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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04 11:23
[세계사] 그레이트 게임과 러일전쟁 1
 글쓴이 : 보스턴2
조회 : 1,298  

1.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 / Большая игр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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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년부터 1907년(영러협상)까지의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작게는 중앙아시아에서 크게는 유라시아 전역의 패권을 두고 일어난 전략적 경쟁을 뜻한다. 그림자의 토너먼트라고도 한다. 일부에서는 「냉전이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전이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19세기 세계 정세와 그 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동유럽에서는 크림 전쟁,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경쟁, 티베트와 위구르도 두 세력의 각축장이었고 동아시아와 캄차카 반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대결했다. 어떻게 보면 유라시아를 넘어 전세계이기도 하다. 러시아도 하와이에 영향력을 내세우려고 했었고, 알래스카를 미국에게 판 것도 영국(지금의 캐나다)을 견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거문도 사건이나 영일동맹, 러일전쟁, 한일합방 역시 크게는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일본이 영국의 대리인 역할) 

'그레이트 게임'이란 용어는 영국 동인도 회사 웨일스 기병대 정보 장교였던 아서 코놀리의 말에서 따왔다. 군인 출신 저널리스트 겸 역사가인 피터 홉커크가 쓴 책 '그레이트 게임' 역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907년(영러협상)을 통해 영국과 러시아가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끝난 것으로 간주한다. 

2. 그레이트 게임의 종결 러일전쟁 

" 나는 우리가 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1901년 니콜라이 2세가 프로이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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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제국(영국, 러시아, 일본)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전쟁(대한제국이 아님 주의..그저 대한제국은 전리품))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에서 벌인 전쟁이며, 일본에서는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일노전쟁; 니치로 센소)라고 부른다. 

서구 열강 누구나 당연히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러시아는 모두의 기대를 제대로 배신하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전쟁의 양상에 내기를 건 사람들도 많았는데, 누가 이기느냐에 돈을 건 게 아니고 일본이 언제 패배하고 러시아가 언제 승리하느냐에 돈을 걸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기에 아무도 내기에 이기지 못하고 무효가 됐다.  

일본 입장에서는 1894년에 치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10년 만에 대국(大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이자, 10년 전 청나라와의 전쟁 이후 연속으로 승전을 거두게 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백인종 대국에 대한 유색인종 소국의 승리라는 세계사적 의미도 컸다. 1차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승리한 전례는 있지만,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반적인 군사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유색인종 국가 자신의 군대에 의한 백인종 국가에 대한 근대에서의 첫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이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즉, '일본만 유일하게 아시아의 맹주로서, 서양인들을 굴복시킬 능력이 있으니, 아시아 전체는 서양인에게 정복당하지 않으려면 일본을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논리이다. 

3. 러일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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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하였다. 러시아가 애타게 원하던 부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독일 제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이후 두 국가는 반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한반도와 만주를 놓고 대립을 벌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갖고 있는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이익을 인정한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반대했다. 애시당초 러시아에게 일본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약소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내부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해서 만한교환론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1937년의 중일전쟁으로 나타난다.  

특히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한 러시아는 일본을 꾸준히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 그리고 3일 뒤인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을 연이어서 체결하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은 심지어 아관파천마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몰렸다. 심지어 이때 일본은 39도선을 중립지대로 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여기서 고종은 줄타기하면서 적당히 러시아 세력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낸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문제는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청나라와의 비밀협정을 파기하고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과 다롄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로부터 강제로 양도받아 해군기지를 건설한다. 이에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경계로 북만주를 빼앗으려 하고 더 나아가 만주 전체를 노리자,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만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가 태평양 지역에 가진 부동항이 없기 때문에 부동항을 가지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러시아는 15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시켰으며, 일본 및 다른 열강들은 철수를 요구하면서,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조선에서 사태 진전이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 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km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을 수리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전쟁 직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는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1903년에 러시아가 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적도 있었고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로젠 남작의 견해에 따라서 러시아 제국군은 만주에서의 철군을 철회,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 일본 3국이 압박하여 물러나게 되나 이 용암포 사건은 일본에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당장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 한반도까지 병력을 진출시킬 여력이 없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 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모든 게 러시아에게 불리했다.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만 완성되면 유럽 러시아의 주력군과 물자를 러시아 철도를 통해 만주까지 보내면 그 정도 문제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먼저 일본이 공격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지 못해서 제 역할을 못했다


4. 전쟁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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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만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만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하지만 7천 킬로미터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을 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 이틀 전에 뤼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도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정 말기인지라 무기도 노후한데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지원이 어려웠고 병력도 분산되어 있는 어려운 처지였다. 한 예로 연발총용 탄환이 2,800만 발이 부족했다. 결코 28만, 280만이 아니다! 거기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보낸 방한복, 털모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전장에 도착했다. 

반면 일본은 무엇보다 전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대한제국에게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
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고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다.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고,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 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다. 그 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점령하였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로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갔고 결국 최후의 보루인 발틱함대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결국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틱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 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5. 러일전쟁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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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 측 대표였던 고무라 주타로 전권대사는 자신들이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측 대표였던 비테는 지금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이를 보면 우습게 보던 상대에게 참패하고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가 억지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테의 말이 진실에 가까웠다. 

우선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일본군의 타격도 그에 못지 않았다. 뤼순을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무려 3만 명이나 잃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 중 1할 5푼에 가까운 전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확대되었고, 봉천전투에서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상당수를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으로 채워야 했다. 러시아 제정군도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상비군 100만을 유지하고 예비군 동원에도 여유가 있었다. 다만 유럽 전선에 항상 주전력을 배치해야 하는 러시아 제국은 그 여유를 살릴 수가 없었다. 

만주에서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보다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가까웠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최대한 활용해서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애초에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철도 타고 여유롭게 뒤로 빠지면 이를 추격할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추격하다간 자멸하거나 반격당해서 괴멸되는 관계로 뒤를 도모해야 하는, 전혀 우선권이 없는 행동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군의 기본 작전술이 빠르게 후퇴한 뒤에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전략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이 그걸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를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면 수세 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 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개중 2만 명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포로) 일본군 7만 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역시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격퇴시키며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를 주장했지만 인명 피해는 일본 측도 상당했던 것이다.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국력차를 고려할 때 전쟁에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최대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추후 공세를 노리나, 이전에 겪었던 몇 차례의 육전 패배와 사령부의 무기력함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 상태였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늘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 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당시 일본의 1년 세입이 2억 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9억 8,400만 엔에 육박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러일 전쟁이 있었던 1905년 총군사비 / GDP가 23.69%......여기서 12억 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2개월 만에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 파산에 처할 위기였다. 물론 러시아도 만만찮은 전비를 지출하여 파산 위기에 있었으므로 피차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휴전 협상에서 일본은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 전권대사 비테는 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 전권대사 고무라는 어떤 식으로든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러시아 측의 '협상하기 싫으냐'는 압박에 결국 본국에 상의하게 되었고, 일본 정부는 모든 상황을 재점검한 후 도저히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은 최우선 목표인 조선만을 건사할 수 있었고 다음 목적으로 요구했던 사할린 전체 할양도 남사할린 할양으로, 하얼빈-여순의 동청절도 이득권도 장춘-여순선의 권리 획득으로 그쳤다.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연전연패로 인한 사기 하락으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되었고 여기에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으며 전략의 미흡함으로 인해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피의 일요일 사건 자체도 러일전쟁 초기 전투의 패배가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으면 그 여파로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얼핏 보면 일본에 내려진 천운으로 보이나,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러시아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비밀리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사건, 상세히 설명하면 한 어린 소녀가 추행당해 임신당한 사건을 단지 소문으로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게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을 비롯하여 유대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냥 죽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 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고 이 와중에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및 폴란드 소수민족들이 학살 및 약탈, 겁탈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고, 이를 갈던 미국 및 유럽의 유대인 부호랑 폴란드인들이 일본을 지지하여 국채를 사들인 점도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선전되었으므로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이고 당시 일본의 일각에서는 배상금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도 할양받자는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정 내용에 화나서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히비야 방화 사건 같은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일본 측 대표는 일본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서 경호를 붙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또한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 언론에서도 일본 측의 황당무계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이건 말 그대로 전쟁에 이겼다고 해도 남는 게 거의 없는 상황. 또한 사실상 전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 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나무위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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