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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03 01:13
[한국사] 새왕조를 거부한 고려 충절들의 최후 [펌]
 글쓴이 : 가난한서민
조회 : 1,506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왕씨 천하의 고려를 완전히 차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민심의 격동을 피하기 위하여 나라 이름을 여전히 고려 그대로 두고 송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려 태조의 묘(廟)를 경기도 마전(麻田)에 건설함과 동시에 왕씨 후예를 우대할 것을 천명(闡明)하였다. 그리고 구왕조 유신들의 마음을 달래서 자기 쪽으로 돌리려 하였지만 유신들의 적대적 기피와 은근한 저항은 이성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벼슬이 삼중대광시중이었으며 높은 학덕으로 온 백성의 흠모를 받는 이색은 본래 태조와 친한 사이였다. 태조의 간곡한 부름에 마지못해 입궐하기는 했으나 왕에 대한 신하의 자세로 절하지 않을 뿐 아니라, 태조가 간곡한 말로 신국가 건설을 위해 좋은 말을 해달라고 하자,
   “늙고 병든 선비가 이제 와서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고향에 돌아가 해골 눕힐 자리나 보도록 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그냥 어전을 물러나와 버렸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3은(三隱)’으로 이름 높은 야은 길재는 이방원과 함께 글을 배운 친구였지만, 창왕을 끌어내리고 공양왕을 옥좌에 앉혔을 때 분연히 관복을 벗어던지고 물러나 낙향하였는데 그 역시 태조의 거듭된 부름에도 불구하고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이름난 대신들과 학자들이 고려에 대한 충성심에서 산야에 몸을 숨기고 철저하게 이씨 왕조를 외면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옆에는 구왕조 중신이던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은, 심덕부, 정탁 등 쟁쟁한 인물들이 있어 큰 힘이 되어 주었으며, 그들의 협조로 이씨 왕조 기반 구축과 신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할 수가 있었다.
불탄 옛자료를 토대로 새로 그린 태조 어진

  1392년(태조 1) 718.  비가 내리었다. 이보다 앞서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억수같이 비가 내리니, 백성의 마음이 크게 기뻐하였다.

   1392년(태조 1) 720사헌부 대사헌 민개 등이 고려 왕조의 왕씨(王氏)를 밖에 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정양군(定陽君) 왕우(王瑀)와 그의 아들 왕조·왕은 장차 고려 왕조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이니 논하지 말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라."

    사헌부에서 또 상소(上疏)하였다.
   "대체 경()이란 것은 한 마음의 주재(主宰)이고 모든 일의 근저(根柢)이니, 그러므로, 큰 일로는 하늘을 섬기고 하느님을 제향하는 것과, 작은 일로는 일어나고 자고 밥먹고 휴식하는 것까지 이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천도를 공경하고 높여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탕왕과 무왕이 흥한 이유이며, 을 없애고 위력을 사용하여 경()을 행할 것이 못된다고 한 것은 걸왕과 주왕의 망한 이유입니다. 역대의 치란(治亂)과 흥망을 상고해 보아도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게 되니, 이것은 경()이란 한 글자가 진실로 임금의 정치를 하는 근원입니다.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른 초기에 기업(基業)을 세워 후세에 전하여 자손에게 계책을 끼치게 됨이 바로 오늘날에 있으며, 하늘이 길흉을 명하고 역년을 명함도 또한 오늘날에 있으니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채택 시행하시어 일대의 규모를 일으키고 만세의 준칙으로 삼으소서.

  첫째는 기강(紀綱)을 세우는 일입니다
  둘째는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군자와 친하고 소인을 멀리하는 일입니다.
             공명정대하여 사직(社稷)이 있는 것만 알고 그 자신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군자이며, 간사하고 아첨하여 남에게 아부하여 용납되기를 취하며, 권한을 도적질하고 세력을 부리며, 남의 좋은 점은 탈취하고 은혜를 팔고서 예! ! 하고 남에게 순종하여, 다만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면 남의 말은 개의하지 않는 사람은 소인입니다군자는 서로 합하기는 어려워도 소원하기는 쉬우며, 소인은 친하기는 쉬워도 물리치기는 어렵습니다서경(書經)현인을 임용하되 의심하지 말며, 사인(邪人)을 제거하되 의심하지 말 것이다.’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진실로 그 현명한 것을 안다면 비록 과실이 있더라도 추천해 이를 임용하고, 진실로 그 아첨한 것을 안다면 비록 공로가 있더라도 물리쳐서 이를 멀리 하소서.
  넷째는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경서(經書)천자가 쟁신(諍臣) 7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을 것이며, 제후가 쟁신 5인만 있으면 비록 무도하더라도 그 국가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만세의 격언입니다. 신하가 나아가서 간하는 것은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곧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서경(書經)간언을 따르고 거절하지 말라.’ 하였으며, 군주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럽게 된다.’ 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서 이것을 마음에 두소서.
  다섯째는 참언(讒言)을 근절하는 일입니다.
                순제(舜帝)는 말하기를, ‘은 참소하는 말이 선인(善人)의 일을 방해하여 짐의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함을 미워한다.’ 하였으니, 참소하는 말이 쉽사리 사람을 미혹하게 하여 순임금과 같은 성인으로서도 오히려 염려로 삼았으니 두려웁지 않습니까시경(詩經)군자는 참언을 조심해야 될 것이니, ()이 이로써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만약 총명으로써 간사를 살핀다면, 온갖 간사가 능히 도망할 수 없으며, 참언이 근절될 것입니다.
   여섯째는 안일(安逸)과 욕망을 경계하는 일입니다.
                  서경(書經)안일과 욕망으로써 나라에 본보이지 말라.’ 하였으니, 안일과 욕망이 덕을 해치는 것은 어찌 한 가지 일뿐이겠습니까? 궁실은 편안하게 거처하고자 하고, 음식은 화려하게 먹고자 하고, 비빈·잉첩의 시중과 재미로 하는 사냥의 즐거움과 개·을 기르는 것과 화초를 완상(玩賞)하는 것도 모두 사람의 천성을 해치고 사람의 정욕을 방탕하게 하니 삼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곱째는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는 일입니다
                 고려 왕조에서는 조금만 재변(災變)이 있으면 두려워하고 반성할 줄은 알지 못하고서, 오직 부처를 섬기고 귀신을 섬기는 데만 힘써서 소비한 비용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환하게 아시는 바입니다. 원하옵건대, 지금부터는 하나라 우왕과 한나라 문제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 모든 복식·기용·연향·상사를 한결같이 검약한 데에 따르고 부처와 귀신에게 쓰는 급하지 않은 비용은 모두 다 제거하게 하소서. 모든 하는 일을 방종 사치하지 아니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눈으로 보고 감동하여 또한 풍속이 후하게 될 것입니다.
   여덟째는 환관(宦官)을 물리치는 일입니다.
                 고려 왕조 말기에는 환자(宦者)가 권세를 부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대개 그 사람 된 품은 의식이 영리하고 말을 잘하며, 안색을 잘 살피고 뜻을 잘 맞추게 되니, 이로써 인주가 왕왕히 그 꾀속에 빠져서 이를 깨닫지 못하고 권병(權柄)을 옮겨서 화란(禍亂)을 발생하게 한 것이 대대로 그 자취가 잇달아 있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그 노련한 간물(奸物)과 매우 교활한 사람과, 탐욕이 많고 부끄럼이 없는 사람은 모두 놓아보내어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여, 새로운 교화에 누()가 되지 못하게 하소서.
   아홉째는 승니(僧尼)를 도태(淘汰)시키는 일입니다.
                 그 법이 본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종지로 삼았으니, 그 무리들은 바위 구멍 속으로 멀리 도망해 숨어 푸성귀만 먹고 물만 마시면서, 정신을 수련하면 될 것인데, 지금은 평민들과 섞여 살면서 혹은 고상한 말과 미묘한 이치로써 사류(士類)들을 현혹하기도 하고, 혹은 사생죄보(死生罪報)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공갈하기도 하면서 마침내 시속 사람들로 하여금 유탕(流蕩)하여 본업에 돌아갈 것을 잊게 하였으며, 심한 자는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옷을 입으며, 재물을 늘리고 여색을 탐하여 이르지 않는 일이 없으니,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열째는 궁궐을 엄중하게 하는 일입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이 신()을 지키기를 금석과 같이 굳게 지키고, 이 영()을 시행하기를 사시(四時)와 같이 꼭 맞게 하여, 위로는 하늘이 돌보아 도와주신 명령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신민(臣民)이 추대하는 뜻을 배반하지 아니하여 억만년의 무궁한 경사(慶事)를 여시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조가 말하였다.
   "환관과 승니를 물리치고 도태시키는 일은 건국의 초기에 갑자기 시행할 수 없지마는, 나머지는 모두 시행하겠다."


  왕조가 바뀌자 정도전은 개국공신 1등에 문하시랑찬성사·동판 도평의사사 판호조사 판상서사사 보문각 대학사 지경연 예문춘추관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등 전례가 없는 많은 요직을 겸임하며 정권과 병권을 한 몸에 안았다. 왕이 된 이성계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해서는 모든 분야의 학문에 뛰어날 뿐 아니라 병법에도 밝은 정도전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태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의욕적으로 정사를 주도하던 정도전은 마침내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둔 한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핏줄 시비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우현보와 세 아들, 그리고 항상 반대 입장에 섰던 스승 이색 등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전면에 나서면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라 효과적인 제거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마침 태조가 즉위 교서를 지으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정도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도전은 즉위 교서에 우현보와 세 아들, 이색, 이숭인, 설장수 등 10명의 죄상을 낱낱이 기재해서 극형에 처한다는 조목을 삽입했다.
  그 조목을 읽고서 태조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짐은 이미 죄인들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다고 말했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였는가?”
   정도전이 읍하고 대답하였다.
   “전하, 그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대역죄인입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짐이 어찌 했으면 좋겠소?”
   태조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책을 물었다.
   정도전은 태조가 즉위 교서에 기재된 형벌 내용을 보고 어떻게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대책도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다.
   “전하께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면 교서에 기재된 형벌보다 조금 낮춰서 죄과를 치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형벌이 좋겠소?”
   “우선 이들의 직첩을 회수하고 서인으로 폐하십시오. 그리고 장 1백씩을 쳐서 죽을 때까지 귀양살이를 하도록 하는 것이 적당할 듯합니다.”
   “짐이 이미 만천하에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공포했는데, 직첩만 회수하고 장형은 면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건 아니 되옵니다. 이들은 반란을 모의하여 전하를 헤치려 한 자들입니다. 이런 대역무도한 자들에게 아무런 형벌도 가하지 않고 용서하시면 장래에 이와 같은 자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음... 그렇다면 삼봉의 뜻대로 하시오. 허나 이색과 우현보는 짐의 오랜 벗이고, 장형을 받기에는 나이가 많으니 그들만은 장형을 면해주시오.”
   “알겠사옵니다.”
   태조는 곤장 100대를 맞고는 사람이 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지못해 윤허했다. 정도전은 못내 불만인 얼굴로 대전을 나와서 단짝인 판중추원사 남은이 근무하고 있는 중추원으로 달려갔다.

  1392년(태조 1) 7월 28일, 태조는 정도전이 가져온 즉위 교서를 도승지 안경공에게 읽게 했다. 즉위 교서에 나오는 저항 세력에 대한 처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현보 · 이색 · 설장수 등은 직첩을 회수하고 폐하여 서인으로 삼아 해상(海上)으로 옮겨서 종신토록 같은 계급에 끼이지 못하게 할 것이며,
  우홍수 · 강회백 · 이숭인 · 조호 · 김진양 · 이확 · 이종학 · 우홍득 등은 직첩을 회수하고 장() 1백 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최을의 등 25인은  직첩을 회수하고 장() 70대를 집행하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며,
  김남득 등 11인은 직첩을 회수하고 먼 지방에 방치(放置)할 것이며,
  성석린 등 9인은 각기 본향(本鄕)에 안치(安置)할 것이며,
  그 나머지 무릇 범죄한 사람은 일죄(一罪)로서 보통의 사유(赦宥)에 용서되지 않는 죄를 제외하고는, 이죄(二罪) 이하의 죄는 모두 이를 사면(赦免)할 것이다."
 
   다음날 정도전과 남은은 판군기감사 황거정과 상장군 손흥종 김노를 은밀히 불렀다. 이들은 바로 유배지로 가서 죄인들에게 장형을 집행할 사람들이었다. 정도전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곤장 100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형벌이오. 그들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말아야 이 나라가 평안할 것이오. 고생스럽겠지만 잘 알아서 처리하고 돌아오시오.”
   이 한마디로 수십 년간 혈통 시비를 걸며 정도전을 괴롭혔던 우현보의 세 아들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전라도와 강원도에 유배되어 있던 우홍수 우홍명 우홍득이 곤장에 맞아 장살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이 우현보 부자 다음으로 싫어했던 사람은 이숭인이었다. 이숭인은 정도전과 함께 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동문이었다. 그리고 이색의 제자들 중 가장 출중했던 사람도 이들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색은 제자들 중에서 자신과 항상 뜻을 같이했던 이숭인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이 사람보다 뛰어난 문장은 고려에는 없다. 혹여 중국에서는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 말은 이숭인의 문장 실력이 고려에서 제일이라는 극찬이었다. 이색의 말을 확인시켜 주듯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중국의 사대부들도 이숭인이 지은 표문을 읽고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색은 이숭인에 버금가는 문장력을 가진 정도전에게는 칭찬에 인색했다. 정도전은 그것이 외가 쪽으로 노비의 피가 섞인 자신의 혈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몽주가 피살된 뒤로 이숭인도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정도전은 이숭인을 여러 차례 만나 신왕조 창업에 뜻을 함께 하자고 제의했었다. 그러나 이숭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이에 정도전은 앙심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숭인은 전라도 순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나주로 옮겨와 있었다. 정도전의 밀명을 받은 황거정은 곤장을 칠 군졸들을 은밀히 불렀다.
   “저 자는 전하를 해치려 한 대역 죄인이다. 너희들이 곤장 100대를 다 치기 전에 저 자의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리하면 내가 큰 상을 내릴 것이다.”
   황거정의 명을 받은 군졸들은 이숭인의 척추를 집중적으로 때려서 장살시켰다.
 
   그 다음은 존경보다는 미운 감정이 더 많은 스승 이색이었다. 당시 이색은 경기도 여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태조는 이색의 귀양지를 전라도 장흥부로 옮기도록 명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경기계정사 허주에게 이색을 잡아서 장흥부 인근의 무인도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허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자연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다른 섬을 찾아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가 죄인을 섬에 귀양 보내자는 것은 호송 도중에 바다에 밀어 넣어서 아예 없애버리자는 뜻이다.”
   그러나 조금 뒤에 내관이 태조의 명을 받들고 와서 이색의 귀양지는 섬이 아니라 장흥으로 하라고 못을 박았다. 이색의 제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정도전은 그 분풀이를 그의 아들 이종학에게 했다.
 
   이종학은 고려의 대유학자인 이색의 맏아들답게 학문이 출중했다. 10대 후반에 과거에 급제해, 20대 후반에 재상의 반열에 오른 수재였다. 당시 이종학도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도전의 밀명을 받은 손흥종은 이종학을 형틀에 묶고 형을 집행하도록 명했다. 미리 지시를 받은 군졸들이 집중적으로 이종학의 척추를 때렸다. 이종학은 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관내가 떠나가도록 비명을 질렀다.
   이때 함창판관 김여지가 나서서 형을 중지시켰다.
   손흥종이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어명에 따라 형을 집행하는 중일세.”
   “상장군 나리, 형리들이 국법대로 형을 집행하지 않기에 소신이 부득이하게 정지시켰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국법에 곤장은 볼기만 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들은 죄인의 허리 위쪽을 치고 있으니 나리께서 바로잡으시옵소서!”
   “끙~! 알았네.”
   신출내기 판관이 끼어들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손흥종은 씁쓰레한 얼굴로 입맛을 쩝쩝 다셨다. 사실 김여지는 어릴 적에 이종학에게 글을 배운 제자였다. 그런데 정도전 등의 음모로 스승이 곤장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형을 정지시켰다.
   이리하여 이종학은 제자 덕분에 장살은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흥종은 포기하지 않았다. 곤장을 맞고 함창서 장사로 옮겨가는 이종학의 뒤를 따라갔다. 형리가 주막집에 하룻밤을 묵자 손흥종은 이때를 이용하여 이종학을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또한 정도전은 이종학의 동생 이종덕을 벼슬을 받지 않는다고 옥에 가둔 후에 매질하고 고문하여 마침내 죽여 버렸다.

   제자중 한 명이 귀양살이하는 이색을 여주로 찾아가서 두 아들의 참혹한 죽음을 알렸다. 이색은 아무 말 없이 제자의 손을 잡고 산골 속으로 들어갔다. 제자는 손목을 잡힌 채 이색을 따랐다. 산도 막바지요, 물도 메마른 산궁수진 처한 곳에 당도했다. 이색은 목을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제자는 비로소 산속으로 들어간 까닭을 알았다. 눈물을 머금고 따라서 울었다.
   이색의 통곡성은 좀처럼 그치지 아니했다. 나라가 망한 망국한과 아들을 둘씩이나 잃은 서리고 엉킨 한이 한꺼번에 쏟아진 통곡성이었다. 이색은 목이 쉬도록 계속해서 울었다. 제자는 이색을 위로했다.
   "그만 그치십시오. 스승님, 그만 진정합시오."
   여러 차례 위로했으나 아침에 솟았던 해가 서편 산마루로 넘어가서야 통곡을 그치고 산속에서 내려왔다. 이색은 제자한테 말했다.
   "이제야 내 가슴이 조금 시원한 듯하이."
   제자는 이색의 심정을 알았다. 이색은 나라가 망한 한과 아들을 둘씩이나 죽인 기막힌 한을 통곡하고 싶었으나, 울기도 어려웠다. 이색의 주위에는 항상 기찰관들이 목은의 행동을 일일이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목은은 제자와 함께 귀양사는 집으로 돌아오자 벼루에 먹을 갈아 종이에 시를 썼다.

   송헌이 나라를 맡더니 나는 떠다니는 몸이 되었네,
   꿈속엔들 어찌 이런 일 있을 줄이야.
   두정씨가 큰 의논에 참여했다 하네,
   어느 때나, 집안사람들 모두 다 모여 지내리.
 
   얼마 뒤, 태조는 곤장을 맞은 여덟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보고를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관을 시켜 은밀히 진상조사에 나섰지만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었다. 태조는 그 일이 정도전의 사주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신왕조의 기틀이 정도전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정도전의 다음 목표가 이색과 우현보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들의 동태를 시시각각으로 보고하게 했다.
   사실 이성계는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하다가 공민왕 때 고려에 들어와 재상이 된 이색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또 이색도 여진족과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선봉에 서서 나라를 구한 이성계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공민왕도 그들 두 사람을 무척 아꼈다.
일찍이 공민왕은 이성계가 원나라의 나하추를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많은 대신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며 이렇게 말했다.
   “문신엔 이색을 쓰고 무신엔 이성계를 썼으니, 짐의 사람을 쓰는 것이 어떠한가?”
   이처럼 공민왕은 고려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로 이성계와 이색을 꼽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무신과 문신이라는 관계를 떠나 친구처럼, 형제처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이런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태조는 어떻게든 이색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유배지에서 석방하고 조정에 나와서 벼슬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이색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정중히 거절했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이색은 3년간 한산, 여주, 오대산 등지를 돌아다녔다. 1396년 5월, 이색은 태조에게 청하여 여주 청심루 아래 여강으로 피서를 떠났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권근, 김숙자, 변계량 등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한 대유학자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었다.
  태조는 절친했던 옛 친구인 이색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 며칠 뒤에 이색이 누군가의 사주로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여주 지역 수령을 사형에 처해버렸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색을 죽게 한 배후는 정도전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태조의 명을 받은 사헌부에서 이색의 죽음에 관한 진상 조사에 나섰지만 어떠한 사실도 밝히지 못했다.
 
   정도전은 개인적으로는 속 시원히 원한을 풀었지만 결국 그의 정치 인생에 있어서는 가장 큰 오점으로 기록되었다. 새 왕조에 대해 저항할 의지도 세력도 모두 꺾인 그들에게 정도전은 조금의 아량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비록 정도전을 제거한 태종대에 씌어진 것이지만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에는 이런 단평이 실려 있다.

   ‘그는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으며,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하려 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세종대왕 1권 [왕조의 아침].박종화. 기린원(1993)
설화  역사를 뒤바꾼 치명적 말실수.이경채.현문미디어(2007)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이인자.송은명.시아(2012)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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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상종 18-09-03 02:29
   
그래봐야 파벌싸움임. 물론 충절, 의리는 존경받을 덕목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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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9 [한국사] [FACT] 황현필 한국사 - 광개토대왕 1부 아비바스 11-22 245
19838 [한국사] [FACT] 국방TV - 삼국시대 한강 전쟁사 ( 역사학자 임용… 아비바스 11-22 211
19837 [한국사] [FACT] 국방TV - 고구려 당나라 전쟁 ( 역사학자 임용환… 아비바스 11-22 217
19836 [한국사] [FACT] 국방TV - 고구려 수나라 전쟁 ( 역사학자 임용환,… 아비바스 11-22 235
19835 [기타] 중국 공산당 70년전 지도, 베이징아래 발해표기 관심병자 11-21 435
19834 [한국사] 개경, 서경 그리고 황성, 고려제국의 수도 하늘하늘섬 11-21 902
19833 [기타] 은(殷)나라 갑골음(甲骨音)은 고대한국어였다 관심병자 11-21 379
19832 [세계사] [ FACT ] 정치외교학과 유튜버가 말하는 몽골이 전쟁을… 아비바스 11-19 313
19831 [한국사] [ FACT ] 정치외교학과 출신 유튜버가 말하는 서희 외… 아비바스 11-19 292
19830 [기타] 베이징 서쪽도 고려 ? 또 청나라지도에 표시 관심병자 11-19 441
19829 [한국사] [ FACT ] 최근에 논란중인 고구려 영토 (3) 아비바스 11-19 617
19828 [한국사] [FACT] 고구려 전성기 - 광개토대왕이 삼국통일을 하지… 아비바스 11-18 470
19827 [기타] [FACT] "현대인이 국뽕, 정치병, 혐오병에 빠지는 이유" 아비바스 11-18 312
19826 [세계사] [ FACT ] "경제가 어려워지면 국뽕에 빠진다" 아비바스 11-18 294
19825 [한국사] [FACT] 세종대왕 한글 반포 이후 줄곧 "강감찬" 아비바스 11-17 346
19824 [기타] 학자들과 국민들도 속인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원문… 관심병자 11-17 304
19823 [기타] 강감찬 / 강한찬 2 (1) 관심병자 11-17 306
19822 [기타] 추모왕 150년의 누명을 벗기다. 글자 오판독으로 어긋… (1) 관심병자 11-17 352
19821 [한국사] [FACT] 정치외교학과 유튜버가 설명하는 조선왕조 아비바스 11-17 283
19820 [한국사] [FACT] 정치외교학과 유튜버가 설명하는 고구려 아비바스 11-17 300
19819 [한국사] [FACT] 금서가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아비바스 11-16 461
19818 [한국사] [FACT] "강감찬" 이지 "강한찬" 이 아니다. (3) 아비바스 11-15 669
19817 [기타] 강감찬 / 강한찬 (2) 관심병자 11-14 496
19816 [한국사] [FACT] 15년전, MBC에서 방영했었던 대제국 고구려 참역… (2) 아비바스 11-13 731
19815 [한국사] 역사학자가 말하는, 광개토대왕이 10년을 더 사셨다… (3) 아비바스 11-13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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