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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04 12:40
[한국사] 부여국 주요국왕 정리(해씨, 낙씨, 부여씨)
 글쓴이 : 보스턴2
조회 : 1,733  

부여국 주요국왕 정리(해씨, 낙씨, 부여씨)
 
북부여, 동부여 등 부여국명을 가진 국가의 왕 혼재되어 있슴 
남부여(즉 백제)는 제외

PICE228.png
      각 부여국의 위치만 참조바람
    
부여2_myhistory79.jpg

부여의 중심 세력권

현대_부여국의_경계.png



* 부여국의 성씨 
북부여, 동부여 - 해씨(해모수,해부루,해금와, 해대소) 
부여국 - 부여씨 (부여울 등) 
남부여(백제) - 부여씨 
갈사부여(갈사국) - 해씨 
고구려 부용국 부여(연나부 거주) - 낙씨 
두막루(두막루부여) - 낙씨 

* 세종실록과 단기고사에 의하면, 동부여의 해부루는 단군의 아들로 적혀있다. 즉 고조선과 부여간에 밀접한 민족적, 혈연적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기사라 할 것 이다. 




1. 북부여 해모수 - 기원전 59년

북부여 시조(始祖). 일찍이 흘승골성(訖升骨城:대료(大遼)의 의주지방(醫州地方))에 도읍을 정한 뒤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자칭(自稱), 왕이 되어 국호를 북부여(北扶餘)라 했다.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 정을 통해 주몽(朱蒙)을 낳았다 한다. 

2.동부여 해부루 (단군의 아들 - 세종실록) - 기원전 59년 이전 

동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란 설(三國遺事)과 단군과 하백녀(河伯女)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란 설(세종실록(世宗實錄)ㆍ단군고기(檀君古記))이 있다. 늙도록 아들이 없어 근심하였는데 하루는 곤연(鯤淵)에서, 큰 돌 밑에 한 어린이를 발견하여 데려다가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재상(宰相) 아란불(阿蘭弗)이 꿈속에서 계시(啓示) 받은대로 도읍을 동해변(東海邊)의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기고 국호를 동부여(東扶餘)라 했다. 

3.동부여 금와왕 - 기원전 1C

늙도록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며 정성을 들이던 부여왕 해부루(解夫婁)가 어느날 곤연(鯤淵) 못가의 큰 돌 밑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발견하여 이렇게 이름지었고 전해진다. 자라서 태자(太子)가 되고, 해부루를 이어 부여의 왕이 되었다. 뒤에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 유화부인)를 만나, 궁중으로 데려와 깊숙한 방에 가두었더니 알을 낳았는데, 그 알에서 주몽(朱蒙, 동명성왕)이 나왔다고 한다. 

4.동부여 대소왕 - 기원전 1C

대소는 금와(金蛙)의 장자로 태어난 때는 알 수 없다. 금와의 아들은 모두 7명이었는데, 서자였던 주몽의 용명이 뛰어났기 때문에 대소와 6형제가 모두 주몽을 시기하였다. 대소는 금와에게 주몽이 후환이 될 것이니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금와가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소는 계속 주몽을 죽이려고 모의하였고, 결국 주몽은 부여를 탈출하여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기원전 24년 이후에 금와가 죽자 대소가 즉위하였다. 

대소는 고구려와 적대하였는데, 기원전 6년에 인질을 교환하고 화친할 것을 강요하였다. 유리명왕은 부여의 국력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都切)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태자가 거부하여 인질 교환이 결렬되었다. 이에 대소는 5만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큰 눈으로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여 성과 없이 퇴각하였다. 서기 9년에 다시 고구려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였는데, 고구려의 태자 무휼(無恤)이 외교적 담판을 지어 사신을 물러가게 하였다. 13년에는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무휼이 학반령(鶴盤嶺)에서 복병으로 공격하여 크게 패배하였다. 

20년에 대소는 고구려에 몸통은 두 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 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라고 답하였다. 대소는 대무신왕의 답변에 놀라 후회했다고 한다. 

21년 12월 대무신왕이 부여를 침공했다. 22년 2월 대무신왕이 부여의 남쪽을 침공하여 진흙 수렁 근처에 진을 치자, 대소왕은 고구려군이 준비할 틈을 주지 않고 기습을 했다. 그러나 대소왕의 말이 진흙 수렁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고구려의 괴유(怪由)에게 참수되어 전사하였다. 대소가 전사한 이후에도 부여군은 용감히 싸워 고구려군을 포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으나, 왕을 잃은 부여는 혼란에 빠져 국력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었다. 

5. 부여 갈사왕(갈사부여국 왕) - 기원후 1C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었던 갈사왕은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예감하고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피난하였다. 압록곡(鴨淥谷)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해두국왕(海頭國王)이 사냥 나온 것을 발견하여 그를 죽이고 백성을 빼앗아 22년 음력 4월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 나라를 갈사국 또는 갈사부여라 부른다.

6. 고구려 부용국 부여왕 낙씨(연나부 거주) - 기원후 1C

대소왕의 종제(從第, 사촌동생)는 고구려 대무신왕 5년(서기 22년) 7월에 부여 사람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대소왕이 죽고 부여가 망하자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고, 대소왕의 동생(→갈사왕)은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부여를 부흥시킬 수 없다"라고 투항한 이유를 말하였다. 이에 고구려 대무신왕은 그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낙씨(絡氏)라는 성을 내리고  부여왕으로 봉한 후 고구려 연나부(掾那部)에 거주하게 하였다.
(두막루의 왕 역시 낙씨인 낙개제 였다) 

7. 부여 구태왕(1) - 기원후 2C

이름이 위구태 혹은 구태(仇台)이다. 120년에 후한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후한의 안제(安帝)로부터 인수(印綬) 및 금색의 비단 등을 선사받았으며, 121년에는 고구려의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병사를 동원하여 후한의 현도군(玄菟郡)을 포위하자, 그는 2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후한군과 합세하여 이들을 격파하였다. 

8. 부여 의려왕 - 기원후 3C

의려왕(依慮王, 생몰년 미상, ? ~ 285년)은 부여(夫餘)의 왕으로 이름은 의려이다. 의려는 마여왕의 아들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3세기 중엽에 마여가 죽자 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서진 무제(武帝) 때 자주 조공하며 친선을 도모했다. 285년에 선비족 모용외가 부여를 습격하였는데, 의려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했고 자제들은 옥저로 피신했다.

9.부여 위구태(2) - 기원후 3C

아버지는 시(始)이다. 주변의 고구려와 선비(鮮卑)가 강성하므로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던 공손탁(公孫度, ?∼204)의 종녀(宗女 : 일가의 딸)를 부인으로 맞아 들여 공손씨와의 유대를 강화하면서, 자국의 안전을 꾀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간위거(簡位居)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2C 위구태왕과는 동명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공손탁의 사위로 유명하다. 

ps) 7의 인물과 9의 인물 사이에는 약 70년 정도 되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게다가 167년에 현도군을 공격한 부여왕 부태(夫台)가 확인되기 때문에 두 위구태왕이 서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역사책에서 두 인물을 섞어서 기록했다. 위구태왕이 죽은 뒤 간위거왕이 즉위했는데, 이 인물이 1.의 아들인지 2.의 아들인지는 불명확하다. 보통은 2.의 아들이라고 여긴다. 

경향신문의 1987년 9월 11일자 기사에서 위만의 손자인 우거의 명칭이 고유 명사가 아닌 우두머리를 지창한다는 조승복 교수의 주장에서 언급되고 우거가 고유 명사라 한 안사고의 주장은 잘못되었으며, 우거에 대한 음운변이를 고구려의 우거, 부여왕 간위거, 위구태 등을 언급하면서 씨족의 생활 공동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 또는 우두머리 직을 가리키는 보통 명사라 했다.

10.부여 부여울 -기원후 4C

여울(餘蔚, 생몰년 미상)은 오호 십육국 시대 전연과 후연에서 활동한 부여계 유민으로 전연에서 벼슬하다가, 전진에게 항복해 전연 멸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자 그의 휘하에 들어가 측근으로 활동했다. 여울은 전연에서 활동하며 산기시랑(散騎侍郞)이란 벼슬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370년 11월에 전진이 침공하자 부여·고구려·상당 일대에서 끌려온 500여 명의 질자(質子)와 함께 수도 업(鄴)의 북문을 열고 항복했다. 한편 모용수가 384년 전진에서 독립해 후연을 건국했고 여울을 포섭해 형양태수(滎陽太守)로 삼았으며, 곧 정동장군(征東將軍) 통부좌사마(統府左司馬)로 삼았고 부여왕에 봉했다. 390년에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를 거쳐 좌복야가 됐고 396년 5월에 태부(太傅)로 삼았다. 이후 기록은 없다.


11.두막루 낙개제 - 기원후 5C

위서 두막루전 에 따르면 5세기경 북부여가 물길 또는 고구려에게 쫓겨가 성립된 나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이의 땅 중 가장 평평한 곳에 위치하여 오곡에 적합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군장은 모두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하고 형벌은 엄했다고 한다. 풍속은 음란하지만, 특히 투기하는 부인은 미워하여, 투기하는 자는 죽이는데, 시체를 그 나라 남쪽 산 위에 버리는데,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 수가 없다. 소나 말을 바치면, 이를 얻을 수가 있다. 혹은 말하길 본래 근본은 '예맥'의 땅이라 한다. 

(開元十一年, 又有達末婁․達姤二部首領朝貢. 達末婁自言北扶餘之裔, 高麗滅其國, 遺人度那河, 因居之, 或曰他漏河, 東北流入黑水. 達姤, 室韋種也, 在那河陰, 涷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距達末婁云. 
개원(713년 ~ 741년) 11년에 또 달말루와 달구 등 두 부락의 수령들이 조공하였다. 달말루는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로서 고(구)려가 그 나라를 멸하자 유민들이 나하를 건너 그곳에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은 타루하라고 하는 물줄기가 동북쪽으로 흘러 흑수에 유입된다 하였다. 달구는 실위의 종족으로 나하의 남쪽, 동말하의 동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황두실위와 접하며 동북쪽으로는 달말루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당서 권 220) 


이들은 당나라에도 조공했기 때문에 당나라 시기의 열전에도 남아있다. 헌데 무슨 이유인지 수·당이 만주를 엄청 갈궈대던 6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는 이들의 조공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조공 기록이 8세기 초반까지 지속되다 사라지기 때문에 이쯤에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멸망 이후 실위와 함께 몽골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그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실위, 고막해, 거란과 같은 말을 썼다는 기록으로 봐선 몽골 지방으로 이동 후 몽골계 민족들에게 동화된 것 같다. 

영토는 사방 이천리로 서쪽에 실위, 남쪽에 말갈이 있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접한다는데, 바다라는 게 아무르강인지 오호츠크해인지 동해인지 아무도 모른다. 책부원귀 외신부 조공조에 의하면 당나라 현종 개원 12년(724년)에 달말루의 대수령 낙개제(諾皆諸)가 와서 조공했다고 한다. 아마 낙개제는 기적적으로 전해지는 두막루의 유일한 인명인 것 같다.

출처 : 해외 네티즌 반응 - 가생이닷컴https://www.gasen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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