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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23 19:03
[일본] [일본서기]무령왕의 탄생
 글쓴이 : 호랭이해
조회 : 3,909  

일본서기 권 14

무령왕의 탄생




국신이 신라를 지키다



수탉을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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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가을 7월에 백제 지진원(池津媛)56이 천황이 장차 행차하려는 데도 석천순(石川楯;이시카하노타테)[옛 책[舊本]에서는 석하고합수(石河股合首;이시카하노코무라노오비토)의 조상인 순(楯)이라고 하였다57.]과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대반실옥대련(大伴室屋大連;오호토모노무로야노오호무라지)에게 명하여 내목부(來目部;쿠메베)로 하여금 남녀의 팔다리를 벌려 나무에 매달고 임시로 만든 단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이도록 하였다[백제신찬(百濟新撰)58에서는 “기사년59에 개로왕60이 즉위하였다. 천황이 아례노궤(阿禮奴跪;아레나코)61를 보내 여자62를 찾도록 하였다63.
백제는 모니부인(慕尼夫人)64의 딸 적계녀랑(適稽女郞)65을 단장하여 천황에게 바쳤다.”고 하였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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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여기에서만 보인다. 『日本書紀』 應神天皇 39년조에 보이는 백제 直支王(腆支王)의 누이 新齊都媛으로 보기도 한다.

57『日本書紀』 仁德天皇 41년 3월조에 백제 왕족 酒君이 石川錦織首許呂斯의 집에 도망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股合이라는 명칭은 石川楯과 池津媛 사이에 있었던 일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58『日本書紀』에 인용된 百濟三書 중의 하나로, 이 기사를 비롯하여 雄略天皇 5년 7월조와 武烈天皇 4년 是歲條 등 세 곳에서 인용되고 있다. 현재의 인용상태로 보아 干支로 紀年을 세운 편년체의 기록으로 생각되며, 개로왕·동성왕·무령왕 시대를 다루고 있다. 개로왕의 동생이자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인 左賢王 昆支의 후예씨족이 편찬하여 『日本書紀』 편찬당국에 제출한 本記의 성격을 가진 문헌으로 추정된다. 한편 6세기 후반 백제 위덕왕이 對倭정책의 필요상 특별히 편찬하여 왜왕에게 보낸 정치적 문서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

59『日本書紀』에서 雄略 2년(458)은 무술년이다. 기사년이 429년(百濟 毘有王 3년)이라고 하면 왜왕 讚(仁德으로 추정)의 시대에 해당하며, 왜왕 武(雄略)의 시대일 수 없다. 60년 후인 489년이라고 하면 백제에서는 末多王(東城王, 479~501)의 시대로 개로왕의 시대가 아니다. 『日本書紀』 應神天皇 39년조(428)에 보이는 백제 直支王(腆支王)의 누이인 新齊都媛에 대한 다른 전승일 가능성이 있다.

60 백제 제21대왕(재위:455~475)이다. 제20대왕 비유왕의 장자로 이름은 慶司(慶)이다.

61여기에만 보인다. 奴跪를 공유하는 인명으로는 『日本書紀』 神功皇后 49년조의 「沙沙奴跪」, 欽明紀 5년조의 「津守連己麻奴跪」 등이 있다. 跪는 百濟三書에만 보이는 인명표기 한자이다.

63원문에는 ‘女郞’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 훈으로는 ‘에하시토’라고 읽는데, 백제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63『삼국사기』 비유왕 2년(428) 기사에 왜왕의 사신이 왔는데 종자가 50인이었다고 하는내용이 있는데, 이는 전지왕 때 왜국에서 백제의 왕녀를 보내달라고 요구한 것을 백제에서 받아들여 비유왕 때 백제왕녀가 파견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64夫人을 ‘하시카시’라고 읽는데, 백제어일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責稽王이 帶方王女 寶菓를 夫人으로 삼았다고 한 기사와 腆支王의 비가 八須夫人이며 그녀가 久尒辛을 낳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신라본기에도 탈해왕의 비가 阿孝夫人이라고 하는 등 夫人을 妃로 삼은 예가 많이 보인다. 夫人은 귀족 여자에 대한 존칭으로 생각된다.

65여기에만 보인다. 이름이 백제의 責稽王과 비슷하다.

66『日本書紀』 편찬자는 己巳年에 백제에서 온 適稽女郞이 池津媛일 것으로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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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4월118에 백제의 가수리군(加須利君)119[개로왕(蓋鹵王)이다.]은 지진원(池津媛)120을 불태워 죽였다는 소문을 듣고[적계녀랑(適稽女郞)이다.] “과거에 여인을 바쳐 채녀로 삼았다. 그런데 이미 예의를 잃어서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다. 앞으로는 여인을 바치지 말라.”고 의논하였다. 이에 그 아우 군군(軍君)121[곤지(昆支)122이다.]에게 “너는 마땅히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기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군군은 “왕123의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원컨대 왕의 부인124을 내려주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에게 주면서 “나의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이 되었다. 만일 가는 길에 출산하면, 바라건대 어디에 있든지 배 한 척에 실어 속히 본국으로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작별하여 왜의 조정으로 갔다. 6월 병술삭(1일)에 임신한 부인이 가수리군(加須利君)의 말처럼 축자(筑紫;츠쿠시)의 각라도(各羅島;카카라노시마)125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도군(島君)126이라 하였다. 이에 군군이 곧 배에 태워 도군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주도(主島)라 불렀다. 가을 7월에 군군이 왕경127에 들어왔다. 이윽고 다섯 아들을 두었다[백제신찬(百濟新撰)에 “신축년128에 개로왕(蓋鹵王)이 아우 곤지군(昆支君)을 대왜(大倭)129로 보내어 천황[天王]130을 모시게 하였다. 형왕(兄王)131의 우호를 닦게 하기132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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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아래 내용은 武寧王의 탄생담이다. 이 기사의 특징은 개로왕과 곤지를 대등하게 각각 가수리군과 군군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전체 내용도 곤지가 왜에 파견된 과정과 무령왕의 출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

119개로왕을 왕이라고 하지 않고 加須利君이라고 하고 곤지도 軍君이라고 한 것은, 두 사람을 대등하게 인식한 결과로 생각된다. 일본에서도 筑紫君磐井과 같이 유력한 지방호족을 君이라고 하였으나, 王보다는 낮은 호칭이라고 할 수 있다.

120『日本書紀』 雄略天皇 2년 7월조 참조.

121『釋日本紀』 秘訓에 코키시, 코니키시 혹은 코무키시(軍君)라고 되어 있다. 코니키시는 백제에서 왕을 지칭하는 용어에 대한 일본음(『주서』 백제전에는 鞬吉支로 나온다.)으로, 큰 吉士와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도 태자는 ‘세시무’, 왕후는 ‘오로쿠’ 등의 古訓이 전하고 있다.

122『宋書』 夷蠻傳 百濟條에 보이는 征虜將軍 餘昆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조와 동성왕 즉위조에서 문주왕의 동생이자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어,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오는 『日本書紀』와 다르다. 『新撰姓氏錄』에서도 河內諸蕃의 飛鳥部造가 百濟 比有王의 아들 琨伎王의 후손이라고 적고 있어 『日本書紀』의 설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日本書紀』에서는 곤지가 백제로 돌아간 것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477) 4월조에서 왕의 아우 昆支를 내좌평으로 삼은 사실과 동 7월조에 곤지가 죽은 사실이 보이므로 477년 이전에 귀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곤지가 왜국에 살면서 낳은 자식은 그가 귀국한 후에도 계속 왜국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중에서 동성왕은 479년에 삼근왕(재위:477~479)의 사망 후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三代實錄』 貞觀 4년 7월조와 동 5년 8월조에 곤지는 飛鳥戶造 등의 조상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일본에는 곤지왕을 시조로 하는 飛鳥戶造라는 씨족이 있었고, 현재까지 곤지를 모시는 飛鳥戶造신사가 남아 있다.

123원문은 上君으로 되어 있다.

124원문은 君婦로 되어 있다.

125현재 佐賀縣 東松浦郡 鎭西町의 加唐島로 보는 설이 있다.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바닷가 동굴과 아기를 씻었다는 작은 샘이 남아 있다.

126『日本書紀』에 인용된 「百濟新撰」에서는 斯麻,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斯摩, 무령왕릉 묘지석에는 斯麻라고 표기하였으며, 武寧王의 諱이다. 무령왕이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섬왕(島君, 시마키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편 『日本書紀』의 기록과는 달리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동성왕의 두 번째 아들이라고 하였다. 무령왕릉의 발굴과 『日本書紀』에 보이는 백제왕계보, 인명표기, 출생연도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127원문에는 京으로 되어 있다. 倭國의 왕경을 뜻한다.

128蓋鹵王 7년(461)이다. 곤지가 왜로 데리고 간 개로왕의 부인이 무령왕을 낳은 해이다.

129나라 이름인 倭에 대한 존칭으로 생각된다. 倭는 나라 분지 내의 지명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130판본에 따라서 天皇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중국 北朝의 황제 중에 王, 天王, 天皇으로 칭호의 격을 높여간 사례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백제가 왜의 입장을 존중하여 天王이라고 표기한 것인지 天王과 天皇이 혼용된 결과인지 분명하지 않다.

131昆支의 형인 개로왕을 말한다.

132원문에는 結好로 되어 있다. 『日本書紀』 應神天皇 8년조 분주에 인용된 「百濟記」에도 같은 표현이 있다. 『삼국사기』 百濟本紀 및 『日本書紀』 繼體 10년 9월조에서도 ‘結好’가 보인다. 여기서 ‘結好’의 주체는 백제로 백제를 중심으로 한 표현이며, 『日本書紀』 편찬의 가필과 정정이 미치지 않은 부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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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관자(官者)143 길비궁삭부허공(吉備弓削部虛空;키비노유게베노오호조라)144이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길비하도신전진옥(吉備下道臣前津屋;키비노시모츠미치노오미사키츠야)145[어떤 책에서 말하기를, 국조(國造) 길비신산(吉備臣山;키비노오미야마)이라고 하였다]이 허공(虛空;오호조라)을 머무르게 하여, 한 달이 지나도 상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천황은 신모군대부(身毛君大夫;무케노키미마스라워)146를 보내어 불렀다. 허공이 부름을 받고 와서 “전진옥이 어린 여자를 천황의 사람으로 삼고, 큰 여자를 자기 사람으로 삼아서 다투어 서로 싸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여자가 이기는 것을 보자 곧 칼을 뽑아서 죽였습니다. 또 작은 수탉을 천황의 닭이라고 부르면서 털을 뽑고 날개를 자르고, 큰 수탉을 자기 닭으로 삼아서 방울과 쇠로 된 며느리발톱을 붙여서 다투어 싸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털이 뽑힌 닭이 이기는 것을 보고 또 칼을 뽑아서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이 이야기를 듣고, 물부(物部)147 병사 30인을 보내어 전진옥과 아울러 일족 70인을 베어 죽였다.이 해에 길비상도신전협(吉備上道臣田狹;키비노카미츠미치노오미타사)148이 궁중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항상 치원(稚媛;와카히메)149을 친구에게 자랑하기를 “천하의 어떤 아름다운 사람도 내 아내만 못하다. 빼어나고 너그러우며 여러 가지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빛나고 온화하며 구석구석 예쁘다. 또한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도 바르지 않는다. 세상에 드문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귀를 기울여서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그리고 친히 치원을 데려와서 여어(女御)150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전협에게 벼슬을 주어 임나국사(任那國司)151로 삼았다. 얼마 후에 천황은 치원을 가까이 하였다. 전협신(田狹臣;타사노오미)152은 치원과 혼인해서 형군(兄君;에키미)과 제군(弟君;오토키미)을 낳았다153[다른 책에서 말하기를, 전협신 아내의 이름은 모원(毛媛;케히메)이다.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카즈라키노소츠히코)의 아들인 옥전숙녜(玉田宿禰;타마타노스쿠네)154의 딸이다. 천황이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을 듣고 남편을 죽이고 친히 총애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전협이 부임한 곳에 갔을 때 천황이 자신의 아내를 총애한다는 것을 듣고 도움을 구하러 신라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이때 신라는 왜155를 섬기지 않았다. 천황은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길비해부직적미(吉備海部直赤尾;키비노아마노아타히아카워)156를 불러 “너희들이 신라에 가서 벌해야 마땅하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서한재기(西漢才伎)157인 환인지리(歡因知利;완인치리)158가 곁에 있었다. 이에 나아가, “저보다 재주가 있는 자가 한국(韓國;카라노쿠니)159에 많이 있습니다. 불러서 부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천황이 군신을 불러서 “그렇다면 환인지리를 제군 등에 따르게 하여 백제로 가서 함께 칙서를 전하고, 재주 있는 자를 바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제군이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가서 백제에 이르러 그 나라160에 들어갔다. 그런데 국신(國神)이 노파로 변해서 홀연히 길에 나타났다161. 제군이 가서 나라가 먼지 가까운지 물었다. 노파는 “다시 하루를 더 가야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제군은 스스로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백제가 바친 금래재기(今來才伎)162를 큰 섬163 속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여러 달을 머물러 있었다. 임나국사 전협신은 제군이 (신라를) 치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몰래 사람을 백제에 보내 “너의 목이 얼마나 튼튼하여 남을 치려고 하는가? 전해 듣건대 천황이 나의 처를 받아들여 이미 아이[아이는 앞의 내용에 보인다]도 있다고 한다. 지금 두려운 것은 화가 몸에 미치려고 하는데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아들인 너는 백제를 근거로 하여 일본과 연락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임나에 근거하여 또한 일본과 연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제군을 타일렀다.제군의 부인 장원(樟媛;쿠스히메)164은 나라에 대한 마음이 깊고, 군신의 의리가 간절하였다.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도 낫고, 절개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이 모반(謀叛)165을 미워하여 자기 지아비를 죽여 집안에 몰래 묻고, 곧 해부직적미와 함께 백제가 바친 수말재기(手末才伎)166를 이끌고 큰 섬에 머물렀다. 천황은 제군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일응길사(日鷹吉師;히타카노키시)167, 견반(堅磐;카타시하)[堅磐은 카타시하(柯陀之波)라고 읽는다.]168, 고안전(固安錢;코안젠)169을 보내어 함께 복명(復命)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왜국(倭國;야마토노쿠니)의 오려(吾礪;아토)170 광진읍(廣津邑;히로키츠노무라)[廣津은 히로키츠(比慮岐頭)라고 읽는다.]에 안치하였는데, 병들어 죽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천황은 대반대련실옥에게 명하여 동한직국(東漢直掬;야마토노아야노아타히츠카)으로 하여금 신한도부고귀(新漢陶部高貴;이마키노아야노스에츠쿠리카우쿠위)171, 안부견귀(鞍部堅貴;쿠라츠쿠리켄쿠위)172, 화부인사라아(畵部因斯羅我;에카키인시라가)173, 금부정안나금(錦部定安那錦;니시고리지야우안나코무)174, 역어묘안나(譯語卯安那;워사메우안나)175 등을 상도원(上桃原;카미츠모모하라)176·하도원(下桃原;시모츠모모하라)·진신원(眞神原;마카미노하라)177 등 세 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어떤 책에서는 길비신제군이 백제로부터 돌아와서 한수인부(漢手人部;아야노테히토베), 의봉부(衣縫部;키누누히베), 육인부(宍人部;시시히토베)를 바쳤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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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후대의 舍人으로 견습관인이다. 舍人을 官者라고 쓴 유일한 예이다.

144여기에만 보인다. 吉備弓削部는 吉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집단으로 보인다. 岡山縣 久米郡 久米南町과 瀬戸町에 각각 弓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145여기에만 보인다. 下道臣은 吉備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으로, 현재의 岡山縣 總社市·倉敷市 일대를 지배하였다. 『先代舊事本紀』에 의하면 應神天皇대에 원래 下道國을 지배하고 있던 兄彦命(稻速別命)을 國造로 삼았다고 한다. 『日本書紀』에서는 吉備津彦命의 후예이며 應神天皇의 皇妃인 兄媛의 오빠 御友別命의 長子인 兄彦이 下道國을 분여받아 吉備臣과 下道臣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였다.

146여기에만 보인다. 身毛君은 美濃에 기반을 둔 호족으로 천황가와 관계가 깊으며, 그 일족 중에 舍人으로 천황을 섬긴 자가 많다. 壬申의 亂 때 활동한 身毛廣이 대표적이다.

147物部連에 예속된 부민이다. 조정의 군사와 경찰을 담당하였다. 律令制에서는 衛門府에 물부 30인이 배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물부는 물부련의 부민이 아니라 일반 백성 중에서 선발한 것으로 생각된다.

148『先代舊事本紀』 國造本紀에 上道國造는 輕島豐明朝의 시대에 원래 中彦命兒多佐臣를 봉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日本書紀』의 이 기사의 내용은 吉備上道臣田狹이 천황을 원망하며 아들인 弟君을 꾀어 신라·백제와 함께 일본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弟君의 아내가 충절을 다하였다는 이야기다. 천황에 대해 배반하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점에서 앞의 기사와 공통되는 면을 가지고 있다.

149『日本書紀』 雄略天皇 원년 춘3월조에 있는 雄略의 세 비 중 한 사람으로 보인다. 磐城皇子와 星川稚宮皇子의 母后이며, 淸寧天皇紀 즉위전기에는 星川皇子를 大藏의 권한을 장악하고 왕위를 노리도록 하였다가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50율령제에서는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女官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後宮을 뜻한다.

151후대의 國司는 國府의 官人으로 행정과 치안 등을 책임졌지만, 여기서의 國司는 그 훈이 ‘미코토모치(御言持)’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해당지역에 천황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敏達 6년 5월조의 分注에서 「王人奉命, 爲使三韓, 自稱爲宰. 言宰於韓, 蓋古之典乎. 如今言使也.」라고 하여 한반도에 사신으로 간 왜의 사신이 자칭하여 宰(미코토모치)라고 하는 것이 관례였음을 밝히고 있다. 神功紀에 보이는 新羅宰의 宰, 6세기에 보이는 任那日本府의 府 역시 훈은 모두 ‘미코토모치’이다.

152이하 弟君을 낳았다고 하는 부분까지는 分註로 보는 견해가 있다.

153淸寧 卽位前紀는 兄君을, 이 기사에서는 弟君을 이름처럼 다루고 있지만, 다만 형과 아우라는 뜻일 것이다. 兄君은 후에 星川皇子의 모반에 가담하여 燒殺되었다.

154『日本書紀』 允恭天皇 5년 7월 己丑條에는 葛城襲津彦의 손자로 反正天皇의 殯宮大夫를 맡았으나, 允恭天皇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155원문에는 中國으로 되어 있다. 7세기 말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사상을 반영하여 倭(日本)를 中國이라고 한 것이다.

156吉備海部直은 吉備 지방의 海部를 관리한 호족이다. 항해에 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 중에서 敏達 2년 5월조의 難波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고, 12년 7월조의 羽島는 백제에 사신으로 갔다. 『古事記』 仁德天皇段에 吉備海部直의 딸인 黑日賣라는 이름이 보인다. 赤尾는 여기에만 보인다.

157西漢才伎는 河內를 본거로 하는 대륙계의 諸種 工人으로, 漢氏가 관리하던 사람들이다. 『續日本紀』 養老 3년 11월조에 下譯이라고 賜姓되었던 잡호 河內手人大足, 양로 4년 6월조에 下村主라고 賜姓되었던 河內國 若江郡의 雜戶 河內手人刀子作廣麻呂가 보인다. 才伎의 종류는 아래 문장의 譯語 이외에 陶部, 鞍部, 畵部, 錦部가 보인다. 西漢은 河內漢이라고도 표기하며, 東漢(倭漢)에 대비되는 말이다.

158여기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159新羅·百濟·加羅 등의 나라를 총칭하는 말로 생각된다. 韓은 ‘카라’라고 읽으며, 外國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

160문맥으로는 어느 나라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로 생각된다.

161신라의 수호신으로 女神이 등장하는 예가 자주 보인다. 仙桃山 聖母가 그런 예이다.

162今來는 일본열도로 새로 온 도래인을 의미하며, 才伎는 기술이 뛰어난 자란 뜻이다. 그 중에는 도기 제작자, 안장 등 마구 제작자, 화가, 비단직조인, 통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후에는 今來가 지명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163『日本書紀』 繼體天皇 23년 3월조에 보이는 백제와 관련된 큰 섬이 南海島일 가능성이 크므로, 여기서도 같은 섬일 것이다.

164여기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165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를 말한다.

166手末은 손끝, 즉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를 말한다. 아래에 보이는 토기, 말안장, 회화, 비단직조를 담당하는 기술자를 비롯하여 통역도 포함되어 있다.

167難波日應吉士라고도 하며, 紀伊國 日高郡(日鷹) 지역을 본거지로 하면서 외교·수운 등에서 활약한 씨족이다.

168日鷹吉士를 氏姓, 堅磐을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169日鷹을 인명으로 보고 堅磐은 筑前國 穗波郡 堅磐鄕이라는 지명으로 보아, 難波吉士日鷹과 堅磐固安錢으로 보는 설을 비롯하여, 堅磐과 固安錢을 두 사람으로 보는 견해, 堅磐의 본명을 固安錢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170『日本書紀』 推古天皇 18년 10월조에 阿斗(아토) 강변의 숙소에 묵은 신라 사신이 다음날 小墾田宮에 入宮하였으므로, 大和國 城下郡 阿刀村으로 추정할 수 있다(『大和志』). 광진읍도 그 부근을 흐르는 大和川 혹은 寺川의 나루로 생각된다.

171新漢은 今來漢人과 같은 뜻이다. 陶部는 陶器, 즉 須惠器를 만들어 공납하는 品部이다. 高貴는 여기에만 보인다.

172鞍部는 마구를 제작하는 品部로 鞍作 혹은 桉作이라고도 한다. 堅貴는 여기에만 보인다.

173畵部는 畵工, 즉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은 品部이다. 因斯羅我는 여기에만 보인다.

174錦은 직조하는 데 많은 공이 들어 金과 같은 가격을 가지고 있다는 최고급 비단이며, 錦織은 그러한 고급직물을 생산하는 品部를 말한다. 定安那錦은 여기에만 보인다.

175譯語는 통역을 뜻한다. 卯安那는 여기에만 보인다.

176『日本書紀』 推古天皇 14년 5월조에 蘇我馬子를 桃原墓에 장사지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의 무덤은 高市郡 明日香村 島庄의 石舞臺古墳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므로, 이 지역이 도원으로 추정된다.

177『日本書紀』 崇峻天皇 원년조에 처음으로 法興寺를 세우고, 이곳을 飛鳥의 眞神原이라고 이름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법흥사는 현재 高市郡 明日香村 飛鳥의 飛鳥寺이므로, 이 지역이 진신원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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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봄 2월에 신협촌주청(身狹村主靑;무사노스구리아워)과 회외민사박덕(檜隈民使博德;히노쿠마노타미노츠카히하카토코)을 사신으로 삼아 오국(吳國)으로 보냈다. 천황이 즉위하고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新羅國)이 속이고 배반하며 포저(苞苴)178를 바치지 않은 지가 지금에 이르러 8년째였다. 그러나 중국(中國)179의 의도를 매우 두려워해서 고구려와 화의를 닦았다. 이로 인해 고구려 왕180이 정예병사 1백 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181로 삼았다[典馬는 우마카히(于麻柯比)라고 읽는다.].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의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어떤 책에서는 “너희 나라가 마침내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전마는 이를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고 물러나서 뒤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나 들은 바를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명하였다182. 나라 사람들이 곧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는데, 다만 고구려인 한 사람이 틈을 타서 벗어나 도망쳐 자기 나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고구려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筑足流城)183에 모여서[어떤 책에서는 도구사기성(都久斯岐城)184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을 돋우었다.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185에게 사신을 보내어185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186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斑鳩;카시하데노오미이카루가)187[斑鳩는 이카루가(伊柯屢俄)라고 읽는다.],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키비노오미워나시)188, 난파길사적목자(難波吉士赤目子;나니하노키시아카메코)189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190,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191.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192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193.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 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도 지극히 강한 나라와 대적하였다. 관군(官軍)194이 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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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억새나 갈대를 엮어서 생선을 싼 것으로 증정품 또는 예물이라는 의미이다.

179倭·日本을 가리킨다.

180시기적으로는 고구려 장수왕대에 해당한다.

181말을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는 馬夫에 해당한다.

182고구려인들은 折風이라고 하여 새깃으로 머리를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신라인들도 닭깃을 머리에 꽂는 풍습이 있었다(『삼국유사』 歸竺諸師).

183筑을 分註 속의 都久, 足流를 斯岐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고, 都久는 達句, 足流는 스쿠루 즉 村으로 達句伐, 곧 현재의 대구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184여기에만 보이는 지명이다.

185『日本書紀』에서는 加羅, 安羅, 多羅 등 10국을 任那라고 총칭한 용례가 있다. 그밖에도 신라가 멸망시킨 卓淳, 㖨己呑, 南加羅, 哆唎, 娑陀, 牟婁도 임나라고 불렀다. 그 중 유력한 나라의 王으로 생각되지만, 어느 나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86『日本書紀』에서 ‘日本府’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日本이라는 국호가 없었으므로, 倭府 혹은 倭臣이 원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古訓이 ‘야마토노미코토모치’이므로 왜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이 기사에서는 行軍元帥라고 하여 外征에 나선 장군에게 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고, 또한 5세기에는 왜가 신라를 빈번하게 침략하였으므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온 왜의 장수를 뜻할 수 있다.

187여기에만 보인다. 膳臣은 『日本書紀』에서는 孝元天皇의 皇子 大彦命이 시조라고 하였고, 『古事記』에서는 大彦命의 아들 比古伊那許士別命을 시조라고 하였다. 大彦命의 손자인 磐鹿六鴈命이 景行天皇의 東國巡幸 때 上總國에서 가다랑어와 대합 요리를 천황에게 바쳤고, 이후 천황의 음식을 조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188여기에만 보인다. 吉備氏는 筑紫·出雲·毛野와 함께 가장 유력한 지방 호족이었다. 야마토 지역과 동맹을 맺고 북구주 세력을 억압 후 야마토 중심의 질서를 편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5세기 중엽에는 造山古墳·作山古墳 등 동시대의 최대 전방후원분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雄略天皇은 적극적으로 길비세력을 제거한 것으로 생각된다.

189難波吉師라고도 표기하며(安康 원년 2월조), 외교·군사 분야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5세기 중엽부터 日香蚊·赤目子·日鷹·熊成 등이 보인다.

190원문의 未至營止를 「전장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야영을 하였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191이하 고구려와 교전한 내용을 기록한 문장은 『三國志』 魏書 武帝紀의 「未至營止. 諸將未與太祖相見皆怖. 太祖乃自力勞軍, 令軍中促爲攻具, 進復攻之. 與布相守百餘日.」, 「乃夜鑿險爲地道, 悉過輜重, 設奇兵. 會明賊謂, 公爲遁也. 悉軍來追. 乃縱奇兵, 步騎夾攻, 大破之.」 등의 문장에 의한 윤색이므로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다.

192원문에는 奇兵으로 되어 있다.

193 5세기 중엽까지 신라·가야·왜에서는 기병에 의한 전투가 일반화되지 않았으므로 사실로 신뢰하기 어렵다.

194왜의 군사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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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천황이 친히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신(神)203이 천황에게 “가지 마십시오.”라고 경고하였다. 천황이 이 때문에 가지 않았다. 그래서 기소궁숙녜(紀小弓宿禰;키노워유미노스쿠네)204,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禰;소가노카라코노스쿠네)205, 대반담련(大伴談連;오호토모노카타리노무라지)206[談은 카타리(箇陀利)라고 읽는다], 소록화숙녜(小鹿火宿禰;워카히노스쿠네)207 등에게 “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는데, 대대로 신하를 칭하였다. 나를 조공하여 알현하는 일208을 어긴 적이 없으며 공직(貢職)도 정성껏 바쳤다. 짐이 천하의 왕이 되기에 이르러서 몸을 대마(對馬;쓰시마)의 바깥에 두고, 자취는 잡라(匝羅)209의 바깥에 숨기면서 고구려의 공물을 막고, 백제의 성을 삼켰다. 이에 다시 전혀 조빙하지 않고, 공직(貢職)을 행하지 않는다. 이리 새끼와 같은 거친 마음210을 품고 배부르면 날아가고, 배고프면 붙는다211. 이에 너희들 네 사람을 대장으로 임명한다. 마땅히 왕사(王師)212로써 핍박하고 정벌하여 천벌(天罰)을 받들어 행하라.”고 칙을 내렸다. 이에 기소궁숙녜는 근심하여 대반실옥대련(大伴室屋大連;오호토모노무로야노오호무라지)213에게 “신은 비록 졸렬하고 약하지만 삼가 칙을 받들었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처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의 시중을 들 사람이 없습니다. 공(公)께서는 이 사정을 천황에게 자세히 말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반실옥대련이 자세하게 아뢰었다. 천황은 이를 듣고 슬퍼하고 탄식하며, 길비상도채녀대해(吉備上道采女大海;키비노카미츠미치노우네메오호시아마)214를 기소궁숙녜에게 주어 그를 따르며 시중들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수레를 밀어서215 전장으로 보냈다. 기소궁숙녜 등은 신라로 들어가서 근처의 고을을 다니면서 공격하였다216[행도(行屠)는 다니면서 공격하는 것이다.]. 신라왕은 밤에 사방에서 관군의 북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탁지(㖨地)217가 모두 점령되었다고 생각하여, 수백 명의 군사와 더불어 도주하였다. 이에 크게 패하였다. 소궁숙녜(小弓宿禰;워유미노스쿠네)는 쫓아가 적장을 진중에서 베었다. 그리고 탁지를 모두 평정하였는데, 남아있던 무리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기소궁숙녜는 또한 병사를 거두어 대반담련 등과 만났다. 병사들은 크게 떨쳐 일어나 남은 무리들과 함께 싸웠다. 이 날 저녁에 대반담련 및 기강전래목련(紀岡前來目連;키노워카자키노쿠메노무라지)218은 모두 힘껏 싸우다 죽었다. 담련(談連;카타리노무라지)의 시종이자 같은 성을 가진 진마려(津麻呂;츠마로)219는 후에 군중(軍中)으로 들어가 그 주인을 계속 찾았다. 그러나 군중에서 보이지 않자, “나의 주인 대반공(大伴公;오호토모노키미)은 어디에 계시는가?”라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그대의 주인들은 결국 적의 손에 죽었다.”라고 하면서, 시체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진마려가 듣고는 발을 구르고 절규하며, “주인이 이미 돌아가셨다. 어찌 홀로 온전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뒤이어 다시 적에게 나아가 함께 죽었다. 얼마 후에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나자 관군 또한 마침내 물러났다. 대장군 기소궁숙녜는 병에 걸려 죽었다(薨).

여름 5월에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키노오히하노스쿠네)220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신 것을 듣고 신라로 가서 소록화숙녜가 거느리는 병마(兵馬)와 선관(船官) 및 여러 소관(小官)을 맡아 마음대로 지휘하였다. 이에 소록화숙녜는 대반숙녜를 크게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한자숙녜에게 “대반숙녜가 나에게 ‘나는 마땅히 머지않아 다시 한자숙녜가 거느리는 병사들을 맡을 것이다.’라고 하였소. 원컨대 굳게 지키시오.”라고 거짓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대반숙녜와 한자숙녜는 틈이 생겼다. 이에 백제왕은 일본의 여러 장군들이 작은 일로 인해 틈이 생겼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한자숙녜 등에게 보내, “나라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청컨대 왕림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한자숙녜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여 갔다. 강에 이르렀을 때 대반숙녜는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때 한자숙녜가 뒤에서 대반숙녜의 안장 뒷부분에 화살을 쏘았다. 대반숙녜가 이에 놀라서 뒤돌아보고 한자숙녜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니, 흐르는 강 속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는 전부터 서로 다투어 가는 도중에 소란을 피우니, 백제왕의 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채녀대해가 소궁숙녜의 관을 따라 일본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대반실옥대련에게 “첩은 장사 지낼 장소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좋은 땅을 정해주십시오.”라고 조심스럽게 상의하였다. 대련(大連)은 이를 천황에게 아뢰었다. 천황은 대련에게 “대장군 기소궁숙녜는 용처럼 날래고 범과 같이 노려보아 두루 온 세상을 아울러 바라보았으며, 반하는 무리를 토벌하고 사해(四海)를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먼 곳에서 힘쓰다가 목숨을 삼한(三韓)에서 잃게 되었다. 마땅히 슬퍼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다해서 장례를 치를 사람을 정하라. 또한 그대 대반경(大伴卿;오호토모노마헤츠키미)221과 기경(紀卿;키노마헤츠키미)222 등은 같은 지역에서 이웃한 유래가 오래되었다223.”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련은 칙을 받들어 토사련소조(土師連小鳥;하지노무라지워토리)224에게 무덤을 전신륜읍(田身輪邑;타무와노무라)225에 만들어 장사지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대해(大海;오호아마)가 크게 기뻐하여 혼자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한노실(韓奴室;카라노야츠코무라)226, 형마려(兄麻呂;에마로), 제마려(弟麻呂;오토마로), 어창(御倉;미쿠라), 소창(小倉;워쿠라), 침(針;하리)의 6인을 대련(大連)에게 보냈다. 길비상도(吉備上道;키비노카미츠미치)227 문도전읍(蚊嶋田邑;카시마다노무라)228의 가인부(家人部;야케히토라)229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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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日本書紀』 雄略天皇 9년 2월조에 보이는 胸方神으로 생각된다. 흉방신은 항해의 안전 등을 관장하는 신이다.

204신라 정벌군의 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고 하며, 신라에서 전투 중에 병사하였다. 5월조에서는 大伴室屋과 같은 지역 이웃마을 사람이라고 하였다.

205『公卿補任』에는 蘇我滿智의 아들이자 蘇我高麗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新羅에서 紀大磐宿禰와 내분을 일으켜 大磐에게 살해되었다.

206大伴室屋의 아들이자 大伴金村의 아버지로, 신라에서 전사하였다.

207 5월조에서 角臣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古事記傳』에서는 小弓宿禰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나 계보는 잘 알 수 없다.

208원문은 朝聘으로 되어 있다.

209草羅 혹은 歃良이라고도 표기하며 현재의 梁山을 가리킨다. 神功紀의 沙比新羅의 沙比도 歃과 음이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산 지역은 朴堤上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라가 가야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곳이었고, 倭에서도 신라 방면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방면의 바다 혹은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鉏海의 鉏 역시 농기구인 ‘삽’이라는 음가를 사용한 것이라면, 歃·匝과 통한다.

210원문에는 野心으로 되어 있다. 이리새끼는 길러서 길들이려 해도 마음은 늘 산에 있어 길들여지지 않는다고 한다. ‘흉포하여 교화할 수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211이 기사의 원문도 『三國志』 魏書 呂布傳을 인용한 것이다.

212帝王의 군대를 말한다. 官軍과 같은 뜻이다.

213『日本三代實錄』과 『伴氏系圖』 등에 大伴武持의 아들로 되어 있으며, 談과 御物의 아버지다. 『新撰姓氏錄』에는 天押日命의 十一世孫, 道臣命의 七世孫이라고 하였다. 『日本書紀』 允恭天皇 11년에는 衣通郎姫를 위하여 藤原部를 설치하였으며, 雄略天皇 즉위시에 物部連目과 함께 大連이 되었다. 雄略 2년에 百済가 바친 池津媛을 범한 石川楯을 붙잡아 來目部로 하여금 처형토록 하였으며, 雄略이 죽은 후 東漢直掬에 명하여 星川皇子의 난을 진압토록 하였다. 또한 清寧天皇 2년 각지역에 白髪部舎人, 白髪部膳夫, 白髪部靫負를 설치하였다. 武烈天皇까지 5대에 걸쳐 대련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214吉備地域의 豪族인 吉備上道臣이 바친 采女로 생각된다. 舒明紀에도 吉備國蚊屋采女가 보인다.

215원문은 推轂이다. 임금이 출전하는 장군의 수레를 친히 밀어서 출발시키던 일을 가리킨다.

216원문은 行屠로 되어 있다.

217㖨은 음이 ‘록’이지만 일본에서는 ‘토쿠’라고 읽고 있어, 탁이라는 음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㖨은 啄의 誤字나 異表記로 생각되며, 신라의 육부 중 啄部, 沙啄部, 漸啄部의 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㖨地는 경주 혹은 신라 전체를 뜻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218淸寧紀의 城丘前來目과 이름이 유사하나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 紀伊國 名草郡 岡崎村을 본거지로 하는 來目氏로 보인다.

219大伴津麻呂이다. 여기에만 보인다.

220紀小弓宿禰의 아들로 顯宗紀 3년조에 紀生磐宿禰로 보인다.

221大伴室屋大連을 말한다.

222紀大磐宿禰를 말한다.

223『日本書紀』 欽明天皇 원년 9월조에 大伴金村이 관직에서 물러나 住吉에 있는 집으로 갔다고 한 내용이나 『萬葉集』에 보이는 ‘大伴의 御津’, ‘大伴의 高師의 濱’과 같은 지명으로 미루어, 攝津國에서 和泉에 걸친 해안지역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奈良時代에 大伴氏 일족이 紀氏의 본거지인 紀伊國 名草郡과 那賀郡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가 많다.

224여기에만 보인다. 土師連은 土師器의 제작과 관련된 씨족이고, 장례에도 깊이 관계하였다.

225和泉國 日根郡 淡輪村(현재의 大阪府 泉南郡 岬町 淡輪)이다. 니산자이古墳과 西陵古墳을 중심으로 하는 古墳時代 중기의 유력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다.

226한반도 출신의 奴라는 뜻으로, 采女大海가 紀小弓宿禰를 따라 신라에 갔던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모두 일본식이다.

227吉費 上道는 현재 岡山市 동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228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229율령제에서는 陵戶, 官戶, 家人, 公私奴婢의 5등급의 賤人이 있었다. 가인은 사노비보다는 상위에 있었지만 개인이 사유하는 하층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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