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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04 20:38
[한국사] 조선을 사랑한 언론인 "베델"
 글쓴이 : 보스턴2
조회 :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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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 때의 영국 언론인. 한국식 이름 배설(裵說). 러ㆍ일 전쟁 때 《런던 데일리 뉴스》 특파원으로 입국하여 1905년 한영 합판 회사(韓英合瓣會社)를 설립하고, 국한문판 대한 매일 신보(大韓每日申報)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국문판 대한 매일 신보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했다. 한편, 을사 조약의 무효를 논파(論破), 배일 독립 사상(排日獨立思想)을 고취하였으며, 고종의 친서를 대한 매일 신보ㆍ《코리아 데일리 뉴스》ㆍ《런던 트리뷴》에 게재하고 미국ㆍ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 등 여러 나라 원수에게 전달, 일본의 강압적 침략 정책을 국내외에 폭로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1907년(융희 1) 통감부(統監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황태자에 대한 결례, 허위 보도와 선동 등을 들어 한성 주차(漢城駐剳) 영국 총영사 콕번에게 제소(提訴)하였으나 그는 그 판결에 불복, 본국 정부에 공소를 제기하고 계속 전과 같은 논조를 계속했다. 1908년에 다시,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고 대한 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제도를 전복하려 함으로써 영국의 한국에 관한 추밀원령(樞密院令) 제5조에 해당하는 교사 선동의 죄를 범했다고 하여, 경성 일본 이사청(京城日本理事廳) 이사관 미우라 고로[三潜梧凄] 명의로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 공소되어 영국 한청 고등 재판(韓淸高等裁判)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상하이[上海]에서 3주일 동안 금고 생활을 했다. 같은 해 7월 서울에 돌아온 후 대한 매일 신보 사장직을 영국인 비서 A.W.만함에게 맡기고 활약을 계속하다가 1909년 서울에서 병사하였으며, 양화진(揚花津) 외인 묘지에 묻혔다. 
베델 [Ernest Thomas Bethell]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일본 사업을 정리하고 조선을 찾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불과 한 달여 만에 영국 신문사에서 해고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사업가의 기질이 강했던 그는 되레 서울에 직접 신문사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자신을 도와준 한국인 통역사 양기탁(1871~1938)과 의기투합했다. 
1904년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한 두 사람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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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기를 기회로… 신문사서 해고되자 직접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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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은 1904년 4월 16일자 ‘한국 황궁의 화재’ 단독 기사에서 고종이 머물던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발생한 화재가 일본군 소행일 것으로 추정했다가 ‘데일리 크로니클’ 통신원 자리에서 쫓겨났다. 신문사의 친일 성향에 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새 삶을 시작하려고 서울에 온 베델은 신문사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해고돼 무척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 베델은 이참에 신문사를 직접 차려보기로 결심했다.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아직 조선에는 이렇다 할 영자신문이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언론인이라는 베델의 새 인생을 열어 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는 이렇게 기획됐다. 

한국어를 할 줄 몰랐던 베델에게는 무엇보다도 영어에 능통하고 믿을 수 있는 한국인 조력자가 절실했다. 앞서 베델은 3월 통신원으로 조선에 왔을 때부터 덴마크인 전기기술자 헨리 예센 뮐렌스테트(1855~1915)에게 자신의 취재를 도와줄 한국인 통역사를 부탁했는데, 그가 소개해 준 이가 훗날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양기탁이었다. 그는 조선왕실 문서를 번역하는 업무를 맡던 ‘예식원’에서 번역사로 평범하게 일하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 어니스트 베델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다. 1934년 대한민국 국무위원이 된 양기탁은 국무령으로 선출돼 1935년까지 재임했다.


2.“양기탁, 이토 저격되자 신보사 2층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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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양기탁은 누구일까. 우리에게는 ‘양기탁’으로 알려졌지만 학계에서는 ‘양기택’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의 이름 한자인 ‘鐸’은 ‘탁’과 ‘택’으로 모두 읽힌다. 베델 연구 일인자인 정진석 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는 “그의 영문 이름이 ‘taik’(택)으로 돼 있고 당시 한글신문들도 그를 ‘양기택’이라고 지칭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양의종’이었다. 1871년 평양 서촌에서 한학자 양시영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전해진다. 15살이던 1886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다양한 학문을 접했다. 우국지사 나현태를 만나 성리학을 수학하고 선교사들이 만든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해 영어도 배웠다. 그는 어학 능력이 상당했던 것 같다. 1895년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스카이 게일이 만든 성서 번역용 한영사전인 ‘한영자전’ 편찬에 참여했다. 일본 영사관원의 소개로 나가사키현에 건너가 2년간 한국어 교사로 일하며 독학으로 일어도 익혔다. 

3개 국어를 할 줄 알았던 양기탁에게 예식원 업무는 그야말로 ‘잘 어울리는 옷’ 같았다. 그가 베델과 만나게 된 것도 뛰어난 어학능력 덕분이었다. 애초 양기탁의 역할은 통신원인 베델이 원하는 취재원을 섭외해 통역하는 정도였지만, 베델이 영국 언론사에서 해고된 뒤 신문사 창간에 뛰어들면서 그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됐다. 결국 양기탁은 1904년 7월 18일 신보와 KDN 첫 호를 발행하고 한 달쯤 뒤인 8월 23일 베델의 신보 사업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예식원을 그만 뒀다. 

원래 베델이 만든 신보는 외국인들을 위한 영자지 KDN(4페이지)에 부록(2페이지)으로 삽지된 것이었다. 양기탁은 영문판 기사를 국한문으로 번역해 다음날 신보에 게재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자투리’였던 신보가 한국인들에게 예상 밖 반향을 일으키며 인기를 얻자 베델은 두 신문을 분리하고 양기탁에게 신보 지면 제작 전권을 줬다. 신보의 강경한 항일 논조는 양기탁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09년 베델이 세상을 떠난 뒤로 신보는 더욱 양기탁에게 의존했다. 

베델은 영국인이었기에 한국이나 일본의 법을 적용받지 않았다. 그가 세운 신보와 KDN이 입주한 건물 또한 치외법권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양기탁은 통감부의 핵심 감시 대상이었기에 건물 밖으로 나갈 경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주로 신보사 건물 안에 머물며 영문기사 번역 일 등에 전념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통감부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자 양기탁이 신보사 2층에서 만세를 부르며 축하연을 벌였다는 보도가 친일매체 ‘대한일보’ 등에 게재됐다. 양기탁은 이를 부인했다. 정 교수는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양기탁의 항일 정신이 일본 당국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양기탁이 일제를 마음껏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베델이 자신의 치외법권을 십분 활용해 모든 비판과 압박을 막아줬기 때문이다. 통감부는 우리나라 신문을 본격적으로 통제하려고 1907년 ‘신문지법’을 제정해 언론을 탄압했다. 하지만 외국인인 베델이 만든 신보는 검열 대상에서 제외돼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정 교수는 “일본의 감시로부터 양기탁을 지켜 준 베델이 대한매일신보의 ‘울타리’였다면, 항일 논조를 바로세워 조선을 구하려 했던 양기탁은 ‘대들보’였다”고 평가했다. 

3. 독립운동가 임치정·이교담, 신보 경영 뒷받침 

하지만 이 두 사람의 힘만으로 신보사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신보가 조선 독립을 위해 제대로 된 기사를 쓴다는 소문이 돌자 명망 있는 논객과 경영자들이 하나둘 이곳에 모여들었다. 1904년 창간된 신보는 당시로서는 후발지였음에도 이들의 헌신 덕분에 일본의 여러 식민통치정책을 좌절시키며 전성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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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지낸 박은식. 1919년 3·1운동 뒤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했고 1925년에는 제2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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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신채호. 역사서 ‘조선상고사’ 등을 썼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탈퇴해 무정부주의 무장 투쟁에 가담했다. 

우선 민족사학자들이 찾아왔다. 박은식(1859~1925)과 신채호(1880~1936) 등 유명 사학자들이 신보에 들어와 필진으로 활약했다. 황성신문(1898~1910)에서 일했던 박은식은 신보에서도 강경 항일 논설을 썼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자 해외로 나가 항일 활동을 이어 갔다. 역사서인 ‘한국통사’를 썼고 상하이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지냈다. 신채호도 황성신문에 있다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뒤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이듬해 신보로 옮겼다. 그는 1910년 중국 망명 전까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일본의 삼대충노’ 등을 쓰며 항일 언론 투쟁을 이어갔다. 당시 베델의 KDN에 대항해 통감부가 만든 기관지 서울프레스(1905~1937)는 신보를 두고 “한국어판은 영문판보다도 훨씬 나쁘고 못된 신문”이라고 비난했다. 

신보사의 경영을 도우려는 이들도 있었다. 임치정(1880~1932)과 이교담(1880~1936) 등이 대표적이다. 임치정은 1905년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와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했다. 신보에서는 부총무와 회계주임 등을 맡았다. 1919년 3·1운동을 기획하는 등 독립 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이교담 역시 공립협회에서 활동하다가 신보에 합류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신보와 KDN은 한때 하루 2만부 가까이 발행하며 조선 최고의 신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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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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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담 
대한매일신보: 1904년 2월에 일어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인 배설(裵說,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측이 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다할 수 있었다. 사세(社勢)가 확장되고 독자수도 늘어나면서,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된 이후에는 민족진영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언론기관이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版) 6페이지로서 그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다. 창간 다음해인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그러나 국한문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글전용 신문의 필요성을 다시 느끼게 되어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한글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서자 일제는 이 신문에 대해 여러 가지 탄압을 가하게 되었다. 일본측은 외교경로를 통해 소송을 제기하여 발행인 배설은 1907년과 1908년 2차례에 걸쳐 재판에 회부되었고, 양기탁도 국채보상의연금(國債報償義捐金)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배설은 이러한 탄압과 싸우는 가운데 1908년 5월 27일부터 발행인 명의를 영국인 만함(萬咸:Alfred Marnham)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1909년 5월 1일 배설이 죽고 난 후, 1910년 6월 1일부터는 발행인이 이장훈(李章薰)으로 바뀌었고, 국권피탈이 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했다.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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