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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14 13:53
[한국사] 백제의 군 호칭 키미, 키시
 글쓴이 : 호랭이해
조회 : 3,059  

『日本書紀』에 보이는 百濟의 ‘君’號에 대한 考察 
The Title “Lord of Baekje" in Nihon shoki 
신유진

전문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66540



1.百濟 ‘君’號의 訓讀과 성격

 日本書紀 에서 ‘君’은 대개 키미(キミ)로 읽히는데,사전적인 뜻으로 본래 고대 호족(豪族) 수장(首長)의 존칭이며,후에 カバネ(姓)가 되었다고 한다.60)또한 천황을 비롯한 자기가 모시는 주인을 가리키는 말에서 특정한 인물을 의식하고 귀인을 가리키는 2인칭 대명사로 발전한 것으로이해하기도 하였다.61)따라서 ‘君’號를 소지한 인물은 일정한 지위와세력을 가진 유력층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백제의 ‘君’號 소지자 가운데 ‘君’號의 훈독(訓讀)이 시기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日本書紀 의 훈독은 日本書紀 를 편찬해서 올린 다음 해,곧 養老 5년(721)부터 일찌감치 궁정에서 강의를 통해 행하였다고 한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는 弘仁 3년(812)부터 강보(康保) 2년(965)에 걸쳐 강독을 여섯 차례 하였는데,이는 日本紀私記 로서 기록이 남았다.후에 이 훈독은 석일본기(釋日本紀) 로 집대성되었다.62)

 곤지(軍君)의 경우 석일본기(釋日本紀) 비훈(秘訓)에 코니키시(コニキシ)코무키시(コムキシ)라고 하여,63)‘君’을 키시(キシ)로 훈독(訓讀)하였다.이는 왜(倭)에서 ‘君’을 칭하고 있는 인물들이 모두 키미(キミ)로 읽히는 점과 구별된다. 유독 백제 ‘君’號의 훈(訓)이 구별되는 것은 당시 백제계 도왜인(渡倭人)들이 사용하였던 訓이 그대로 日本書紀 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무엇보다도 日本書紀 내에서 동일한 ‘君’號임에도 불구하고 시기나성격에 따라 다르게 훈독(訓讀)되고 있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이에 대해 백제의 ‘君’號 소지자들의 훈독을 비교하여 그 성격을 제시해보도록 하겠다.

 궁월군(弓月君)과 주군(酒君)은 이른 시기에 보이는 백제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倭의 ‘君’號 소지자들에게서 읽혀지는 키미(キミ)로서 훈독(訓讀)되고 있다. 이는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궁월군과 주군의 도왜 사실을 전하는 사료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궁월군과 주군의 기사는 씨족전승의 성격이 강하다. 日本書紀 본문에 배치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한반도에서 도왜(渡倭)하여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나타내준다.그러나 이들의 사료는 당대의 사료가 아닌 日本書紀 를 편찬할 때에 재구성된 사료이다.이들은 이미 倭 내에서 천황의 신하로서 자리매김한 후이기 때문에 倭에서 사용되던 ‘君’의 訓인 키미(キミ)로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등장하는 가수리군(加須利君),군군(軍君),도군(嶋君),마나군(麻那君),사아군(斯我君),법사군(法師君)은 키미(キミ)가 아닌 키시(キシ)로 훈독(訓讀)된다.유독 이들만 키시(キシ)로 읽히는 점은 어떠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이와 관련하여 주서(周書) 백제전이 주목된다.64)



I.王의 姓은 夫餘氏로 어라하(於羅瑕)라 부르고,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 말하니, 중국 말로 모두 왕이다( 周書 卷49列傳41異域 上 百濟條).



 위의 사료 I에 보이는 건길지(鞬吉支)는 코니키시(コニキシ)로 읽힌다.‘鞬’은 大를 의미하며,‘吉支’는 百濟 정치사회에서 지배층의 중추로 ‘君’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한다.65)더 나아가 君이 王으로도 사용된 사실에 주목하여66)鞬吉支=大君=大王으로 인식하기도 한다.흥미로운 사실은 日本書紀 내에서 百濟王을 칭하는 훈독 또한 건길지의 훈독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67) 日本書紀 에서는 백제왕이 코키시(コキシ)또는 코니키시(コニキシ)라고 읽혀,두 음이 유사하다. 앞서 코니키시(コニキシ)가 大王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日本書紀 내에서는 비록 표기가 王으로 되어 있지만 훈독을 통해보면 大王으로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훈독은 백제가 멸망하면서 일본의 姓으로 자리한 百濟王(구다라노 코니키시 くだらのこにきし)氏가 그대로 훈을 이어가는 모습에서도 확인된다.



C-1.백제 가수리군(加須利君)[개로왕(蓋鹵王)이다]은 지진원(池津媛)[적계여랑(適稽女郞)이다]이 불에 타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채녀(采女)로 삼았다.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失墜)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하였다.이에 그의 아우 군군(軍君)[곤지(昆支)이다]에게 “네가 마땅히 日本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군군(軍君)이 “상군(上君)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君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가수리군(加須利君)은 임신한 부인을 군군(軍君)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이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 日本書紀 권14雄略天皇 5年 夏4月條).




 그렇다면 키시(キシ)로 훈독되는 가수리군(加須利君)과 군군(軍君),도군(嶋君)을 살펴보도록 하겠다.우선 가수리군은 군군이 앞의 사료 C-1과 같이 ‘상군’으로 표현한 점으로 보아, 군군보다 우위에 있는 인물로 日本書紀 본문에 배치하였다.또한 日本書紀 雄略天皇 20年 百濟記 에서 보이는 ‘대후(大后)’의 표기나 좌 우현왕제의 실시68)등으로 보았을 때 이미 개로왕은 大王의 위치에 있었다.

 한편 군군(軍君),도군(嶋君)과 관련해서는 왕 후제의 실시와도 연관을 가진다.69)왕 후제가 처음 보이는 시기는 개로왕대로, 송서(宋書) 에 그 모습이 처음 나타난다.특히 王을 칭하고 있는 인물은 여기(餘紀)와 여곤(餘昆)으로 모두 왕족에 해당한다.‘君’號를 칭하고 있는 군군, 도군 또한 왕족에 해당한다.더욱이 ‘大王’의 존재가 아무리 늦어도 개로왕대에는 확립이 되었기 때문에,70)왕족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王에 비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군군과 도군의 ‘君’號는 大王 아래 王으로 비견되는 칭호로 왕족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이 반영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마나군(麻那君),사아군(斯我君),법사군(法師君)의 기사는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마나군(麻那君)의 경우,목씨의 인물로 비정되기 때문에 왕족의 인물로 볼수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동성왕대 시행된 왕 후제와 관련시킬 수 있다. 이때의 王은 ‘지역+王’의 형태로 사료상에 나타난다. 모습 자체는 ‘이름+君’과 ‘지역+王’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王’을 칭하고 있는 인물 가운데 귀족으로 비정되는 ‘저근(姐瑾)’71)이 보인다.더욱이 저씨(姐氏)는 三國史記 나 日本書紀 에는 저미(姐彌)씨로도 제시되어 있으며, 三國史記 에는 목협만치와 조미걸취가 같이 제시되어 있는 점을 보았을때 목씨로 비정되는 마나군(麻那君) 역시 시기상으로 충분히 그 지위가 동성왕대 보이는 왕 후에 준했을 가능성이 높다.따라서 이러한 모습이 日本書紀 내에서 ‘君’으로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사아군(斯我君)의 파견과 더불어 골족(骨族)이 대두되고 무령왕을 중심으로 한 가계의 인물들 즉,사아군(斯我君),법사군(法斯君)에게서만 키시(キシ)로 훈독(訓讀)되고 이후에 보이는 인물들은 키미(キミ)로 훈독(訓讀)된다.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장군군윤귀(將軍君尹貴)이다.그의 ‘君’號는 키미(キミ)로 훈독(訓讀)된다. 장군군윤귀(將軍君尹貴)는 백제의 사신으로 안라에 파견되는 모습을 보이는데,이는 그가 백제의 국가체제 내에서 더 이상 王에 준하는 신분이 아닌 신하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백제군풍장(百濟君豊璋)은 君의 훈(訓)이 세시무(せしむ)로,왕자를 뜻하고 있는 訓을 가진다.이 때의 ‘君’은 日本書紀 내에서 사용된 ‘저군(儲君)’,즉 태자로서 사용된 君號임을 상정할 수 있다. 즉 이러한 훈독의 모습은 무령왕대 나타났던 골족으로서의 ‘君’號의 모습이라 생각된다.
 
 日本書紀 에 보이는 가야의 ‘君’號 소지자인 졸마군(卒麻君),산반해군(散半奚君), 사이기군(斯二岐君) 또한 백제의 ‘君’號와 더불어 키시(キシ)로 읽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이는 백제 ‘君’號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해 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이들과 관련된 사료는 아래와 같다.




J.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신(日本府臣)과 임나집사(任那執事)를 불러,“천황에게 보낸 나솔득문(奈率得文)과 허세나솔가마(許勢奈率奇麻) 물부나솔기비(物部奈率奇非)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이제 일본부신(日本府臣)과 임나국집사(任那國執事는 마땅히 와서 칙(勅)을 듣고 함께 임나(任那)의 일을 협의하라.”고 말하였다.日本의 길비신(吉備臣),안라(安羅)의 하한기대불손(下旱岐大不孫)과 구취유리(久取柔利), 가라(加羅)의 가라상수위고전해(上首位古殿奚) 졸마군(卒麻君) 사이기군(斯二岐君) 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이, 다라(多羅)의 이수위흘건지(二首位 訖乾智),자타한기(子他旱岐), 구차한기(久嗟旱岐)가 백제에 이르렀다.이 때 백제왕 성명(聖明)이 대략 조서(詔書)를 보이며, "내가 나솔미미좌(奈率彌麻佐) 나솔기련(奈率己連) 나솔용기다(奈率用奇多) 등을 보내어 일본에 보냈다"( 日本書紀 권19欽明天皇 5年(544)11月條).




 사료 J를 보면 加羅의 졸마군(卒麻君) 사이기군(斯二岐君) 산반해군(散半奚君)의 인물들이 ‘君’ 을 칭하고 있다.이들은 欽明天皇 2年 夏4月條에 따르면 가라(加羅)의 졸마한기(卒麻旱岐),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 다라(多羅)의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였다.72)그러나 3년 후 한기(旱岐)의 칭호에서 ‘君’칭호로 변해 있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 조선식(朝鮮式) 용어인 한기(旱岐)를 日本書紀 편찬자가 독자를 위해 편찬 당시의 말로 알기 쉽게 고쳐 썼다는 견해73)가 있지만,2년조의 한기들 모두가 5년조에서 君으로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의 견해는 따르기 어렵다.

 그렇다면 卒麻旱岐,散半奚旱岐,斯二岐旱岐의 인물들이 왜 ‘君’號를 사용한 것일까.당시 백제는 고령 가라국이 주도한 ‘가라연맹’을 중심으로 고령,합천,거창,진주 등 서부와 북부 가야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꾀하였는데,74)이들이 대체로 그 지역 출신이라는 점과 이 세 인물들만 ‘君’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점을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백제는이들에게 ‘君’號를 칭해주는 대우를 해줌으로써 백제의 대외관계 측면에서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을 것이다.즉 백제는 백제의 대외상황과 맞물려 이들에게 ‘君’號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준 것이다.이는 위의 가야인물들의 ‘君’훈독과 백제 ‘君’의 훈독이 동일하다는 점을 통해 가야의 인물들이 백제의 ‘君’號를 소지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제는 어느 정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인물들에게 키시(キシ)로 훈독되는 군호를 사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이는 바로 키시(キシ)로 훈독되는 군호가 반독립적인 세력가에게 주는 칭호였음을 알려준다.물론 이들에게 군호를 사여한 주체는 백제왕이므로 어느 정도 독자성은 인정해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백제왕의 신하로 점차 편입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후에 倭에서 백제왕족에게 ‘百濟王’을 사성해주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백제왕의 ‘王’은 8色 姓 보다 상위에 있는 것으로 왜국의 왕족에게만 주어지는 칭호로, 지토천황(持統天皇)은 선광(善과 그 자손에게 백제왕의 칭호를 내려줌으로써 이들을 왜국의 준황족으로 대우75)하면서도 이들을 신하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한 것이다.

 백제 ‘君’號의 훈독(訓讀)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키시(キシ)와 키미(キミ)로 훈독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키시(キシ)로 훈독되는 ‘君’號는 大王체제하에서 王에 비견되는 지위를 상징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한 인물들에게 주어진 칭호였다.처음에는 왕이나 왕족의 인물들에게서만 ‘君’號가 보였지만,점차 귀족이나 가야의 수장층 인물에게서도 ‘君’號가 사용되어 점차 확대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무령왕대 이후 ‘君’號 형태는 이전과 차이를 가진다.즉 키시(キシ)로 훈독되는 ‘君’號의 범위를 ‘골족(骨族)’으로 한정시키며 골족(骨族)이 아닌 인물에게서는 키미(キミ)로 훈독되는 모습을 보인다.더욱이 키미(キミ)로 훈독되는 백제의 ‘君’號는 그 역할이 국가의 외교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경우를 고려할 때,백제의 국가체제하에서 관료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인다.



2.百濟 ‘君’號의 分化와 의의

 앞서 살펴보았듯이 백제의 ‘君’號는 505년(武烈 7)을 기점으로 구분되는 모습을 보인다.우리는 이를 통해 이 무렵부터 백제의 ‘君’號가 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불안한 신분으로부터 출발한 무령왕은 자신의 가계에 대한 정통성을 강조하고 위해 골족(骨族)의식을 대두시켰고, 이는 백제의 ‘君’號를 분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여기에서 골족의 범위는 동고조 8촌까지로 본다.77)즉 무령왕대 이르러 백제의 ‘君’號 소지자는 骨族에 해당하는 인물에게 왕에 준하는 키시(キシ)로서,그 후에 보이는 인물들의 ‘君’號는 키미(キミ)로서 구분하였다.이러한 訓讀의 구분은 骨族이 아닌 마나군(麻那君)이 더 이상 君을 칭하지 않는 점에서도 연결된다.또한 앞의 사료 D-2에서 보면, 骨族과 더불어 百濟王이 아닌 백제국주(百濟國主)라는 표현을 사용함78)으로써,무령왕의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모습은 후에 무령왕의 능 또한 기존의 무덤과는 달리 남조의 전축분을 사용하는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이는 그의 차별성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백제 ‘君’號의 분화는 단순히 무령왕 가계의 정통성 확보 뿐 아니라 왕족의 차별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骨族’을 통한 왕족의 차별화는 당시 백제 뿐 아니라 신라나 왜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다.신라의 경우,성골(聖骨)이라 하여 지증왕계에 속한 소가계 집단의 구성원들에 의해 유지토록 하여79),왕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소가계 집단의 우월의식을 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80)倭의 경우 또한 가바네제도를 실시하여 왕족과 귀족을 구분짓고자 하였다.백제에서는 무령왕대 ‘담로제(擔魯制)’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는데, 양서(梁書) 백제전에 의하면 “22담로에 자제종족(子弟宗族)을 분거케 하였다.”81)라는 표현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즉 무령왕은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신분적인 우월성을 내세우며 새롭게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백제의 ‘君’號를 사용한 인물들을 역할적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무령왕대에 들어 ‘君’號가 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무령왕 이전 백제의 ‘君’號 소지자들은 일본에 정착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규합하여 그들의 후예씨족들까지 일본의 사서(史書)상에 이름을 남겼다.그러나 무령왕대에 들어서면,골족을 중심으로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하에 ‘君’號 소지자들을 두면서,그들의 세력을 규제하였다.또한 점차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는 사신의 역할조차 관등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여 왕권강화를 이루어냈다.이와 관련하여 무령왕대의 관등제 정비 및 좌평의 변화가 주목된다.‘君’號를 칭했던 인물인 마나군(麻那君)과 장군군윤귀(將軍君尹貴)는 각각 중좌평목례마나(中佐平木刕麻那)와 하좌평목윤귀(下佐平木尹貴)로 나오고 있는데, 무령왕대 이후 그들에게 제1品의 관등인 좌평(佐平)직을 내려줌으로써 백제의 신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君’號를 사용한 인물들이 통치체제의 정비를 통하여 신분적 질서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모습은 백제의 ‘君’을 칭하고 있는 인물들이 무령왕대 이후 점차 줄어들고 있는 점과 관련된다.

 백제의 ‘君’號는 또한 국가의 대외관계 차원에서 활용되었다.이와관련하여 첫째 백제의 ‘君’號가 단순히 백제측 인물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닌 가야나 왜의 인물에게서도 보이는 점이 주목된다.백제는 이들을 토대로 대외관계의 활로를 개척한다는 의의를 갖기도 한다.가야의 경우는 이미 앞에서 제시하였고,왜의 경우 위덕왕대에 여창(餘昌)이 축자국조(筑紫國造)에게 안교군(鞍橋君)이라 칭한 사례가 있다.이와 관련된 사료는 아래와 같다.




K.(전략)餘昌은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사졸들은 놀라어찌 할 줄 몰랐다.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新羅)의 기병(騎兵) 중 가장 용감한 자를 쏘아 떨어뜨렸다.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말안장 앞뒤의 횡목(橫木)을 뚫었고,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계속 화살을 쏘니 비오듯 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이로 말미암아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餘昌)이 국조(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며 ‘안교균(鞍橋君)’이라 불렀다<안교(鞍橋)는 우리말로 구라니(矩羅膩)라 한다.>( 日本書紀 권19欽明天皇 15年(554)冬12月條).




 위의 사료 K에서 보듯이 筑紫國造는 筑紫國의 호족으로서,백제의 군사 파견을 이끄는 인물이었다.이러한 인물에게 ‘君’號를 내려준 것은 단순히 공적의 치하가 아닌 앞서 가야의 ‘君’號 소지자들과 마찬가지의 경우로 필요시 백제의 우방(友邦)으로 그들을 활용하고자 한 의도를 보여준다.

 둘째 키시(キシ)로 훈독되는 백제의 ‘君’號 소지자들의 성격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인물들로,백제 뿐 아니라 다른 지역 특히 倭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즉 백제의 ‘君’號는 大王체제와 더불어 대외관계 측면에서 반영된 칭호로 보인다.百濟는 유력한 도왜인(渡倭人)들을 활용하여 대화(大和)정권에서 친백제노선이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君’號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백제의 ‘君’號는 倭에서 활동하였던 ‘君’號 소지자의 세력
및 후손들을 통해 倭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倭는 늦어도 6세기경이 되면,천황에 대한 종속과 지위와 직무 등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서 ‘君’號를 姓으로서 사여하였다.82)더욱이,倭에서 ‘君’號를 소지한 인물들이 대체적으로 천황가로부터 갈라져 나왔다는 점은 백제의 骨族으로서의 ‘君’號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또한 이들의 ‘君’號는 천황에 대한 종속과 지위와 직무 등을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倭에서 사용된 ‘君’은 무령왕대 분화된 ‘君’인 키미(キミ)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이는 6세기에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백제와 왜 모두 왕 중심의 질서가 강조되고,‘君’號를 소지한 인물들이 관료로서 인식하게 되는 점,倭에서 ‘君’을 칭하는 인물들이 모두 키시(キシ)가 아닌 키미(キミ)로 훈독되는 점에서 여실히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Ⅴ.맺음말



백제의 ‘君’號는 그동안 사료의 한계로 인하여 크게 주목되지 못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君’號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계속적으로 이어져 왔으며,본고 또한 이러한 면에서 그 시도를 이어가고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백제의 ‘君’號에 대해 접근하고자 하였다.

이에 필자는 우선 日本書紀 를 토대로 백제의 ‘君’號 소지자들을
살펴보았다.이들은 단순히 백제측 인물뿐만 아니라 가야의 인물과 왜의 인물에게서도 나타난다.이러한 모습은 백제의 ‘君’號가 당시 백제와 가야,왜의 정치적 상황에 밀접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모습을 보이는 6세기 초에서 중엽까지의 백제는 무령왕대에 이르러 국가체제의 재정비 및 왕권 강화를 이루었으며 성왕대에는 사비로 천도하기에 이른다.또한 왜는 武烈 繼體天皇대를거치며 새로운 왕조가 성립되고 있었다.따라서 백제를 통한 새로운 문물의 안정적인 수용으로 왕권 강화를 이루고자 하였으며,가야는 6세기 중엽이 되면 안라를 중심으로 백제와 외교를 전개하는 모습을 보인다.즉 이 당시의 백제,가야,왜는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외교관계가 이루어졌음을 상정할 수 있으며, 이를 백제의 ‘君’號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백제의 ‘君’號 소지자들은 그들의 후예씨족들을 토대로 보았을때,정착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다.이 세력은 단순히 ‘君’號 소지자들 자신의 세력유지뿐만이 아니라 백제의 군사지원을 염두에둔 세력형성이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더욱이 이러한 세력 형성은 백제의 ‘君’號가 가지고 있는 訓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백제의 ‘君’號는 키시(キシ)와 키미(キミ)두 가지로 訓讀된다.키시(キシ)는 개로왕(蓋鹵王)인 가수리군(加須利君)에서부터 법사군(法斯君)까지 읽히고 있는데,이들은 모두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君’號 소지자들이다.이후 나타나는 백제의 ‘君’號는 키미(キミ)로 訓讀되는데 이들은 더 이상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인물들이 아닌,백제의 관료로서 자리 잡는 모습을 보인다. 더나아가 기존에 ‘君’을 칭했던 인물은 ‘君’號가 아닌 백제의 관직으로서 이름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무령왕대에 이르러 ‘骨族’의식의 대두와 더불어 국가체제의 정비를 통해 백제의 ‘君’號가 분화됨을 보여주는 것이다.더욱이 이러한 백제의 ‘君’號는 倭의 姓 가운데 하나인 ‘君’과도 訓讀이나 역할적인 측면에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의 ‘君’號는 국내사서에서는 살필 수 없는 칭호지만 당시에 백제에서 사용된 칭호였다.더욱이 ‘君’號의 역할과 성격은 백제를 넘어서 가야,왜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연구라 생각된다. 그러나백제의 ‘君’號는 日本書紀 라는 일본측 사서의 활용과 제한된 사료라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어 미흡한 측면이 많이 보이므로 추후 보완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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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國史大辭典編集委員會, 國史大辭典 4,吉川弘文館,1983,209쪽.
61)김숙자,일본어의 호칭접미사 Kun(君)의 의미용법 , 상명대학교인문과학
연구 15,인문과학연구소,2004,2쪽.
62)坂本太郞 외,앞의 책,1967,34~52쪽.
63)坂本太郞 외,앞의 책,1967,470쪽,주 8.
64)坂本太郞 외,앞의 책,1967,470쪽,주 8;靑木和夫,軍王小考 , 日本古代の政治と人物 ,吉川弘文館,1977,96~98쪽 ;三品彰英,앞의 책,天山舎,2002,73쪽.
65)이용현, 가야제국과 동아시아 ,통천문화사,2007,103쪽.
鞬吉支에 대한 해석으로 鞬은 ‘한 큰’으로,吉支는 ‘貴人’으로 풀이한 견해(李丙燾,百濟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 , 百濟硏究 2,1971,16~17쪽)가 있다. 또한 鞬吉支를 ‘鞬+吉支’의 合成語로 보아 ‘鞬’은 ‘加 邯熊 金 玄’등과 같으며 “神”또는 ‘韓 干’등과 같이 ‘한(大)’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吉支’는 ‘귀인’을 지칭하는 尊稱接尾辭로 보아 ‘神君님 나라님’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견해(都守熙, 百濟王稱語 小考-於羅瑕,鞨吉支,구드래,구다라를 중심으로-, 百濟硏究 3,忠南大學校 百濟硏所,1972,140~141쪽 및 百濟王稱語에 대하여 , 한국언어문학 11,한국언어문학회,1973,247쪽)도 제시되었다.
66)弓月君의 경우, 新撰姓氏錄 에서 弓月王으로,酒君 또한 新撰姓氏錄 에서 酒王으로 사용되었다.이후 加須利君은 蓋鹵王,軍君은 琨支王,嶋君은 嶋王으로 계속해서 君과 王이 혼용되어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67)李根雨는 日本書紀 에서 백제의 왕을 ‘코니키시’즉 ‘큰 吉支’라는 훈을달고 있는데,이러한 訓은 백제인들의 관용적인 표현이 日本書紀 에 반영된 것으로 생각하였다(앞의 논문,1994,108쪽 주 29참고).
68) 宋書 卷97列傳57夷蠻 東夷 百濟國條에 行冠軍將軍 右賢王 餘紀와 行征虜將軍 左賢王 餘昆이 보인다.
69)백제의 왕 후제와 君號는 그것을 칭하고 있는 인물들의 지위가 상당히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왕 후제가 중국 사서에 보이고 백제의 지방경략과 관련이 있다면(김영심, 5~6세기 百濟의 地方統治體制 , 韓國史論 22,1990),군호는 日本書紀 에서만 보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다만 곤지의 경우 좌현왕을 칭하면서 군군으로도 불린 점을 보았을 때 양자간에 관련성이 어느 정도 엿보인다.백제의 왕 후제와 군호와 관련해서는 별고에서 다루도록 한다.
70)梁起錫, 五世紀 百濟의 王 侯 太守 制에 對하여 , 史學硏究 38,한국사학회,1984.
71) 南齊書 卷58列傳39東南夷 百濟國조에 따르면,姐瑾은 寧朔將軍 面中王에서 行冠軍將軍都將軍 都漢王으로 나온다.
72) 日本書紀 권19欽明天皇 2年(541)夏4月 “安羅次旱岐夷呑奚 大不孫久取柔利 加羅上首位古殿奚 卒麻旱岐 散半奚旱岐兒 多羅下旱岐夷他斯二岐旱岐兒 子他旱岐等 與任那日本府吉備臣[闕名字].往赴百濟 俱聽詔書.…(후략)…”
73)鬼頭淸明, 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 ,校倉書房,1977,208쪽.
74)白承忠,6세기 전반 백제의 가야진출과정 , 百濟硏究 31,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2000,75쪽.
75)김은숙, 일본 율령국가의 백제왕씨 , 百濟 遺民들의 活動 (百濟文化史大系 硏究叢書 7),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2007,92쪽.
76)일본고전문학대계본(소위 岩波本)에서는 ‘君’을 せしむ로 훈독하고 있으나,신편일본고전문학전집본(소위 小學館本)에서는 キミ로 훈독되고 있어 차이가 보인다.이러한 모습은 百濟君 자체가 기존의 이름+君의 형태가 아닌 국가명+君의 형태로,倭에서 많이 보이는 지역명+君과 유사한 모습이다.따라서 百濟君 역시 倭의 君 칭호와 더불어 당시 日本書紀 에 보이는 편찬자의 인식으로서 풍장을 보았을 때 천황의 신하로서 キミ로 훈독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풍장의 ‘군’호는 그의 지위가 왕자라는 점에서
보았을 때,당대에 과연 キミ로 훈독되었을지는 의문이 있어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77)노중국, 백제의 骨族의식과 골족 範圍 , 韓國古代史硏究 50,한국고대사학회,2008.
78)百濟國主라는 표현은 武烈 7年에 처음 제시되고,이후 敏達 12年(583)冬10月條,同年 是歲條,皇極 元年(642)2月 戊子條,皇極 2年(643)4月 庚子條에 보인다.
79)李種旭, 新羅上代王位繼承硏究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80,270~275쪽.
80)양기석, 百濟專制王權成立過程硏究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1990,152쪽.
81)其國有二十二檐魯,皆以子弟宗族分據之.
82)平野邦雄,앞의 책,1969,393~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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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친구 18-09-14 14:34
   
‘임금’ 왕호(王號)의 어원 및 왕검(王儉)과의 연관성 고찰

http://www.gasengi.com/m/bbs/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74460&sca=&sfl=mb_id%2C1&stx=cellmate
햄돌 18-09-14 20:08
   
무슨 글에 한자가 이리 많은지 너무 길어서 읽지도 못하겠음
     
호랭이해 18-09-14 20:14
   
저도 읽는데 고생해서
읽기 쉬우시라고 한문앞에 한글로 적어논거에요
     
호랭이해 18-09-14 20:50
   
대충 요약하자면

코니키시 = 건길지

코니,콘 = 건(큰)
길지 = 키시 = 군

건길지 = 대군 = 대왕

초기 유력호족과 왕족 = 키시
후기 왕의 골족 = 키시
        왕족 외    = 키미

우방을 위해 다른 국가의 호족들에게도 키시, 키미 칭호를 하사함

예 : 졸마한기 -> 졸마군
          
위구르 18-09-17 22:59
   
좋은 정보 잘봤습니다. 예전에 고구려와 흉노인지 아님 대쥬신제국사인지 조선상고사인지 이 셋중에서 한 책에서 큰키시=건길지가 한걸 봤는데 간만에 보게 되어 반가운 단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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