, 見四方之國, 詔之. 於國中烟不発. 國皆貧窮. 故, 自今至三年, 悉除人民之課役. (중략) 是以, 百姓之栄, 不苦役使. 故, 称其御世, 謂聖帝世也.」라고 적혀 있다. 『日本書紀』와 『古事記』 모두 3년의 과역 면제에 관한 설화를 싣고 있다.

65 난파 고진궁을 가리킨다.

66 大阪灣을 가리킨다.

67 大川(현재 淀川)으로 비정한다.

68 자전제에 대해서는 枚方市의 伊加賀 부근에서 都道區 東野田町 부근에 이르는 장대한 제방이라 보는 견해와 伊加賀 부근의 정천 좌안에서부터 寢屋川市 太間 부근을 거쳐 門眞市 北島 부근에 이른다고 보는 견해, 伊加賀에서 출발하여 정천이 크게 분류하는 지점인 太間과 정천이 고천으로 다시 분류되는 지점인 平池 부근에 이르는 지역에 축조된 제방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69 강경은 문화 후진지역인 東國 武藏에서 온 병사로서 원시적 습속에 순응하여 죽음에 이른 존재로, 삼자는 문화 선진지역인 畿內人이어서 신의 진위를 의심하고 신을 시험하는 등 원시적 습속을 부정한 존재로 간주되기도 한다.

70『新撰姓氏錄』 右京 皇別 茨田連條에서 「多朝臣同祖. 神八井耳命男彦八井耳命之後也.」, 山城國 皇別 茨田連條에서 「茨田宿禰同祖. 彦八井耳命之後也.」라고 적고 있다. 또 同書 河內國 皇別 茨田宿禰條에서는 「多朝臣同祖…男野現宿禰. 仁德天皇御代. 造茨田堤.」라고 적고 있다. 天武天皇 13년 12월에 茨田連씨가 宿禰로 改姓하였다.

71 하백은 원래 중국 黃河의 신을 일컫는데, 고구려의 주몽신화에도 보인다. 『日本書紀』에는 하천을 관장하는 신이 대부분 ‘水神’, ‘河神’이라 기재되어 있는데, 하백이 등장한 사례는 위 사료와 皇極天皇 원년조에서 「羣臣相謂之曰. 随村村祝部所教. 或殺牛馬祭諸社神. 或頻移市. 或祷河伯. 既無所効. 蘇我大臣報曰. 可於寺寺轉讀大乘經典. 悔過如佛所訟. 敬而祈雨.」라고 적고 있는 예가 전부이다. 양 기사에 등장하는 하백은 수신으로서의 능력을 시험받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천황에 비해 물을 제어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72 인간을 희생으로 바치는 이른바 ‘人身供犧’설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간주되고 있다.

73 단간은 하천의 분류 지점이나 합류 지점과 같이 수량이 급격히 늘어나거나 물의 흐름이 빨라지는 지역이어서, 제방을 쌓는 것 자체가 어려운 구간을 가리킨다.衫子斷間은 茨田郡 太間村(현재 寢屋川市 太間町 부근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비정되고 있다. 强頸斷間은 東生郡 千林村(현재 大阪市 旭區 千林 부근 지역)으로 비정하거나, 정천이 고천으로 다시 분류되는 지점인 平地 부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75 조공이 일종의 외교 행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조공과 노역 종사는 곧바로 연결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것은 『日本書紀』에 깔린 삼한 복속의 관념적 이데올로기와 열도로 도해한 이주민들의 기술이 畿內의 개발에 공헌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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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가을 7월 신미삭 계유(3일)에 고구려76가 철로 만든 방패와 과녁을 바쳤다77.

8월 경자삭 기유(10일)에 고구려의 사신에게 조정에서 향응을 베풀었다. 이날 군신 및 백료를 모아 고구려가 바친 철 방패와 철 과녁을 쏘게 하였다. 많은 사람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였다. 다만 적신(的臣;이쿠하노오미)78의 선조 순인숙녜(盾人宿禰;타타히토노스쿠네)만이 철 과녁을 관통하였다.
이때 고구려 사신들이 활 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경외를 표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순인숙녜를 칭찬하여 이름을 내려 적호전숙녜(的戶田宿禰;이쿠하노토다노스쿠네)라 하였다. 같은 날 소박뢰조(小泊瀨造;오하츠세노미야츠코)79의 선조 숙녜신(宿禰臣;스쿠네노오미)에게 이름을 내려 현유신(賢遺臣;사카노코리노오미)[賢遺는 사카노코리(左舸能莒里)라고 읽는다.]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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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원문은 高麗이다. 『日本書紀』의 高麗는 모두 『三國史記』의 高句麗이다. 이하 본문에서는 고구려로 해석한다.

77 고구려와 倭 양국 관계를 조공국과 피조공국 관계로 설정한 것은 『日本書紀』 편자의 윤색이다.

78『新撰姓氏錄』 山城, 河內, 和泉國皇別 的臣條에서는 武內宿禰의 아들인 葛城襲津彦의 후예라고 적고 있다.小泊瀨造는 武烈天皇의 名代인 小泊瀨部를 관장하는 伴造이며, 小泊瀨는 武烈天皇의 이름이다.

79천무천황 12년 9월에 泊瀨造가 連姓으로 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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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에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가을 9월에 적신의 선조 지전숙녜(砥田宿禰;토다노스쿠네)와 소박뢰조(小泊瀨造;오하츠세노미야츠코)의 선조 현유신(賢遺臣;사카노코리노오미)을 보내 조공하지 않은 일에 관해 묻게 하였다. 신라인이 두려워하여 공물을 바쳤다. 조(調)로 바치는 비단 1,460필98 및 여러 가지 잡물을 합하여 배 80척 분량이었다99.


41년 봄1413월에 기각숙녜(紀角宿禰;키노츠노노스쿠네)142를 백제에 파견하여 처음으로 국군(國郡)의 경계를 나누고, 각 지역에서 나는 것을 상세히 기록하게 하였다143. 그때 백제의 왕족 주군(酒君;사케노키미)144이 무례하였다145. 이 때문에 기각숙녜가 백제의 왕을 책망하였다. 그때 백제의 왕이 두려워하여 쇠사슬로 주군을 묶어서 습진언(襲津彦;소츠비고)146에게 딸려서 바쳤다. 이에 주군이 와서 석천금직수허려사(石川錦織首許呂斯;이시카하노니시코리노오비토코로시)147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그리고 거짓으로 “천황께서 이미 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너에게 의지하여 살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오래 지난뒤에 천황이 드디어 그 죄를 용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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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수치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어디에서 이러한 구체적 수치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대 신라가 보낸 물품의 양이 이 기사에 혼입되어 나타난 수치일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다.

99 고대 일본에서 八이라는 숫자가 ‘많다, 넓다’라는 일반적 의미를 내포해 사용된 점을 고려하면 80척이라는 말도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숫자는 아니다. 『日本書紀』 神功皇后攝政前紀(仲哀天皇 9년 겨울 10월조)에 神功皇后에 항복한 신라왕이 미사흔을 인질로 보냄과 동시에 80척의 배에 공물을 실어 보냈으며, 이것이 신라왕이 항상 80척의 배에 공물을 바치는 연유라고 기술된 전승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보인다.

142 기각숙녜는 실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전승상의 존재로 간주된다. 『古事記』 孝元天皇段에는 「此建內宿禰之子. 幷九男七女二…次木角宿禰者, 木臣, 都奴臣, 坂本臣之祖.」로, 『新撰姓氏錄』 左京皇別 紀朝臣條에는 「石川朝臣同祖. 建內宿禰男紀角宿禰之後也.」라고 적혀 있다. 『日本書紀』 응신천황 3년 시세조 紀角宿禰 참조.

143 ‘처음으로~모두 기록하였다’라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日本書紀』 孝德天皇 大化 원년 7월조에 보이는 詔에 기초하여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덕천황 41년조(『日本書紀』 기년으로는 353년)가 근초고왕 8년(353)에 해당되므로 본문 기사를 백제의 檐魯制 시행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로 활용하거나, 『日本書紀』의 신공황후부터 웅략천황 이전까지는 2주갑을 내려 보아야 한다는 통설에 따라 473년(개로왕 19년)으로 수정해 蓋鹵王代에 지방 통치 조직의 편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144『新撰姓氏錄』右京 諸蕃下 「刑部」조, 和泉諸蕃 「百濟公」조, 同「六人部連」조에 「出自百濟國酒王也」라는 기록이 있어, 酒君을 선조로 하는 후예씨족이 확인된다.

145『日本書紀』 응신천황 25년조 無禮 참조.

146仁德天皇 이후 仁賢天皇에 이르기까지 安康天皇을 제외하고 모두 葛城氏를 妃 혹은 母로 삼고 있다. 『日本書紀』 신공황후섭정 3년 정월조 葛城襲津彦 참조.

147『住吉大社神代記』에는 「石川錦織許呂志.」라는 인명이 보이며, 『和名類聚抄』에는 「河內國石川郡, 以之加波」라 적고 있다. 현재 大阪府 南河內郡 太子町, 河南町 千早赤阪村, 羽曳野市의 일부, 富田千市의 동부 지역에 해당된다. 석천씨는 蘇我氏 일족이라는 설과, 河內의 石川郡을 본거로 하는 백제계 씨족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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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가을 9월 경자삭(1일)에 의망둔창(依網屯倉)148의 아미고(阿弭古;아비코)149가 기이한 새를 잡아 천황에게 바치며 “신이 늘 그물을 쳐서 새를 잡아왔지만, 이러한 새는 잡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에 기이하여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주군을 불러 새를 보이며 “이것이 무슨 새인가?”라고 물었다. 주군이 “이런 새는 백제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이면 사람을 잘 따릅니다. 또한 빨리 날아서 여러 가지 새를 잡습니다. 백제인들은 이 새를 구지(俱知)150라고 부릅니다[지금의 매이다.].”라고 답하였다151. 이에 주군에게 주어 사육하게 하였다. 이후 얼마 안 되어 길들일 수 있었다. 곧 주군이 가죽 끈을 새의 다리에 매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 위에 앉혀서 천황에게 바쳤다. 이 날에 백설조야(百舌鳥野;모즈노)152에 행차하여 사냥하였다. 그때 암꿩이 많이 날아올라 매를 놓아 잡게 하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꿩을 잡았다. 이 달에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153를 정하였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매 기르는 곳을 응감읍(鷹甘邑;타카카히노무라)154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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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依網은 현재 大阪市 東住吉區 我孫子町과 庭井町에서 大和川의 對岸 松原市 天善町 일대에 걸친 지역이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62년 10월조의 依網池 참조.

149 阿弭古는 원시적인 姓(가바네)으로 이해되고 있다. 阿比古, 阿毘古, 我孫이라고도 쓴다.

150『和名類聚抄』에는 「鷙, 和名太加(다카). 今案, 古語云俱知(구치).」라고 적고 있다.

151『삼국사기』 백제본기 阿莘王 원년조(392)와 毗有王 8년(434) 2월조, 8년 9월조에 의거하면 阿莘王代(392~405) 이전에 매사냥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2 和泉國 大鳥郡이다. 현재 大阪府 堺市의 中百舌鳥町에서 濱寺石津町에 걸친 지역이다.

153 매를 사육하고 매사냥에 종사하는 특수기술자 집단이다. 매를 사육하는 호를 ‘鷹戶’라 하는데, 『令集解』에 인용된 『古記』에서는 ‘大和, 河內, 攝津에 鷹養戶 17호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154『攝津志』에서는 「鷹飼部第宅古蹟在鷹合村, 又有鷹甘部墓, 今稱平塚.」이라 적고 있다. 鷹甘邑(鷹合村)은 현재 大阪市 東住吉區 鷹合町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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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년에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여름 5월에 상모야군(上毛野君;카미츠케노노키미)155의 선조 죽엽뢰(竹葉瀨;타카하세)156를 파견하여 조공하지 않은 까닭을 묻게 하였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흰 사슴을 잡아, 곧바로 돌아와서 천황에게 바쳤다. 이윽고 다시 날을 잡아 길을 떠났다. 얼마 후에 또 죽엽뢰의 아우 전도(田道;타지)157를 파견했다. “만일 신라가 막으면 군사를 일으켜 치라.”고 명하고 정병을 주었다. 이에 신라가 군사를 일으켜 막았다. 이때 신라인이 나날이 싸움을 걸었다. 전도는 요새를 굳게 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때마침 신라의 군졸 하나가 병영 밖으로 나왔다. 곧 사로 잡아 그 상황을 물었다. “백충(百衝;모모츠키)158이라는 힘센 자가 있습니다. 가볍고 민첩하며 용맹합니다. 항상 군의 우측 선봉에 섭니다. 그러므로 살펴보고 있다가 좌측을 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 신라는 왼쪽을 비워놓고 오른쪽을 방비하고 있었다. 전도는 날랜 기병으로 하여금 왼쪽을 계속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군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군사를 풀어 수백 명의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4읍159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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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上毛野氏는 『日本書紀』에 의하면 崇神天皇의 황자로, 豐城命(豐城入彦命)의 후예이다. 『日本書紀』 숭신천황 48년 4월조 上毛野君 참조.

156『新撰姓氏錄』 左京皇別 上毛野朝臣條에는 「豐城入彦命五世孫多奇波世君之後也.」, 『弘仁私記』 序에는 「田邊史, 上毛野公…大鷦鷯天皇御宇之時, 自百濟國化來而言, 己等祖是貴國將軍上毛野公竹合也者, 天皇矜憐混彼族訖.」이라고 적고 있다. 多奇波世(다카하세)와 竹合(다카하세)은 竹葉瀨를 가리킨다.

157『新撰姓氏錄』 河內皇別 止美連條에는 「尋來津公同祖, 豐城入彦命後也, 四世孫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持君, 三世孫熊次, 新羅等, 欽明天皇御世參來.」라고 적고 있다. 전도는 55년에 전개된 에미시 정토 중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58 여기에만 보인다.

159『日本書紀』에는 ‘4邑, 4縣, 4村’ 등 4를 단위로 한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160『古事記』에는 보이지 않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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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여름 5월에 황릉(荒陵;아라하카)163의 소나무 숲 남쪽 길에 갑자기 두 그루의 상수리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길을 사이에 두고 끝이 연결되어 있었다164.겨울 10월에 오국(吳國)165과 고구려가 나란히 조공하였다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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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攝津國 西成郡 安良鄕이라는 설과 大阪市 사천왕사의 서남에 있는 茶磨山이라는 설이 있다.

164 ‘木連理’를 祥瑞로 간주하는 중국사상에 의거한 내용이다.

165 應神紀부터 齊明紀에 걸쳐 ‘吳’가 나온다. 고대 일본에서 사용된 吳의 용례에 관한 연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로 중국의 장강 하류 지역을 가리키거나 중국 전체를 吳라고 칭한다는 견해이다. 둘째, 吳는 본래 가야 지역의 ‘久禮’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실제로는 한반도 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셋째, 『日本書紀』에 등장하는 吳를 고구려를 매개로 등장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그리고 흠명기와 추고기에 보이는 백제를 매개로 한 오로 분류하고, 이를 통해 『日本書紀』 찬자의 吳國觀을 읽어내는 연구가 있다.

166『宋書』 文帝紀의 元嘉 7년(430) 正月條에는 「倭國王遣使獻方物.」이란 기사가 보인다. 원가 7년이 庚午年이고 인덕천황 58년도 경오년이므로, 『日本書紀』 편자가 이 시기 정도에 吳國의 조공 기사를 비정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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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봄 정월 신유삭(1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뛰어난 의사를 신라에서 구하였다42.
가을 8월에 의사가 신라에서 왔다. 그리하여 천황의 병을 고치도록 하였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병이 다 나았다. 천황이 기뻐하며 의사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귀국하게 하였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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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5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允恭天皇 시대의 한반도 관계 기사는 이전 시기에 주된 외교 대상으로 등장한 백제와 가야 지역이 아닌 신라가 주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43『古事記』 允恭天皇段에서는 신라가 파견한 御調를 바치는 大使 金波鎭, 漢紀武가 藥方을 잘 알고 있어 천황의 병을 고쳤다고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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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년 봄 정월 을해삭 무자(14일)에 천황이 죽었다(崩)91. 그때 나이 약간이었다92. 신라가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며 조(調)를 실은 배 80척93과 각종 악인(樂人) 80명을 바쳤다. 이들은 대마에 머물면서 크게 곡하였으며, 축자94에 도착하여 또 크게 곡을 했다. 그리고 난파진(難波津;나니하노츠)95에 도착하자 모두 소복을 입었다. 이들은 모두 조물(調物)을 받쳐 들고, 또 각종 악기를 울리며 난파에서 왕경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춤추며 노래하였다96. 마침내 빈궁(殯宮)에 들어갔다.
겨울 11월에 신라 조문사 등이 상례를 끝내자 돌아갔다. 신라인은 늘 왕경 부근에 있던 이성산(耳成山;미미나시야마), 무방산(畝傍山;우네비야마)97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금인판(琴引坂;코토히키노사카)98에 이르러 돌아보며 “우니미파야(宇泥咩巴椰;우네메하야) 미미파야(彌彌巴椰;미미하야)”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아직 이 나라 말99을 익히지 못해서였다. 이는 무방산을 잘못 말하여 우네메라 하고, 이성산을 미미라고 잘못 말한 것뿐이었다. 이때 왜사부(倭飼部;야마토노우마카히베)100가 신라인을 따라가다가 이 말을 듣고 의심하여 신라인이 채녀(采女;우네메)101와 통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곧 돌아와서 대박뢰황자(大泊瀨皇子;오호하츠세노미코)102에게 말하였다. 황자는 곧 신라의 사신을 모두 가두고 추문(推問)하였다. 이때 신라의 사신이 “채녀를 범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왕경 근방의 두 산을 좋아하여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사실이 아니었음을 알고 모두 용서하였다. 이에 신라인이 크게 원망하여 공상하는 물품의 종류 및 배의 수를 더욱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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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古事記』에는 「甲午年正月十五日崩.」이라 적혀 있다. 甲午는 『日本書紀』에서는 安康天皇 원년에 해당되어 하루의 차이가 난다. 안강천황 원년 2월조에는 「是年, 太歲甲午.」라 적혀 있다.

92 나이를 이야기할 경우, 若干은 20세 전후의 젊은이를 칭하는 것이다. 『고사기」에는 「漆拾捌歲.」라고 적고 있다. 『日本書紀』와 『古事記』 모두 允恭天皇이 78세에 죽은 것으로 기재하고 있는 만큼 若干이라 묘사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93 많은 숫자를 의미한다. 『日本書紀』 인덕천황 17년 9월조 80척 참조.

94 축자의 儺大津으로 현재 博多를 의미한다.

95『日本書紀』 인덕천황 62년 5월조 難波津 참조.

96 조문사가 倭로 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8세기대에 외국의 조문사가 對馬에서 倭京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참조하여 『日本書紀』를 편찬할 때 첨가 서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97 大和의 三山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奈良縣 橿原市 木原에 위치하며 삼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大和의 三山은 현재 奈良縣의 奈良盆地 南部, 飛鳥 주변에 솟아 있는 세 개의 산을 가리킨다.

98 琴彈原(현재 奈良縣 御所市 富田에 있는 白鳥陵 주변)은 日本武尊의 陵이 조영되었다는 琴彈原과 같은 지역이다. 『日本書紀』 경행천황 40년 시세조 琴彈原 참조.

99 원문은 ‘風俗之言語’이다.

100 飼部를 지배하는 伴造는 飼造인데, 『日本書紀』 천무천황 12년 9월조에 倭馬飼造와 川內馬飼造가 連姓을 받았다. 飼部(馬飼部)는 주로 대화와 하내에 소재한 것으로 간주된다.

101『養老令』 後宮職員令 氏女采女條에는 郡의 少領 이상의 자매 내지 딸 중에서 용모가 단정한 자를 선발하여 後宮에 봉사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102 윤공천황의 황자이며 뒤에 웅략천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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